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가을빛
구월 둘째 일요일이다. 도청 근무하다 먼저 퇴직했던 고향 친구가 백수에게도 주말이 기다려진다던 농담이 떠오른다. 내가 퇴직 후 재입학한 자연학교는 방학이 없고 주말도 없는지라 연중무휴 등교다. 새벽녘 잠을 깨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책을 펼쳐 읽다가 이른 아침밥을 해결하고 산책 걸음을 나섰다. 산행이 아닌 산책은 등산지팡이를 짚지 않고 트레킹화를 신게 됨이 다르다.
엘리베이터를 나서 이웃 동 꽃대감 꽃밭으로 가니 친구와 밀양댁 할머니는 내려와 있지 않았다. 꽃을 가꾼 주인장이 자리를 비운 꽃밭에는 초가을을 장식하는 여러 꽃이 피어 화사했다. 그 가운데 덩굴을 뻗어 가면서 별처럼 빨간 꽃을 피운 유홍초가 단연 눈길을 끌어 매혹적이었다. 유홍초와 같은 선홍색 꽃을 피운 분꽃과 촛불 맨드라미도 볼 만해 휴대폰으로 사진에 담아두었다.
반송시장 정류소에서 동정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차내에서 아까 찍은 사진을 몇몇 지기들에게 날려 보내며 안부를 전했다. 가을이 오는 길목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 꽃대감 친구가 가꾼 꽃이라고 소개했다. 동정동에서 북면 오곡으로 가는 15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온천장으로 곧장 가지 않고 고암과 아산을 두르는 노선이라 외진 마을에 살거나 텃밭을 가꾸는 노인이 타고 내렸다.
온천장에서 바깥 신천으로 나가니 북면 생태공원과 맞닿은 낙동강이 드러났다. 강변의 초등학교 앞을 지나 도래와 현도를 거처 내산에서 오곡으로 들어갔다.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는데 기사는 빈 차를 돌려 명촌으로 향해 갔다. 오곡은 북면의 최북단이고 곁에는 함안 칠북 내봉촌에 딸린 작은 마을과 이웃했다. 강변에 새로 뚫린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니 안개가 걷혀가는 즈음이었다.
길섶에는 한낮엔 꽃잎을 오므려버리는 나팔꽃이 아침을 맞아 꽃잎을 펼쳤다, 꽃잎이 연한 푸른색과 흰색 두 종류였다. 꽃잎만이 아니라 꽃송이도 일반적인 크기와 아주 귀엽게 작은 꽃송이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내가 지난 초여름 길섶에 자라던 야생초 잎을 따 찬거리로 삼았던 가시상추는 애벌레가 갉아 먹어도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웠다. 꽃씨가 떨어지면 내년 봄이 기대되었다.
작은 마을 앞에는 쉼터 정자를 창고처럼 묵혀두었는데 거기 처마 밑에는 지난봄에 제비가 진흙을 물어다가 지푸라기와 섞어 지은 제비집이 보였다. 드물게 보는 제비집이었다. 초여름까지 새끼 제비를 쳐서 키워 제 일가를 이루어 어디론가 사라져 빈 둥지였다. 농가 처마 밑 제비집과 들녘의 개체수는 현저히 줄어도 해마다 봄이면 돌아온 제비는 남녘으로 귀환을 앞둔 때지 싶다.
오곡과 내봉촌은 북향 산비탈을 개간한 단감과수원 일색에다 논은 전혀 없고 약간의 밭뙈기였다. 신작로 주변 농경지가 끝난 곳은 깎아지른 벼랑 아래 낙동강이 흐르고 전방 저만치 창녕함안보가 강심을 가로질러 걸쳐져 있었다. 벼랑은 생태가 복원되면서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운 노란 수까치깨와 뚝갈꽃을 봤다. 뚝갈꽃은 마타리꽃처럼 생겼는데 노랗지 않고 하얗더랬다.
창녕함안보 남단에 닿아 홍보관으로 들어 간식을 먹으면서 창밖의 댐과 밀포섬을 조망했다. 휴게실로는 휴일을 맞아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이들이 간간이 드나들어 쉬었다가 다시 떠났다. 한동안 머문 홍보관을 나와 밀포 앞 고목 팽나무가 선 나루터 쉼터를 내려다봤다. 지난 초여름 지기들과 칠서 강나루 청보리밭을 거닐고 와 거기서 라면을 끓여 먹었던 추억이 서린 현장이었다.
한낮이 되자 아직 볕살이 따가운 때라 강변 따라 함안 칠서로나 둑을 건너 창녕 부곡 학포로나 남지로까지 걷기는 무리였다.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면서 풋단감이 고물이 차 여물어가는 과수원을 지났다. 길섶 언덕에는 넝쿨이 나가면서 맺혔던 애호박이 누렁 호박이 되어 배꼽을 드러내 누워 있기도 했다. 오곡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간 내산에서 15번 마을버스를 타고 왔다. 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