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과 스투디움
시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물론 촉각이나 청각도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시각보다 더 직접적이고 활용도가 높아 보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은 대상을 온전하게 모두 파악하도록 하는 전지전능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우리의 인식이란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대상의 본질을 정확히 간취하기보다는 누구나 공감하는 일반적인 의미 속에서 이해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보다 손쉽게 여기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가리켜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일반적인 감정이고 습관의 힘이다. 이런 점에서 스투디움은 응시자의 주관적 관점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되어 길들여진 문화적 앎을 기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위 사진(생략-인용자)은 썰매를 끌고 가는 아버지와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눈 오는 날 두 명의 사내아이를 끌고 가는 풍경'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 사진의 스투디움을 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 감지하는 감성적인 측면은 푼크툼(punctum)이라고 바르트는 지칭한다. 이 사진 속의 동네에 살았고, 이 거리의 난간에 걸터앉아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의 긴 세레모니를 해야만 했던 남자가 이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면, 그에겐 썰매를 끌고 있는 아버지와 아이들의 모습보다는 눈이 쌓인 채 길게 뻗어 있는 난간이야말로 시선을 끄는 부분이 될 것이고, 그에게 이 사진은 아련한 그리움, 혹은 아픔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둔 감상을 푼크툼이라 한다.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러한 상처, 이러한 찌름, 이러한 표시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는 라틴어에 존재한다. 이러한 단어는 단어가 또한 구두점의 개념으로 보내지고 내가 말하는 사진들이 사실상 이러한 예민한 점들로부터 점이 찍히고 가끔씩 얼룩이 지는 것보다 훨씬 나에게 와 닿는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상처들과 표시들은 점들이다. 그래서 스투디움을 교란시키는 이러한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 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면 푼크툼, 그것 역시 찔린 자국, 작은 구멍, 작은 자국, 베인 작은 상처 그리고 또한 즉각적인 한 방이다. 사진의 푼크툼, 그것은 그 자체에서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죽이고 나의 심금을 울리는) 우연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스투디움으로 해석되는 사진 외에도 우리 내부에서 반응하는 각자의 주관적인 감성과 해석이 획일적이고 공식적인 예술의 틈바구니에서 새롭게 사태를 파악하고 향유할 수 있게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사진이 의미를 갖게 되기를... 사진을 바라보는 일이 스투디움의 이해로 끝나지 않는 푼크툼이 한 구석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 본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거기에 송곳과 같은 아픔을 줄 수 있다면... 혹은 그리움이란 송곳에 의해 촉발되어 아련함이 나타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출전: http://spinoxa.tistory.com/m/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