김현식(35세, 가명) 과장은 말을 하고 있었고, 정영미(30세, 가명)는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었다. 김 과장이 무언가 따지는 것 같았고, 영미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맹을성(63세, 가명) 사장은 속이 뒤집어졌다. ‘아니 저것들이! 내가 나이 들었다고, 오피스텔 얻어주고 생활비 대주는데, 지들끼리 재미보고 있네!’
이 상황에서 맹 사장은 직원과 사랑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이를 갈았다.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하마터면 길 건너 두 사람에게도 들릴 뻔 했다. 마침 그때마다 대형 트럭이 굉음을 내고 지나가서 다행히 이 가는 소리가 길을 건너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어금니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왠 일인지 영미가 김 과장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김 과장은 영미를 오피스텔로 들여보내고,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비는 맹 사장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시간을 맞추어서 내리는 것 같았다. 우산도 없어 양복은 잠수복이 되었다. 원래 맹 사장은 물과는 상극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데리고 가서 봐준 점쟁이도 그랬고,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역학자도 똑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당신은 물과는 아주 상극이야. 대신 금과는 아주 잘 맞아. 그러니까 물을 조심해야 해. 강이나 바다에는 절대 가지 말아. 접시물도 신경 써. 대신 나무가 많은 산으로 가. 산속에는 금광이 있는 거야.’
맹 사장은 지금까지 사주관상가나 역학자의 말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점쟁이가 물을 조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무시했다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선생님이 ‘너는 체격이나 운동신경이 좋아 수영선수가 되면 좋겠다. 팔다리가 길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헤엄칠 수 있다.’고 희망을 심어주었다.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다른 학생들 듣지 못하게, 조용히 각자의 장점을 과장해서 이야기해서 기를 살려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걸 오해해서 맹 사장은 어린 나이에 흥분했다. 누나 수영복을 훔쳐 개천으로 가서 매일 수영 연습을 하다가 물뱀에 물렸다. 다리를 물려서 병원에 업혀가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꽃뱀에 물려 죽을 기회도 보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물뱀에 물려죽을 뻔 했다.
그런데도 담임 선생님의 인생 방향 제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맹 사장은 수영을 포기를 하지 않고, 풀장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배영을 하고 있는 여대생의 가슴 위로 머리를 박았다. 다행이 별로 높지 않은 곳에서 뛰어내렸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여자의 보형수술한 가슴이 터져 난리날 뻔 했고, 맹 사장의 뇌세포가 100억개는 소멸할 뻔했다.
두 번의 사건 사고를 경험한 맹 사장은 그 후에는 절대로 물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을 해도 물에 관련된 사업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거래처 사장이 운영하던 생수공장을 빚 대신 헐값으로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뿌리쳤다. 전국적으로 4대강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많은 이권을 얻을 수 있음에도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주변에는 발도 디뎌놓지 않았다. 사업보다는 목숨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맹 사장은 영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분간 영미를 회사 밖에서 만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업무상 부하로만 상대했다. 김현식 과장에 대해서도 박천순(55세, 가명) 상무를 시켜 경리상 부정은 없는지 은밀하게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영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비가 오던 날 사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은 너무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어리석게 남의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 전세보증금에 압류가 들어와서 모두 날아가게 생겼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 사업하고 있는데,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설마 같은 교인이 사기를 치랴 싶어 보증을 서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교인도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경영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회사를 살려보려고 하다가 아버지에게 피해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보증을 서주었다가 파산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영미는 사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화를 받으면 사장은 당연히 오피스텔로 와서 영미가 어떻게 되었든 그짓을 강요할 것이 뻔했다. 그것이 너무 싫었다. 그런 상태에서 속이 상해 혼자 술을 마시고 12시 조금 넘어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김현식 과장이 영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 늦은 시간에 왠일이세요?”
“영미 씨! 할 말이 있어요. 사장과 만나지 말고, 제발 내게로 돌아와요.”
“과장님! 저희 아버님이 보증을 잘못 서서 전세금이 모두 날라가게 되었어요. 지금 저는 남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생활이 절실한 거예요. 부모님을 제가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예요. 그냥 돌아가세요.”
“전세금이 얼만데요? 내가 빌려줄게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돈도 필요 없고, 그냥 돌아가세요. 우린 이미 끝난 거잖아요?”
“영미 씨! 사장과 헤어지지 않으면 내가 사장에게 이야기해서 영미 씨로부터 떨어지게 만들 거예요. 아니면 사장 부인에게 말을 할 거예요.”
“도대체 왜 이래요?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김 과장이 불쌍해 보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초라한 남자가 골리앗 같은 사장을 상대로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을 벌이려고 하다니! 그리고 지금 아버지 문제로 골치 아픈데, 무슨 사랑 이야기를 할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김 과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도닥거려주었다. 영미도 술도 많이 취한 상태였다.
김 과장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사장의 태도가 냉정하게 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사장이 자신과 영미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차피 조만간 회사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하고, 본격적인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회사 돈도 1억원 몰래 빼돌렸다.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거래업체로부터 받을 돈을 수표로 받아서 회사 통장에 입금시키지 않고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회사 장부에는 거래처로부터 아직 대금을 받지 않은 것으로 미수 처리해두었다. 경리담당자로서 회사의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착복함으로써 업무상 횡령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김 과장은 영미를 만나, 우선 급하면 쓰라고 했다. 이자를 받지 않고 무이자로 빌려줄 테니, 돈 2천만원을 쓰고, 나중에 천천히 갚으라고 했다. 영미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선의로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았다. 회사자금을 횡령해서 마련한 돈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일 그런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거나 눈치 챘으면 영미는 당연히 거절했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과장은 돈을 5만원권으로 빌려주면서도 영수증, 차용증이나 각서 같은 것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영미는 고마웠다. 일주일쯤 지나서 저녁을 샀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순진한 김 과장의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다. 영미는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김 과장은 영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새벽에 술에 깬 영미는 먼저 자진해서 김 과장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아주 뜨겁고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영미는 지금껏 겪어본 남자 중에서 가장 멋있고, 황홀한 정사를 경험했다. 그 때문에 영미는 김 과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맹 사장은 김 과장을 불렀다.
“김 과장. 몇 달 전에 내가 오피스텔을 하나 회사 자금으로 구입해 놓은 게 있어. 역삼동에 있는 건데, 명의는 편의상 비서실의 정영미 앞으로 해놨어. 그런데 아무래도 계속 직원 앞으로 명의를 해놓는 것은 이상하니까 매각하도록 해. 2억5천만원에 샀는데,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처분해 주게. 알았지?”
“예. 사장님. 곧 부동산에 내놓겠습니다.”
김 과장은 사장 지시대로 오피스텔 주변에 있는 부동산사무소 몇 군데에 매물로 내놓았다. 처음 구입한 가격으로 팔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극심한 불황이고, 오피스텔이 너무 과잉공급되었을 뿐 아니라, 부근에도 새로 짓는 오피스텔이 많아 오래 된 오피스텔은 쉽게 매수자를 찾기 어려웠다. 김 과장은 영미를 만나, 사장이 오피스텔을 처분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사장과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 같으니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 영미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사장님이 왜 그러는 걸까? 최근에 김 과장과 만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잘못하면 회사도 다니지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영미는 사장실로 들어가 울면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장님! 저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전세금을 차압당했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속이 상해서 혼자 술을 마시고 전화를 받지 못했던 거예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냐!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과 만나야 해. 나 같은 늙은 사람은 만나면 안 돼. 늙은이 냄새도 나고, 서로 맞을 수가 없어. 모든 걸 끝내기로 했어. 다른 직장도 알아봐. 새 직장 구할 때까지는 그냥 있도록 할 게. 우리 관계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