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추진되었으나 모금액이 부족해 지체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관심 갖아주시고 방문해주세요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
http://www.whrmuseum.com
나눔의 집
http://www.nanum.org/main.htm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
다음아고라 모금청원서명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donation/view?id=44588&
경남 사천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 위령비를 세우는데
땅을 제공한다고 한다.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10대 20대를 보내야만 했던
위안부할머니들에게 같은 대한민국국민으로서
미안하지도 않는가?
대한민국여성을 지켜주지는 못해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기는 커녕
이무슨 추태인가!!!!!
동참합시다!!!
젊은 여성회원분들
우리는 여성이라는 성별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일본과 미국이나
중국에 다시 먹혀 종군위안부로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여성이 성노예로 전락되는것은
비단 일제강점기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오랑캐에게 침입을 받았을때에도
우리여성들은 성노예로 전락됐죠.
그때도 지만원이나
뉴라이트같은 친일매국노집단은
자발적인 성매매 행위였다며
주장할것입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있어야만
그나마 객관적으로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증명할수 있을것입니다
이제 살아계시는 할머니들이
몇분 남아계시지 않기 때문에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더욱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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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5년에 경남 진양군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했다. 가게에서는 고구마, 생선, 감, 과자 등을 팔았다. 가게일은 어머니가 주로 하고 아버지는 장에서 물건을 사들이거나 팔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우리 소유의 논밭도 있었다. 형제자매는 2남 9녀였다. 딸 아홉 중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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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1928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의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이를 모두 열 둘을 낳았는데 일출은 그 중 막내이다. 일출이 태어났을 때 이미 위의 다섯 형제가 죽어 일곱이 남았다. 일출이 막내이니 부모님은 이미 많이 늙었고, 농사를 지었다. "어렸을 때에 조카들이랑 다 같이 컸어요. 학교는요 화동 소학교를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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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에서 삼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를 닦다가 마흔살에 결혼하여 나를 마흔 두 살에 낳았다. 평창에서 5대가 살았다. 내가 여섯 살때 우리 집이 분가했다. 보통 시골사람들이 먹고 살 정도로 살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도 지었다. 그러나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그러니까 학교를 가다가 말다가--- 일하러 가다가 밥도 해다 주고, 또 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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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1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갈아 먹을 논도 없었다. 그래서 살기가 어려워 대나무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꾸리고 있던 큰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곳은 지리산 밑의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였다. 여기서 아버지는 담배농사를 지었다. 산에는 송이버섯과 산나물이 많아서 따먹기도 하고 장으로 가져가서 쌀이나 돈으로 바꾸기도 했다. 아버지가 농사지은 담배잎은 전매품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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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목수여서 처음에는 살림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아버지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서 가산을 탕진했다. 형제는 친어머니와 계모가 낳은 아이를 합해 11명인데, 내가 첫째였다. 친어머니는 내가 군대위안부로 대만에 다녀온 후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계모는 1957년 결혼했다. 나는 학교에 다닌 일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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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부모와 여섯 자매가 있었는데, 나는 셋째였다. 어머니가 원채 솜씨가 좋아 삼베, 무명베 길쌈을 해서 논 다섯 마지기를 마련하여 빠듯하게 먹고 살았다. 학교는 보통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나는 학교에 가라고 하면 안가고 산을 타곤 했다. 그래서 엉덩이에 붉은 흙을 잔뜩 묻혀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부모님이 그러려면 학교를 구만두라고 해서 '얼씨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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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콩나물 고르는 일을 해주고 남은 콩나물 뿌리부분을 주워와 소금을 넣고 삶아먹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술꾼이다 보니 어머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삯바느질에서부터 채소장사를 거쳐 나중엔 길거리에서 해장술을 팔았다. 소녀 이옥선은 일곱살때부터 공부가 하고 싶어 매일 학교에 보내달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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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우리가 들어가자 온돌 위로 우리를 앉히고 잠시 서계셨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우리를 반기는 것인지 아니면 귀찮아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할머니의 태도에 나는 어색함을 누구려뜨리려 할머니도 어서 올라와 앉으시라고 권했다. 그 사이가 얼마쯤 되는지 모르겠다. 일 분 정도였는지 아니면 사 오분 정도였는지. 그렇게 서계시던 할머니는 우리를 보고 아무런 말씀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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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주군에서 외동딸로 성장했다. 나 처녀적에 이쁘다고 얼굴도 바구고 머리도 바꾸고 막 그러자 그랬다. 내가 열네살에 배가 고파 팔병신에게 시집을 갔다. 한 삼년 살았는데 나이 많이 먹은 신랑이라 좀 있으니까 죽었다. 자식은 못 낳았다. 임신은 해보질 못했다. 그리고 다시 친정으로 왔다. 돌아와서 남의 집 일도 하고 살았다. 친구들이 밥해 놓고 부르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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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름으로 고치고, 일본말 하라 하고, 뭘 사도 상점에 들어가서 일본말 하라 하고, 내 들어올 때. 그래가지구 여기 중국엔 돈도 많고 공장에랑 (사람도) 많이 쓰고 한다니까, 내 열 여덟 살 때 부모도 몰래…… 동무 하나 와서…… 내하고 이름이 같지. 성이 다르지. “얘, 옥선아, 중국에 바느질 공장에 (사람) 쓴다니까, 우리…… 바느질 공장에 아니 들어갈래?” 그래 가만가만 ‘모두 간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니 가겠는가?’ 그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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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생으로 평안남도 평양이 고향이다. 오빠 둘에 언니 하나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평양 모란봉 앞에 집이 있었다.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우고 죽을 쑤어서 먹을 때가 많았다. 집안이 어려워 7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였다. 일본사람 집에서 아기를 돌보아주며 7년동안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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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 2008-03-13
제목 : 한지민 남몰래 나눔의집 2천만원 쾌척 선행
미녀스타 한지민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 거액을 쾌척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MBC 사극 '이산'에서 여주인공 송연 역으로 열연 중인 한지민은 3월7일 나눔의 집을 찾아 2,000만원을 기탁했다. 이 같은 사실은 한지민의 팬들과 나눔의 집을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한지민의 소속사 측은 13일 뉴스엔과의 통화에서 "다른 분들이 기부하는 것에 비해 많은 금액도 아니고 해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한지민이 그 동안 출연료와 CF 계약금 중 일부를 모아 기탁했다"고 밝혔다.
한지민 소속사 관계자는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 돼 피해를 입은 할머니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어 조용히 돕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민은 지난해 KBS 2TV 드라마 '경성스캔들'에 출연한 바 있다. 당시 한지민은 독립투사 나여경 역을 열연했다. 한지민의 기탁 소속을 전해들은 '경성스캔들' 팬들도 최근 나눔의 집을 찾아 성금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성스캔들' 팬들은 지난 2월 ‘위안부 할머니 방문 성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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