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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 없는 매국 친일부역 박정희 무부들이 독도폭파론 거들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정희-박근혜 부전여전인가
박정희 한일굴욕협정 뒤에 미국제국주의 자들이 압박
박근혜 한미일 삼각동맹에 따른 매국 한일군사정보협정에도
배후에 미제가 존재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서기1962.10.20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왼쪽, 서기1926~2018)과 오히라마사요미(오른쪽 大平正芳, 서기1910~1980)가 회담을 하고 있다. 이 둘간에는 비밀회동도 있었는데 이 때 향후 진행될 굴욕한일협정수교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남한은 일본에게서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3억달러를 받고 차관형식으로 2억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만행 피해배상금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일본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 결과 오늘날 되풀이되는 위안부할머니 피해배상금, 징용, 징병으로 인한 피해 배상금, 사과 등 개인의 피해배상권을 뺏어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편집자 말).
1. 연재를 시작하며
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적대 관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눈에 띄게 큰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의혹이나 불만이 제기되지만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1948년부터 70년 동안 굳어진 적대 관계가 하루아침에 끝나고, 1993년부터 25년 동안 꼬인 '북핵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겠는가.
북미 관계가 정상화하면 북일 관계도 정상화할 것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의 사례에서 보듯, 미국과의 수교 이전에 일본과의 수교가 먼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면 적어도 수백억 달러의 일본 돈이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에 앞서 북한과 일본은 냉전 종식 직후인 1990년부터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몇 년 동안 진행했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했다.
머지않아 이루어질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내다보며 1965년 이루어졌던 남한과 일본의 수교 과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재가 그랬듯, 한일 수교에도 미국이 왜 개입하고 어떻게 압력을 행사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한반도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일본의 강제점령 또는 식민통치를 당하고 20년이 흐른 1965년 남한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시지 않은 터에 서둘러 하느라 '졸속 협상'이란 비판이 나왔다.
일본이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차관을 포함해 모두 8억 달러를 건넸으니 '굴욕 외교'라는 비난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강요와 다름없는 압력 때문에 "양키 입 닥쳐"라는 시위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이같은 졸속적이고 굴욕적 협상 과정에서 '독도 폭파' 얘기가 나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일본의 협상대표가 한 망언이 아니라, 한국의 협상대표가 제안한 것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협상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김종필은 1961년 박정희와 5.16쿠데타를 일으킨 뒤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그 부장이 되어 1년 반이 지난 1962년 10월 일본에 건너가 한일협정의 기초를 마련했던 이른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에 합의하면서 독도를 폭파해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는 당시 일본 외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4년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른바 '6.3 사태'다.
요즘 횡령과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받고 있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나도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는데, 그가 데모를 해봤다고 내세우던 게 바로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였다.
2. 한일협정에 관한 정부문서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미국 국무부는 1980년대부터 1960년대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해 공개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이 시작됐던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2~1960)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4년 출판됐다. 케네디 행정부 (1961~1963)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1996년에, 존슨 행정부 (1964~1968)의 한국 관련 외교문서집은 2000년에 출판됐다.
이 가운데 2000년 출판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에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 (U.S. Efforts To Encourage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이라는 별도의 항목 아래 약 40건의 문서가 실려 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왜 그리고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일 두 나라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1995년부터 1950~60년대의 외교문서들을 공개하기 시작해 2005년까지 약 160권에 이르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들을 모두 공개했다. 2005년 1월 한국 정부가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일본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한 것이다.
남한이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자 북한은 4일 후 2005년 1월 21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북한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만여 명의 학살만행, 840만여 명의 강제련행, 20만여 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강조해오던 터였다.
한일협정에 관한 연구는 박정희가 1979년 죽은 뒤부터 발표될 수 있었다. 1980년대엔 이재오의 <한일관계사의 인식 : 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1964~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서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1984년엔 "분단 40년, 그 고난의 벽을 깨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를 펴내기도 했다. 2018년 7월, 친구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 전도사 노릇을 한 게 명예스럽다고 말한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기도 하다.
1995년엔 민족문제연구소가 한일협정 30주년을 맞아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는 책을 펴냈다.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의 글을 포함해 10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이종원 일본 동북대학 교수가 "기밀 해제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미국정부의 외교문서" 등을 활용하여 쓴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란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한일회담은 한국과 일본의 2국간 교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포함한 3국간 교섭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미국은 자신의 동아시아 정책의 필요에 따라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한일 양국정부도 교섭의 상대방보다는 미국의 정책과 의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치 경제적인 힘의 원천인 미국이라는 세력을 서로 자신에 유리한 방향으로 동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도성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1995년 "서울의 외무부 본부는 물론 동경의 주일대사관까지 수도 없이 드나든 끝에" 정부 서고의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여 <실록 박정희와 한일회담: 5.16에서 조인까지>라는 자료집을 펴냈다. 이 가운데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용의 자료들이 몇 가지 제시되어 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2016년 펴낸 <협상의 전략>에서 한일협정도 다루고 있다. '쉽게 타협하면 역사가 복수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일본에 유리한 청구권 협상과 미국의 압력," "미해결 과제로 남은 독도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친일파 박정희 정권, ‘일본과 한국은 가족, 미국은 큰 형님’(2)
박정희 반란 성공하자 일본과 수교 논의 배경에 미국이 있었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한국은 불안정한 의붓자식”
김종필,
“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사소한 문제다”
“‘보상금’ 명목이 아니라도 좋다 돈 만 달라”
일본은 ‘독립축하금’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돈 줌
중국 명나라와 이조선과 사대주의 주종관계,
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서 되풀이 되는 현대사
▲서기1965년 한일수교회담이 진행되자 전국 대학가 및 시민들이 극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 매국협상이라며 박정희 친일파 정권 타도를 부르짖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서울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학교를 패쇄시키고 굴욕, 매국 한일협정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일제에게 해방된지 20년만에 다시 사실상 일제식민지 체제로 돌아갔다는 평을 받는다. 또 구한말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간의 불평등 수교조약(서기1876.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의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만 빼놓고 모든 분야에서 대일종속성이 위험수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편집인 주).
3. 한일 관계정상화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3) 박정희 정부 시기 (1961~1965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 미국은 그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자로 변하여 "친공 혹은 반미감정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961년 6월 13일 열린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케네디 (John Kennedy) 대통령은 한국의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 한일 간의 지속적인 반목이라고 결론 내렸다.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 지명자에게 서울에 가면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해달라고 지시하고, 케네디 자신은 일주일 후 미국을 방문한 이케다 (池田) 일본 수상에게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0월부터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박정희는 1961년 11월 케네디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향하다 도쿄에 들러 이케다와 회담하며 한일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1962년부터 한일협정을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제6차 한일회담이 이른바 '대일 청구권'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 문제로 1962년 3월 중단되자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이 "비현실적으로 높게 (unrealistically high)" 8억 달러를 청구하고 일본은 "비현실적으로 낮게" 7000만 달러를 제공하려 하기 때문에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파악하면서, 한국보다 일본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은 보상금 규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미국에 알렸지만 일본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62년 5월 케네디는 요시다 (吉田) 전 수상에게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일본 안보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한국 안보를 지켜왔다. 한국이 일본과의 밀접한 경제관계 없이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다. 이제 일본이 역할을 해줘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그 무렵 5.16 쿠데타 이후 '제2인자'로 행세하며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0월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 (大平) 외무상 및 이케다 수상을 만났다. 그리고 워싱턴에 도착해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히라 및 이케다와 대일 청구권, 어업문제, 평화선, 독도문제 등에 관해 주로 논의했다. 재일동포 지위와 문화재 반환 등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사소한 문제다. 청구권과 관련해 오히라는 1년에 2500만 달러씩 12년 동안 3억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난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12년은 너무 길다면서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모두 6억 달러를 요구했다. (중략)
오히라는 3억 달러까지 줄 수 있지만 '보상금 (reparations)' 명목은 될 수 없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며 축하하는 (congratulatory in 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명목으로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3억 달러는 충분하지 않고 보상금 3억 달러 이상과 차관을 포함해 6억 달러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요구했다. 차관이 아닌 돈의 명목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전체 금액에 보상금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보상금'이라는 말을 고집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러스크는 한국과 일본이 될수록 최대한의 노력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촉구해왔다며, 한일수교는 두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종필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겠다고 대꾸하며 독도 문제에 관해 보고했다.
일본이 최근에 독도 문제를 협상 주제로 들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김종필은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미루자고 했다. 독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러스크가 묻자, 김종필은 "갈매기가 들르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김종필이 오히라에게 독도를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다고 하자, 러스크도 그 해결책을 떠올렸다고 대꾸했다. 오히라는 김종필의 제안에 만족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케다 수상에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게 일본의 유일한 해결책이냐고 김종필이 묻자, 이케다는 대중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연기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독도 폭파를 한국이 제안하고 일본이 거절했던 셈인데,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내용과는 정반대다.
김종필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오히라와 다시 만나 두 번째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한일협정의 기초가 된 문서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차관 1억 달러로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자금의 명목을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은 '독립 축하금'으로 건네고 한국은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서로 편리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내용이 한국에 알려지자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박정희가 한일수교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왼쪽 부터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 이동원 외무부장관, 김동조 주일한국대사. 박정희, 정일권 등 모두 일본제국주의 만주군 출신들이다. 일제치하 조선총독부 개, 돼지 노릇하던 자들이 일제가 물러간 자리를 차지하고 친일파 통치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정확한 역사인식이다. 일제치하에서는 직접식민통치요, 지금은 그 졸개들에 의한 간접식민통치시대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된 적이 없다. 역사광복투쟁을 비롯하여 적폐청산이 시대과제인데 이것의 실상은 친일파로부터 자주독립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립투쟁중이다.(편집자 주).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 역시 "한일협상의 조기 타결을 가장 급선무"로 삼았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의 주미대사들을 부르기도 하고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일본 수상과 한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면서 다그쳤다. 그 이유는 1964년 5~7월 작성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가안보위원회 (NSC)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다.
"요즘 동북아의 가장 급선무는 한일협정이다. 이는 병력을 감축하는 것보다 미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장기적 방법이다. 미국은 아직도 2000만 인구의 한국에 매년 3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간에 걸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한일협정이 맺어지면 6억 내지 10억 달러의 다양한 일본 자금이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중략)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남한에 38억 달러 이상의 경제원조와 28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쏟아 부었다. 우리의 모든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 (this nation is still an unstable U.S. stepchild)이다. (중략) 우리는 1965년 한국에 대해 3억 5000만 내지 4억 달러의 원조를 계획하고 있는데,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지불을 계속할 수는 없다."
1964년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1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하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한국 정부를 더욱 압박할 수 있었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 및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을 더 중시했던 박정희는 미국 방문 이전에 한일협정이 서명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일본 정부에 합의문 작성을 서둘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한국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한국과의 수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라 외상은 주일 미국대사에게 미국의 압력이 일본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말고 한일협상을 "일본인들의 방식으로 일본인들의 페이스에 따라" 추진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일본은 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망언까지 곁들이며 '피해 보상'이 아닌 '독립 축하' 또는 '경제 협력'의 명목으로 돈을 주겠다고 배짱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수교에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일본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허용하지 않던 미국이 일본에게 한일협정을 먼저 타결하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접근에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는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미국에게 한일협정을 6월까지 체결할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주일 한국대사에게 친서를 보내 6월 15일까지 한일협상을 매듭짓도록 지시하면서 성사를 위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이에 한국의 협상대표들은 일본 측에서 문제 삼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합의문 끝에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쟁점은 무엇이든지 추후 협상의 주제가 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협상하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국내적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미루게 된 배경이다.
1965년 6월, 한국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5개월 뒤 미국을 방문해 국무부 관리들에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큰형 (the big brother)이다. 두 동생들이 과거에 서로 다투었는데, 앞으로 동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안일 (family matters)에 관해 얘기할 수 있도록 형님이 이끌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한국을 '의붓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국은 미국을 '큰형'으로 받들고 싶어 했고, 한국정부는 국민의 깊은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던 셈이다. 굴욕적이고 졸속적으로 처리된 한일협정과 관련해 미국의 오만함이나 일본의 무례함을 비판하기에 앞서 한국의 종속성과 비굴함을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일제침략배상, 북한 것까지 팔아먹은 박정희 정권이전 (3)
“북한 국가 불인정, 남한 주권 북한까지 미치니 청구권도 북한까지 포함한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조선,
"남조선 당국은 일제 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서기2004.05.22. 북조선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본국 고이즈미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조일수뇌회담을 가졌다. 일본 수상의 평양 방문에는 현재 일본 수상 아베신조(安倍晋三)도 따라갔다. 모두 일제침략을 저지른 자들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일제침략의 근원,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 정신을 잇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날 회담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를 거론하며 일제침략배상에 소극적이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민족 수백만을 강제동원해 죽이고, 부상입히고, 노동력 착취한 만행에 비하면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새발의 피도 안된다는 것이 진실이다(편집인 주).
4. 한일협정과 북일 수교
한국 외교통상부가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하자 일본 정부가 반발했다. 한국의 친일 보수신문들도 거들었다. 한일협정에 관한 일본의 협상 기술이나 전략 또는 치부가 드러날까봐 우려했을 것이다.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되던 북일 수교 추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과 일본의 협상 과정과 결과에 북한과 관련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협정엔 남한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명시되어 있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 과정에서 남한의 "헌법상 주권은 이북 지역까지 미치기 때문에 청구권 문제 해결에는 북한 지역에 관련되는 청구권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반도 "통일 이전에 북한의 청구권 문제에 대해 북한과 구체적 교섭을 하지 않을 것을 상호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 건넨 돈에서 박정희 정부가 일제 식민통치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보상금을 가로채기는 했어도 북한 지역에 돌아갈 보상금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2005년 1월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된 직후 북한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남조선 당국은 일제 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000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남한이 받은 8억 달러가 "턱없이 적은 금액"이기도 했지만, 그 돈의 성격이 '피해 보상'이나 '손해 배상'이 아니라 '경제 협력'이나 '독립 축하' 명목이었기에 한일협정이 굴욕적이고 반민족적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여만 명의 학살 만행, 840여만 명의 강제 련행, 20여만 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터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김일성 부대가 1940년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승전국으로서 패전국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이 아니라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역시 보상이든 배상이든 '경제 협력'의 틀 안에서 과거를 청산하기로 합의했다. 참고로, 그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小泉進次郎) 일본 수상이 서명한 '조일 평양 선언'의 제2항은 다음과 같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력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대하여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리자 (낮은 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중략)"
북한과 일본은 1990년대 초부터 수교 협상을 시작했다. 앞에서 보듯 200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과 2004년 5월의 정상회담에 힘입어 협상이 곧 타결될 것 같았다. 게다가 고이즈미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8월까지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나라의 관계가 수교로 이어지기는커녕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 관련 문제,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 그리고 미국의 반대다.
나는 이 가운데 미국의 반대가 북일 수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과거에 중국이나 베트남 등과 국교 정상화를 계획하고도 미국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다 미국의 양해와 승인을 받고서야 수교에 이를 수 있었듯, 북한과의 수교 역시 미국의 허락 없이는 진전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2000년대 이전엔 남한의 견제와 방해도 컸다. 남한은 1995년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때 일본이 쌀을 보내려던 것까지 막은 적이 있다. 일본이 남한보다 먼저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면 한일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1965년 한일 수교가 시작된 때는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여서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1966년 7월 러스크 (Dean Rusk) 미국 국무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시나 (椎名悅三郞) 외상이 대략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한일협정으로 남한과의 관계가 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두통거리'가 있다. 일본이 북한에 공장설비를 수출하려는데 그러려면 북한 기술자들이 일본에 들어와 정밀검사를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남한이 북한 기술자들의 일본 입국을 반대하기에 일본은 한일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3년 이상이나 연기했다. 이제 한일 국교정상화가 완전히 정착되어 일본 정부가 북한에 수출을 재개하고 싶은데, 남한은 일본이 북한 기술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설비를 수출한다면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손상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러스크가 남한을 편들며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일본이 북한과 무역하는 것은 모기에 한 방 쏘이는 것에 불과할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모기에 쏘임으로써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 일본과 북한의 관계보다 일본과 남한의 관계가 훨씬 크고 중요하다."
이렇듯 남한과 일본은 미국의 간섭 및 압력 아래서 가까워졌고 북한과 일본은 남한의 견제와 미국의 반대로 멀어져갔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8월 29일, 북한과 일본이 "미국에 알리지 않고" 지난 7월 베트남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외신 보도가 나온다. 두 나라가 올해 11~12월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지기도 한다. 남한이든 일본이든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려면 미국의 양해와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서글픈 현실이기에 북미 관계가 진전되길 바랄 뿐이다.
5. 연재를 마치며
지난 7월 "베트남 파병 :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을 연재하면서, 남한이 베트남에 병력을 보내기 시작한 1964년의 정치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면서 7월 11일 다음과 같이 썼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8월 중 "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을 연재하면서 지난주 8월 23일 자 글에서도 '6.3사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야당과 대학생들이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64년 6월 3일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해 일체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모든 대학의 문을 닫아버렸다."
지난 7월 11일의 연재 글을 읽은 미국의 한 독자가 흥분하다시피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왜 그 끔찍한 서울대학교 총장놈 이름은 밝히지 않으세요? 권중휘." 1970년대 초 경북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민주화운동을 한 죄로 군대에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약혼자 때문에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칠순 여성의 피맺힌 절규랄까.
그 할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며 역사 한 토막을 밝히기 위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한다. 1964년 6월 3일, 야당의원들과 대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한 날,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정희는 계엄령에 대한 미국의 동의와 협조를 얻기 위해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와 하우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서울대학교 총장이 그 날 나용균 야당 국회부의장을 통해 자신에게 "65명의 서울대 학생과 시위대를 부추기는 다수의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하우즈에게 6사단과 28사단 병력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우즈는 버거의 동의를 얻어 승인했다.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 때 서울대학교 총장이 권중휘. 일본 동경제국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펴냈다는 대단한 영문학자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해인 1961년 총장으로 취임해 퇴임을 5일 앞둔 1964년 6월 3일, 박정희에게 자기 학생들과 교수들이 빨갱이라고 밀고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군사독재의 탄압으로부터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나용균 국회부의장은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하다 제헌국회부터 6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이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엔 장관도 지내고 1963년엔 야당 몫으로 국회부의장까지 된 사람이 야당이 주도하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앞장서는 '빨갱이들' 명단을 박정희에게 건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자기가 앞장서기는커녕.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 겸 최고 대학의 총장과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까지 군사독재자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대학생들과 야당의원들이 주도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방해했던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희 군사독재가 18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133
북조선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의 작품
남북 화해 협력 시대에 왜곡된 김일성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손정도 목사,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보다 더 많은 일 해
평안도 갑부 아들로 재산 팔아 만주 길림 개척 이주민 수용
김일성의 정신적 스승으로 김일성 성장기 절대적 영향 끼쳐
주체사상은 우리고유의 정신사상으로 김일성과는 상관없어
북에는 540여개 가정교회로 도착화 된 기독교가 왕성히 활동
김정은은 일찌감치 낙점된 왕도 수업으로 키워진 지도자
▲ 조선개국 4353.08.02. 서울 광화문아침에서 열린 통일학당 제33차 강연을 최재영 프레스 아리랑 공동대표가 진행하고 있다. 자료에 보이는 사진은 김일성 주석이 서기1994년 북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한 장면이다.
조선개국 4353.08.02. 서울 광화문아침에서 33차 통일학당 강연이 있었다. 최재영 재미교포 목사가 맡았다. 이날 강연은 북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손정도 목사라는 독립투쟁사의 거물과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를 조명하여 남북한 근현대사의 핵을 짚었다.
최재영 목사는 현재 프레스 아리랑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대미자주독립투쟁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초를 치르기도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시민권자 대북입국 금지를 하기 전까지 북한을 수시로 들어가 활동했다.
현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벗겨져 자유롭게 국내서 활동하고 있다. 이날도 통일 시대를 맞이하여 남북이 이질감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강연을 이끌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손정도 목사는 누구인가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교통부장, 재정경리담당을 역임 했고 68개 항일무장단체를 지원했다. 평안남도 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망국을 당하여 재산을 다 팔아 만주 길림으로 이주했다.
집단 이주 촌을 도산 안창호와 함께 건설했다. 이 지역 땅을 매입해 조선 땅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에게 수백만 평을 농사지으라고 나눠줬다.
이런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됐다. 진도로 쫓겨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현상금이 걸렸고 결국 길림 동양병원서 각혈하며 갑자기 사망했다. 이때가 49세였다. 일제가 음식에 독극물 탄 것으로 추정된다.
손 목사는 현재 동작동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묻혀 있는데 시신은 없다. 사망한 지역 길림의 흙만 파다가 묻어 놓은 것이다.
중국 모택동 문화혁명 때 손 목사 유해 있는 묻혀 있는 지역이 파괴됐다. 지금은 그 위에 도시가 건설돼 어디에 있는지 아예 모르게 됐다.
너무 안 알려져 백범 도산과 우남과 같은 급의 독립투사 거물 임에도 손정도 목사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왜 안 알려졌나.
본인의 독특한 인생관 철학사상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스스로 걸레 철학이라고 했다. 걸레는 꼭 필요하다. 궂은 것 더러운 것을 청소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구석에 방치해 놓는 그런 것이다. 손 목사는 평소에 “나는 걸레처럼 살고 싶다. ” 라는 말을 신조처럼 했다,
미국에 있는 그 자녀들에게 손정도 목사 기념학술원을 같이 하자 제안하자고 아버지가 평소 걸레처럼 살라고 했다며 거절했다.
자신들도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다. 백범, 우남, 도산보다 독립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했다. 한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가 손정도 목사다
김일성에 대한 남한의 모략과 왜곡
박정희 정권의 공작이었다.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도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등 친가와 외가가 모두 항일투쟁을 벌인 가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명영 교수라는 사람이 박정희 정권하에서 왜곡 모략하는 책을 발간하면서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날조된 가짜로 알려졌다.
김일성 열전, 괴수 김일성, 김일성의 정체, 가짜 김일성 등이다. 박 정권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가짜 김일성을 퍼뜨렸다. 국책사업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일성 가계가 독립투사로 가득하다는 것은 언론에서 먼저 알고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김일성의 친동생 김철수가 국가독립유공자라고 했다.
김일성의 외삼촌, 강용석도 항일무장투쟁 하다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도 마찬가지다. 월남한 한국기독교계의 대부로 알려진 한경직 목사와 한가지인 배민수 목사가 책을 썼는데 거기에 김형직이 혈서를 쓰고 항일투쟁했다고 나온다. 김형직은 조선국민회라는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어 일제와 싸웠다.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인연
김일성의 원래 이름은 김성주다.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도 항일투쟁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던 중 갑자기 사망한다. 김형직은 평소에 김성주에게 '나는 병이 있어 오래 못 살 것이다. 내가 죽으면 길림에서 목회하는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당시 김성주는 15세였다. 만주 길림에 있는 조선인 교회로 담임 목사인 손정도를 찾아갔다. 손정도 목사는 잘 왔다면서 부인과 함께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양아들처럼 돌보았는데 손 목사의 부인은 삯바느질로 도왔다. 처음에는 화성의숙에서 배웠다. 독립투사 최동호가 교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동학 천도교가 세운 정의부 소속이었다. 이후 독립투사 오동진과 최동호의 추천으로 손 목사는 김성주를 육문중학교에 입학시켜 학비를 댔다.
김성주는 손 목사의 교회에 나갔고 거기서 주일학교 반사, 연예선전단이라는 성가대 대장도 맡았다. 풍금도 잘 쳤다.
이쯤에 김성주는 조선인 소년단체를 만들어 공산주의 운동 공부를 했다. 기독교 신앙도 동시에 이어나갔다.
이 당시 공산주의 운동은 일제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는 항일투쟁의 수단이었다. 지금처럼 사회주의 좌파 운동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손정도 목사의 항일투쟁 정신을 배운 것이었다. 김성주는 비밀독서회도 만들어 활동했는데 당시 만주의 권력은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벌 지배하에 있었다.
장작림, 장학량 군벌 치하였다.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돼 있어 김성주의 이런 활동을 알고 그가 다니던 육문중학교에 경고가 내려왔다.
그리고 김성주는 체포돼 8개월 정도 구금된다. 이때 손정도 목사가 구명운동을 했고 군벌에게 뇌물을 주어 김성주를 빼냈다.
구금 됐을 때 손정도 목사의 막내딸 손인실이 김성주를 보살폈다. 침구, 사식 등을 들여보내며 도왔다. 나중에 김일성이 손인실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김성주는 출옥 후 손정도 목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고 이후 15년 동안 풍찬노숙을 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출옥하면서 주체상의 주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이날 강연에는 평소보다 많은 시민들이 몰려와 북에 대한 소식에 목말라 했다.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우리 민족 수천 년 동안 내려온 고유한 사상과 정신문화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학문화 철학화한 것이다. 대미대결에서 사상 무장화 한 것이다.
다만 주체사상 근본주의로 흘러 너무 김일성 부자와 결부시켜서 강조하는 것이 흠이다.
주체사상을 교회 신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남한의 미국산 기독교는 주님, 또는 하나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한다. 북 기독교인의 관점은 다르다.
요한계시록에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내가 문을 연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기다리거나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내 길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고 내가 주체가 되고 내 힘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도 기독교가 있는데 구한말과 일제 치하 형성된 기독교다.
우리 남한처럼 해방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온 미국산 사대주의 기독교가 아니다. 북한은 교회가 가정교회로 돼 있다. 평양에 봉수교회 등이 있지만 북에도 교회가 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가정교회가 북에는 540여 개가 있다. 특별히 교회당이 없을 수밖에 없다. 마을 회관 등 공공건물에서도 예배드린다. 북의 기독교는 이렇게 토착화됐다. 남한은 미국식 교회가 토착화된 것이다.
북에는 당연히 신앙의 자유가 있다. 종교정책을 두 갈래로 펴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누구나 종교자유가 허용한다. 대외적으로는 제한, 통제한다.
밖에서 북으로 목사나 선교사의 신분으로 들어와서는 간첩행위를 하는 것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진 김동철 목사가 북에서 활동했는데 나중에 북에서 돌아와 한국 전광훈 목사에게 자기는 미국 씨아이에이(미국중앙정보국)의 첩보원이었다고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어떻게 키워졌나
흔히 김정은, 김정철, 김여정이 스위스에 유학했는데 베른에 있는 최고급 국제학교에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반만 맞는 것이다. 김정철과 김여정은 베른의 최고급 국제학교에 다닌 것이 맞다. 김정은은 다르다.
시골에 있는 이름이 없는 학교에 다녔다. 이는 김정일이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지도자 수업의 하나로 하층계급을 체험시키는 과정이었다.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민군 사병으로 들어가 군 생활을 한다.
또 북조선 최고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했다. 지도자로 일찌감치 낙점돼 왕도 수업을 밟아 지도자로 키워진 것이다.
그가 집권하고 벌이는 것을 보면 종합적이다. 새로 건설되는 도시나 농장을 보면 스위스풍이 물씬 풍긴다.
백두산 아래 삼지연 시나 강원도 3개 군을 밀어서 만든 대규모 농장, 세포 등판의 건물이나 목초지를 보면 스위스풍이다. 스위스 유학시절 보고 느낀것이 그의 북조선 '재조산하'에 진하게 녹아 들어가 있다.
▲손윤 통일학당 학장. 손 학장은 이날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이제까지 북조선 김성주(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감동했다. 김성주가 화성의숙에 들어가서 배운 것을 언급하며 최동호가 학교장이었는데 이는 동학 천도교가 세운 정의부 소속이었다며 역사의 내막을 상기시켰다.
출처: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412
김일성, 동학 화성의숙서 주체사상 싹틔워이전 기사보기다음 기사보기
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동아시아 역사, 이제 더이상 희생양되지 말야 한다.
손병희 인재양성교육 오늘날도 소중한 귀감
근대사는 잘난 양반이 아닌, 차별 천대받던
서얼, 상놈들이 변혁하고 발전시킨 역사
이이제이전술에 당하는 역사 이제 끝내야
▲서기2019.01.05. 서울 종로구 안국역 2번 출구 건너편에 위치한 <광화문아침> 의백학교에서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이 '동학혁명과 3.1혁명의 진실'을 주제로 심화학습 강의하고 있다.
서기2019.01.05. 서울 종로구 3호선 안국역 건너편에 위치한 <광화문아침> 의백학교에서 의암 손병희, 백범 김구 정신을 잇는 심화학습 수업이 있었다. 이날 강의 두편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조병현 의백학교 지도교수가 맡았다. 두번째 시간에는 손윤 의백학교 이사장이 이끌었다.
손 이사장은 이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령, 김일성이 만주 길림성 화전현에 있었던 화성의숙이라는 곳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털어 놨다. 화성의숙은 동학, 천도교에서 세웠다고 한다.
최동호라는 독립군 장군이 있었는데 천도교인으로서 만주에서 활약한 정의부 소속이었다. 그가 화성의숙에서 김일성을 가르쳤다고 손 이사장은 상기되어 전했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은 여기서 동학사상을 접했을 수 밖에 없고, 동학은 민족과 자주를 얘기하는데 오늘날 북조선의 국시노릇하는 주체사상이 여기서 나왔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인지 현재도 북조선은 천도교를 우대하고 천도교에서 나온 청우당도 존재한다. 최동오 장군은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부주석도 역임한 민족주의자다. 그는 현재 북조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한다.
또 최동오 장군의 아들, 최덕신과 그의 처, 류미영 부부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북으로 망명했는데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독립투사 류동렬 장군의 외동 딸인 류미영씨는 지난 서기2016년 11월에 사망했다.
당시 북조선 보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이었고, '천도교 청우당중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양형섭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지금 남북, 북미 대화 사령탑을 맡고 있는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하여 애도했다. 또 김정은 위원장도 애도화환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북조선 당국은 큰 애도를 표시했다. 남편 최덕신과 현재 북조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당시 양형섭 부위원장은 애도사에서, "애국애족의 길을 걸으면서 민족의 대단합과 통일성업에 헌신하여온 명망있는 여성정치활동가, 귀중한 동지를 잃은 슬픔을 금할 수 없다"고 애절한 심정을 표시한 것으로 당시 북조선 당국은 보도했다.
▲만주 길림성 화전현에 있었던 화성의숙. 김일성은 서기1926년에 이 학교에 입학하여 천도교 최동오 장군으로 부터 동학, 천도교를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학 천도교, 청우당은 북조선 정권 수립시에도 살아남았다. 해방공간에서 북조선도 수많은 당들이 난립했다. 소련군이 해방군으로 들어왔으나 소련군이 밀고 있는 조선로동당 외에 다른 당은 반동으로 몰려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청우당이 살아남은 것은 조선로동당 로선과 같거나 더 진보한 것도 있다. 동학의 자주개벽사상을 잇는 청우당이, 비록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혁명을 내세운 조선로동당과 결이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청우당이 살아남은 데는 다른 이유도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김일성과 동학 천도교와의 인연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손 이사장이 천도교와 김일성과의 인연을 상세하게 밝힌 이유는 동학, 천도교가 근대사는 물론 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리기 위함이다. 동학이 우리역사에 끼친 것에 비해 너무나 적게 알려져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향후 남북일통시대를 맞이하여 73년이상 분단된 채 켜켜히 쌓인 남북 이질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숙제다. 동학, 천도교와 북조선과의 깊은 인연이 이질화를 극복하는데 한 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손 이사장은 이날 심화학습을 ‘이이제이 夷以制夷’로 시작했다. 중국 고사성어에서 나오는 말인데, 오랑캐로 오랑태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적으로 적을 이긴다는 말로 풀이된다.
서기19세기 서양열강의 동아시아 침략과 이를 이어받은 일제의 침략전쟁 속에서 파악하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이이제이 전법을 활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수운 최제우를 리조선 정권이 죽였는데 이것을 이이제이 관점에서 보았다. 수운의 동학은 민족, 주체, 척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동경대전에도 ‘개같은 왜적놈’이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동학 수운은 일본의 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적을 또 하나의 적인 리조선 정권을 이용해서 죽였다고 풀었다
마찬가지로 동학농민전쟁 때 관군이 동학군을 죽였는데 일본이 배후에서 이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형사고소사건도 이이제이로 보았다. 이 소장은 식민사관청산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그를 자신을 식민사학자라고 비판했다고 하여 전 고려대 교수 김현구씨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검찰이 기소를 했고 이 사건을 맡은 당시 서울서부지법 나상훈 1심판사가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것도 조선총독부식민사관을 만들어낸 일제가 배후에서 작용한 것으로 파악했다.
대한민국 사법당국을 이용해 이 소장을 처벌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대법원 상고심 재판에서 무죄로 최종 확정되었다.
손 이사장은 이러한 적의 이이제이 전법을 각성해서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자고 호소했다.
▲손윤 이사장은 이날 수업에서 대륙에 잠들어 있는 우리 역사도 언급했다. '이이제이'와 관련하여 백이숙제무덤이 있는 곳을 다녀온 경험담도 들려 주었다. 사진은 백이숙제무덤을 표시한 표지석이다.
이어 그는 동학이 어떻게 3.1혁명을 주도했는지 밝혔다. 그는 3.1혁명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또 3.1만세혁명이 대한강토 뿐만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주 등에서 동시 다발로 일어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철저히 사전준비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데는 의암 손병희의 노력이 숨어있었다고 강조했다. 의암 손병희는 서기1912년께 향후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인재양성을 시작했다.
480명이 넘는 인재들을 모아 교육시켜 대일독립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포덕53년(서기1912) 천도교에서 발행한 <중앙총부휘보> 내용을 소개하며 거기에 이름을 올린 여러 인사를 거명했다. 3.1혁명독립선언서에 이들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밝혔다.
3.1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발행된 휘보에 그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의암이 3.1혁명 일으키기 7년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또 3.1혁명 한 참 전에 보성인쇄소를 차린 것이나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한 것도 3.1혁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보성인쇄소가 결정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1혁명은 동학, 천도교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의암 손병희 활약을 높이샀다. 의암이 이렇게 할수 있었던 것은 동학수행 내공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손 이사장은 이날 동학, 천도교가 갖는 의미를 여러각도에서 분석했다. 동학은 천도天道인데 우리고유 사상인 홍익인간이라고 일갈했다. 천지인, 삼위일체, 천일합덕, 신인일치 등과 맥이 같다고 보았다.
국통맥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유교, 불교, 선교, 기독교를 아우르는 동학을 피력했다. 수운 최제우가 받았다는 을묘천서는 고구려 천서인 천부경과 통하는 것이라고 풀었다.
▲대일항쟁 초기 천도교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천도교 발행지, <중앙총부휘보>. 이 휘보에는 3.1혁명당시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다수의 천도교인이 들어 있다. 천도교가 3.1혁명을 주도했음을 손 이사장은 자신있게 말했다.
의암 손병희가 이런 사상과 수행에 터잡고 있었기 때문에 3.1혁명이라는 거대한 대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의암의 능력은 향자치나 3.1민회에서 발견된다. 의암이 <준비시대>라는 책을 내놨는데 여기서 의암의 경세관을 엿볼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 재발행 과정도 나중에 들려주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고가를 주고 복사하여 냈다고 했다.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는 책을 그가 상세하게 풀었다. 해석하는 과정에서 최대 한자사전인 8만단어 사전을 찾아도 해결이 안되는 한자도 나왔다.
알고 보니 일본식 한자였다. 그러니 중국식 한자사전을 아무리 찾아도 풀리리 없었다. 의암이 한 때 일본으로 숨어들어 일본을 정탐하는 동안에 일본식 한자에 익숙해져 <준비시대>에도 들어간 것이다.
한편 3.1혁명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다. 중국 상해임시정부외에 서울 한성정부, 연해주에서도 생겨난다.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일제에 투쟁하는 대표정부로 자리매김한다. 백범 김구가 끝까지 이끌어 해방을 맞이한다.
손 이사장은 백범도 동학에 뿌리박은 인물로 소개했다. 동학농민전쟁 때 황해도 해주성 전투에서 팔봉접주로 나섰다고 한다. 선봉대에 서서 포수7백명을 지휘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동학이 녹아 있다. 이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상해임시정부를 이엇다고 하니 동학정신에 터잡고 있다.
실제로 상해임시정부를 꾸릴 때 동학 입김이 작용했다고 한다. 독립투사들이 동학, 천도교측 본부인 당시 경성독립단 본부 의사를 반영하여 정부조직을 하겠다고 했다.
이날 백범이 환국하여 천도교당을 방문해서 한 말도 소개했다. “만약 천도교 대교당이 없었다면 3.1운동이 없었을 것이고, 3.1운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없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다.”
알려지지 않는 굵직한 현대사 한 장면이다. 손 이사장은 자신이 어려서 학교다닐 때 현대사를 왜 안 알려 주느냐고 선생에게 따졌다고 한다.
친일부역자들을 불편케하는 진실된 역사가 밝혀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백범이 광복 후 천도교당에서 한 말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의백학교 심화수업과정은 1월 매주 토요일에 계속된다. 두 번째 심화학습은 1월 12일 ‘조선의 노론과 대한민국의 노론’을 주제로 이덕일 교장이, ‘우리민족의 기원과 홍산문화’를 주제로 이찬구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이 맡는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기자의 다른기사
출처: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6_0010_0030_0010
일본의 전쟁배상
1. 일본의 전쟁배상
대일 강화조약은 제14조 a항 2에서 일본의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과거 해외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현지 국가에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배상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해외에 놓고 온 재산을 배상이라고 한다면, 중국도 내몽골과 만주지역 등에 있던 일본의 재산, 광업권, 철도권익 등을 전후에 취한 만큼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강화조약 제4조는 한국과 같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 대해서도 일본 재산을 처분을 통한 청구권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패전 때까지 일본의 기업과 민간인이 해외에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일본 외무성은 1945년 8월 5일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3,800억 엔 가량의 해외자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통계를 인정한다면 1945년의 환율 1달러당 15엔을 적용하여 일본은 패전과 함께 약 250억 달러 어치 해외자산을 전쟁배상으로 지불한 셈이다.
표2. 패전 당시 일본의 해외자산
지역 | 금액 | |
한반도 | 702억 5600만엔 | |
타이완 | 425억 4200만엔 | |
중국대륙 | 東北지방 | 1465억 3200만엔 |
華北지방 | 554억 3700만엔 | |
華中・華南지방 | 367억 1800만엔 | |
기타 지역 | 280억 1400만엔 | |
合計 | 3794억 9900만엔 |
또한 대일 강화조약 제14조는 일본이 전쟁 기간 피해를 끼친 연합국과 양국간 협정을 체결하여 배상하도록 규정했다. 전쟁배상은 이처럼 양국간 협정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이 1950년대에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필리핀·베트남·버마·인도네시아 등 4개국으로 배상금은 총 3,643억 4880만 엔에 달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양국간 협정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라오스·캄보디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미크로네시아·버마(추가) 등 6개국으로 총 605억 8000만 엔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의 경우는 대일 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일본으로부터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은 받지 못했으나, 1965년에 체결된 청구권 협정을 통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자금을 받았다. 회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배상적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한국 국민들에게 그러한 성격임을 홍보했다. 반면에 일본정부는 어디까지나 ‘경제원조’ 내지는 ‘독립축하금’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그렇게 자국민에게 설명했다. 이때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은 동남아시아 국가와 동일하게 생산품과 용역서비스에 의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대일 강화조약 제16조는 중립국과 일본의 동맹국에 있던 일본의 해외 재산 등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 포로에 대해 보상을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은 1955년에 45억 엔을 국제적십자사에 지불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다루었다. 생산품과 용역서비스에 의한 전후처리 방식은 일본이 경제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견인차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일본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아직도 북한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국가간 전후처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정부간 청구권 타결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본제국에 의한 강제동원피해자들이 1990년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있어 전후처리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이제까지 제기된 수많은 소송 가운데 일본 정부나 기업에 대해 단 한 건의 보상 의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전후보상에 관한 청구권은 국가간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해결되었으며, 개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원칙적으로 국가나 기업의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주]
주 971다만 일본 사법부가 1997년 9월 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되어 사망한 한국인 11명 피해자 유족에 대해 일본 사법부가 일본정부와 기업에게 유골 반환과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권고한 것처럼, 일부 재판을 통해 법적인 판단보다 인도적인 차원의 화해를 유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90718195300504
[日경제보복 보름] ②잘못 꿴 '1965년 체제'…수교 후 끊임없는 갈등
송고시간2019-07-19 12:01
'현실 타협' 한일협정, 식민지배 불법성·배상 문제 정리 못 해
日 "강제동원·위안부 피해자 배상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
韓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별도…개인의 배상 청구권 인정해야"
(서울=연합뉴스) 김동현 기자 = 일본 경제보복의 배경으로 지목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과 피해자 배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한국 정부는 당시 한일협정에는 일본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이 포함되지 않았으며, 피해자 개인이 일본 정부·기업에 배상을 요구할 권리까지 제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한국 정부에 5억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제공한 한일협정으로 피해자 배상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런 간극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국 간 깊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김종필 오히라 한일회담 한일협정
1962년 11월 12일 일본 외상실에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후 담소하고 있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 청구권 자금 5억달러 받았지만, 과거청산·피해배상 못 건드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일본 정부와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을 비롯한 5개 조약을 체결해 해방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경제발전에 일본의 도움이 절실했던 박정희 정부와 반공 진영 결속을 위해 한일관계 개선을 원했던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정부는 일본의 거센 반대에 기본조약에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시하지 못했고, 과거에 양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애매모호한 문안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 정부는 이 문안을 1910년 강제병합조약 등 식민지배로 이어진 과거의 한일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이고 무효라는 의미로 해석했지만, 일본 정부는 과거 조약이 원래 합법적이고 유효했으나 1948년 한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다 보니 강제동원 노동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도 제대로 다뤄질 수 없었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이 경제협력 증진을 위해 한국에 5억달러(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를 제공하도록 하면서 양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이익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고 규정했다.
이는 일본이 "피해자 배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할 때 제시하는 근거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부정하면서 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배상까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게 한국 정부 입장이다. 일본 정부도 청구권 협정 체결 이후 5억달러의 성격에 대해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1965년 한일협정은 일본으로부터 경제발전에 필요한 도움을 받아내는 성과가 있었지만, 과거사 청산과 개인 배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견을 남겨 '불완전한 조약'으로 평가받는다. 이 한일협정에 기초한 한일관계를 흔히 '1965년 체제'라 부른다.
2005년 한일회담 문서공개관련 민관공동위회의
[연합뉴스 자료사진]
◇ 불완전한 '1965년 체제', 강제동원 배상 문제로 재조명
1965년 체제의 불완전함은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부각됐다.
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40년간 비공개였던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결정하면서 그동안 가려진 협상 내막이 드러난 것이다.
정부는 문서 공개가 야기할 피해 보상 문제 등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정부 관계자와 민간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정부위원으로 참여했다.
민관 공동위는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軍)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해석했다.
협정 체결 당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탓에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에 대한 청구권 문제만 해결했을 뿐 위안부,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등에 대한 배상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 정부가 받은 무상 3억달러에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일본에 추가 보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공동위는 정부가 무상자금 상당액을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에 사용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으며, 정부는 지원법을 제정해 2008년부터 강제동원 희생자 1인당 위로금 2천만원을 지급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가 이때 해결됐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민관 공동위는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예외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책임을 인정한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 판결도 민관 공동위 의견과 궤를 같이한다.
대법원은 1965년 청구권협정이 양국 간 합법적 관계에서 발생한 청구권을 제한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처럼 불법적 관계에서 발생한 청구권은 제한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식민지배의 성격에 대해서도 명확히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발언하는 강일출 할머니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지난 2016년 1월 1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1213차 정기수요집회'에 앞서 열린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위안부 합의 갈등도 '1965년 체제' 극복이 과제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해왔지만,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민간 차원의 위로금 지급만 제시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계속 논란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일본은 2015년 박근혜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타결했다.
양국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한국 정부가 설립하고, 재단에 일본 측에서 10억엔을 출연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이 이 조치를 착실히 이행한다는 전제로 이 합의가 사실상 위안부 문제의 '최종 해결'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한일정부의 정치적 야합"이라고 반발했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가 피해자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며, 위안부 피해자 지원 재단도 최근 해산했다.
이런 한국 정부의 '역사 바로잡기' 움직임에 일본 정부는 "한국이 국제법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갈등 역시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이를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이 식민지배 책임과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 원만한 접점을 찾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이런 갈등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 한일 양국이 이번 경제보복을 계기로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 1965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bluekey@yna.co.kr
출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4686.html
한국이 이만큼 사는 건 일본 돈 덕분이라구?
등록 :2019-08-06 11:16수정 :2019-08-08 03:21
[한겨레21]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철 지난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대는
이들을 보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다시 생각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8년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를 내건 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이 이만큼 살게 된 건 19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이 준 돈 덕이 크지 않느냐고, 아베 신조 정권 대변지 노릇을 한다는 일본 극우 신문의 서울 주재 논설위원은 말했다. 이럴 때는 으레 36년 일제강점기에 철도, 도로 놓고 공장, 학교 지어준 덕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는 얘기까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그건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고 중국에 아편전쟁을 일으켜 유린한 것,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한 것,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것, 독일이 폴란드를 짓밟은 것이 모두 인도와 중국, 알제리, 에티오피아, 폴란드의 발전을 위해서 그랬다거나 그 나라들의 지금 발전이 배상금(또는 보상금 등) 덕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랑하니까 때려 죽였다거나, 도와주려고 빼앗았다는 말만큼이나. 그럼에도 전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철 지난 노래를 줄기차게 불러대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독일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이제는 어쩌면 그 노래의 곡조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중략
조약 체결에 초청받지 못한 이유한국의 국제법적 지위를 결정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그해 9월 체결되고 1952년 4월 발효) 체결 때 미국이 작성한 조약 초안에는 한국이 “대일 평화(강화)회담 참가국으로 결정”돼 있었다. 1949년 12월 초안 전문에서 한국은 ‘연합국 및 협력국’ 명단에 있었다. 그해 12월29일 미국 국무부가 초안과 함께 작성한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에 대한 논평’도 한국이 수십 년간의 항일 저항, 전투 기록이 있다며 강화조약 서명국(당사국)이 돼야 하는 이유를 적었다.(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2010)그 강화조약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존 포스터 덜레스(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가 조약 초안을 뒤엎고 한국의 교전국 지위가 박탈됐다고 최종 통보한 것은 1951년 7월9일이었다. 당시 덜레스의 문서철 지도에 한국령으로 명기됐던 독도도 나중에 소속 자체가 어디인지 명기되지 않은 모호한 상태로 얼버무려져, 지금의 ‘독도 문제’ 씨앗이 뿌려졌다. 덜레스는 왜 그랬을까?정병준의 책은 그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정을 미국 국립공문서관 1차 사료를 토대로 자세히 추적하는데, 그 요체는 당시 일본을 냉전의 교두보로 육성하겠다던 미국의 대일정책 변화와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집요한 한국 배제 요구였다. 그때 요시다가 덜레스에게 보낸 비망록이 남아 있다.“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 거주자(종전 무렵에는 거의 150만 명)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는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그 결과 잠깐 동안 일제 지배를 받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과는 무관한 폴란드 등이 서명국에 포함됐다. 필리핀은 그때 무상 5억5천만달러의 배상금 등 모두 8억달러를 받았고, 인도네시아도 비슷한 액수를 받았다. 40년을 싸우고도 조약 체결에 초청도 받지 못한 한국이 1965년에야 굴욕적인 한일협정으로 받은 돈(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은 무상 3억달러 등 총 5억달러였다.한국은 승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도 서명국이 되지도 못한 것이 아니라, 서명국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받지 못했기 때문에 승전국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 건 미국이었다. 일본을 영구 종속화한 미-일 안전보장조약(안보동맹)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문희상 의장이 일본 총리나 일왕의 ‘단 한마디의 진심 어린 사죄’를 얘기했을 때 그는 아마 브란트의 그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을 “극히 무례”한 일로 받아들이는 일본 우파의 심성과 역사관, 그리고 독일의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이런 얘기를 하면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자행한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냐며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희생자 수로 죄업의 경중을 가릴 순 없지만, 희생자가 5천만~8천만 명에 이른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일본군은 학살한 희생자 수나 그 수법에서 결코 독일에 뒤지지 않았다. 그 전쟁에서 일본군에 희생당한 아시아 민간인만 2천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일본은 40년 세월을 식민지배하면서 차별과 수탈로 조선을 파괴했다.사토 에이사쿠도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한 비핵 3원칙으로 197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미국과 밀약해 그 3원칙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나중에 발견된 극비 문서로 확인됐다. 사토 집권 때 일본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시-사토로 이어진 일본 보수 정치는, 브란트가 철저히 나치 등 과거사 청산, 동서 화해 쪽으로 독일을 이끌고 간 것과 달리 반공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냉전적 대결 정책에 편승해 경제적 실익을 챙기면서 과거사를 덮고 구체제와 그 세력들을 온존시켰다. 2차 대전 패전 3국 중 그때의 국기와 국가를 그대로 쓰는 나라는 일본뿐이다.정한론자 이래 변한 게 없는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총리가 사토였다. 그 상대는 “쇼와의 요괴”란 별명이 있는 그의 형 기시가 “내가 설계했다”고 큰소리친 만주국에서, 도조 히데키가 지휘했던 관동군 산하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였다. 이 둘을 엮은 것이 미국이고, 그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산물이다. 아베 정권은 지금 흔들리는 그 체제가 일본에 제공한 기득권을 고수하려 하면서 거기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문재인 정권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배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카드가 한국 내 반정부 여론을 부추겨 문재인 정권을 좌절 또는 굴복시킬 수 있다고 착각한 듯하다. 거기에는 ‘반문’(반문재인) 기치 아래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한국 보수 주류 매체들 기사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그들의 우익 편향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것만 보면 한국은 곧 망할 나라로 보였을 테니까.‘아베의 전쟁’은 아픈 과거사를 그대로 드러내고 대규모 배상·보상 작업을 계속하며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오히려 신뢰를 얻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개헌을 통한 ‘보통국가’화 전략과 연계된 ‘아베의 전쟁’은 유럽연합으로 귀결된 브란트의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를 분열과 대결로 몰아가는 새로운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 ‘정한론자’ 요시다 쇼인 이래 변한 게 없어 보이는 그들의 전쟁은, 그러나 실패할 것이다.한승동 언론인·전 <한겨레> 기자
출처: http://www.lifein.news/news/articleView.html?idxno=3072
[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⑬] 북한의 대외경제 :일본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legend_bd&logNo=221615562386
출처: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571404
북한이 요구하는 전쟁배상금 액수는 최소 200억 달러를 상회한다. 1천억 달러를 제시할 것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02&aid=0000007503
"북한, 일본에 4백억달러 배상 요구"
기사입력 2003.11.19. 오후 5:42 최종수정 2003.11.19. 오후 5:42
출처: http://m.jajusibo.com/a.html?uid=23725
북, 일본에 본격적인 배상금 거론 시작은 심각한 위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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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9-23
23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이 태평양전쟁 전후로 북에서 숨진 일본인 유골을 발굴하여 일본으로 보내주는 데 유골 1위 당 120만 엔 총 100억 엔(약 994억 원)의 경비를 일본 측에 요구했다고 23일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고 한다.
일본은 자국민 납치자 반환이 우선이라며 이 요구를 거부했다.
북은 북일합의에 따라 작년 7월 납치자에 대해 재조사를 진행했지만 일본이 공식적으로 납북자로 규정한 12명(이미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 제외·이하 공인 납북자) 중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아예 입국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생존 납북자는 없다'는 종전 입장을 그대로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북은 납치 문제에 앞서 유골 반환 등 다른 현안부터 풀자는 입장을 내세우는 것으로 아사히신문은 보도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본은 북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북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국교수립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북은 일본에 대해 말로만의 사과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충분한 금전적 물질적 피해배상이 있어야만 일제침략에 대해 용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북은 강점기 일제가 끼친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 보상은 물론 이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않음으로서 가한 정신적 피해배상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부분은 물가나 임금상승율을 반영하면 되는데 이 정신적 위자료는 해가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성격의 항목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쟁기간 북과 한반도에 끼친 피해에 대한 북의 배상금 요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최근 북은 미국에 대해 전에 요구했던 107조 달러에 7조달러를 더해 114조 달러(14경 원)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언론보도 내놓았다.
이번 일본인들의 유골을 발굴해서 보내주는데 1위 당 한화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요구하는 북의 입장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희생되거나 실종된 800만 명의 우리 국민들에 대한 배상금액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될 것이 자명하다.
희생자들이 평균 20년 직장생활을 해서 월급을 매달 300만원씩 받는다고 치고 계산하면 약 2,400조 원이란 어마어마한 산정액이 나온다. 300만원에서 생활비 100만원을 뺀 200만원에 20년 근무 240개월에 해당하는 라이프니쯔계수(151.5253)를 곱하면 약 1인당 3억 원이 나온다. 여기에 800만 명을 곱하면 2,400조가 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북은 수많은 우리 민족을 징용으로 끌고 가서 가혹한 노동을 시키고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죄악, 정신대 강제동원 죄악, 문화재 약탈 파괴, 자원약탈 죄악, 정신적 피해를 지금도 가하고 있는 죄악에 대한 배상금까지 요구하고 있어 이를 모두 합하면 상상초월 천문학적인 보상액이 나오게 된다.
북은 사람을 패고 죽이고 성노예로 부리고 노예노동을 시키고서 말로만 잘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용서해줄 수 있는가. 반성과 사죄는 물질적 배상이 있어야만 진심이 된다며 이 모든 배상금을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추상같은 입장을 피력해왔다.
그러면서 북은 ‘우리는 피해자이고 일제는 가해자다. 배상을 요구할 권리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있다.’며 ‘국제적으로 그런 피해에 대한 배상은 꼭 대화를 통해서만 받으란 법은 없다’며 대화로 안 되면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받아낼 것이라는 입장을 계속 피력해왔다.
다른 수단이란 유엔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하거나 전쟁하는 것인데 유엔은 일본과 미국이 주도하는 기구라 가능성이 낮고 결국 전쟁응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일본은 자위대법을 국회에서 사실상 침략전쟁 가능법으로 개악하여 이제 다시 일제시대처럼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젠 북에서 일제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전쟁 최후통첩을 하더라도 평화헌법국에 대한 전쟁 최후통첩을 한다는 국제적 비난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된 국면에서 북이 과거 일제식민지배에 대해 피해배상을 강력히 요구한다면 북일관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한 전쟁위기로 치달아갈 가능성이 높다.
최근 북은 미국과도 일전불사의 의지를 계속 피력하고 있다. 남측에 대해서도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를 이유로 예상을 뛰어넘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한반도는 전쟁일보직전 상황까지 갔었다. 나아가 이제 북은 일본과도 일전불사의 험악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북의 한, 미, 일에 대한 대응이 심상치 않다. 과거와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 초강경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출처: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8461
북, 미국이 끼친 피해액 약 65조달러, 약 7경 5천조원
이창기 기자 | 기사입력 2016/07/04 [20:01]
첫댓글 파랑새님은
빨강새를 엄청 싫어하시는 분이군요.
빨강새도 있다는것을 인정하시면 세상사는게 좀더 풍부해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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