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빙궁 앞 벌판에 빙궁의 최정예 무사들인 빙혼대가 도열해 있었다. 빙혼대는 제일대부터 제십대까지 총 십 대가 존재하고, 각 대는 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근 인원 배정을 다시 하여 그렇게 조직했다. 그들의 앞에는 빙철룡이 차갑게 얼어붙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 대주는 앞으로 나와 빙혼단을 받아가라. 수는 충분하니 한 사람 당 하나씩 돌아가게 받아가도록." 빙철룡의 명에 빙혼대의 대주들이 나와 빙혼단을 받아갔다. 이 빙혼단은 일정 시간 동안 빙공을 익힌 무사의 능력을 급증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예전 빙철룡을 치료하던 빙혼단을 개량하여 만들어낸 약이었다. 빙혼대가 모두 빙혼단을 하나씩 받아가자, 빙철룡이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천하를 접수하러 간다. 너희들은 빙궁의 영웅들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너희들의 자손이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와아!" 빙철룡의 말에 천 명의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빙철룡은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투기를 몸으로 받으며 차갑게 웃었다. '좋아. 성공할 수 있어.' "소궁주님, 슬슬 출발하시는 게 좋습니다." 빙철룡은 자신의 옆에서 조언하는 사내를 슬쩍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빙궁주와 빙철룡을 설득한 사내였다.
현재 무림맹과 혈교, 그리고 은왕곡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고, 지금이 얼마나 굉장한 기회인지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출발!" 빙철룡의 외침이 북해의 차가운 하늘에 울려 퍼졌다.
벽운학은 무림맹의 수많은 무사들과 함께 동정호로 향했다. 혈교는 동정호 근처에 도착한 이후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무림맹을 기다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상하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그놈이 뭘 믿고 이러는 걸까?' 벽운학은 혈교에서 어떤 수를 준비했을지 몰라 경공에 능한 수백 명의 무사들을 이용해 척후 활동을 계속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기에 몇몇 장로들이 우려를 표했지만, 벽운학이 생각하기엔 모자라기만 했다. "맹주님, 너무 조심하는 것 아닙니까? 속도가 지나치게 느립니다. 이대로라면 오늘도 도착하기 힘듭니다." 벌써 무림맹을 떠나온 지 꽤 지났다.
그냥 돌진하듯 달려왔으면 벌써 혈교와의 싸움이 끝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거의 무림맹에 다시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조심해서 움직였다.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합니다. 저들은 왜 가만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벽운학의 말에 옆에 있던 제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점을 지금 생각 중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기다린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들이 뭔가 함정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남궁상룡은 그들이 답답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려가서 공을 세우고, 기회를 틈타 벽운학을 죽이고 싶었다. 남궁상룡의 눈이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아무리 함정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수천이나 되는 무사가 있습니다. 그 어떤 함정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남구앙룡의 말에 제갈천이 빙긋 웃었다. "청룡단주의 패기는 이해하지만, 군사의 입장에서 보면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갈천은 그렇게 말한 후, 벽운학을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명령 한 번으로 수천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맹주님 역시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끄응." 남궁상룡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행군은 계쏙해서 느릿하게 이어졌다.
무림맹은 해가 중천을 지날 무렵 혈교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일부러 시간을 그렇게 맞췄다. 무리해서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싸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벽운학은 혈교 무리를 노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꽤 먼 곳까지 살폈지만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저들은 고작 오백 구의 철강시가 전부였다. 철강시 오백 구가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무림맹의 수천 무사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수 위주로 전투를 하면 피해를 최소화해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무림맹이 나타나자 혈교 무리도 술렁이더니 서둘러 진형을 갖췄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들썩였다. 그리고 서서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벽운학은 그 모습을 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작전은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위에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작전을 세워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돌격!" 벽운학이 마침내 외치자, 무림맹의 고수들이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일단 그들이 나서서 적의 기세를 꺽어야 앞으로의 싸움이 편하기 때문이다. 꽈과광! 양 진영이 격돌하는 소리는 엄청났다. 마치 수백 근의 화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크아아아!" "하아압!" 쩡! 쩡! 쩡! 괴성과 비명, 그리고 기합이 한데 어우러졌다. 연달아 파육음이 들려왔고, 쇠를 치는 듯한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머리가 터지거나 잘려 나간 철강시들이 바닥에 쓰러져 갔고, 무림맹의 무사들도 하나둘 죽음을 맞이했다. 벽운학은 그 치열한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구룡신검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대단한 무위였다.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몸부림치는 듯했다. 벽운학을 중심으로 꿈틀대는 아홉 마리의 용은 근처에 다가오는 철강시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뜯어 먹었다. 꽈드드드득! 한꺼번에 대여섯 구의 철강시를 동시에 처리하는 벽운학의 실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마철령은 입가에 비웃음을 걸친 채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는 철강시들이 형편없이 밀리고 흑령과 그림자들이 악전고투를 하며 하나둘 목숨을 잃어가는 데도 전혀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무림맹이 혈교를 밀어붙였을 무렵, 마철령이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는 혈옥패가 있었다. 혈옥패를 쥔 손에 힘을 주니 핏물이 스며들며 혈옥패가 은은히 진동을 시작했다. 우우우웅. 크하하하! 모두 끝났다! 이 버러지 같은 멍청이들!" 마철령의 외침을 들은 벽운학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벽운학의 눈에 가장 먼저 들온 것은 불길한 핏빛 광채를 내뿜고 있는 혈옥패의 모습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막아야 한다!' 벽운학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날렸다. 마치 비룡처럼 날아오른 벽운학은 마철령의 손에 든 혈옥패를 향해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이미 늦었다!" 마철령의 외침과 동시에 혈옥패에서 새빨간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끼아아아아아! 귀곡성이 울렸다. 벽운학은 검 끝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자 크게 당황하며 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검은 점점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쩡! "크윽!" 결국 뒤로 튕겨져 나간 벽운학은 다시 무림맹 진형으로 떨어졌고, 곧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방이 사이한 붉은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 빛은 고스란히 땅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놀란 일이 벌어졌다. "크카카카카!" "끼기기기기!" 땅속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불쑥 불쑥 바닥에서 사람 손이 솟아나왔다. 그 손은 거무튀튀했는데, 나오자마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발목을 움켜쥐려 했다. "어헉!" 무림맹 무사들이 다급히 발을 치웠다. 하지만 손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무사들은 당황해 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깡! 마치 쇠를 검으로 두드린 듯한 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손은 멀쩡했다. "서, 설마......" 땅속에서 팔이 완전히 솟아나왔다. 그리고 머리와 몸이 순식간에 빠져 나왔다. 그들은 철강시였다. 무려 이천 구가 넘는 수였다. 벽운학은 크게 당황했다. 설마 철강시를 땅속에 숨겨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대체 어떻게......!' 벽운학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기감이 특별히 발달했다. 특히 강시 특유의 사악한 죽음의 기운에 대해서는 훨씬 더 민감했다. 한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바로 발밑에 있던 강시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크하하하! 어떠냐! 이것이 내 힘이다. 네놈의 능력을 내가 모를 것 같았느냐? 철강시를 오백 구나 순순히 바쳤을 때는 이 정도 준비는 있었을 거라 예상했어야지. 크하하하하!" 마철령은 통쾌하게 웃었다. 지금 철강시들의 솟아나온 자리는 무림맹 무사들이 있는 자리였다. 말 그대로 무림맹 무사들과 철강시들이 완벽하게 뒤섞여 버렸다. 벽운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몰살당한다.' 벽운학은 마철령을 노려봤다. 저들은 강시다. 그들의 주인인 마철령을 죽이면 강시들도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았다. 일단 그렇게 생각한 벽운학은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하아압!" 벽운학의 검이 아홉 마리 용을 토해냈다. 마철령은 크게 웃으며 양손을 마구 휘둘렀다. "크하하하하!" 퍼버버버버벙! 아홉 마리 용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마철령은 품에서 검을 하나 꺼내더니 그대로 뽑은 후, 검집은 버렸다. "자아, 우리가 마지막을 장식해야지." 마철령의 검이 섬뜩한 핏빛을 머금었다. 벽운학은 침중한 얼굴로 검을 들어올렸다. 단전에서 무한한 기운이 샘솟았다. 벽운학의 몸에서 은은한 서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철령과 벽운학의 경천동지할 대결이 시작되었다.
뇌룡장 사람들은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분지였다. 분지 한가운데 천막을 치고 쉬는 자들이 바로 흑귀와 그림자들이었다. 그들 사이사이에 철강시도 몇 보였다. 하지만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모두 합해서 사백 정도 되는 구나." 당백형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현재 뇌룡장에서 온 사람들의 수는 삼백 명이 넘는다. 그 중 십대고수가 셋이니 거의 승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흑귀들의 실력은 얼마 전 그들이 뇌룡장을 습격했을 때 겪어봤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이제는 상대할 수 있었다. 당시에 비해 뇌룡대도, 녹룡대도 상당한 실력을 쌓았다. "뭐,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구나." 당백형의 말에 강악도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두 사람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군데군데 보이는 철강시들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그쯤은 엽광패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듯했다. '그리고 저 시꺼먼 놈들.' 그림자들의 실력이 만마니 찮아 보였지만 그도 별 문제 없어 보였다. 현재 일행이 있는 곳은 분지를 감싼 산 중 하나의 정상이었다. 그곳에서 적을 감시하기는 좋지만 습격을 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더욱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기습을 하려는 찰나, 표중산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표중산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은밀히 히동했다. 그러자 전서구 하나가 그의 팔뚝에 앉았다. 표중산은 전서구를 다시 날려 보내고는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 그리 심각한 게냐?" "북해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난데없이 북해라는 말에 일행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북해? 그놈들이 갑자기 왜?" "천하를 발아래 두겠다고 천명했다 합니다. 그들이 천하를 발아래 둘 수는 없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표중산의 말대로였다. 그냥 보고만 있으면 혈교와 무림맹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나중에라도 뇌룡장이 나서서 그들을 응징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피해가 너무나 극심하다. 강악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놈들도 막으면 되지." 강악의 말에 모두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특히 표중산은 정말로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모두 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천 명? 아주 딱이네." 강악은 그렇게 말하며 당백형을 바라봤다. 강백형은 강악의 말을 알아듣고 빙굿 웃었다. "좋아. 어차피 여기선 할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당백형까지 허락하자, 강악은 씨익 웃으며 엽광패를 쳐다봤다. 엽광패는 강악의 눈길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네놈도 같이 가자." "예? 제, 제가 왜 그리 갑니까? 여기도 만만치 않다고요! 제가 이곳에 없으면 정말로 큰일 납니다!" "괜찮아. 우리가 한 방 쏴주고 가면 돼." "예?" 강악은 몸을 돌려 분지 한가운데 모여 있는 천막들을 바라봤다 . 당백형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마주본 후, 준비에 들어갔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달려가지 않고!" 당백형의 외침에 다들 화들짝 놀라 당황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세 여인이었다. "모두 달려요! 일단 저들을 물리치고 생각하자고요!" 서하린의 외침에 뇌룡장 사람들이 산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되도록 은밀하게 달렸지만 소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악이 당백형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시작하지." 당백형은 소매에 손을 넣고 비침을 한가득 꺼냈다. "높은 데서 떨어지니 워력이 훨씬 강하겠지?" "당연하지." 당백형의 손에서 비침이 날았다. 기를 가득 머금은 비침들이 하늘을 빽빽이 메웠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강악의 손에서 뇌전이 쏟아져 나갔다. 빠지지지지지지직! 뇌기를 머금은 비침들이 하늘에서 뇌전의 그물을 만들어냈다. 쩌저저저저적! 어마어마한 위력의 벼락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벼락들은 분지 한가운데 있던 천막들을 그대로 덮쳤다. 콰과과과광! 천막들은 단번에 재가 되어 버렸고, 그 안에 있던 자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밖에 있던 자들 중 운이 좋은 몇몇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광경에 보던 엽광패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려웠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두 늙은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자, 이제부터 네놈이 당악이다." "예?" "예전에 말했지 않느냐. 네놈이 당악이라고 혹시 아느냐? 후세에 사람들이 네놈을 보고 뇌황이라고 불러줄지. 으하하핫!" 강악은 그렇게 웃으며 옮겼다. 그 뒤를 의미심장한 표정의 당백형이 따라갔고, 엽광패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심정으로 뒤따랐다.
동정호 위를 미끄러져 가던 무영은 한쪽을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쪽에 모여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금령도 무영이 바라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두르자." 금령의 말에 섞인 다급함에 무영은 조금 더 무리를 했다. 쉬익! 두 사람을 태운 조각배가 갑자기 수면을 스치듯 날아갔다. 무영은 배가 공중에 뜬 상태에서 기운을 또 뿜어냈다. 이번에는 배가 완전히 날아갔다. 콰직! 배는 강가를 넘어서서 땅에 떨어졌다. 그대로 박살났지만 배에 탔던 두 사람은 멀쩡했다. 배가 떨어지기 직전에 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금령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막대한 죽음의 기운이 몰려오는 쪽이었다. 무영은 금령이 빠르게 사라진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이내 두 사람은 무림맹과 혈교가 싸우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판은 아비규환이었다. 혈교의 철강시는 정말로 무서웠다. 수가 적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수까지 많으니 무림맹의 하급 무사들은 목숨을 제대로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령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굳은 듯 멈춰 섰다. 금령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핏빛 검을 든 마철령이 있었다. 마철령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 팔다리가 사라진 벽운학의 모습이 보였다. "으아아아아!" 금령이 울분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가득했다. 금령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향하는 곳은 마철령이 있는 곳이었다. 스릉. 금령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쉬가가가각! 수많은 금빛 검기가 쏟아져 나갔다. 마치 하나하나가 황금으로 만든 화살 같았다. 그 황금빛의 검기는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철강시들의 머리를 꿰뚫었다. 퍼버버버벅! 마철령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벽운학의 목을 치려는 찰나였다. 한데 난데없이 황금 화살이 날아왔다. "크윽!" 꽈앙! 금빛 검기를 검으로 쳐낸 마철령은 금령이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마철령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는 금령의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헉! 너, 너는!" "닥쳐라!" 어느새 마철령 앞으로 다가온 금령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금가루가 쏟아져 나갔다. 금빛 검기가 가루처럼 흩날렸다. 서걱! 마철령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마철령은 경악에 찬 눈을 채감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갔다. 마철령은 죽었지만 철강시들은 여전히 날뛰었다. 금령은 철강시들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금령의 눈이 죽어가는 벽운학에게로 향했다. 철강시들을 처리한 것은 무영이었다. 무영은 금령에게 달려가며 손을 위로 뻗었다. 쩌저적! 벼락 한 줄기가 무영의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무영은 그렇게 모은 벼락을 앞으로 내뿜었다. 쩌저저저저저적! 수백, 수천 줄기의 벼락이 쏟아져 나갔다. 그 벼락은 정확하게 철강시만을 노려봤다.
벼락에 맞은 철강시는 내부의 사기가 모조리 타버렸다. 그렇게 기운을 소진한 철강시들이 하나둘 풀썩풀썩 쓰러졌다. 무영이 모든 철강시를 처리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미 무림맹 무사들이 철강시의 수를 압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철강시들은 남은 무림맹 무사들의 손에 하나둘 정리되었다. 무영은 다급히 금령과 벽운학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벽운학은 숨이 끊어졌고, 금령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서 있었다. 금령의 손에는 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무영은 그 책의 제목을 읽을 수 있었다. '천기비록(天氣秘錄).' 벽운학은 죽기 직전에 천기비록을 금령에게 넘긴 것이다. 천기문의 명맥이 자신의 대에서 끊기지 않게 하려는 열망이 그 안에 가득했다. 그렇게 혈교대전에 막을 내렸다.
강악과 당백형은 북해빙궁이 지나는 길목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말로 무리해서 움직였기에 상당히 긴 거리를 짧은 시간 동안 이동할 수 있었다. 엽광패는 질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온몸에 내력이 한 톨도 남지 않은 듯했다. 그만큼 몸을 혹사시키며 달려왔다. 그런데 저 늙은이는 아직도 쌩쌩해 보였다. '이런 괴물 같은......' 엽광패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어찌 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엽광패는 더 이상 두 늙은이를 쳐다보지 않고 먼 곳을 응시했다. 조만간 북해빙궁이 몰려올 것이다. 그들은 단 셋이서 상대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엽광패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 기술 한 방이면 다 끝이지. 괴물들.' 강악과 당백형이 보여주는 천뢰(千雷)라는 무공은 정말로 경악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불가능했다.
천뢰를 쓴다면 아무리 북해빙궁이 대단하다고 해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력의 절반 이상을 단번에 잃고도 계속 천하를 도모하겠다면 그건 바보지.' 어쩌면 북해빙궁은 이번 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 타격을 다시 채워 넣으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불쌍한 놈들이군.' 엽광패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현재 북해빙궁에 대한 소문이 상당히 많이 퍼진 상태였다. 북해빙궁이 하도 요란하게 몰려왔기 대문이다.
북해빙궁은 일부러 소란스럽게 이동했다. 무림맹이나 혈교가 더 당황해 피해가 크기 원했기 때문이다. 일단 무림을 접수하고 나면 차근차근 힘을 키워 완벽하게 장악하겠다는 게 빙철룡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반쯤은 성공했다. 천하가 술렁였으니까.
북해에서 온 천 명의 무사들이 뿜어내는 차가운 기세는 정말로 대단했고, 그것을 먼발치에서라도 본 사람들은 저마다 소문에 일조했다. 엽광패는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강악과 당백형이 신중한 얼굴로 빙궁 무사들이 오는지 살피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왔으니 당연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공은 채워 놔야겠지?' 생각해 보니 아직 운기조식도 하지 않았다. 바닥난 내공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엽광패는 품에서 작은 단약 하나를 꺼냈다. 무영이 떠나기 전에 만들어준 신선단이었다. 은은한 광채를 뿜고 있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하여간 신통하단 말이야." 엽광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신선단을 입에 넣었다.
입에 넣는 순간 녹아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엽광패는 바위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내공을 보충했다. 과연 신선단은 대단했다. 그저 내상약이라고 했지만 신선단의 효능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선단을 장복하면 혈도가 점점 튼튼해진다. 엽광패도 상당한 효능을 맛봤다. '그리고 최근 만드는 것들은 뭔가 다르단 말이지.' 방금 먹은 것도 최근 만든 신선단이었다.
이것은 신선단과 신선고의 능력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체력과 내공을 단번에 회복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런 귀한 약을 막 낭비해도 되나 모르겠군.' 엽광패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품에 아직 남은 신선단들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제 오는군." 엽광패는 당백형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당백형 옆으로 다가갔다. "이제 오는 겁니까?" "그래. 네놈의 역할이 크다. 잘해라. 실수하면 좋은 꼴 못 볼테니까." 엽광패는 강악의 말에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그저 그들의 길을 막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당백형과 강악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숨었다. 두 사람이 숨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무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빙철룡이 있었다. 빙철룡은 길을 가로막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엽광패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넌 뭐냐?" 빙철룡은 사실 그냥 단숨에 목을 자르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엽광패가 풍기는 기운이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겁나지는 않았다. 천 명이 한 명을 겁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천하제일인이 오더라도 겁나지 않아. 북해빙궁은 최강이다.' 빙철룡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빙철룡은 엽광패를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네놈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여......" [죽고 싶으냐?] "아니, 당악이다!" 빙철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악? 설마 사천당가?" 엽광패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감히 사천당가 따위가 내 앞길을 막았단 말이냐? 훗, 어이가 없군." 빙철룡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안 그래도 깔아뭉개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빙궁의 움직임보다 엽광패가 더 빨랐다. 아니, 강악과 당백형이 더 빨랐다. 엽광패가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하늘 높이 던지며 외쳤다. "천뢰(千雷)!" 쉬쉬쉬쉬쉭! 그와 동시에 당백형의 손에서 날아오른 비침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빠지지지지직! 강악의 손에서 뻗어나간 뇌기가 비침들을 감쌌다. 쩌저저저저저적!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벼락이 쏟아졌다. 빙궁의 수많은 무사들이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절반이 넘는 무사들이 무너졌다. 빙철룡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가졌단 말인가. "어,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엽광패는 자신이 한 일도 아니지만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나 당악이 어떤 사람인지 알겠느냐?" 유난히 당악이라는 이름을 강조한 엽광패는 북해빙궁 무사들을 노려보며 소매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한 동작으로 수백 명의 무사들을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빙철룡 역시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크윽. 무슨 이런 괴물 같은......" 엽광패는 빙철룡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강악과 당백형이 천뢰를 펼칠 때마다 자신이 속으로 하던 말 아닌가. 빙철룡은 뒤로 물러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던 존재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운곡! 어디 있느냐! 운곡!" 운곡이라는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빙철룡은 공포에 젖었다. '그런 대단한 무공을 선보이고도 전혀 지치지 않아다니!' 빙철룡은 그 점이 더욱 두려웠다.
앞으로 그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한 번이라도 더 그것을 제대로 맞으면 살아남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찌할 테냐? 한 방 더 맞아 보겠느냐?" 엽광패가 소매에 손을 넣은 채로 그렇게 말하자 빙철룡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도, 돌아가겠다고 하면 그냥 보내주시겠습니까?" 엽광패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시 덤비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호,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빙철룡은 포권을 취하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당악이라는 이름을 씹고 또 씹어 삼켰다. 무슨 수를 써서든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듬했다. '당가라 이거지. 빙궁의 힘을 우습게 보지 마라.' 엽광패는 빙철룡이 포권까지 취하자 소매에서 손을 빼 잘가라고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침들이 하늘을 빽뺵이 메웠다. 빙철룡의 안색이 시꺼멓게 죽었다. "허억! 그, 그냥 보내주겠다고......" 엽광패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자신도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엽광패의 얼굴을 본 빙철룡은 가슴이 철령했다. 마치 자신이 속마음을 읽고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아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해봐야 이미 늦었다. 쩌저저저저저적! 어마어마한 수의 벼락이 쏟아졌다. 처음 것보다 더욱 많고 강력한 벼락이 떨어졌다. 신선단을 먹고 내공을 완전히 보충하고 날린 천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빙철룡은 여전히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이제는 복수고 뭐고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빙철룡이 주저앉자, 엽광패가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헛된 꿈은 이제 접고 돌아가거라." 그 말을 남긴 엽광패가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빙철룡은 망연한 얼굴로 엽광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렇게 북해빙궁의 야욕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빙철룡은 살아남은 무사들을 수습해 빙궁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들의 어깨는 천근 쇳덩이를 얹은듯 무거웠다..
첫댓글 끝까지 잘보고 갑니다. 수고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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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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