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 글?꼭 읽어보세요》
지난 4월에 중국 절강성 영파, 중국말로 닝보란 도시에서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이 한꺼번에 한국에 온 사실은 이미 잘 아실 겁니다.
13명 중 한 명은 책임자격인 남자고 한 명은 38살 여성이고, 나머지 11명은 20대 초중반 처녀들입니다.
사진들을 보니 남쪽에 와서도 별로 걱정할 필요 없이 알아서 잘 살 것 같아 보이는 똑똑해 보이고 아름다운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38살 된 여성은 나이가 10살 넘게 많아 아마 여자 지배인 아닐까 싶은데, 알고 봤더니 그가 최삼숙의 딸이랍니다.
최삼숙이 누군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엔 티비만 틀면 최삼숙의 노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최고 여가수에 인민배우의 딸이 왜 왔을까요.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북에서 잘 나가는 부모를 두고 있다 탈북한 청년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탈북 동기는 답답해서였습니다.
해외에 나와서 자유를 체험하다가 북한에 한 번씩 들어갈 때마다 생활총화 한다고, 사상 검토한다고 시달리고 나면 환멸이 느껴진답니다.
거기에 젊은 김정은이 올라선 뒤로 “내가 평생 이런 꼴을 당하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아득하답니다. 그래서 온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유가 그리워도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갈 수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안 그럼 아마 해외에 나온 사람 중에 도망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 중 용기를 내서 온 젊은이들을 보면 “부모 일생은 부모 일생이고, 나는 내 삶을 살아야겠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주관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최삼숙의 딸 리은경도 그렇게 생각했겠죠. 그리고 엄마가 모든 인민이 다 아는 인민배우인데 설마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진 않겠지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리은경에겐 믿는 구석도 있을 겁니다. 바로 어머니의 두 언니, 즉 이모가 한 명은 프랑스에, 한명은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북하기 전에 이모들과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고, 이모들이 오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최삼숙의 가정은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분단사를 잘 대표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최삼숙은 한국에서 너무 유명한 가수 남인수의 조카입니다. 남인수는 분단되기 전인 1945년 이전엔 남북을 통틀어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미성을 지닌 가수로 추앙받았습니다.
분단된 이후에도 남쪽에서 가요 황제로 불렸고 1962년 사망할 때 한국 가수협회장을 지냈으며, 평생 1000곡이 넘는 노래를 남겼습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잘 아는 ‘낙화유수’ ‘애수의 소야곡’ 등이 바로 남인수가 부른 대표곡입니다. 남인수의 본명은 최창수인데, 그의 형제인 최창도의 딸이 바로 최삼숙입니다.
최삼숙의 어머니인 김봉점은 해방 후 서울에서 반미활동을 하다가 검거될 위기에 처하자 1948년에 3살, 1살 된 딸을 남기고 북으로 갔습니다.
1950년 전쟁 때 김봉점은 서울로 들어와 딸들을 만났는데, 후퇴하면서 38선 부근에서 낳은 딸이 최삼숙이라고 합니다. 이후 최삼숙에겐 최명원이란 남동생도 생겼죠.
최삼숙은 과거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을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는지 모른다. 운명하는 순간에도 ‘남녘에 있는 자식들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최삼숙은 커서 평양방직공장 방직공이 됐는데 공장예술소조에서 활동 가야금병창으로 전국노동자예술축전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음악단 성악배우로 뽑혔는데 1971년 김정일이 ‘꽃파는 처녀’를 만들면서 주제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에선 ‘아버지의 축복’을 불렀고, ‘열네번째 겨울’, ‘곡절 많은 운명’, ‘도라지꽃’ 등 3000여 곡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 이 집안은 참 대단한 집안입니다. 삼촌은 해방 전 민족을 대표하는 가요황제, 조카는 북한 최고 여가수입니다. 분단되지 않았다면 최삼숙 가정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 최삼숙을 줄거리로 삼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최삼숙도 “갈수록 커가는 행복 속에 웃다가도 남녘의 언니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최삼숙은 집에서도 프랑스와 한국에 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언니들 이야기를 자주 했을 겁니다. 중국에 파견된 딸에게 몰래 연락을 해보라고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덜컥 딸이 남쪽에 갔다니 어머니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겠죠. 잘 살길 바라면서도 다신 딸을 보지 못하는 그 어미의 마음은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최삼숙을 분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두 언니를 남쪽에 두고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야하는데, 오늘날 또 딸까지 남쪽에 갔으니 이제 딸까지 그리워해야 합니다.
리은경도 38살이니 북에서 시집을 가서 자식이 있을 가능성도 있죠. 그러면 그 역시 어머니 운명을 그대로 답습해 평생 이산가족으로 북에 남겨둔 혈육을 그리워하면서 눈물로 살아야겠죠.
분단 70년에 아직도 이런 이산의 아픔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겐 통일이 정말 뼈가 사무치게 손꼽아 기다려지는 일일 겁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리은경은 자발적인 이산가족이 됐고, 서울에서 살게 됐습니다. 집안의 유전이라면 그녀도 노래를 잘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노래만 잘 한다면 남인수의 조카 손녀에 최삼숙의 딸이란 그 이름만 갖고도 여기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꼭 성공해서 나중에 어머니 최삼숙까지 탈북시켜 서울에 데리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으로
2016년 6월 10일 방송분입니다.
남한 독자들이 아닌 북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