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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불평등. 이 단어는 어릴때부터 참으로 많이 들어보셨을겁니다. 그리고 대부분 부정적인쪽으로 조명되고는 하며, 현재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분들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대중부터 정치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해결책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불평등이란 미래에 해소가 가능한것일까요?
전 그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현대 사회 아니 더 나아가 문명 사회 그 자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것에 대해 현재 대표적으로는 부동산부터 각종 자산들로 인해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으시는분들은 대관절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인류는 오히려 소위 더 진보하고 발전할수록 불평등해졌고 격차는 벌어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발제글은 그에 대해서 고찰이 될 지언데 이에 대한 근원적 배경부터 국가란 가장 광범위한 집단부터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벌어지는 격차에 대해서 설명하고 원인에 대해 짚어내는것을 목적으로 해당글을 읽는분들께 최대한의 도움과 인사이트를 공유할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적어봅니다. 그렇다면 더 파고 들어가보죠.
II. 문명의 태동과 불평등
문명이란 곧 불평등이다. 이 명제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무슨 정신나간 사람의 헛소리인가? 싶으신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교과서부터 많은 역사책에서 말하는 인류 정확히는 인류가 사용하는 기술의 발전과 개선되는 생활수준과 양립하는 명제입니다. 왜냐? 그만큼 기술이 발전할수록 재화나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것의 가치를 저장할수 있는 자산 축적수단도 그만큼 증가했기 때문이죠.
아직도 이해하기 힘드신가요? 그렇다면 한번 여러분들께 제안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께서 2~3만년전의 수렵-채집의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생활한다고 가정할시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돌도끼? 창? 허름한 가죽옷 그리고 동굴 내지 움막등인가요? 그렇습니다. 옛날 수렵시대의 격차란 얼마나 사냥을 할 육체적 힘과 그에 맞는 도구와 전략을 세울 지능이 있느냐에 따라 생기며 이로 얻는 소위 재산이란 짐승의 고기와 가죽, 산딸기, 포도와 같은것들입니다.
즉 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이라 할지언들 - 물론 그 당시엔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만 - 고작 고기를 5점 먹느냐 1점 먹느냐의 차이였던것이죠. 게다가 실제 먹을수 있는거 위장의 용적량 이상 과도하게 잡을시에는 건조를 한다고해도 그 당시 기술과 저장수단으로는 오히려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많았죠. 1~2주 이상 지나면 신선도가 떨어지기 일수였으니까요.
<샨리우르파 유적지>
그러나 기원전 8,400년전 무렵 현재 남동부 터키 샨리우르파에 위치한 네발리 코리란 유적지 - 누군가는 괴베클리 테페를 얘기하실수도 있으나 집단문화는 발견되었으나 농경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에서 이런 인류의 고달프면서도 매우 평등한(?) 삶에 뭔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농경이 시작된이죠. 이는 현대 인류의 모든것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전에 쌓아놓고 불릴수 없었던 자산이란 개념이 증식이 가능해졌다는것이죠. 소위 부(富)의 축적이 시작되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 종교 지도자, 거상, 지주등의 소수에게 쏠리게 되죠. 중국인들이 문화대혁명 시기 오순도순 매우 평등하고 고른 삶을 살았다는것은 그들의 과거의 미화만은 아니란것이죠.
왜냐? 경제 자체가 파괴되고 그야말로 파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저장하고 쌓아놓을 부(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공산당 최고위층 조차도 미국 중산층 수준의 음식과 생활수준을 누릴 정도로 사회 전반의 경제가 몰락했기 때문에 절대다수는 말그대로 서로간에 굶주린 배를 안아가면서 '평등한 극단적 빈곤'을 만끽했기 때문에 이것은 일정 부분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지표중 하나인 지니계수도 그것을 반영하듯이 마오가 죽기전인 1년전인 1978년경 지니 계수는 도시는 0.15, 시골은 0.20이였습니다.
그런데 소위 경제발전을 하고 먹고 사는것이 개선되면서 지니계수가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1978년에 0.20이였던 지니계수는 22년 이후 2000년도에 들어서 0.40으로 증가하며, 경제성장이 최고조에 이르던 2007~2008년도까지는 0.49까지 올라가다가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조금 낮아졌는데 이것도 0.465 수준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죠.
게다가 지니 계수는 소득에 따른 불균등이지 자산에 따른것이 아니고, 자산 격차의 경우는 오히려 더 벌어지기도 했고요. 심지어 둔화되면서도 말이죠. 하여간 다시 본론인 수천년전 원시 농업 시절로 돌아가보죠. 이 시절의 정치체란 아무리 커봐야 수만명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던 그야말로 초소형 부족 집합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간과할수 없는것이 이때부터 현대 세계에서 보이는 사회 양상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는것이죠. 부족장과 그의 가족들과 친우들은 많은 농작지를 차지하거나 권력을 이용해 농작물의 소출을 거둬들이며 일반 소작농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자산을 쌓아가며 거부가 된 반면 일반 농민들은 평생을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며 이 때는 정말로 한번 흉작이 나면 진짜로 '굶어 죽는' 기근 상태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근대 전 까지 이어져온 현상이기는 하지만요.
하여간 이런 부족장들과 실권자라 할만한 지배계층은 당시 농경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근대 이전 부를 창출해낼 유일하고 근본적인 수단은 바로 토지에서의 수확이였는데 이 토지의 크기가 모자라다는점이였고, 이전 일개 가문간의 불화와 짐승의 고기와 모피를 탐내면서 기껏해야 수십명끼리 싸우던 전투라고 불러주기 힘들만한 소규모 싸움이 점점 조직화 그리고 집단화 되면서 '전쟁' 이라 불릴만한게 탄생합니다.
이 시기 이미 기초적인 제련된 창칼, 전차, 바퀴 등이 등장하고 이런 부족들이 한 세력에 우위를 차지하거나 혹은 학살을 통해 다른 부족들의 영토를 점거하면서 원초적인 문명이 발생하고 소위 성읍 국가 내지 도시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현재 우리가 배우는 4대문명 같은것들의 기원이죠. 이것은 동아시아보다 최소 1500~2000년 단위로 빠른 문명을 시작했던 중동-이집트 지역뿐 아니라 문명이 시작했던 모든곳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죠.
이집트는 그렇게 나일강 일대를 통합했고, 히타이트 또한 아나톨리아 (현 터키 지방) 지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도 위엄으로 회유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많은 것과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가려던 시도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것은 현재까지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 국제기구를 제외하고서 집단중 가장 최상위에 있는 '국가' 들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고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뽑자면 히타이트와 이집트간의 전쟁부터 아시리아의 정복전쟁,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동아시아에는 대표적으로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또 유럽에서는 300같은 영화로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까지 다양하게 생겨나죠. 동시에 이 과정에서 바로 제국과 '지역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이 제국과 지역화는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III. 제국의 출범 그리고 '지역화'
여기서 지역이란 말을 들으시고 한국 같이 국가내의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는분이 있을지 몰라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범지구적 관점에서 보았을때의 지역을 얘기합니다. 예를들어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 지역' 같은것이죠. 물론 다수의 한국인들에겐 한반도도 크나큰 땅이고 동아시아 지역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세계에서 보았을때는 그저 일부에 지나지 않기에 사학자들은 지역화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제국과 지역화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슨 영향을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끼쳤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소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윗문단에서 처음에 군락이 다른 군락들을 끌어모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고 또 그 강성한 부족하나가 다른 부족들을 제압 내지 흡수하면서 국가란걸 이루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던걸 기억하실거라 생각하는데요.
지금까지 눈치가 빠르신분이라면 어느정도 캐치채셨겠지만 개인 즉 권력자도 더 많은 부와 영토를 획득하지만 동시에 한 중심집단이 되는 그것도 수백개의 군락에서 수십개의 부족으로 그리고 수개의 국가로 점점 상향식으로 하나의 점으로 끌어올려진다는 패턴을 파악하셨을거라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의문을 가지실분도 있을거라 봅니다. 그렇다면 국가들이 정복당하고 더 윗단계로 올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수많은 국가들이 정복 내지 멸절 당하면서 또 하나로 통합되어 생겨나는게 바로 '제국'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국은 소위 동아시아에서 '황제국' 과 '제후국' 간의 관계라기 보다 다민족을 전부 아우르는 일반 국가들의 상위개념으로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아직까지 이게 무슨말인가 싶으신분들도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한국 대중들 특히 성인 남성들 대다수에게 친숙한 삼국지를 예로 들어보죠. 제갈량의 칠종칠금이나 혹은 조금 덜 익숙하시겠지만 위나라의 오환 정벌 같은게 소위 제국이 하는 행위와 거의 일치합니다. 다른건 거대한 도시를 이루는 문명국보다는 부족국가에 가깝다는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제국이 형성되는 과정이랑은 동일한데요. 제갈량이 남만을 쳐들어가면서 연의에선 서로 좋게 좋게 끝났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명 아니 인간 그 자체가 동물의 갈래인 이상 본성적으로 특유의 야성과 잔인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쟁중에서 대규모 살상같은건 당연히 수반되었다고 보는게 맞을텐데요.
이러면서 한 쪽의 세력 즉 여기서는 남만이 제갈량의 촉한에 사실상 굴복하고 편입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번 일어나고 여러 민족을 포함하는 거대 국가가 되면 그게 바로 제국이 되는것이죠. 그리고 이게 끝은 비참하게 맞이했지만 최초의 제국이라 할만한 아시리아 제국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터키등 당시 문명국들을 발전한 전차술과 잘 훈련된 병력들로 정복하면서 생겨나죠.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이라 할만한 중국이 아직도 춘추시대에 머물러있을때 말입니다.
그러면 지역화는 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으실겁니다. 금방 춘추시대를 제가 금방 문장의 말미에 언급했는데, 현재 중국의 영토는 위구르 티베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의 고유영토라 인식되는 중원-강남 지역조차 명백한 한족의 영토는 아니였습니다. 이게 무슨 한국의 국수주의자들이 말하는 환웅 및 동이족 얘기가 아니라 처음에 한족의 뿌리가 될 수 있는 상나라 시절의 한족 정확히는 화하족의 문화가 공유된 지역은 지금의 하남성과 산시성 일부 그 이상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그 이외에는 그들이 북적, 남만, 서융, 동이라 불리는 오랑캐들의 미개 지역이었고요.
싼싱두이 출토 마스크
그런데 지금 이미 고고학적으로도 계속 발견되는 즉 물증이 나오고 있는거기도 하지만 성도 즉 삼국지 촉나라 지역에는 원래 중원지역과는 다른 별개의 문명이 존재했습니다. 쓰촨 문명의 바오둔 문화 그리고 싼싱두이 (삼성퇴) 유적 까지 거의 아마존에서나 보일법한 문양과 양식을 가진 물품들이 대거 출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이미 사서에도 나와있는바이지만 초나라나 월나라 오나라 이런 나라들은 장강문명이 있던 지역에 위치했던것부터해서 중원과 아예 습속이 다른 묘족의 국가였고, 이것은 초나라가 다른 화북지역 국가들이 공, 후, 백 등 주왕 아래 신하라는것을 형식적으로 나마 자칭했던 반면 자신은 '왕' 이라고 주나라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는것에도 드러나며 추후 인정하긴 하지만 여전히 문화적으로 많이 이질적이였고요.
심지어 상나라의 갑골문에서도 드러나듯 현재 산동 지역도 정벌하던 이(夷) 즉 오랑캐의 지역이었습니다. 북경지역도 한족 지역화 된게 서주에서 식민 (여기서 식민은 근대 식민제국 같은게 아니라 그리스-로마 시기 처럼 사람들이 심어진다는 의미) 거주촌이 생기고 거기서 토착민들을 죽이거나 동화시키면서 된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상과 주가 사실상 성읍 국가 즉 수도와 그 근처이상을 지배하지 못하는 일종의 성읍국가였던 탓에 실제 최초의 제국이라 불릴만한 진나라조차 그 당시 기록에도 반이 사실상 오랑캐라고 불렸듯 진나라를 개국하는 시조가 변방의 땅을 봉읍받고 서쪽으로 좋은 의미로 개척 그리고 실제는 학살과 편입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서 '중화 제국' 의 '지역' 이 될 수 있었던거죠.
또 중원내에서조차 이 지역화는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정(鄭)씨가 많을텐데 이 정씨는 원래 주나라의 성씨인 희성이였습니다. 주나라 말기 주 선왕이 자기 동생을 분봉하면서 갈라지고 그래서 성씨를 다르게 고친 경우로 이 국가는 한때 나름 존재감이 상당한 국가였는데 자체 왕실 권력 다툼등 여러 실책을 반복하고 제, 진, 초 등의 주변강국에게 침략당하고 통일하는 진나라가 아닌 중원의 춘추시대 패자국이었던 진(晉)나라에서 찢어져 나온 한(韓) 나라에게 정복당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국들은 정나라말고도 중산국부터 다양하게 많았는데요. 근데 전부 병합당했습니다.
제가 뜬금없이 왜 이런말씀을 드리냐면 심지어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던 중원 지역내에서 조차 점점 작은 국가들이 큰 나라에게 먹히고 여러개의 고만고만한 세력이 소수의 더 큰 세력으로 힘과 부가 집중되는 하나의 흐름을 설명드릴 예시이기에 그런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나라들 사이에서도 중국사를 조금만 접하신분들이라도 다 아는 전국시대의 무한 경쟁에서 사실상 점점 가장 강한 세력이 '승자 독식' 을 하게 되는것을 아실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시황으로 유명한 그 진(秦)나라죠.
진나라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 중국에선 변방지역이였고 사실 반 오랑캐 취급받던 국가였습니다. 거의 잡종 취급이였는데, 국가간도 그렇고 개인간에도 그렇지만 아무리 속으로 깔보던 결국 힘있는 놈에게 못당하는거라 진나라가 커져갈수록 위협감도 느끼는 동시에 그에 대해 마지못해 인정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나라는 사마착이 파촉을 정벌하면서 영토를 대거 넓히고 제도와 군비를 바로 잡아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외교술과 암살 및 공작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요국 육국 하나 하나를 제압해나가며 중국 문명을 전부 통일하고 진정한 의미로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 이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연나라를 정벌하면서 요동까지 닿게 되고 이 때 이후로 소위 한민족과 중국 통일왕조란 거대한 제국의 길고 긴 관계가 시작되었죠. 진나라 자체야 비로소 단명했지만 이 짧은 기간동안 도량형부터 문자까지 통일시키는등 하나의 제국으로 지역내 풍속도 문화도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는 프로세스 자체는 후대에 재통일한 한나라에게도 이어져 한나라에서 현재 중국의 주류 민족이라는 '한족'이 생겨나죠.
동시에 한나라가 처음에는 통일왕조의 체면이 안서게 흉노에게 굴욕적인 백등산전투에서의 패배를 겪고 거의 100년간 버로우를 탔습니다만 그 동안 힘을 축적하고 모아 한국 최초의 국가라 할만한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현 위구르 지역에 위치한 도시 국가들을 한의 영향력안에 두어 흉노의 자금줄을 끊어버리고 막북정벌로 극심한 타격을 주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대 동아시아의 문명 혹은 한자문화권이라 할 만한 '지역화' 의 기반을 다지고 당나라때 북방민족의 문화까지 한군데로 뭉쳐 다시 신라, 일본, 남조 등의 국가로 전파하면서 중국의 문화와 문물에 기반한 동아시아 지역을 만들게 됩니다.
아무래도 현재 한국인들의 대다수에 가장 거리감이 덜 느껴지고 가까운 역사가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사다보니 이쪽을 중점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아까전에 중동의 아시리아제국과 마찬가지로 타지역에서도 이런 지역화 현상이 비슷하게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경우 왠만한 역사 모르는 일반인들도 다 아는 로마제국이 제국과 지역화의 전형적인 예시라 할 수 있고, 켈트, 게르만, 그리스, 이집트, 라틴 현 유럽의 거의 모든 민족을 하나의 제국아래 동화시키고 지역화를 시켰죠.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로마보다 더 빨랐다고 볼 수도 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을 하던 시절 있던 난다왕조는 간다라 마흐차 말라 등 십육대국이 난립한 북인도를 정리해 통합한 준 제국이었고 이걸 또 들고 엎어 전복해버린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가 세운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아 대륙 전역은 물론 이란 일부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는 당대 중국마저 뛰어넘는 최강의 제국이라 할만했습니다.
허나, 수차례 말씀드렸듯이 지배자들과 집단은 갈 수록 더 커지고 상위로 갈려는 일종의 경향성이 있는데, 결국 제국들간도 연결과 교류 그리고 넘어서 이런 제국들까지 포괄하는 지역을 넘나드는 환대륙제국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문장만으로 역사를 어느정도 아시는분이라면 파악하시겠지만 육상, 초원, 해상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유라시아 교역과 그리고 몽골제국의 등장이죠.
IV. 지역 교류와 제국들 위의 제국
교양 역사 개설서에서도 이미 많이 논하고 있듯 로마나 한나라의 비단길이라던가 그런거는 잘 아실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역사책들은 거기서 설명을 끝내는 경우가 잦은데 오히려 더 많은 물류는 초원길과 바닷길 특히 광동 -> 베트남 -> 스리랑카 & 남인도 등의 소위 남중국해-인도양 루트로 갔습니다. 강남개발이 본격화 되는 송나라때부터 특히 그랬고요.
이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실 분이 있겠지만 국제무역과 교류는 소위 거대한 대륙 사이에 걸쳐져있는 제국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추후 설명드릴 세계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류란 별게 아닙니다. 심지어 앞서말씀드린 부족들간의 조우나 국가간의 중소규모 전쟁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교류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관계를 맺고 접점이 생겨날때마다 연결망이 생겨나고 거기서도 갑과 을 즉 누가 우위에서 이끌어가느냐 이끌려 가느냐가 결정나기 시작했죠. 비록 18세기 전근대까지만해도 이것이 크게 강하지 않아 멀리 있는 어디 국가 심지어 대제국이 망하더라도 타지역에 크게 영향받는 경우는 잘 없었긴 하지만 이런 소규모 교역이 발단이 되었다는점을 놓쳐서는 안되겠죠.
여하튼 고대에는 로마-페르시아-한, 당나라에는 더 활발해져 동로마-이슬람-당 혹은 당-위구르 or 토번 - 동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고 이때부터 남중국해와 인도양으로 가는 해양로 또한 열리기 시작합니다. 광동 지역에 이슬람 상인들 수백명이 있다고 할 정도로 점차 규모는 커지고 세계체제를 향해서 내달리고 있었으며 이것이 송나라때 절정을 맞이합니다.
송나라 시절에는 국가에서 수군 상당수가 대외 무역을 위한 상선들을 호송하는 호송전단이 따로 꾸려질정도로 -아시다시피 근대 까지만해도 바다는 위험한곳으로 해적들이 많았습니다 - 나름 전근대 기준으로는 대규모 해양 운송이 되었으며 이는 육상운송의 그것을 추월했습니다. 이렇게 점점 지역경제와 문화의 통합에서 늘어나는 교류로 대륙 경제까진 아니더라도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고 그 위의 발전상이 어떨지 추측해볼 정도까진 진행이 되었는데요.
이러다가 터진것이 13세기 전 시대를 뒤흔든 몽골입니다. 몽골은 크게 3가지 의미로 세계체제가 형성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열해보자면 이렇습니다 :
1. 유라시아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해서 동-서를 잇는 지역의 교류에 대한 리스크와 그에 따른 안전 비용 절감으로 국제 교역 촉진
2. 그 자체가 이동하고 각국 및 부족들과 교류하는 유목민의 상업적 특성으로 이전까지 상당수는 공무역 내지 국가에서 규정해놓은 룰에 따른 극도의 보호무역에 대해 친무역 & 친상업적 정책으로 선회
3.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그 후 몽골-중국일대에서 발원한 흑사병이 신속히 오아시스 도시 국가등 일종의 중간 교류지에 대한 돌이킬수 없는 파괴 및 타격을 주게되었으며 몽골의 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중국을 위시로 하여 아시아 지역 상당수는 무역과 대외 교류보다 안 그래도 자급자족인 전근대 사회를 더욱 폐쇄지향적으로 전환시킴.
즉 몽골제국은 호라즘과 서요, 금나라, 송나라등의 제국과 동유럽의 대국인 키예프 공국을 집어삼켜 하나의 환(Trans) 대륙 제국을 형성해냈으나 이후 후속조치로 이것이 유지되고 그리고 단순 정복지사이에서의 교류가 아닌 현재와 같은 전세계를 잇는 하나의 체계적인 연결망을 통한 체제를 구축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실제로 정복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게 드러나는게 몽골제국이 정복을 하지 못한 서유럽이나 혹은 지중해 근동지역 및 인도등의 교역이란게 이전과 크게 다를바 없거나 혹은 오히려 감소하는 모양새까지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몽골은 로마와 한나라가 교역하던 기존 통로를 이어붙이고 확대하는데는 성공했고 그로서도 나름 의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제국을 집어삼킨 거대 '제국' 이란걸 초월한 하나의 세계 체제로 연결되진 못했다는것이 되겠는데요. 아이러니하게 인구 1억 당시 세계 인구 23~24%에 달하고 지구 면적의 18%에 달하는 지상 최대의 대칸국이 달성하지 못한것을 인구 150만의 조그만 국가가 물꼬를 트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인것이죠.
V. 세계체제의 청사진: 포르투갈 - Plus Ultra
Plus Ultra는 라틴어로 보다 더 멀리 나아가다 혹은 더 먼세계로란 뜻으로 몽골의 파괴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서 동시에 서유럽에서 가장 궁벽한 지역인 포르투갈 지역에 이만큼 적합한 구절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은 지중해 무역에서도 사실상 베네치아, 제노아, 아라곤 (축구를 좋아하시는분이라면 아실 바르샤지역의 연고지인 카탈루냐의 전신) 왕국에 밀렸는데 농사를 짓기에도 썩 좋은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먹고살기 팍팍한 동네였다는것이죠. 실제로 농업생산력이 곧 인구규모와 거의 동치되던 전근대에서 영토가 작더라도 인구가 100~150만이라는건 땅이 비옥하지도 않았다는것이였고 그렇기에 포르투갈은 사실상 상업과 항해에 목숨을 걸은 국가였습니다.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중 하나로 꼽히는 엔리케 왕자에 따로 붙는 별칭이 '항해왕자' 일 정도로 말이죠.
당시 포르투갈은 15세기초 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경쟁하면서 레반트 지역 지금으로 치면 시리아-레바논등이 위치한 근동 혹은 콘스탄티노플을 찍고 흑해 쪽으로 가는 그런 무역을 통해 없는 재정을 확충해가며 성장해가던 나라였는데요. 그때 제일 무게 대비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들중 하나는 바로 후추였습니다.
13-14세기 향료 가격
가끔씩 역사 논문에서도 오류로 기록되는 바가 있는데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속설이 돌 정도로 고가의 상품이였다는것은 분명하죠. 그래서 포르투갈은 그걸 구하기 위한 소위 무역 루트를 뚫을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좀 기시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왜냐면 '아니 원래 가던길로 가면 되는거 아냐?' 라고 의문점을 가질수 있을테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게 힘들어졌습니다. 왜냐면 금방 몽골제국이 소위 뚫어놓았다던 그 무역로와 연결망들이 몽골제국 이전보다 더 파괴되거나 못쓰게 되었고, 터키와 근동일대에 새로운 세력이 생겨납니다. 아나톨리아 지방에 터키란 이름을 자리잡게한 오스만 제국 당시 기준으로는 오스만 베이국이 지배세력으로 떠오르고 관세 및 통행료부터 안 그래도 힘들어진 무역을 더더욱 까다롭게 만듭니다.
윗 문단에서도 몇번 지적한 사항이지만 전근대 무역이란 해적부터 육상에는 도적까지 현대인 기준으론 거의 북두의 권에 가까운 치안 상황에다 정확한 길을 찾거나 기후 예측하는것도 불가능한 상황인만큼 장거리 무역일수록 그 난이도가 무지막지하게 올라갔기에 이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목격하는 사건들도 그렇고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들은 기본적으로 복합적인 원인이 결합되어서 나타나는만큼 오스만뿐 아니라 당시 항해술의 발전이라던가 갤리에서 캐럭이나 갈레온의 발전까지 다 다루어야 되지만 이 글에선 큰 거시적 맥락을 잡는쪽을 지향하는만큼 설명이 부족하다 생각하신다면 이해를 부탁드리는바고요.
여하간 그렇게 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와 향신료 제도라 불리는 말레이-인도네시아 제도에 발견 및 진출하는데도 성공하고 포르투갈의 북동부 지역에도 발을 디디고 무역 기지를 짓는 업적을 이루어냅니다. 이것은 나중에도 몇번 언급될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매우 중요한것입니다.
1400년도 Ranulf Higden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
언뜻 보기엔 단순 새로운 항해로와 지역 발견 정도로 여기실지 모르고 태어날때부터 전 세계 지리가 인공위성으로 생생하게 제공되는 현대인들에게는 별 것 아닌것 같이 느껴질수도 있으나, 세계체제란 집을 짓는데 일종의 구조물 스케치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이 해내지 않았다면 이 항해로를 통해 네덜란드, 영국등의 후발주자가 온전히 새로 탐사하고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고 혹은 아예 시작하지도 않고 더 긴 수백년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시 플랑드르 (현 네덜란드-벨기에)-영국 - 한자 (현 북독일) 지역으로 이어지는 양모 무역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죠.
어쨌든 이렇게 되어 포르투갈이 세계체제의 새로운 막을 열지는 않았지만 이전에도 말했던 연결망과 접점을 새로 만들어놓고 그걸 따라서 이후의 식민제국 그리고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세워지는것에 큰 시발점이 되었다는점에서 포르투갈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긴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포르투갈을 언급한 연유는 인지하셨을테고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으로 이어지는 세계체제에 관해서 논해보도록 합시다.
VI. 네덜란드: 지역화에서 세계화 그리고 상업 자본주의 - Gouden Eeuw
1612년도 건립된 암스테르담 주식거래소
네덜란드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풍차, 튤립, 빈센트 반 고흐에서 어떤분께는 홍등가까지 여러가지가 상기될수 있습니다만 네덜란드가 현대 세계에서 가장 주요한 국가들중 하나였다고 생각하시는분들은 많지 않으실거라 생각합니다. 네덜란드는 일단 경제나 금융사를 약간 배우신 분들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세계의 금융 기법이라던가 중앙은행, 주식 거래소, 선물 매매, 채권 등 거의 금융 자본주의의 기초 기법들을 전부 창안한 국가입니다.
초양극화에 세계화 얘기하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실분도 있겠습니다만 모든게 다 엮여들어가듯 연결이 되있기 때문에 최대한 너무 늘어지지 않게 하고 싶지만 짚고 넘어갈수밖에 없음을 양해부탁드립니다. 왜냐면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화는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는 동의어로 봐도 될 정도로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일단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전에 3명의 주요 학자들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머뉴엘 월레스타인, 크리스토퍼 체이스 던, 지오바니 아리기 란 학자들인데 다른 여러 논지를 펼친 학자들도 12~13명 이상이지만 너무 깊게 파고들기엔 길이가 너무 길어지는만큼 세계체제와 세계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 3명의 주장을 간략하게 설명드리면 이러합니다:
1. 월레스타인 : 정치, 문화, 사회 그 모든것은 경제의 하부 구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죠? 네 이분은 마르크스계열 역사학자입니다)에 종속되어 중심 지역 (Core) 와 반 변방 (Semi-Periphery) 그리고 변방 (Periphery) 로 나뉘는데 이것은 네덜란드로부터 시작되어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세계화 이룩.
2. 체이스 던 : 세계화는 이전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와의 교류부터 이집트의 하트셉수트 여왕이 홍해를 건너던 그 시절에서 시작된것으로 그 이후 동아시아, 서유럽, 북유럽까지 국가가 생겨나고 문명권 별로 교류를 하고 16-17세기 이후 서구 중심의 대융합이 이루어져 단일한 세계체제가 형성.
3. 아리기 : 세계화는 13세기 발흥한 몽골제국이란 세계 제국에 버금가는 유라시아 통합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무너진 이후 파편을 다시 연결 및 확장하고 더 강력하게 탄생시킨것이 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이다.
이론을 처음보는 분들이라도 최대한 소화시키기 쉽게 설명해보자면 대략 이런데 제 글을 지금까지 제대로 따라오신분들이라면 파악하셨겠지만 저는 3번째의 비중은 아주 약간 들어가고 오히려 비판적인쪽에 월레스타인과 체이스 던의 이론이 중점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리기의 경우 소위 월레스타인이 1970~80년대에 주장했던 세계체제론의 서구중심주의적 사관이라는것을 비판하는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적 조류라는 측면에서 보았을때 의의는 있습니다만 실증적으로 크게 증명이 안되기 때문인데요.
무슨 말 이냐면 아까전에 몽골 관련해서 문단을 다시 한번 스크롤 올리셔서 보셔도 알겠지만, 세계체제는 그야말로 한곳을 중심으로 해서 그외 지역 즉 전세계 모든곳에 하나로 연동되는 시스템이란 측면에서 주요한건데 몽골은 정복한 지역조차도 체계적인 통합을 이루지도 않았고 중세 유럽부터 근동등의 무역 자료를 살펴보면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던가 아니면 흑해 - 아시아 루트라던가 그런쪽에서 대규모로 늘었다는 자료가 없고, 심지어 흑사병 이전인 1320~1340년대에 약간 감소세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네덜란드 이후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면서 생긴 물류 및 인적 교류의 장기적인 꾸준한 증가세와 비교해보면 크게 안맞는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제국도 체이스 던에서 설명하는 지역화의 확대이면서 동시에 문명 시초부터 꾸준히 지속되어온 더 거대한 상위 정치-경제체로의 상향식 발전이란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아직 세계화라고 부르긴 힘들었다는것이죠.
아무튼간에 다시 네덜란드를 설명드리자면 네덜란드는 금융뿐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이 포르투갈의 항해루트를 접수하는 일종의 인수인계를 하면서 포르투갈이란 경쟁자를 몰아내고 한때는 브라질에도 진출했으며 (실제로 그래서 네덜란드계 혼혈이 있습니다), 남아공부터 인도네시아 동남아 루트를 더 확대 시키고 아시아-아메리카 교역로와 접접을 더 증가시킨것은 물론 동아시아 쪽 특히 대만과 일본에다 무역기지를 세우면서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실 한국분들이 속하는 동아시아에 서구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는것이 이 네덜란드 때입니다.
네덜란드 또한 인구가 150만인 국가이고 아직 산업화 시절만큼 압도적인 격차는 내지 못했기에 동아시아의 주요 문명국을 정복할 수준에는 미달했음이 분명하나 이 시기에 중요한것을 네덜란드가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1500년대 중반부터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식민지 주로 포토시 은광에서 유입되던 은화 레알 데 오쵸가 가는 무역로 장악 및 확장 그리고 일본의 이와미 은광등을 삼각무역속에 포함시키면서 주요 플레이어가 되었다는점이죠.
동아시아는 원래 은화를 쓰지 않았습니다. 송나라때까지만해도 구리로 된 동전등을 쓰거나 아니면 말 그대로 곡물이나 특산물을 그대로 세금으로 거두고는 했죠. 그런거 때문에 아마추어 경제 사학자들이 이런 점을 놓치고 계산해서 송나라가 세계 GDP 50%라던가 그런 오류와 과장이 섞인 계산을 해서 인터넷에 송나라가 대단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부풀려진식으로 떠돌기도 했습니다.
이 은이 쓰이기 시작한게 왜 중요한건지 읽으시는분들은 아마 체감이 안되실겁니다. 근데 생각해보십시오. 네덜란드가 무력으로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네덜란드등의 교류로 일종의 세계 체제에 간접적으로나마 편입이 되기 시작한것이며 사람들이 사고 파는 모든 물물교환을 하는 매개체의 공급과 통제가 동아시아 지역의 토착 문명들이 아닌 네덜란드와 그 근처의 유럽 제국들에 의해서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했기에 중요함을 몇번이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것이죠.
그리고 네덜란드는 이걸 동아시아에만 한게 아니라 나중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고 카피할 삼각무역의 원조로서 아프리카 - 남북미 - 유럽을 사실상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고 서구란 상위 개체에 편입이 되게 만듭니다. 게다가 유럽 내에서도 네덜란드는 당시 기준으로는 선박을 경량화시키고 가격을 대거 낮추는데 대표적으로 플류트등이 바로 그것으로 유럽 유통의 과반을 담당할정도였고 유럽 선박 갯수 40% 이상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동아시아는 그 때까지 아니 19세기까지도 연안해군에 머물러있던 반면 17세기부터 이미 바다의 주도권은 서구에게 완전히 넘어간것이였고 네덜란드는 그것의 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 이후로 소위 전통 루트라는게 전부다 파멸에 이릅니다. 이건 일부러 과격한 단어를 쓴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파멸합니다.
포르투갈까지만해도 대서양등 새로운 항해루트를 나름 발견했지만 여전히 사우디 반도 남단에 있던 오만 왕국과도 경쟁하며 홍해로 돌아와서 지중해로 다시 유입시키는등 유라시아의 전통 무역루트에서 약간의 변화 조짐은 보였지만 오히려 기존 무역로의 무역량이 더 늘기도 하는등 큰 변동이라고 부르긴 힘들었는데요.
이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란 사실상 역사상 최초의 대기업이라 할만한 이 집단이 이윤과 보상이 달리면 사람의 욕구와 창의성이 얼마나 뛰어나지는지 보여주면서 전부 다 바뀝니다. 동인도회사가 삼각 무역부터 아메리카 은 - 동남아 향신료 - 중국 차, 도자기 등을 통한 하나의 그물망과 같은 무역 체제를 짜기 시작하면서 중국-유럽으로 가고 중간길에 페르시아에 조금 파는등 이런 무역 방식은 전부 폐기되다시피 합니다. 그것도 거의 50년만에요. 1500년이 넘게 이어져온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때까지만해도 새로운 무역과 경제망을 짰으나 아직 유럽이 완전한 중심이고 모든 분야를 하나로 지배하는 거대한 세계체제를 구축했다고 까지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얼마가질 못하거든요. 왜냐면 모든 사물에는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이 되는만큼 금방 언급한 플류트선의 경우 북해등과 연안등의 전투에 능하고 빠른 건조와 대규모 운송선단을 이룰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대양에서 특히 '대포'가 본격 해군의 주력무기로 쓰이면서 워 갈레온 같은 대형선박들에게는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었다는것이죠
실제로 그렇게해서 크롬웰이 항해 조례등으로 영국 선박만 영국 물품의 운송을 할 수 있게 못박아버림으로서, 네덜란드 선박의 운송과 무역에서의 우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하고 동시에 결정적으로 이전의 유럽 패자 지위에 거의 도달했던 스페인을 로크루아 전투등에서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네덜란드 인구 15~16배에 달하는 이웃 강대국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시도 때도 없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막대한 체급의 격차를 이겨내지 못하고 네덜란드는 프랑스에게 국토의 거의 절반가까이가 유린당하고 댐까지 터뜨려가면서 프랑스 대군을 가까스로 막아내나 이미 재정과 인력의 소모는 심각했습니다. 네덜란드가 전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고 현재 뉴욕과 같이 금융의 정점이라할만한 도시가 암스테르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한 이유는 네덜란드는 패권국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무슨말이냐면 네덜란드는 이후 영국이나 미국 같은 패권국 좀 더 적확한 용어를 쓰자면 Hegemon 이라고 부르긴 힘들었습니다. 헤게몬이란 곧 질서의 중심에서 무력도 갖추었지만 무력만이 아닌 그 외 경제나 정치 외교 수단만으로 타국을 압박하고 굴복시킬 힘을 가진 국가를 얘기하는데 고대 그리스의 정의부터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신동이라 할만한 안토니오 그람시까지 각각의 정의를 내리지만 대체로 국제정치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편입니다.
일단 네덜란드는 말씀드렸다시피 기본적으로 국가 체급이 너무 작은것도 있고 그런만큼 결정적으로 네덜란드의 부(富)란게 타국과의 교류와 상업에 의해서 생겨난것인데 세계경제에서 국가간의 국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란게 잘해봐야 1~5% 수준이였습니다. 이걸 네덜란드가 전부 독식할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전부 차지했다 하더라도 당시 프랑스의 GDP가 세계에서 5~6% 수준이란걸 생각하면 겨우 비슷하게 싸울까말까 수준인것이였죠. 게다가 군대로 뽑을수 있는 맨파워차이도 감안하면 더 불리할테고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해군규모조차도 프랑스가 고작 10~15년만에 따라잡아버리고 세계 최대 해군을 건조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이렇게 쌓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서 반 프랑스 동맹의 맹주이자 해양세력의 중심 국가로서 프랑스의 팽창을 어느정도 저지하는데 성공하고 루이 14세가 외치던 자연 국경선의 꿈을 수포로 되돌리죠. 그 이전에 영국의 왕위를 차지하며 동군연합을 맺는것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이렇게 동군연합을 맺으면서 프랑스를 상대할때 영국은 주로 해군을 키우게 하고 네덜란드는 육군을 육성하며 여러 선진 금융제도등이 영국에 이식되는등 영국의 성장에 대한 견제는 소홀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네덜란드의 관점에서 변방의 섬나라를 인류 사상 최대 제국이자 세계 체제의 바통을 이어받는 국가로 의도치 않게 도와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현대 세계 체제의 틀을 만든 국가이자 세계 전역을 연동시키게끔 줄을 연결시킨 그 대영제국의 성립인것으로 세계 체제는 또 다시 새로운 장을 열게 되죠.
VII. 영국 : 세계체제의 구조 확립과 산업 자본주의 - Pax Britannica
대영제국. 이 이름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도 익히 알려진 이름이라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대영제국은 단순히 거대한 식민제국을 세우고 한 쪽에서 칭송과 다른쪽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는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국가입니다. 영국은 세계화에서 주요한 다섯가지 역할을 담당했는데요. 첫번째는 다중 세계의 붕괴, 두번째는 세계간 상품 및 경제의 연동, 세번째는 산업화와 기술 격차의 탄생, 네번째는 금융 자본의 세계 네트워크 형성, 그리고 다섯번째가 문화적 세계화 및 표준의 정립입니다.
이말에 대해서 좀 난해하게 느껴지실분들이 있으실테니 하나 하나씩 짚어가나보죠. 첫번째 다중 세계의 소멸은 무엇이냐하면 가령 예를들어 동아시아에서는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나라의 통일 중국 그리고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주변국가에 동아시아 지역 문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종의 지역화 현상을 거쳐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대로 16~17세기까지만해도 동아시아인들에게 천하(天下) 그러니까 하늘 밑의 모든것 즉 세계는 곧 중국과 한국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월남등의 조공국이고 그외에는 주변 북적 남만등의 오랑캐들이 자리잡고 있고 더 멀리 나아가면 아예 화 즉 중화의 입김이 아예 닿지 못하는 화외지역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렇듯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세계란 사실상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부 이상을 벗어난적이 없다는 것이죠.
동아시아가 서로는 천산산맥이고 북으로는 시베리아에 서남으로는 히말라야고 남으로는 동남아 밀림같은 고립된 지형이라 이런 경향이 더 강하긴 합니다만 이것은 비단 동아시아에만 국한되는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에 비하면 훨씬 이전이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진 세계란 이집트등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지역 로마 일부 그리고 흑해 및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와 소그디아나 그리고 동쪽 끝으로 현재 인더스강 유역까지정도 였습니다. 그렇기에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를 '얼마 크지도 않은 땅' 이라며 정복욕을 불태운바 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이런 지리 관련 지식이 알려지고 퍼져나갔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문제점은 지역간의 상호 연결성이 전무하고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세계로 보기보다 일종의 '여러 세계가 공존하는' 상황이였던것이죠. 가령 조선에게 압도적인 대국이자 천조국 그야말로 천자의 제국인 명나라가 멸망했더라도 이스탄불에 살던 농민 무스타파나 파리에 살던 농민 피에르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죠.
지금 미국은 커녕 일개 중견국에서만 사건이 터져도 그 즉시 세계에 요동을 치는것과는 별개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체급이 큰 국가가 아예 멸망을 했더라도 어떤 영향이 없었을정도로 지역간의 교류나 상호간의 영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봐도 될 수준이었으며 19세기 까지 청나라만 하더라도 세입 80~85% 이상이 자국 토지에서 거두는 토지세에다 90% 이상의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곡물 키워서 먹고 살다가 죽는것 그것이 바로 전근대의 삶이었으니깐 말입니다.
그런데 대영제국은 이 모든것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16세기 이전까지 중국보다도 더 거대했던 인도 지역에 위치한 인도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 무굴제국이 내분으로 허약해지는 틈타 7년전쟁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전장보다 훨씬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프랑스와의 인도와 북미에서 벌어진 식민지와 패권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미주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굳히는 한편 아시아의 3대 지역중 하나인 인도를 영국이 갉아먹게끔 만반의 준비를 마치게 되죠.
여기에 동유럽에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 걸쳐 성장하던 신흥 열강 러시아가 중동의 칼리프국이자 지배적인 세력인 오스만에 대한 남진으로 중동이 점차 뒤흔들리는 와중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발칸반도로 진출하며 가중된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서 영국은 오스만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슬람 문명이자 중동에 하나의 강력한 통일제국이 있는건 영국의 세계를 단일 경제권으로 묶는 작업에서 방해요인이지만 유라시아 사방으로 진출해대는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점차 오스만의 이권과 주요 거점 및 영토 일부분을 확보하거나 오스만이 약화된 틈을 타 반란이 일어나는 지역을 뒷공작으로 지원해서 이집트부터 사우디 반도 일부를 점거하고 남중국해-인도양-아프리카- 지중해- 북해 그리고 대서양을 통해 미주까지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편 크림전쟁등에서는 러시아가 오스만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니 오스만과 같은 편으로서 러시아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하죠.
그러다가 1차대전에서는 오스만이 영국에 군함을 주문한것을 자신이 그대로 날름해가는 통수를 선사하면서 오스만이 독일편에 붙어 전쟁을 일으키자 갈리폴리 같은 굴욕을 겪었음에도 미국을 치머만 전보를 통해서 독일이 미국의 영토를 멕시코에게 주겠다는것을 첩보전을 통해 알려 미국 전역의 여론에 불을 질러버려 미국이 참전하게 하는데 성공해 승자로서 오스만을 완전히 분할하고 영국의 뒷배로 세워진 사우드 왕조 즉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부터 중동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등에는 영-프의 보호령이 들어서는 Divide and Rule에 성공합니다. 터키 본토까지도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분할당할뻔 했으나 현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에 의해 다행히도 저지된바 있습니다.
그럼 동아시아는 어떤가요? 동아시아는 거의 마지막 손길이 닿는곳이긴 했으나 단순한 무역과 경제 접점을 넘어서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경제정책을 영국의 편의대로 강제 당하고 그 후 2차 아편전쟁 마지막에 의화단 사태로 북경이 수차례 함락당하면서 철저히 굴복하게 되고 심지어 1898년 청일전쟁 패배 이후에는 독일과 러시아등 유럽 국가들이 화북 지역을 분할할려고 했는데 통일 중국에서 얻는 상업적 이익이 더 나았던 미국이 유럽열강을 견제하면서 없는 계획이 될정도로 중화세계에 기립한 중국과 그 이외 제후국과 오랑캐로 이루어진 천하란 세계관은 서구 세계체제의 변방부로 편입되기 시작하죠. 일본은 그 정도 험한 꼴은 아직까지 안보았으나 조슈와 사츠마번등이 영국등에 의해 해안 포대가 전부 박살나는 힘의 격차를 깨닫고 반자발적으로 세계체제의 상부는 아니라도 중상부라도 되볼려고 발악하게 되죠.
북미 등 남미는 이미 중소규모 원주민들을 17~18세기에 서서히 학살 및 정복해가거나 전쟁에서 승리해 그나마 규모가 큰 국가였던 아즈텍, 잉카등이 스페인에 의해 쓸려나가서 식민지가 된 상황이였는데 영국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대륙세력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고 그러면서 아르헨티나의 독립 세력을 지원하여 독립시켜 이곳도 나눠서 지배하라는 지배 원칙을 철저히 이행하여 영국의 영향권하에 두고 추후에 얘기할 금융 자본등으로 그들에 족쇄를 채웁니다.
그 이후 아프리카는 기술이 발달하며 말라리아등과 밀림지대도 정복이 가능한 지역으로 바뀌며 이미 거점을 차지해놓았던 이집트와 나폴레옹 전쟁당시 네덜란드 그 당시는 프랑스의 괴뢰국이던 바타비아 공화국의 식민지로 점령한 남아프리카 지역을 하나로 잇는 종단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그 이전 사하라 사막 이남에 몇 안되는 비옥한 농토겸 좋은 무역항 조건을 가진 서아프리카 일대에서도 영토 확장을 시작하여 미국 중국 러시아보다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30% 가까이를 집어삼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 베링해협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유라시아 횡단하는 수준의 거리인 아프리카 남과 북 끝을 연결하는데도 성공하고 오세아니아 마저 이미 네덜란드가 발견했음에도 쿡선장을 필두로 집어삼키면서 전 세계 5대륙 6대양이 단 하나의 체제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으며 이렇게 세계체제의 틀과 기반은 마련되죠.
자, 그러면 두번째 포인트인 세계간 상품과 경제의 연동 현상은 무엇일까요? 첫번째의 사실상 연장선상으로 이어지는 주제라고 보셔도 무방한데 다중 세계가 있을 시절에 유럽의 최강 제국이 망해도 동아시아 조선의 홍길동은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실제로 연결성이란게 거의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미미한 수준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이후 조금씩 연결이 되어가던 이것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거의 동기화가 됩니다. 이건 실증 자료로도 입증이 되는건데, 런던과 베이징 뉴욕 그리고 뉴델리 각각 서로 머나멀고 상이한 지역에 위치해있는 도시들의 빵등의 기본 식자재 물가가 비슷해지거나 혹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변동하는 양상이 비슷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현대 어디 식량 수출국등이 영향을 받으면 국제 식료품 가격이 뛰어오르는것과 유사하게 말입니다. 1820년대 12파운드, 10파운드, 9파운드, 15파운드 각기 다르던게 1850년대 이후부터는 14파운드로 상승하면 정확히 2파운드가 같이 뛰면서 12파운드가 되는등 이런 추세선을 그리게 되죠.
게다가 이것은 한 예로서든것이지 단지 식자재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 그리고 대량생산으로 인해 무역의 규모가 자급자족 경제의 그것에 비교해도 그 규모가 커지거나 혹은 중소국가 기준으로는 더 능가하기까지 하면서 사실상 고위 관료와 귀족들을 위한 국제무역이란것은 가장 말단의 소시민들의 내일 아침 사먹을 빵의 물가까지 결정하는 즉 전 지구의 모든것을 아우르는 단일 경제체로서 한발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대량생산 및 기술 발전은 또 산업화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세번째 요인인 산업화로 인한 대분기와 본격적인 기술 격차가 생기는것을 말씀드려야 되는데,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밑에서 위로 힘와 돈이 몰리고 크고 강한 세력이 더 강대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목문명들의 소멸이 있을텐데, 이것에 대해 왠 유목문명이냐하실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이 세력들은 전근대 시기만해도 가장 강력한 전사집단으로서 지배자에 속했는데 그들은 한순간에 중소국가조차 유지 못하고 소멸해버렸죠.
<전근대의 임금과 경제 성장율>
물론 이는 신대륙에서의 구황식물등의 도입등 기존의 농경제국들이 인구가 증대되고 이래서 도저히 체급이 감당할수 없어진것도 있겠습니다만 이것만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든게 고대 흉노와 한나라의 인구 격차는 흉노가 한나라의 주 하나보다 인구가 작다고 할 정도였고 실제로 한나라 인구가 5,960만에 흉노 인구가 사서나 추정치에 따른 약 100만~120만 수준이라면 거의 60배에 달하는 차이로 인구 차이로는 누르고도 남았어야 됩니다.
이게 준가르나 청나라로 오면 더 커진다고 하지만 러시아와 준가르의 인구차로 비교해보면 한-흉노나 당-위구르에 비해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진 않았습니다. 즉 이건 기술 격차 그리고 그런 기술을 개발하고 그걸 대규모 상용화할 재원의 차이에서 났다고 보는게 맞겠죠. 동시에 앞서 말씀드린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어지는 전통 무역로의 파탄으로 인해 거대 농경문명들과의 무역 수수료를 받아먹는 역할을 하던 유목민들의 수입원이 사라진것또한 결정타였고요
하여간, 산업화와 그에 따른 산업자본주의는 굉장히 중요한것이 상업 자본주의가 단순히 '상업적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등의 추상적인 측면이 있었던 반면 이때 이후로는 실제로 거대한 잉여 자본이 축적되는 시기입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농경문명의 생산성과 소득이 서기 1년~1500년 시절 0.05~0.1% 증가하고 1500~1800 대항해와 지구단위 무역 시스템이 들어서면서 0.31%정도 증가하다가 1820년대 이후에는 평균 2.37% 이상 증가하게 되며 서구와 아시아-아프리카 최빈국의 소득 격차는 19세기 초 3배에서 약 7~10배 이상 벌어지게 되죠. 이것은 농경문명이 보다 유목민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체급이 비대해지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을뿐 아니라 농경문명 사이에서조차 자본과 그에 따른 기술 진입장벽을 형성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16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임진왜란등으로 한국인들 대부분이 익히 들어보셨을 일본군의 조총과 그리고 조선또한 조총을 양산하는데 애시당초 조총이란것은 전쟁용 무기가 아니였습니다. 그럼 무엇이냐고 생각하실수 있겠는데 조총은 일본도 포르투갈-스페인등 서남유럽이 기원으로 아케부스인데 이건 사냥 및 밀렵용으로 쓰는 사냥용 총이었던걸로 당시 전쟁용으로 쓰고 당대 최강 군사집단인 테르시오가 쓰던 머스킷보다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빠른 훈련속도와 관통력 덕분에 순식간에 만병지왕으로 떠오르게 되죠.
근데 이 조총조차도 일본이 처음에 견본을 통한 역설계를 거쳐 자기들이 자체 제작을 할려고 했는데 이게 안되서 당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거금을 주고 제조법을 전수받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그들이 생산해내게 된건데요. 자, 생각해보시면 이것도 공방에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수공업이었으며 구조나 제조법도 그리 어려운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돈까지 줘 외국의 기술을 전수받고나서야 만들수 있었는데, 이게 산업화에 이르면서 더 말도 안되게 벌어집니다. 일단 이미 위에서도 말했지만 대규모 공장 설비나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선 특히 경공업에서 또 이후에 설명할 중공업등 더 자본집약적이고 핵심기술이 중심이 될수록 자본, 더 많은 자본, 그리고 더더욱 많은 자본이 필요하게 되죠.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내화벽돌등 산업재 수입량
여기서 일단 첫번째 기술장벽이 세워지는데, 이게 수공업이 아니라 기계가 하게되고 그 기계를 다룰 소수의 핵심 기술자와 시설 그리고 그걸 또 운용할 전문가가 중요해지면서 사회, 문화, 기술, 정치, 경제, 제도 모든걸 뒤바꾸고 수십년간 새로 쌓고 축적해야만 그나마 기술을 따라가는데 문제는 이미 기술이 앞서 있던 국가들은 마냥 가만히 추격을 허용하면서 놀고 있지 않다는것이고 이러면 결국 붉은 여왕 효과 처럼 이미 기존의 위치를 고수하는걸 위해서 그렇게 생고생을 하고 그거조차 안하면 더더욱 뒤쳐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고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상당수는 시도하지도 않거나 시도해보고 사실상 그 격차를 절감해서 포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 인력이 넘치고 농업 소득이 거대한 중국조차 1900년대 초까지 근대적 대규모 공장단지를 설립하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사회의 부패상부터해서 핵심 기술 인력의 부족등으로 우한에 한양 제철 공장이란 최초의 근대적 공장을 짓는게 1890년대나 가서이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지배계층과 서민층의 재산 차이뿐 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 국가와 변방 국가의 격차도 도저히 따라잡을수 없을정도로 초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게 된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기술격차로 인한 경제 효율 및 생산성 차이는 자본 규모의 격차가 더 늘어나는것을 야기했고, 이는 자본을 운용하고 또 그것을 이용해 여러 기법과 대출 및 투자로 불리는 금융 자본이 넘쳐흐르는 일종의 잉여 금융자본을 낳았고 이는 자국이 아닌 해외 그리고 더 나아가 전세계 전체를 소수의 금융 선진국의 자본의 이익을 위해 변방국의 생산수단 및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를 위한 원자재등이 종사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네번째 금융 자본의 세계 경제 네트워크 형성이루어지죠. 그들은 이제 발전된 무기와 군대 제도를 통한 정예병들과 자본력을 통해 전근대의 거대 제국들을 모두 해체하여, 연결망을 거의 다 형성하고 이제 세계에서 그들이 상품 교역으로 침투할수 없는곳은 지구상에서 없다시피할정도로 사라졌죠. 그리고 소위 레닌이 그토록 비판했던 당시 기준으로 근대 자본주의 종착지로 보이는듯했던 금융 자본주의의 꽃이 만개하게 되죠.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등 서구는 중남미의 수많은 기업과 은행의 자본을 약 40%대까지 엮는것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전역에도 서구 은행가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곳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심지어 반식민지라고 해도 최소한의 국체는 유지하고 있던 청나라마저도 철도와 같은 거대 자본이 필요한 프로젝트등에 영국, 프랑스등의 서구 자본이 다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근대화할때뿐 아니라 전쟁에서도 영국-미국등의 서방 차관을 빌렸고 혹은 그들이 일본을 러시아에 대항할 장기말로 이용하기 위해서 빌려주었던간에 일본 혼자의 자본으로는 해낼수 없었던 일이고 영국 정확히는 영미의 자본가들 및 은행가들은 일본을 자본이란 거대한 그물망으로 엮어 자신들의 주구로 내세워 프랑스 이후 더 거대한 유라시아의 지배를 목표로 떠오르던 대륙세력인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이용해먹죠. 그리고 기껏해야 중화-조선과의 관계에 조금 더 추가해 서유럽 열강 몇몇의 개별적인 각국과의 관계로 국제 정치를 바라본 구한말의 지식인층들은 이것에 대해 파악을 못하고 아쉽게 국가 자체가 서구의 암묵적 동조하에 사라졌죠.
어떤분들은 가쓰라-태프트 조약만 읆으시는분들이 있었으나 이것은 당시 그리고 현대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체제의 최상위층에 있던 서구세력 전반의 합의와 묵인하에 이루어진겁니다. 당시 미국은 열강들중 하나에 불과했고 서유럽 열강들 모두가 반대하거나 꺼려하는데 이런 일은 일어날수가 없었다는 말이며 이미 세계를 관장하는 세력들이 동의한 순간 그 시점에서 조선에게는 희망이란건 없었단 말입니다.
즉 이 세계체제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결과 엉뚱한데 희망을 걸고 일본제국이 날뛸때도 일본제국 조차 이 체제하에서 벗어날수 없는 폰이나 나이트에 불과한 조그만 체스말이란걸 눈치채지 못하고 세계체제의 주도세력들이 일본이 조선과 대만같은 빵부스러기는 나눠줘도 중국 점령 및 동아시아 지역 접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것또한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개화파이자 후에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와 같이 '동아시아의 왕은 이제 일본' 이라면서 그저 명청교체기나 그런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 및 패권 교체정도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죠.
실제로 이 서구 금융은 차관이나 여러 형태로 조선 말엽 구한말에도 들어와서 몇몇 사업가와 대리인을 내세워 조선뿐 아니라 동양 최대의 금광이라 할만한 운산금광 채굴권을 확보하기도 했고, , 심지어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강대국들의 중앙은행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칠정도로 국가 이상의 자본력을 갖추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본의 세계 침투와 맞물려 더 중요한것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문화적 세계화입니다.
다섯번째 문화적 세계화는 비슷한 뜻을 가졌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문화 확산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세계화의 첫단계로도 표현되기도 합니다. 단순한 교류와 무역만을 세계화의 시초라고 표현한다면 경제가 첫번째가 될 지모르나, 하나의 단일 체제로서 하나의 표준하에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짜맞추듯 정교하게 돌아가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구축된건 문화쪽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러분들께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문화란 무엇인가요? 영화, 음악, 예능, 음식 뭐 이런것들인가요. 물론 이들도 문화의 일종입니다만, 문화란 인간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행동과 가치관등 전부를 망라합니다. 그리고 서구의 문화적 세계화는 가장 반서구적이고 최고의 오지에까지 단단히 뿌리잡을정도로 성공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700년대까지만해도 전근대 아시아 아프리카 뿐 아니라 서구에서조차 노예에 대해 크게 꺼리지 않던 사상은 1800년대 들어 영국의 주도하 노예무역을 근절하기 시작하며 그것이 옳지 않고 '나쁘다'는 것이 심지어 노예매매가 횡행하는곳에서조차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인종차별에 대한 나쁘다는 인식도 17세기까지 전무하던것이 영국과 미국의 지식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단 이런 가치관과 의식뿐만 아니라 의복에서도 그게 드러나는데, 식민지인들조차 영국의 연미복을 바탕으로 한 양복과 넥타이를 맸으며, 시간의 기준 또한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의 표준이 되었고 그들의 법률은 곧 동아시아에서는 만국공법이라고도 불리는 국제법이 되었고 방첩기관 또한 영국의 MI5가 세계 최초이자 세계 각국의 본받을 모델이 되었죠.
<현대 복지시스템의 초석이 된 비스마르크 내각 치하 사회법전 (Sozialgesetzbuch)>
그리고 어느새 회사등 기업들에서 일을 하는것이 아주 당연한것이 되었고 국가가 헌법등 법률을 제정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재판을 하는것 또한 마치 물리법칙인것인마냥 자리잡았습니다. 200년은 커녕 150년전까지만해도 전혀 부자연스러웠던것이 말이죠. 게다가 국가나 정부가 국민을 지원해준다는것 또한 전근대에서는 그저 잘해봐야 구휼이나 교회의 기부였지 전면적인 프로젝트나 정책이라는것은 독일 그리고 뉴질랜드등 대영제국 자치령에서 시범으로 시작해서 영국으로 퍼진 복지 시스템이 Ctrl + C , Ctrl + V 된것이지 원래 자생적인것이 아니었습니다.
좌파, 우파 내지 진보, 보수 이런 사상 갈등도 동아시아부터 중동등 비서구지역에서는 없던 관념이며 사회주의, 자본주의 이 모든것은 서구에서 수입된 사상들입니다. '자유' 등의 개념도 일본에서 처음 번역할때 골몰해야 했다듯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수입되어, 세계체제 치하 문화와 가치관의 표준 정립과정에서 그야말로 지당하고 보편적인 사상이 되었죠. 그리고 이러한걸 가르치는 교육 시스템조차 서구의 그것에서 왔으며 그 후 세대들은 이것이 전통 토착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인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요.
그런 의미에서 영국과 그리고 영국을 위시한 서구 세력들의 문화적 세계화는 정말 견고해져서 이미 더 이상 떼낼수 없을 지경까지 왔죠. 현재 서구에서 가장 규탄하는 중국 공산당조차 독일계 유대인인 마르크스를 찬미하고 극도로 폐쇄적인 왕조국가라고 놀림을 받으며 민족주의와 자력갱생을 그리도 외치는 북한의 최고정당이 라틴어 labor, laboris에서 출원한 조선'노동'당을 자처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격변을 일으킨듯인것처럼만 보였던 영국조차 새로운 변화의 파도를 타지 못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기술격차와 진입장벽을 만들어낸것처럼 새로운 후발 주자들이 변화와 혁신의 선봉장이 되어 모든 전쟁을 끝내리라고 당대 사람들이 의심치 않던 1차 세계대전이란 폭풍과 함께 영국을 역사의 뒷방 늙은이로 몰아내죠.
그 두국가는 바로 신성로마제국 대공위시대 이후 600년 가까이의 분열상을 종식시키며 러시아보다 강대한 신흥 대륙세력으로 떠오르던 독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독특한 국가인데 거대한 대륙국가이면서 동시에 유라시아만한 대륙을거대한 섬으로 영유하며 유라시아에 태평양, 대서양 양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한 영국의 아들 미국입니다.
VIII. 전간기 : 세계화의 일시적 단절 그리고 2차 산업혁명과 포디즘
성공의 어머니는 실패다. 인구에 많이 회자되는 격언이죠. 그런데 역사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진실일때가 더 많았습니다. 실패의 어머니가 성공일때 말입니다. 근대 영국은 어떻게 보면 여기에 부합하는 사례일지도 모르는게, 유라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전역을 하나의 세계체제로 엮어내고 전세계에 자본 금융망을 형성하고 세계 최강의 해군을 건조하며 기원전 2000년 시절 이집트 농민의 90% 노동이 수작업이였고, 4700년이 흐른 1700년대에도 70%의 노동이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던것을 10%미만으로 축소시키는 기계를 통한 생산으로 생산성과 소득의 전례없는 향상 그리고 그를 통한 자본과 문화의 발전을 통해 문화 표준 정립등 그야말로 전례 없는 업적을 이루어낸 이 영국은 그들이 이룩한것에 너무 도취되었는지 앞으로 펼쳐질 더 중요하고 현대 인류에 (지금까지는) 가장 큰 영향을 끼친 2차 산업혁명에서 도태되기 시작합니다.
2차산업혁명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발명으로는 전기, 석유, 내연기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플라스틱, 그리고 뒤에서 조금 더 설명할 대량생산을 위한 컨베이어벨트까지 현대인들 최소 중진국 이상의 국민들이라면 없어서는 안될 필수재들이며 생활에 불편을 덜어주는 수준을 넘어 없어서는 안되는것들이 이때 생겨났고 실제로 면직 및 경공업으로 시작한 1차 산업혁명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경제의 팽창이 일어나죠.
동시에 이런 경제팽창은 진입장벽의 고도화 현상과 그 이전의 모든 변화를 무의미하게 만들정도였습니다. 가령 영국이 18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공업 생산량의 약 60% 이상을 차지했으나, 미국이 산업화를 1850~60년대에 시작하고, 독일이 1840~50년대에 시작했다고 여겨지는데 공업 생산력에서 미국이 영국의 그것을 추월하는데 약 30~40년만이고 독일또한 50년만에 영국이 쌓아놓았던 탑을 뛰어넘게 되죠. 마치 영국이 그 이전 전근대의 모든 업적을 부정할정도로 거대한 성장과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던것처럼 말입니다.
헌데, 그럼에도 전세계적으로 전근대의 성장하고 변화하는 속도에 비해 최소 수십배 빠른 이 근대시기 그러니까 달리 말해보자면 전근대 수천년이 축적한 힘을 모은 영국의 그것을 단순 경제 성장만으로는 뺐기 힘들었습니다. 화학과 물리분야는 독일에, 그리고 후술할 대량생산 체제와 농업 및 공업 생산력에서는 미국에 각각 빼았겼음에도 금융과 해군에서 아직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었고 이는 최소 전쟁 그것도 전 세계가 휘말려들어가는 초대규모 전쟁이 필요했고...그게 바로 터지죠.
모든 전쟁을 종결시킬 전쟁이라고 '대전쟁' 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그저 보다 더 거대한 전쟁을 위한 프리퀄에 불과했던 1차 세계대전이죠. 사실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미국이 너무 급성장하면서 남북미 지역의 영향력은 점점 영국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영국에게 직접적인 군사적이나 정치 외교적 도전을 하는거 까진 아니었고 도버해협으로부터 100km도 안떨어진 독일제국이란 신흥강국이 이빨을 드러내며 해군력을 증강하고 있었으니 영국의 눈은 중부 유럽에 쏠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매우 특이한 국가입니다. 미국의 영토나 환경을 보면 본토 면적만으로 500만 km2 넘어가는 즉 로마제국보다 거대한 초대형 국가의 분류에 속하고 실제로 1840~1850년대 미국이 팽창하던 그 시절만해도 미국은 바다에도 의존을 하지만 해군력은 크게 볼품있다고 말하긴 힘든 대륙국가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성장하면서 해양국가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격이라 할 수 있는 대영제국마저 쉽게 능가하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해양국가로 떠오죠.
게다가 이것뿐 아니라 미국은 사실상 대기업이나 재벌체제의 원류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업이란 개념 자체는 네덜란드와 영국등에서 시작된게 분명하나 영국내 다수의 자본가들은 동시에 지주이기도 한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이미 노동자를 그렇게 굴리는 입장에서 체면이랄게 뭐가 있겠냐합니다만 그들 나름대로 일종의 지켜야 될 룰이나 의식같은건 있었는지 수십명에서 수백명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이나 회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귀족 / 평민으로 나눠지는 제도적 내지 사회적 계급이 없었고 굳이 강조해봐야 경제적인 토지나 자산에 따른 경제적 계급 정도가 있었고 이게 실제로 투표권 즉 정치 권리를 행사하는데 제약으로 미국 초기에는 작용하기도 했지만, 포퓰리즘의 원조이자 현재 트럼프가 찬양해 마지못한다는 앤드루 잭슨시기에 주택이나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모든 백인 남성들에게 풀리게 되면서 자본이 사실상 사회의 가장 중요한 테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면때문에라도 유럽에서는 근본없는 졸부라던가 이런식으로 깔보기도 했죠.
하지만 미국은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보다 더 거대한 자본, 보다 더 효율적인 생산기법, 보다 더 대규모의 고용인력과 설비등을 갖추면서 유럽 그것도 당시 자본주의의 본산이자 산업혁명의 태동지인 영국마저도 뛰어넘을정도로 생겨나고 그것의 절정이 바로 현재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에 의해 탄생한 미국 특유의 포디즘이었습니다.
포드는 이제 뭔가 새로운걸 발견해낸건 아니고 이미 기존에 있던 개념에서 착안하여 더 효율적이고 상용화 시키는데 성공했다는점에서 찬사를 받아야 되는 인물입니다. 왜냐면 이전 유럽에서도 포드가 주장하고 적용한 부품별 분업화적 생산방식 자체야 애덤 스미스도 포드가 기업가로 성공하기 100년도 전에 이미 다 얘기했던바니까요. 근데 이걸 그렇게 효율적이고 획기적이게 만들었다는점에서 주목을 해야 되는데요.
이미 많은분들이 아시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포드 등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장에서 생산이란 기계와 함께 부품이 주어지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걸 함께 조립하는 방식이였는데, 1870년대 시카고의 신시내티 도축공장에서 돌아가는 벨트에 달린 육고기들이 절단되고 도축되는 과정을 보면서 영감을 얻습니다.
이걸 생산과 제조분야 전반에 적용하게 되면 어떨까? 라는 걸 말이죠. 그래서 적용되자 자본가들과 정치인 및 관료등 매우 고위층에게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자동차를 중산층 이상만 되더라도 구비할수 있는 국민 상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야말로 박리다매의 시대가 열린거죠. 게다가 이것은 19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미국의 대기업 그리고 그런 대기업들을 더 합쳐놓은 상위개체인 복합기업의 막대한 자본력이 뒷받침이 되어 생산하자 소위 선진 유럽국가들도 감당해니기 힘들정도의 폭발적인 생산력을 보여주게 되죠.
간단한 예를 들어 1920년대 말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 댓수가 약 440만대가 넘었는데, 영국은 고작 198,000대였고 1920년도에는 미국 혼자서 세계 전체 자동차의 생산량을 96%를 차지했다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길정도로 앞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독일이 영국의 주요 안보 위협이자 견제 상대가 되면서 영국은 버뮤다부터 카리브해에 있던 미국의 팽창을 그나마라도 막아줄 해군 마저 전부 유럽 전선으로 돌리게 되고 미국은 어떤 견제도 받지 않고 남북으로 15,200km 유라시아 동서횡단 7,600km의 약 2배에 달하는 초대륙을 혼자서 점유하는데 성공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1860년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미국의 군비 지출이 영국과 러시아가 싸우는 전쟁의 3배에 달하던것을 보고도 남부를 지원해 찢어놓을려했던 파머스턴 자작의 계획이 시작도 되지 못했을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을수도 있지만, 1차대전때 미국이 독일에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하고 미국의 주최하에 현 국제연합의 원형이라고도 불리지만 실패로 끝난 국제연맹 시스템이 창설되며, 금 또한 가장 많이 가진국가에 대영제국 경제력과 영국의 1인당소득까지 추월하게 되죠.
여기에 더 나아가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은 금융쪽의 지위는 굳건할줄 알았는데, 심지어 파운드를 누르고 달러가 세계 주요국 외환보유고에서 58~62%까지 오르게 되며 영국은 미국에 대해 상당한 불안 심리를 가지게 되나, 영국은 이전까지 해왔던 1>2+3 정책 그러니까 영국이 해양에서라도 패권국 자리를 유지할려면 최소 2위와 3위국가의 해군보다 더 큰 규모로 보유해야된다는것인데 이마저도 사실상 포기하고 미국의 지분을 인정합니다.
왜냐면 미국은 현재 미국 소득 13%에 경제 비중 67%인 중국 수준이 아니라 당시 대영제국 전체 그러니까 영국 + 캐나다 + 호주 + 뉴질랜드 + 인도 + 미얀마 + 파키스탄 + 싱가포르 + 말레이시아 + 아프리카 대륙 수십개국 + 이라크 + 오만 지역등 다 합한것의 경제규모의 1.3배 이상으로 커져버렸습니다. 거기다 소득도 영국의 약 1.5배 수준으로 떠올라서 스위스 다음의 세계 소득 2위 그리고 인구 1천만 이상 국가들 이상의 주요국중에서는 세계 소득 1위가 되었던 양과 질 모든 부분에서 비교할수가 없는 최강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체급에다 생산량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아예 1860년대에 뉴욕 센트럴파크를 완공하고 1900년대 초부터 100층이 넘는 마천루를 짓던 미국을 인정할수밖에 없었고 그리 해서 탄생한게 국제 관계사에서 유명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인데요.
모든 디테일 까지 이 글에 다 설명드리기엔 너무 장황해질테고, 요점만 설명하자면 이미 패전한 독일이랑 공산혁명으로 당시 고립되어있던 소련은 아예 배제대상이고 당시 해군력이 곧 강대국의 위상을 설명하기도 하던때 지위를 협상으로 결정짓자는것인데 미국과 영국이 5:5 그리고 일본이 3 프랑스와가 이탈리아가 1.75:1.75 로 나뉩니다. 그리고 영국은 이걸보고 미국이 더 팽창하고 불만을 가지는걸 잠재울수 있겠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양의 어떤 국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일본이였고 그 국가는 오히려 자신들이 서양세력에 의해 강제로 억제되고 있다고 느끼며 반발심을 품고 이는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만큼 미국은 이미 전간기 시점에 벌써 세계체제의 정점에 근접해가고 있었고 새로운 기술 및 자본격차로 그 이전까지의 세계체제보다 더 공고하고 강력한 체제 다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아도 되시겠죠. 실제로 영국은 이때 안보적으로 태평양과 대서양 양면에서의 위협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서 영일동맹을 포기하기까지 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국이 그만큼 미국의 실제 실력을 이미 간파했다는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요.
간단하게 이 문단의 주제들중 하나인 세계체제의 일시적 단절을 가져온 세계대공황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시작된것이 아닌 미국이 근원지였다는점에서 이미 미국의 힘은 세계 전체를 덮을 수준으로 커졌고 그 왕좌를 접수하기까지 말그대로 시간문제였습니다. 왜냐면 인류역사상에서 미국 이전에는 공급이 그러니까 생산량이 너무 넘쳐나서 수요가 못따라가는 그런건 경험한적이 없었습니다.
전근대는 아예 가장 기초재인 식량 생산마저 식량을 소비하는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기근현상이 일어났고, 근대와서도 공업품의 대부분은 고관대작과 부유한 자본가들을 위한 전에도 말씀드린 특별한 사치품들일정도로 너무 생산하는게 많고 풍요로워서 그런건 없었는데 이게 인류사 최초로 미국에서 등장할정도로 미국의 생산력은 그 이전 어떤 국가를 들이대도 비교하기 난감할 수준이였죠.
이렇게 금융이 중심으로 옮겨지고 세계체제의 근본이 미국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스무트할리법을 실시하며, 동시에 유럽의 식민제국들도 자국과 자국 식민지를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블록화가 이루어지면서 세계화의 진행에 일시적인 중단이 이어지는데, 약 무역량이 70% 이상 감소해버립니다.
<무역블록의 형성>
그리고 이런 극단의 상황에서 경제야 좋을리가 없었고 사람들은 극단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대두한게 민족주의, 국수주의 이후 파시즘이며 이것은 곧 1차 세계대전의 확장판이라 할만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불씨를 태우기 시작합니다. 허나, 이렇게 대공황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피폐해지고 무역량이 대거 감소했음에도 세계화 자체의 큰 흐름은 바꾸기 힘들었는지 무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00~1800년대 평균점이 약 3~4%인데 이 시기 13%대였으니까 그래도 4배이상 높았죠.
여기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영국이 세운 세계체제가 큰 위협을 받나 싶었지만 이전 네덜란드가 영국이란 다른 해양 제국에게 세계체제의 건립하는 역할을 넘기게 되며 보다 강력해진것과 유사하게 영국은 다시 일어서 프랑스까지 정복해버리며 영국 본토를 공군으로 위협하던 독일이란 대륙국가에 맞서 미국등에게 제트엔진등의 기술을 전수하고 많은것을 양보하며 미국에게 그 포지션을 완전히 넘기게 됩니다.
IX. 미국 (I) : 인류사상 최강의 국가 그러나 미완의 세계체제 - Pax Americana(?)
미국은 그 이전의 패권국가와는 많이 다른 특이한 형질을 가진 대륙과 해양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 국가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떨어져 유라시아의 주요 강대국들과는 이격되어있는 왠만한 섬보다도 더 고립되어있어 국제 정치에 개입하기 위해선 해양력이 필수적인 해양 세력이면서도 동시에 남-북아메리카라는 초대륙에서 전쟁으로 연거푸 승리를 거두고 총칼로 짓누르며 일방적인 패권을 거둔 대륙 세력이기도 하다는점에서 말이죠.
미국은 그야말로 자신의 동네에서 언터쳐블이라고 할만한데 현 시점에서 미국이 북아메리카 기준으로는 87%의 GDP이며 중남미까지 다 합해도 75%의 GDP를 차지하니까 그야말로 미국 혼자서 모든것을 좌지우지할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금융 자본으로 묶어놓은것까지 생각하면 완전한 미국의 놀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과 네덜란드와는 다른 해양진출 양상을 띕니다.
무슨말이냐면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그 이전 포르투갈까지 보면 대륙에서 밀려나거나 혹은 자기가 속한 지역 즉 유럽대륙에서는 해당 국가들이 힘을 발휘도 못했고 어차피 안된다는걸 알아서 크게 필요성도 못느껴서 비스마르크가 영국의 육군이란 독일 제국 육군이 아니라 프로이센 경찰에게도 제압당할 수준이라며 조롱한적이 있을정도로 그들은 유럽 외 비서구 지역에서 지배자로 군림하고 식민지를 확장해갔죠.
그런데 미국은 금방도 논급했지만 자기가 속한 지역을 전부 평정하고 정치,군사,경제 모든 부분에서 미국에게 종속되는 구조를 구축하고 나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유라시아로 치면 러시아가 중국 인도 중동 유럽까지 다 먹어치우고 해양력을 증강하여 그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미주대륙으로 진출하는 그런 느낌에 가까운것입니다.
이렇게 미국 그 자신이 성장루트를 걸어왔기에 지역내 패권국가가 탄생하는걸 영국도 그랬지만 미국이 특히나 극도로 꺼려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여하튼 미국은 기존 해양국가와는 영 다른 코스를 걸어왔다는것을 이해하셨을거라 봅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본토가 있던 덕분에 이후 이어지는 뒷심싸움에서도 영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체력을 보여줄수 있었고 실제로 2차세계대전때 인류 역사상 최대 상비군 규모인 육군 826만 7,958명, 해군 338만 817명, 해병대 47만 4,680명, 해안 경비대 85,783명으로 총 1,220만 9,238명과 항모 141대를 동원하는 단순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수준의 저력을 보여줍니다. 이조차도 다른 국가들 95~98% GDP를 전비로 쓸때 미국은 고작 GDP 37.5%를 쓴거였지만 말이죠.
이렇게 2차대전이 터져서 33만명 4,473명의 군대에서 인류사상 최대 군대로 늘리게 된 것에는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니였고, 미국에게도 안보적 위협이 생기고 다 아시다시피 사상 최대의 전쟁이 터져여서였습니다. 헌데 그런 위협의 발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의 군사 기술 특히 해군쪽 개발의 가속화를 미국 그 자신이 사실상 창조하고 주도했던 석유산업에서 비롯되었다는것이겠죠. 왜냐면 목조선은 말할것도 없고 석탄으로 굴러가던 함선들은 에너지 효율이 극악이라 잘해봐야 15~18노트였다면 석유로 굴러가는건 24~26노트의 속도로도 갔습니다.
<1945년 미국 국방비 vs 그외 열강들 미국 국방비>
그래서 이렇게 훨씬 빠르고 작전 시간이 길어진 전함들과 항공모함들이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거나 미국과 강대국에게도 적용이 되었고, 대서양 태평양 양쪽에 워싱턴이 말한 유럽내 다른 국가들의 사안에 개입하지말라는 조언까지 깨면서 유라시아로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도 자국내 자급자족으로 어지간하면 다 해결되는 국가라 폐쇄적이나 그 당시에는 무역량이 미국 경제규모의 3분의1 수준인 독일보다도 적을정도로 유라시아 개입 관점으로 보았을때는 매우 내향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이는 2차대전때 석유 금수조치와 미국의 경제 고사작전이 펼쳐지면서 발등에 불이 붙은 일본이 진주만에 폭격하면서 아직까지도 미국의 초우량 체급에 맞지 않는 미주대륙에서의 관망자 역할을 끝내고 인류 역사상 어떤 국가보다도 광범위한 개입과 힘의 투사를 하게 되고 미국 혼자 2차 세계대전의 물자 생산량 40%, 1944-45년 미국의 국방비 > 영프독+소련+이탈리아+일본+중국을 능가하는 어떤 세력도 범접할수 없는 국가로 떠오르게 되면서 반은 자의 그리고 반은 타의로 세계체제의 정점에 오르고 서유럽 식민제국의 모든것을 접수하게 됩니다.
<1922년 유럽에 의해서 지배받던 지역 : 빨강, 유럽 이주민들이 지배하던 지역 : 주황, 비-유럽인 지역 : 파랑>
여기서 접수라는 말에 조금 의아하신분들이 왜 접수라는 말을 썼는지 설명드리자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보죠. 가령 조폭들의 영역 싸움에서도 보면 다른 세력이 물러나고 힘의 공백이 생기면 그 밑의 여러 세력들이 자릿세등에 군침을 질질 흘리면서 투쟁을 하게 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 수준이 아니라 국가도 정해진 상위 정부가 없는 국제정치 입장에서 보면 거대한 깡패들이나 마찬가지인데요. 헌데,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등 세계 85~90% 지역 이상에 영토와 영향력을 끼치던 국가들이 전부 자기 앞가림도 못할정도로 쇠퇴하거나 아니면 아예 국토 전체가 초토화되었는데 그런 자리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바는 다른 제 3의 어떤 세력이 그것을 다 집어삼켰다는거고요.
그리고 그게 바로 미국이 되는것이고 미국은 세계체제의 구조를 다시 복원시키는것은 물론 아예 완성시키기 위해 하나의 제안을 합니다. 이미 세계 해군력 95% 이상에 달했던 미국이라 그 외 전세계 해군이 다 합쳐도 의미없어진 상황에서 해적이고 중소국가 부터 강대국들의 분쟁이고 영토 다툼이고 전부 자기가 커버하겠다는것이죠. 이는 영국이 했던 역외균형자 그러니까 영국은 현재 트럼프 시기 미국이랑 비교해도 소극적인 편으로 자기 본토와 자기 식민지만 신경쓰고 그 외에 세계체제에 큰 영향이 가는것만 일부 개입하거나 직간접적 지원을 해서 일본을 키우듯 그런 역할을 했는데 지금 미국은 자국 영토와 해외 속령뿐 아니라 전세계 항해로를 미군이 순찰하고 그외 다툼을 중재하겠다는 선언을 한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강대국들이 전부 반겼을리는 없죠. 그들도 이전에 나름 한 방귀끼던 국가들인데 자신들 입장에서 변두리였던 국가가 갑자기 턱 등장해서 내가 이 모든걸 결정하겠다고하니 탐탁치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2차대전 이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가져온 수준의 전쟁 격화를 막을 엄청나게 강력한 세력이 필요로 했고 그들이 미국의 의사에 저항할정도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반은 자의, 반은 타의로 영국을 위시로한 이전 세계체제의 중심이었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이 아직까지는 완전히 갖추지 못한 외교-정치적 자산과 해외 거점등을 빌려주는것을 제안하게 되죠.
그럼에도 미국은 이미 오래되고 대공황시기 블럭경제를 구축하며 자신들만의 세력권을 형성하려 했던 유럽의 식민제국들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네덜란드의 경우 전쟁을 거의 다 이기고 마지막 결정타만 날리면 되는 수준이었으나 네덜란드 정부가 운용하는 자금과 네덜란드군에 소모되는 돈, 원자재 모든것을 미국이 지원해주었고 결정적으로 또 다른세력인 소련이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이런 독립세력들을 지원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려고 한만큼 서유럽의 제국들을 해체시키며 동시에 단일세계경제체제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단의 제목과 같이 말그대로 소련이란 세력때문에 반쪽짜리 세계체제가 될 공산이었습니다. 왜냐면 세계 정세에서 격리되어있던건 물리적 장벽 즉 바다로 인해 격리되어있던 미국만이 아닌 정치 / 경제 적으로 세계체제의 주도세력인 서구세력에게 반강제적 봉쇄를 당한 소련으로 인한 대형곰이 2차대전 덕분에 철장에서 풀려나왔기 때문인데요.
그리고 이 두국가는 양대 진영을 구축하고 전근대의 최대제국인 몽골제국부터 근대뿐 아니라 인류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제국인 대영제국조차 이루지 못했던 5대양 6대륙에 대한 전 지구적인 힘의 투사가 가능한 국가였습니다. 한 때 질서를 이끌었던 서유럽 등은 비교하기 남루한 수준으로 정치, 문화, 경제, 이념, 외교, 군사, 기술 7방면에서 전세계적으로 압도적이며 이들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전세계의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는 변방이라도 영향을 받는도저히 전례가 없는 수준이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자유주의 vs 공산주의 진영>
그래서 사람들은 해당 국가들에게 '강대국 이상의 무언가' 를 붙여줘야 된다고 하였고,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William T. R. Fox는 미국, 영국, 소련등이 '초강대국' 이 되 국제질서를 주도할것이라 했으나, 영국은 금세 미국의 2차대전 이후 영국의 거점들을 미국이 점거하고 미국의 경제에 의존하는 사정상 이에 대해서 어쩔수없었던 영국은 제국의 해체를 하여 사실상 탈락해버리고 이 용어가 특정 의미를 부여하며 지칭하게 된것은 사실상 미-소가 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된 이후는 미국이 유일한 상황으로 언론에서 재미로 떠드는것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학술적 의미에서 미국 이외 중국이나 유럽등을 지칭하지는 않는 상황이였죠.
특히 지금이야 해체되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소련의 경우 만주전략공세작전 이후 중국 국민당에게 소비에트 근거지를 대부분 파괴당한 중국 공산군에게 무기를 넘겨주었고, 북한에 진군해서 소련 군정을 세우면서 사실상 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의 사실상 창조주이자 큰형님 국가가 됩니다. 사실 소련이 원했던건 오히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적절히 분열해 대립하고 만주와 북중국 일부를 가진 중국 공산당이 소련에 의존해서 동유럽 위성국같이 되는 구도였는데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집어삼키게 되면서 소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공산권의 대국이 또 하나 생기게 되고 이는 추후 말씀드릴 공산권의 분열과 북한의 중국-소련 줄타기 외교의 씨앗이 됩니다.
그래도 그 당시까지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에 유라시아 55%의 면적을 차지한 위성국까지 합칠시 몽골제국보다 더 거대한 사상 최대의 대륙세력이 들어서면서 '단일' 세계체제라고 부르기 애매해지고 본격적인 왕좌를 쓰고 대대적인 세계화를 진행하기에 걸림돌을 치우는것을 목표로 합니다. 허나, 소련이야말로 미국에게 랜드리스를 대거 받아보고 미국과 협력해보면서 미국의 초월적인 국력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았던 국가이기도 했기에 미국과의 충돌을 단순히 피하는것을 넘어 세계 경제체제의 주춧돌이 되는 브레튼 우즈 협정에서 파운드를 포함해 그 이전 어떤 기축통화보다도 강력한 통화가 될 달러와 그에 기반하는 세계 체제인 브레튼 우즈체제에 대해 소련도 마지못해 찬성하게 되죠.
왜냐면 당시 미국의 국력이란 경외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석유 생산량 67%부터 식량 생산량 50%에 세계 경제 비중 41%로 대영제국 + 프랑스 제국 + 독일 + 소련 + 이탈리아 + 일본 + 중국 등 모든 강대국의 총합수준이였고, 대륙간 비교해보아도 미국 혼자서 유럽 + 아시아 합친 즉 당시 세계 인구 88%를 차지하는 지역보다 세계 인구 5~6% 수준이었던 미국 하나의 경제규모가 더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가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했는데 실제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세계에서 차지하던 GDP 비중을 꼽아서 보자면 이러한데 :
17. 스페인 제국 : 4.6%
16. 프랑스 식민제국 : 5.4%
15. 고대 이집트 : 7.3%
14. 러시아 제국 : 8.3%
13. 이슬람 제국 : 10.3~12.0%
12. 소련 : 12.7%
11. 마우리아 제국 : 21~23%
10. 대영제국 : 24.28%
9. 몽골제국 : 25.21%
8. 한나라 : 25.77%
7.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 24~30%
6. 로마 제국 : 26.01%
5. 명나라 : 28.82%
4. 당나라 : 29.1%
3. 송나라 : 31.44%
2. 청나라 : 33%
1. 미국 : 40~41%
인 수준으로 미국은 저번에 국제정세글에서도 한번 설명을 드린적이지만 2020년 현재기준으로도 유럽-중동사에서 로마 이외 비교가 불가능할정도로 몽골제국과 비슷한 세계 경제 비중을 차지하고 전성기 기준으로는 대왕고래와 같이 현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고대 초거대 공룡들보다도 덩치가 훨씬 큰 그런 국가입니다.
<2011년 달러 기준 환산 세계 경제규모 변화>
특히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근현대는 경제가 변하는 속도가 단순 인구규모와 토지의 면적만이 아닌 산업과 혁신등에 크게 좌우되는만큼 변하기도 빠른데 저만한 덩치를 유지한다는건 매우 놀라울 수준이고요. 왜냐면 고대 1년 한나라시절에서 송나라 시절까지 GDP 변화는 고작 14% 수준이였습니다. '1000년동안 경제 규모 변화가 서기 1년대비 14%'였다는것인데 한국의 1973년도 '1년 경제성장'이 '14.8%' 였습니다. 한국이 사상 최고 빠른 성장을 한 국가이지만 그래도 고작 1년의 성장율이 1000년간의 성장율보다 높다는것은 얼마나 근현대 변화가 잦고 그만큼 그 위치를 유지하기 힘들다는것을 시사하죠.
실제로 1820년대에서 2019년까지 세계경제는 약 8,720%가 커졌습니다. 약 200년이란 기간에 이만큼이나 커진것이고 미국은 이러한 세계체제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물론 세계 대공황 시기의 대단절 현상이 세계화의 완전한 종언을 의미하지 않았듯이 영향을 아예 안끼친것도 아니라 1차대전 시기 영국이 주도하던 세계체제 수준의 무역과 경제 교류로 회복하는것은 1970년대 중후반에 가서 얘기입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미국은 정치-외교 자산도 서유럽이 수백년간 쌓은것에 비하면 부족함이 없잖아 있었기에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의 것을 시나브로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고 이미 이전되어가던 금융 연결망에서의 최종 종착지이자 중심으로서의 지위도 194~50년대까지만 해도 공유하던것을 1960~70년대 이후는 아예 미국의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요.
거기에 미국은 영국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논급한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미국은 영국처럼 필요한때 해양전력과 상륙군이 와서 치고 빠지는 스타일이 아닌 아예 유럽대륙부터 현재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아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등까지 그 근본이 대륙과 해양에서 비롯되었고 영국 수준으로는 전쟁의 억제가 안된다 싶어서 해군이 전 세계 대양을 누비는 동안 미 육군은 전 세계의 육지에 주둔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런 모든것에도 불구하고 소련이란 적은 막강한 적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소련은 1960년대까지 미국과 현격히 나던 핵전력의 격차를 줄이고 나중 가서는 미국보다도 핵 무기를 많이 만들어서 문화, 경제등 여러면에서 미국에 뒤쳐진다 할지라도 미국이란 국가를 확실히 파멸시킬수 있던 국가였고 이념적으로도 다른 한축을 이끌며 미국과 서구의 자본이 동구권을 위시로 한 공산권을 하나로 엮는 단일 세계경제체제를 구축하는데 차질을 겪고 있었죠.
게다가 소련의 계획경제체제는 현재 결과물만을 보고 실패라고 인식하는 현대인의 인식과는 전혀 다르게 50년대까지만 경제 교과서에 실릴정도로 고성장을 구가하는 우수한 체제로 받아들여졌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현재 경제 교과서에도 나오는 저명한 경제학자인 폴 새뮤얼슨조차 소련이 미국을 추월하는건 시간 문제이며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후반대 안에는 이 궤도선만 따라간다면 능가할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심지어 이 내용은 1980년대 후반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이런 우려속에 60년대 이후 미국이 소련이란 그야말로 궁극의 적수를 상대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을 포섭해야했고 전장이 되어 국토 전체가 폐허가 된 대륙 유럽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혹은 완전히 초토화되진 않았더라도 재정적으로 사실상 파탄에 이른 영국등의 동맹국들을 지원하면서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등이 태평양과 아시아로 진출하는것을 막기 위해 일본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독자분들이 거주하고 계신 한국에 대한 경제와 안보 지원을 세계 최대이자 역사상 가장 큰 시장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의 시장을 동맹국들에게 개방하고 달러를 주고 번영하게끔 하죠.
<소련의 미국 경제 추월 시점>
하지만 아무리 미국일지라도 수십년간 그것도 농업시대도 아니고 무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시금 1910년대 초 근대 절정기 수준으로 돌아갈정도로 높아지고 있는데 혼자서 자기 인구 몇배에 달하는 동맹국들을 부유하게 만드는것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했고 동맹국들이 설령 현재 중국이 하는것과 같이 일본 한국등이 관치경제로 자국 민간기업에 온갖 특혜를 주고 질이 약간 조악하지만 가성비 좋고 싼 제조품들을 덤핑하며 통화 정책을 수출에 유리하게 절하하는것등 이 모든것을 소련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의 달러와 세계체제의 복원 그리고 더 나아가 완성을 위해서 이런것을 사실상 묵인하죠. 이렇게 약 15년을 굴러가다가 60년대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덫이라고 할만한 베트남이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X. 미국 (II) : 전후 복구, 페트로달러 그리고 3차 산업혁명
미국은 2차대전과 한국 전쟁까지 지속된 전쟁을 거친 이후 평시 경제로 안정화하는 상황으로 되돌리는 한편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안보 또한 보장하면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자국의 시장을 동맹국들에게 이용하는것을 허가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왠 걸, 처음에는 호치민이랑 손을 잡는거까지 했던 미국이 프랑스가 이거 안하면 공산화 되는데다 자국 식민지에 대해 이 정도로 방관한다면 안그래도 프랑스의 핵개발로 관계가 심상찮았는데 아예 동맹을 나가리 시키겠다는 말조차 하자, 국제정치의 힘의 논리에 따라 결국 프랑스의 손을 들어주고 참여하게 되는데요. 어차피 프랑스 식민제국 자체는 해체 수순을 걷고 있어서 미국에게 도전할수 없는 위치라 더 밟을 필요도 없었고, 더군다나 서유럽의 메인 플레이어중 하나인 프랑스란 강대국이 아무래도 동남아 정글의 베트남보다는 우선시되는건 미국입장에서 어쩔수 없는 측면이 있었는데 이게 미국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으로 다가오게 되죠.
베트남은 미국이 아니면 중국은 당시 호치민이 프랑스보다도 경계하는 상대인데다 미국과 맞설 수준은 전혀 아니었고 결국 소련말곤 손을 벌릴 상대가 없었고 소련은 미국을 한번 엿먹이는겸 스푸트니크 쇼크로 미국에게 어느정도 미국조차 기술과 핵전쟁에서 (실제로 미국이 압도적으로 앞섰다는게 나중에 밝혀졌지만) 밀린다고 위축되었기에 기꺼이 응합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 스타로 치면 해처리는 전혀 공격은 안하는데 탱크와 배틀로 오는 저글링만 왕창 잡아대는 희한한 전술을 쓰게끔 만들죠.
그렇게 미국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휘말리게 되는 베트남전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이건 미국의 국운을 거는 전재도 아니었고 말그대로 린든 존슨이 말했던것처럼 언제든 버려도 되는 지역인데 한국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맹국들에게 보여줄 신뢰와 위신의 문제 그리고 지역내 공산화와 소련의 팽창등이 원인으로 1-2차 대전때처럼 화끈하게 미국 국회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전시 국채를 무한대로 국민들에게 강제하는게 가능한게 아니였기에 결국 미국 행정부내에서 해결해야되었고 그건 연준을 통해 달러를 찍어내 정부가 편성한 국채를 사주는 이런 행위로 자금을 조달해야되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높지만 2차대전과 비교해서는 4분의 1수준도 안되는 GDP 대비 8~9% 군비를 쓰니까 어쩔수 없었던 방책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땜빵식으로 막는 행위는 애시당초 오래갈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달러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면서 35달러 = 금 1온스였던 이 가치가 의심을 받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전부터 안그래도 다시 세계체제와 경제적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금융 연결망도 강화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 투기 자본이 각국의 기업은 물론 정부까지 통째로 털어먹는것에 대한 외환 방어 및 미국이 계속 달러 값을 낮추는데에 대한 불만과 그 돈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의구심까지 겹쳐 샤를 드 골이 했던 유명한 정책은 달러를 전부 팔아 금을 가져오는것을 시행하고 다른 국가들 마저 이를 따라하거나 답습할 조짐이 보이니 닉슨대에 들어 그 유명한 금태환 금지와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투자가들이 말하는 페트로 달러 체제가 열리게 되죠.
<헨리 키신저와 당시 사우디 석유 장관이였던 자키 야마니>
페트로 달러는 문자 그대로 Petroluem 그니까 석유와 Dollar 달러를 연동시킨다는것인데 이전에는 금이 담보가 되어주었다면, 석유가 일종의 프라이싱을 하면서 산유국들이 달러로만 대금을 받게 되면서 당시 산업을 굴리고 경제가 돌아가기 위한 필수재인 에너지를 구매하는데 달러가 필수가 되었고 그로인해 미국은 소위 연금술사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파운드 이전의 레알 데 오쵸나, 네덜란드 길더, 베니스 두캇이나 이슬람의 디나르, 로마의 데나리우스등은 전부다 아예 금이나 은으로 만든 금화나 은화였고 파운드조차도 fiat money 그러니까 종이 화폐임에도 불구하고 금본위제로서 금보유량만큼 발행량이 찍어낼수 있었는데 달러는 어떤 제약도 받지않고 인플레이션을 전세계로 전가할수 있는 전 지구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자기 마음대로 찍어내게 되었으니 이게 돌맹이와 나무를 금을 만들어내는 연금술과 다를게 무엇이겠습니까?
<세계 경제 규모 vs 세계 중앙 은행들의 금 보유량>
이는 물론 장점들도 있습니다. 일단 경제 정책의 양대축인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에서 금본위제는 금에 무조건 제약을 받기 때문에 정부에게 주어진 통화정책의 재량이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의 발굴량이 근대 초기까지만해도 경제가 그렇게까지 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따라갈수 있었다면, 현대 경제는 그야말로 배수단위가 아니라 아예 지수단위로 팽창을 해서 도저히 전 지구에 있는 금의 매장량을 다 합산하더라도 그게 경제규모에 비하면 그저 극소량에 불과하다는점에서 사실상 금본위제는 이런 근원적인 문제점으로 도태될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미국의 막대한 달러 발행으로 더 가속화 된 측면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죠.
허나, 이는 후술할 국가뿐 아니라 기업과 개인까지에게 영향을 미칠 양적완화와 그로 인한 초양극화등의 부작용을 더 가속화시키는 결과도 낳으니 일종의 양날의 검이란점에서 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여간, 미국은 이렇게 해서 인류가 수천년동안 사용했던 실물과 귀금속에 기반한 화폐를 날려버리고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의 손아귀에 완전히 통제할수 있는 불환지폐 달러로 단일 세계경제와 세계체제의 완성을 더 가깝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미국과 독일이 주도했던 2차 산업혁명에서 더 발전하고 선진국들에서마저 거대한 기술진입장벽을 현재에 생기게 만든 3차 산업혁명의 씨앗이 미국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의 시작은 그 유명한 IBM의 컴퓨터와 함께 바로 아파넷(ARPAnet)으로 미국 국방부에서 미군의 전산 연결망으로 사용할려고 했던것인데 곧 현재 우리가 쓰는 인터넷의 전신이 되며 곧 정보혁명의 초석이 됩니다. 당시 이 연결지점이 되었던 대학들에서, 이건 정부와 군사용으로만 쓰기는 너무 아깝다 생각하여 대중화와 상업화를 시도하고 이것은 계속 퍼져나가죠. 미 정부도 사실 이것을 통제하지 않을려고 했던것은 아니나 미국 정부는 이미 퍼진것을 사실상 막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전략을 좀 바꾸게 되죠.
어차피 한국, 일본, 독일 등 동맹국들의 싼 값에 들여오는 상품들도 사줘야 되고 당장 거대한 혁신이 없는 이상 임금도 당시 미국이 높은 입장에서 산업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던 와중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르게 됩니다. 차라리 민간에서 이것을 통해 지속적인 혁신과 새로운 신산업을 일으킬 창조적 파괴를 일으키면서, 국가 전략적인 관점에선 이 인터넷을 이용해 적국 특히 독재국가들에게 불리한 정보와 문화를 퍼뜨리고 미국이 현 인류가 듣고, 보고, 생각하는것에 대한 표준을 정립하게 되는 더 거대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됩니다.
<즈베그뉴 브레진스키>
그러면서 동시에 1970년대초에 닉슨과 키신저의 주도하에 미국의 전대 패권국인 영국이 아주 잘 써먹었던 나눠서 지배하라는 Divide and Rule을 공산권에도 적용합니다. 중소분쟁으로 소련에 극도의 위협감을 느끼고 위구르와 만주에서 차례 차례 패배하고 북경을 떠나 성도에서 항전하는 계획까지 세울정도로 수세에 몰렸던 자본주의 진영에 그리고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고립된 중국에게 손을 내민것이였죠. 이는 실로 유효한 전략이었습니다. 스탈린이 북한과 한국이란 장기말을 통해 미국의 힘이 서유럽에 집중되는것을 막고 아시아쪽으로 진이 빠지게하여 동구권을 안정시킨것의 역이나 다름이 없었죠.
그러면서 닉슨 이후 인권외교로 알려진 카터시절 키신저에 버금가는 현대 외교사의 거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중국과 협력해서 소련을 양방향에서 견제하는 한편 소련이 미국에게 안겨줬던 굴욕과 손해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하기 위해 소위 Bear Trap 곰을 잡는 덫이라고 불린 소련의 아프간전 침공 방관 및 유도 작전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이는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중 하나인 냉전의 종말에 매우 밀접한 사안이였습니다.
XI. 미국 (III) : 냉전 종결과 일본의 부상
미국은 CIA등을 통해 소련의 방첩조직인 KGB가 일종의 과잉 반응과 판단 착오를 일으키게끔 정보 공작을 시도했고, 이는 적절히 먹혀들어가 '친소' 정권 이었던 아프간 정부를 소련이 밀어버리고 중국이 AK-47 짝퉁을 무단으로 제조하면 미국이 파키스탄등의 경로를 통해 아프간의 이슬람 게릴라 집단인 후에 일부는 탈레반이 되는 무자헤딘을 지원해주고 정규전력은 분명히 다 파괴시키고 압도적인 교전비를 냄에도 도저히 전쟁은 안끝나는 베트남전보다 더 골치아픈 전쟁이 되었고 이것은 소련의 안그래도 악화하던 생산성과 경제를 더더욱 나락으로 빠뜨리고 소련 사회전반에 염세적인 분위기가 돌게끔 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세계 체제와 경제의 중심이자 정점에 있다는것을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195~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국내 시 오브 런던의 은행가들이 쥐고 있는 금융 권력을 완전히 가져오진 못했는데, 미국은 70년대후반 80년대 들어서 서유럽의 정치 외교 자산뿐 아니라 금융 패권마저도 접수하기 시작하며 산유국인 사우디를 이용해 소련이란 국가의 장기적 해체 플랜을 세우는데요.
위에서도 이미 논급했듯이 현재 미-중 관계처럼 미국이 직접적인 접점이나 연결망이랄게 무역이나 금융자본시장에 있는 미국 자본 및 서방 생산기지등이 전무했으므로 사실상 간접적인 공격과 압력을 넣을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크게 4가지 수단을 사용합니다. 나열해보자면 :
1. 소위 대중에는 스타워즈로 널리 알려진 SDI 프로젝트등의 군비 증강으로 소련의 재정 출혈 증가,
2. 중공업과 기초과학이 강하지만 경공업이 약하며 석유등 원자재수출로 자금을 충당한다는점을 노려 사우디등과 협력해 석유 증산으로 인한 유가 하락으로 소련 경제 타격,
3. 문화와 인권등 가치관의 표준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미국의 소프트파워와 소련 및 공산권내 시민운동과 노조세력의 결합유도
4. 세계경제와 금융의 중심으로서 NSDD-66 작전 시행으로 금융, 기술, 석유에 대한 핀포인트 제재
일단 첫번째는 말그대로 소련에 대한 군비 압박이었는데, 이는 CIA에서도 나온 결과지만 소련은 70년대까지 미국보다도 더 많은 군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 평균 4%고 후반에 좀 군비가 경제력 대비 올라갈때 7%였습니다. 이는 미국의 경제가 당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고 베트남전부터 경제-사회적으로 후유증을 꽤 많이 겪던 상황에 카터의 외교 정책 노선상 군비를 크게 쓰는편이 아니어서 소련이 이 부분에서 압박을 덜 받은 부분이 있으나 레이건은 공산주의 국가의 특유 국영기업의 비효율성과 지금 중국마저도 공유하는 감시국가의 특성인 비대한 치안 유지 비용등을 생각할때 이 군비 증강은 안그래도 쪼달리는 소련의 재정에 치명타를 가할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군비를 증강하고 특히 당시 기술력으로는 수조달러를 퍼부어도 어림없을거라고 했고 실제 소련에서도 10분의 1 비용이면 미국의 핵 방어 체계인 SDI를 뚫을수 있을거라고 말한것처럼 그 때 무기의 실용성으로만 보았을때는 크게 효용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었으나, 이는 이념과 체제의 대결을 펼치던 소련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는 경쟁이었고 이미 아프간전으로 돈을 많이 날려먹는 와중에 1970년대까 1700~1800억 달러를 넘나들던 군비가 3000억에서 3300억달러까지 증가하면서 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GDP의 약 15%가 되고 거의 경제 자체가 마비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죠.
그리고 다음은 공산국가의 특징으로 소련의 모델을 그대로 이식받은 중국도 개혁개방이전 최고 선진 경제지역이 일제가 적산하고 간 만주지역내 중공업 단지였던것과 같이 기초과학등은 강하고 군사 관련 물자와 국가 인프라를 위한 대규모 생산은 꽤 뛰어나지만,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기술 측면에서는 매우 약했습니다. 그래서 현 중국 총리 리커창이 2010년대 초에도 우리는 볼펜알이나 연필심도 제대로 생산못한다면서 일갈한적이 있고요.
하여간 이런 국가전략과 전쟁에는 유용하지만 평시에는 일정 성장이후 다시 산업에 재투자와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소련 그리고 현재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석유와 원자재에 의존해서 정부의 운영자금을 충당하는 경제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미국은 이것을 소련의 또 다른 약한고리라고 간주했고 그에따라 미국의 동맹국이자 석유 최대 생산국들중 하나인 사우디 아라비아와 손을 잡고서 유가 증산으로 30달러대의 유가를 3분의 1수준에 불과한 10 달러로 폭락시켜 소련이 생산을 하더라도 도저히 수익이 못남게 만들어 버리는데 소련은 1달러당 10억불 그래서 연간 200억불의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문화부분에서 이미 미국은 전간기때부터 유럽 영화시장 90%를 장악하고 미국의 재즈등의 대중문화와 의복 양식이 서유럽 중산층까지 장악할정도로 근현대사뿐 아니라 인류사를 총망라해도 그야말로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없는 압도적인 문화력을 지녔기에 이걸 또 소련을 향한 창으로 쓰였고, 폴란드 출신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와 자유노조 운동의 수장인 레흐 바웬사와 긴밀히 협력하여 소련을 제외한 동구권과 바르샤바 동맹의 최대 전력중 하나인 폴란드에 소위 말하는 문화 침투를 시키게 되죠.
이런건 폴란드 뿐 아니라 그외 동구권과 소련 본토 지역에도 자유 라디오 방송부터 여러 매체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방의 소식과 문화란 토양을 동유럽에도 깔기 시작해서 냉전 말기에는 서방의 락 밴드등이 초청되는등 그런 활동들 전부가 하나의 문화적 세계화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타국의 사상과 체제를 흔드는 수단이기도 하죠. 그래서 현재 중국 당국이 별거 아닌거 같은 드라마나 무해해보이는 영화에까지 극도로 히스테리 현상을 보이는것이고 말입니다.
<냉전시기 공산주의 국가들과 현재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
마지막으로 사실상 전 지구에서 세계체제와 금융 연결망의 중심인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수단인 NSDD-66 작전입니다. 용어만 보면 무슨 첩보작전 용어 같지만 길게 풀면 국가안보결정지침의 줄임말로서 국가 대전략 차원에서의 소련 경제 붕괴 작전인데요. G7을 위시로한 서방국가들과 공도보조를 취하고 소련산 천연가스 매입 중단 및 신규계약 금지와 노르웨이등의 북해산 유전 활용등 대체수단 강구와 함께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옥과 런던에서 소련 채권금 리를 대폭 올려 상환 부담을 가중시키고 위험성이 높은 단기 채권에 의존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린 유가 하락 시기 소련뿐 아니라 세계의 최대 곡창지대중 하나인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에서 흉작이 일어나서 곡물이 부족해졌기에 곡물을 수입하고 약한 경공업 때문에 경공업 제품들을 수입했어야 되었는데 소련 루블은 공산권에서나 통용되지 거기를 벗어나 세계 경제체제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는 현재 중국의 위안화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비기축통화였고 큰 고객이던 유럽에서의 석유 수입 감소 내지 중단은 크나큰 경제 충격으로 다가왔고 마침 체르노빌까지 터지는 악재의 연속이 겹치면서 소련 경제 붕괴의 가속화를 이끌게 되죠.
그렇게 해서 1980년대 말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면서 통제권을 상실해가자,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것을 기점으로 하여 동구권 전체가 무너지고 2년후 소련 그 자체마저 무너지면서 전세계 소련을 종주국으로 삼았던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전반에 걸친 대다수의 국가들은 무너집니다. 개혁개방을 하거나 마가린 공산주의라고 불릴정도로 극단적 민족주의가 공산주의만큼 강하거나 혹은 거의 대체하는 수준이었던 동아시아의 중국, 북한, 베트남과 중국-베트남의 보호국에 가까운 라오스 인민 공화국 그리고 오히려 미국의 차단으로 고립되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소련과 접점과 연결망이 많지 않았던 쿠바등 최소 3~40개에 달하던 수많은 공산주의 / 사회주의 국가들이 고작 5개의 국가 정치-경제 의존성이 절대적인 라오스와 북한을 고려할시 실질적으로는 거의 3~4개국가 수준으로 줄어듭니다.
<미국의 무역적자중 90년대 대일적자는 현재 중국의 그것보다 컸다>
이렇게 세계체제는 다음 주자로 넘어갈때 끊기는듯하면서도 후대로 전승되고 연결되어 더 크게 불타오르는 올림픽의 성화와 같았습니다. 게다가 세계체제란것은 물리적인 지배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 견고하고 끈질긴 연속성을 지녀 수천년간 이어져오던 상위로 가는 경제, 문화, 정치의 거대한 문명적 흐름 결정체기도 했던만큼, 소련은 미국 하나가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세계의 거미줄같은 연결망을 상대하는거라 더 버거웠던 점에서 어느정도 승패는 싸워보기도 전에 났다고도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에서 미국 대통령들부터 최고위층들까지 지금 중국과 다르게 어떤 경제, 금융 제재가 불가능한 소련이 핵공멸이 아닌 이상무너질리는 없을거라 여겼고 이런 양극체제는 거의 반영구적이라고 받아들여진만큼 냉전 붕괴와 세계체제의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완성에 가깝게 도달할것이라는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죠.
그리고 이 냉전붕괴 시기와 동시에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도 경쟁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현재 일본 장년층이 짱구 극장판의 어른제국의 역습에서와 같이 향수를 느끼는 버블시기의 일본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일본은 현재 중국과 매우 유사하면서도 오히려 더 괄목할만한 부분을 보여주는데요. 중국이 포브스에서 사실상 공산당 비호하에 내수를 독점해서 순이익은 낮지만 수입이 엄청난 그런 국영기업 위주로 도배된거에 비해 당시 일본기업은 그런 국영기업과 대형은행들도 즐비했으나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등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도 최선두를 달리는 기업이 많았습니다.
세계 10대 시총 상위권중 7개 이상이 일본것이고 50대기업중 34~35개가 일본이 차지했다는것은 인터넷에 나도는 소위 '일본 버블경제의 위엄.jpg' 이런식으로 나도는 짤방을 하도 많이 보셔서 익숙해지셨을정도니 중언부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기업부문을 제외하고도 소득이 사실상 주요국중 세계 1위를 찍고, 해외 자산도 세계 1위를 달성하며 미국이 일본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고작 100~200억달러 수준의 적자를 내거나 혹은 흑자를 간간히 내기도 했다면 70년대말 - 80년대초에는 이게 규모가 늘어서 2000억달러 무역적자가 나올정도가 되죠.
<버블시기 일본과 중국 GDP 대비 부동산 시장 규모 비교>
그래서 실제로 이 때 미국은 이미 영국과 서유럽에서 가져오기 시작한 금융 통제권과 더불어 위에서 말씀드린 3차 산업혁명의 중점이 되는 IT 산업등 신산업 위주로 육성하면서 제조업 부분에선 미국과 선린관계를 가져가던 당시 중국과 그리고 냉전 이후에는 동구권등에 대한 투자 및 아웃소싱으로 굴뚝산업이라 불리는 제조업의 비중과 단가를 줄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는게 제조업들은 고용의 창출은 많이 해서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수익과 경제규모의 팽창면에서는 이미 침체 내지 감소수준이었고, 그런걸 100개 팔아도 고부가가치 서비스나 상품을 5개 정도파는거에 비해서 미미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매출 측면에서는 현재도 폭스바겐이나 도요타, 월마트등이 최상위권에 위치해있습니다만 순이익면에서는 수십위로 밀려나는 현상이 그래서 벌어지는것이고요.
그런데 일본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 2019년 9월달에 버블 일본경제와 중국 경제 등 동아시아 모델을 지적하는 기고문에서 지적되었듯이, 인프라의 과잉개발의 즉 토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비중 즉 이것은 부동산 자산 버블로 내수 경제를 띄우는 한편, 동아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원자재와 식량의 자급자족 불가로 이런것을 해외에서 사와야 했기 때문에 미국-유럽등에 팔아서 외화, 한 마디로 달러를 가져와야했는데 일본의 록펠러 타워 인수부터 소위 일본에 대한 공포증 줄임말로 공일증이 생기고 있어서 이것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제가 짚어드렸듯이, 이런 산업들은 미국-유럽에서 120~130년전부터 해오던 소위 전통산업이라 성장이 크게 없었고 나눠먹을 파이 지분을 계속 뺐어먹어야 겨우 살아남는 제로섬 경쟁이 되기 일수였는데 수익도 별로였죠. 그래서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일본 대장성은 두가지 방책을 세웁니다. 하나는 부동산버블 대신 주식 버블을 키우는 한편 2차 산업혁명의 쌀이 철강이었듯이 3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반도체가 될 것이라는걸 파악하고 그쪽을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하에 육성하기로 한것이죠.
그렇게 해서 일본은 일반 경공업 및 중공업 제품도 자기네 국산만 쓰면서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도 자국산만 쓰는걸 넘어 일본 관료와 정치인들과 서로 쿵짝하는 정경유착하 보조금을 지원받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가성비로 쓸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어느정도였냐면 1989년 기준 상위 10대 반도체 회사중 1~3위가 NEC, 도시바, 히타치 였고 그외에도 5,6,8위에 후지츠 미츠비시 마츠시타등이 있었고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57%에 달했고, 인텔은 1985년에 아예 D램 시장에서 손을 들고 백기투항까지 해버리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런 수준이다보니 미국입장에선 뚜겅이 열릴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로 수출 가격을 절상해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독 유도하는 한편, 일본내 외산 반도체 비율을 최소 20%이상으로 올려야 된다는 1986년 미일반도체 협정을 맺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세는 꺾일 여지가 안보여 앞서 말씀드린 1989년 1990년도 까지만해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1991년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일본의 기업들이 1~2위권은 지키고 있었지만 3위권등은 추격당하는등 그 조짐을 보이다가 1993~1994년도 이후부터는 미국에게 1위권등을 내주고 시장 점유율이 점진적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미국은 고부가가치 산업 및 핵심기술에 대한 거의 독점수준으로 3차 산업혁명을 단독으로 주도할 계기를 맞게 되었죠..
<일본 GDP가 아시아 전체보다 컸을 시절>
반면에 일본은 내수 진작을 위해서 유도해 한때 미국 증시 규모보다 커졌던 일본의 니케이 버블도 터져버리고 그 충격파가 이후 부동산에도 서서히 전가되면서 약 1990년대 중반에 미국 경제의 73%까지 따라잡고 그 시절까지만해도 그래도 일본이 미국을 최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초에는 제친다는 말이 나오다가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자 자산의 6~70%이상을 차지하고 도쿄만으로 미국을 사고 덴노가 거처하는 황거만으로 캘리포니아를 산다던 그 부동산 버블이 펑 터져버리면서 모든게 골로가고 거대한 정부 지원을 통한 가성비로 경쟁해왔던 상당수의 일본 기업들 및 그리고 아예 정부 소속인 국영기업들은 순식간에 세계 100대기업등의 순위권에서 전부 탈락하게 되는 참사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미국은 장장 50년 가까이 전 세계를 체스판으로 놓으며 정치-이념-군사에서 싸운 유이의 초강대국중 하나인 소련을 붕괴시켰고, 2020년 현재까지도 미국의 경제 규모 대비 가장 거대했으며 주식과 해외자산에선 미국조차 능가했던 일본조차 경제전쟁한지 약 15년만에 미국에게 도전할수 없을정도 수준으로 떨어뜨리는데 성공했고 이것은 그야말로 세계체제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국가만이 휘두를수 있는 권능이자 전가의 보도에 힘입은 덕택이였습니다. 물론 이런 지위도 미국이 처음에 유럽에게 가져오기 위해서 장고의 세월을 참으며 유럽 식민제국 전체보다 커질동안 군사-정치적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줄인 진정한 의미의 도광양회를 했기에 날로 획득한건 아니지만요.
여하튼 미국은 드디어 세계의 공산권 붕괴와 경제적 라이벌의 침체로 마지막 경제 세계화의 스퍼트를 뛰는 한편 국제기구가 설립된 이후 어떤때보다 강력해지게끔 조력해 한 때 NGO등을 포함해 초국가단체라고 교수와 전문가들이 논했을정도로 국가간의 국경을 초월하는 정치 기구들의 힘의 향상 즉 세계화의 마지막 단계라 일컬을수 있는 정치적 세계화의 시초를 닦게 됩니다.
XII. 미국 (IV) : 경제적 세계화의 완성과 정치적 세계화 - 중국의 편입 그리고 에너지, 식량, 통화 패권
경제적 세계화의 완성은 중국과 공산권의 붕괴를 놓고 말하기 힘들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지구상 가장 거대한 대륙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의 6할에 가까운 지역이 한 곳은 철의 장막으로 다른곳은 죽의 장막으로 막혀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장막이 걷혔고 70년대후반 1910년대초 이전의 무역 비중 고점이던 29%를 넘어 1980년대엔 36% 그리고 냉전의 종결 이후 금융위기 직전까지 계속 치솟아 올라 60.77%에 달하는 경제적 세계화의 절정이자 완성을 맞이합니다.
이 뿐 아니라 미국이 아닌 미국과 유럽 일본등의 미국 동맹국 즉 서방 세계의 세계 경제 비중은 90년대말 2000년대초 심지어 그 제국주의 시대 정점인 1913년 시절의 미국 + 유럽의 57~58%보다 높은 72~73%에 달하면서 어떤 세력도 이에 대해 '도전' 이란 단어를 꺼내는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의 입지를 다집니다. 동시에 미국-유럽등의 서구 자본등은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농업, 공업, 유통업등 전 세계가 이 금융 자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안받는곳이 찾기 힘들어졌죠. 특히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태국과 한국등 여러 무역 및 금융 장벽을 허물고 한국만 하더라도 삼성과 같은 주요 알짜기업 외국인 지분이 55~57% 이상이 되는 사실상 모든 경제 주체들을 집어삼키는 작업이 시작되고 그것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자유무역협정이였죠.
GATT체제와 우루과이 라운드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출범한 WTO 체제 그리고 그 북미 전체를 정치적 국경만 제외하고 경제적으로 한몸으로 만드는 NAFTA를 시작으로 해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한미 FTA 부터 나머지 제도적 경제적 국경이라 할 수 있는것들을 전부 허물어가고 이를 조력하는것은 IMF와 WB 혹은 한국어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였으며 정치적으로는 U.N 의 수많은 산하 기구들이 80년대까지 비토를 먹이며 미국의 영향력에 대립하던 공산권이 없어진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경제적 세계화의 촉진 그리고 정치적 세계화 또한 시작합니다.
유네스코의 활동이 이전에도 활발했지만 2000년대 초 더욱 더 가속화되며 세계 곳곳의 문화 유산 정렬 작업이 들어갔고, 미국과 서방의 반대세력이나 세계체제에 맞서는 곳은 철저한 제재와 구속구로 성장에 제약을 걸거나 세계 시장과 자본에의 접근을 차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는 현재 미국이 금융제재의 도구로 자주 쓰는 SWIFT 결제망의 장악이 컸는데 SWIFT는 본래 1970년대 벨기에에서 출범한것이나 기축통화 달러 그리고 그 달러를 좌우하는 연준의 지위상 이런 국제 외환결제망의 지배권을 가지는건 미국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더 나아가 지금은 대립하는거처럼도 보이지만 미국은 당시에 이런 세계경제체제 그리고 정치적 세계화의 시범 모델로서 유럽연합또한 아예 떠민 수준은 아니라도 나름 지원하고 장려했습니다. 특히 유럽 국가들도 어느정도 후에는 정치-군사 통합 얘기도 장기적 목표로 삼았고 자유무역협정보다 더 가깝게 물리적 국경까지 푸는 수준의 결합이였던만큼 미국으로서는 이 세계체제의 종착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이런 방식은 어떤지 지켜볼 기회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거기에 유럽연합에 동구권이 포함되기 이전 이 모든 국가들과 그 외 제 3세계 독재국가들이 미국의 정치체제를 모범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게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1800년대 0.5~1%만의 인구의 정치체제는 1910년대 15% 그리고 1930년대 파시즘의 발호로 9%까지 위협을 받다가 미국이 추축국을 무너뜨리고 약 세계 30%의 인구가 민주주의를 향유하다가 58~60%까지 올라가는 고작 200년만에 극소수의 정치체제에서 세계 과반수의 정치체제로 자리잡게 되죠.
그러나 이와 동시에 미국은 일본의 사례와 서유럽 식민제국의 해체의 개입에서도 보여주었듯이, 동맹국이나 친선국이라고 할 지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크는것만을 두고 보는 국가는 절대 아니기에, 동아시아의 거대국가 중국을 밀어줍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보면 냉전시절에는 소련을 견제하는 견제구이면서 동시에 냉전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유럽과, 일본을 견제하며 미국의 달러를 널리 널리 유통시켜주는 하위 파트너로서 이만한 국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은 90년대까지 막강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중소 공방들을 죄 몰락시켰고, 유럽 최대 제조업 강국인 독일의 제조업 비중 하락폭마저 미국 수준으로 떨어지며, 프랑스와 영국등은 아예 독일과 중국산 수입 상품으로 가득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유럽 국가끼리 유럽연합과 유로화 블록 이후 사실상 단일경제체에 가깝게 유로만 쓰던곳에 중국은 무역대금을 달러로 주고받는만큼 달러를 지속적으로 유입시키고 세계의 달러화 (Dollarization) 의 점진적인 확대를 꾀할수 있게 되죠.
그러면서 90년대말 2000년대초까지 버블이 꺼졌음에도 세계 경제 2위를 여전히 고수하며 아직도 강력한 제조업과 고부가가치 산업에서의 경쟁력을 보여줬지만 일본 경제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던 중저가 제조업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하며 일본이 다시 부활하거나 크지 못하게끔 억제하는 미국이 천안문 사태에 대한 제재도 순식간에 풀고 중국에게 맡긴 임무를 중국은 아주 훌륭하게 해내고요. 그리고 이 와중 중국의 중간재 공급기지로 한국을 설정해 한국을 키워 일본과 한국을 경쟁시키는 위에서 수차례나 언급했던 Divide and Rule을 적용하는걸 잊지 않고요. 위안부나 이런문제에 대해서 미국 정치권이 이전까지 한국 편을 들어줬던건 이런 국제정치학적 셈도 없었다고 보기 힘들다는것이 되겠습니다.
물론 미국도 중국의 이런 제조업 물량 공세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미국은 미국 동맹국들에게 거대 시장을 내주고 신산업을 키우면서 저가 제조업 부문에서는 어느정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미국 동맹국들 대신에 중국이란 최소한 그때까지는 미국의 말을 잘 따르는것처럼 보이던 국가인 중국에게 대신 맡기고 오히려 더 싼 물품을 제공받으며 이미 발전한 3차 산업혁명을 통한 원격 지시와 아웃소싱이 가능해지며 단가를 최대한 낮추고 기업들의 순이익을 올리는 결과를 거두었고 현재 가치 사슬 (Value Chain) 이라고 불리는 그것의 시발점이 되죠. 미국의 달러가 보다 세계화되고 1980년대까지만해도 나름 강세였던 마르크화나 엔화등을 물리치고 유일무이한 기축통화로 군림하게 된 것은 덤이고 말이죠.
유로등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도 결국 달러랑 연동될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더 자세하게 논급하겠지만 이조차도 달러의 아성에 도전해보지 못하고 자체적인 결함으로 무너지죠. 결정적으로 이런 신산업을 키우면서 유통이나 일반 생필품들의 물가가 안정되어 줘야 되었는데 지금 임금의 거의 10분의 1수준으로 월 5~6만원 (50~60만원이 아닙니다.) 받고 일하던 8~9억 이상의 거대한 중국 노동력을 이용해서 그것도 달성했고 IT버블 붕괴 이후 새로운 산업이 재정비하고 일정수준 커지는데까지의 과도기 또한 무난하게 넘어갈수 있었죠. 그리하여 이시기 미국 정부의 독려하 다국적 기업들은 반도체 설계 시장등 고부가가치 산업의 공급 68% 이상을 쥘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은 무역, 금융등의 경제 연결망을 넘어 보다 큰 그림을 그립니다. 사실 이는 이전부터도 시도했던것이긴 하지만 이제 전세계적으로 미국 자본 입장에서 아예 침투가 봉쇄된 구소련을 위시로한 공산권같은곳이 소멸해버린 상황에서 이시기 미국 정부의 독려하 다국적 기업들은 반도체 시장등 고부가가치 산업의 공급 67% 이상을 쥐는것부터 해서 키신저가 1974년도 국가 안보 회의에 논급했듯 '인구 성장을 조절하고 줄이는것을 유도하기 위해 식량은 곧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세계 수출시장에서 옥수수등의 상품 작물에서 40%이상 자국이 지분을 차지하는걸 넘어 더 큰 통제권을 가질려고 하죠.
무슨말이냐면 미국의 중서부 대평원말고도 이 세상에는 많은 비옥한 곡창지대가 있다는것은 아실겁니다. 예를들어 그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분지부터 우크라이나의 체르노젬 흑토 지대등 다양한 곳이 있는데 그곳의 곡물 저장고 및 세계 곡물 유통시장 그리고 곡물을 심기 위한 종자와 농업에 필수적인 농약등 모든 방면에서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장악하게 되는데 비중을 들어보자며 미국이거나 혹은 미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5대 다국적 기업 - 카길 (미국), ADM (미국) , 번기 (미국) , 드레퓌스 (스위스) , 글렌코어 AG (스위스) 들이 세계 곡물 유통의 8~90%를 장악하게 되며, 종자시장 또한 몬산토등을 위시로한 미국과 서방의 다국적기업의 67%에 농약은 기업을 6개~10개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이들의 비중은 75~90%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심지어 중국이 원산지인 대두등을 가져가 오히려 개량해버려서 중국에 역수출해 중국의 콩 시장을 아예 장악해버리는 기행까지 펼치게 되며 인구의 필수재인 식량을 전부 장악하게 되고, 미국은 단순 식량에만 그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산업과 경제를 굴리는 에너지를 노리게 되고 이는 중동이 왜 미국에게 최소한 셰일이 폭발적인 생산량 증가를 보여주기전까지만해도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부분이죠. 사실 영미 석유 메이저들인 세븐 시스터즈등이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나 아니면 아람코(ARAMco) 사우디 아라비아- 미국 석유 회사등이 세워질때 어느정도 통제권을 지녔으나 70년대 이라크부터 이란까지 석유 국유화를 단행하고 당시 미국은 어느정도 힘이 빠진 상태였기에 안보 제공등을 대가로 어느정도 협조만 얻어내는 쪽을 취하죠.
하지만 냉전도 끝나고 일본이란 라이벌도 사라지고 미국과 국제기구의 영향력은 한때 초강대국을 넘은 극초강대국이란 용어까지 나올정도의 수준이었기에 에너지에 대한 통제권을 통해 세계 체제를 더 견고하게할 일익으로 삼을 생각을 합니다. 거기다 비단 석유문제뿐만 아니라 영프가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를 팔때 그 근처에 거주하던 이집트의 하산 알 바나가 서방에 대한 반감을 키우며 서구 문화에 물들지말고 순수했던 아랍 그시절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단체이며 현재까지도 극단주의자부터 일반 이슬람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엄청난 집단이 되버린 무슬림 형제단을 창시하는데, 이 집단이랑 하산 자체야 생물학적으로 당시 정치권 입장에서 선넘는짓을 많이해서 활동한지 약 20년이 되고 죽거나 체포당하게 됩니다.
허나, 이런 단체의 상위층들을 끌어내렸다고해서 그들이 퍼뜨린 사상이 사라지는것은 아니었거니와, 현실적으로 서구의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되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당시 중동 지배층에 대해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뿐 속으로 참고있던 반감들을 터뜨리고 구체화시키는데 이만한 교리가 없었기에 이 교세는 폭발적으로 불어납니다. 더불어 알 바나의 죽음같은것은 일종의 순교로 여겨져서 세력을 불리기 위한 선전으로 더욱 써먹기 좋았고 실제로 유효했고요.
그렇지만 미국은 당시 주적인 소련부터 새로 크던 일본과 유럽등의 동맹국에 대한 견제를 하면서 새로운 산업과 혁신을 선도하며 세계 체제를 고수하는거까지 해야 될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 손보는것은 90년대까지 미루고 있었으나 쿠웨이트등에 난동을 부리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응징겸 이슬람 문명권에 대한 경고로 걸프전등에 미국의 힘을 보여주었고 이것으로 일단 잠시간은 충분할것이고 중동내 미국의 힘에 대항하고 에너지 패권에 대해 도전할 세력은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심각한 오판이였습니다.
이후 다 아시다시피 9.11 시절 국제무역센터와 펜타곤등에 비행기 하이재킹을 통한 테러가 일어나고, 이는 곧 미국본토에 대한 침공으로 여겨져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으로 이어지며 이후 이슬람 문명의 혼돈과 분열을 일으켰다는점에서 어느정도는 성과를 거둔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전 글에서도 몇번 논급했지만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세계화 그리고 정치적 세계화도 발을 디딜정도로 범위가 매우 넓어졌지만 동시에 소련이 커버하던 모든 영역과 제 3세계 개도국에 대한 경제 개방 및 힘의 공백에 안보제공으로 세계 질서 안정을 유지해야 되었고 이는 냉전 이전에도 미국은 대영제국과 몽골제국이 커버하던 영역보다 더 많은 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전지구 속속히 개입하게 되다보니 그야말로 과잉팽창으로 이어졌죠.
이 때부터 미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자신의 능력이 축적되고 성장하는 이상의 것의 지나친 개입을 했다고 판단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전쟁까지 개입하니 미국민부터 미국 정치권까지 이건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거나 우리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하면서 일종의 고립주의와 같은 염증현상이 일어납니다. 더 문제는 미국이 빠지더라도 미국 이외 나름 힘 좀쓴다는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조차 고작 앞마당 이상의 영향력을 뻗쳐 힘의 공백을 메꿀 역량이 안된다는점이었으며, 미국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부분이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전세계 대양 무역루트를 지키면서 더 넓어진 영역 한 때는 내륙의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미군기지를 설치하고 문자 그대로 전 지구에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통화패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는 달러패권을 전혀 놓지 않았고 내려놓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미국이 가진 무기중 가장 강력한 무기들중 하나니까요. 전세계 원자재, 식량, 공업품 모든것의 결제와 오가는 경제 연결망의 매개체를 통제한다는것은 곧 그 전체를 통제한다는것과 동의어였고 세계체제와 경제적 세계화의 완성을 위해선 필수적이여서 유로화 이후 중국과 제 3세계등을 공략하여 그 국가들의 달러 사용을 장려해 세계 외환 거래의 88~89%가 달러로 이루어지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내며 가장 반미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북한에조차 달러에 대한 수요를 낳게 되죠.
이리하여 미국은 식량과 식량유통, 곡물의 종자, 농약도 장악했으며, 에너지 시장에 대한 통제권과 영향력도 차지했고,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전세계 기축통화로서의 화폐 패권은 더 공고히 하였는데요. 하지만 이럼에도 이 문단에 '미국' 이란 단어를 쓰지않은것에서 어쩌면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전후 미국과 미국 동맹국들이 협력해서 만든 UN 등을 기반으로 한 세계체제는 이미 균열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자체의 문제도 있고 더 큰 문제는 미국 동맹국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이념의 적이었던 소련 현 러시아등의 경쟁력 약화등에 상당부분 기인한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수천년 문명의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약소 부족이 강대한 부족에 흡수당하고 그런 부족들이 세운 국가들에서 중소국가들이 보다 큰 나라에 먹히고 또 그런 큰나라가 더 강력한 국가에 정복당하며 제국이 세워지고 이 제국들에 대한 굴복 및 하나의 경제 연결망 편입으로 이끌면서 세계체제가 세워졌듯이, 기술도 마찬가지죠.
<브랜드 가치로 매긴 세계 Top 20 테크기업들 : 미국 중국외엔 거의 전멸 상황이다>
위에서도 수차례 언급했던것이니 간단하게 다시 재정리겸 넘어가자면 단순한 농업기술과 조악한 수공업까지는 분해해서 보고 구조를 이해해서 금방 복제해내는게 가능했으나 많이 복잡한것도 아니고 공방에서 조금 더 복잡한 수준으로 만든 사냥용 조총마저도 단순히 봐서 베끼는것만으로는 제 성능을 내는 상품을 못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기술 격차가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근대로 올라가면 근대 철갑함은 그 동양에서 유일한 근대화를 했다던 일본조차 영국에 수십년간은 그냥 주문해서 돈 주고 사와야되었을 정도고 영일동맹 당시 여러 기술 지원을 받고나서야 그나마 자체적으로 만들수 있게 됩니다. 이런 과정도 없었던 다른 동양국가들은 말할것도 없고, 수억의 인구를 지닌 중국조차도 근대적 공장과 그걸 위한 공작기계를 작전하듯이 수입해와서 만들었다는 눈물겨운 스토리도 있을정도고 어쨌거나 유럽열강들보다 조금 쳐지지만 기술 접근이 용이했던 러시아 제국의 후신인 소련마저도 공장이나 자동차 제조 기술등은 미국이나 독일등에서 들여와야 했을 정도였고요.
그런데 지금 이것은 아직 자본과 기술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않은 1-2차 산업혁명이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현 경공업과 중공업에서의 단계였다는것이죠. 앞서 3차 산업혁명 그러니까 정보혁명은 그야말로 이전보다 보다 더 자본집약적이며 첨단을 달리는것들이고 인력은 지금 IT 기업들에서도 보시면 아시겠듯이 그야말로 한줌 수준인 산업들로 단순 인간의 숫자와 그걸 따라하는것만으로 쫒아가기 힘든 산업들입니다.
<플랫폼 시장에서 미국과 유럽의 격차>
이러다보니 유목-농경 그리고 문명국 사이에서의 격차를 넘어 여타 선진국과 3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세계체제의 정점국가인 미국과 그리고 그외 중-러 강대국들과 미국간의 경제, 군사등 여러부분에서 격차가 더 벌어지는 양상이 생깁니다. 즉 3차 산업혁명의 지배권을 쥐게되고 4차 산업혁명으로의 혁신을 주도하게 된 미국이 사실상 소프트웨어나 가장 고도화되고 핵심적인 필수 신산업들을 전부 독점하게 되었단것이죠.
해당 산업들은 사실 자본이나 기술이 이미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더 1차 농업 2차 제조업 3차 IT등 올라갈수록 필요한 정도가 몇배가 아니라 수십배 수백배 이렇게 되기 때문에 진입장벽은 심지어 선진강대국들이라는 유럽과 일본에게조차 넘을수 없는 사차원의 벽 소위 넘사벽 수준이 되고 현재까지도 이들은 제대로 맞서기는 커녕 비빌만한 수준의 기업체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격차가 벌어지는걸 넘어 이글의 또다른 주제중 하나인 초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이며 이는 논란의 대상인 존 볼턴이 조지 부시 밑에서 재직할 당시 상임 이사국 체제를 폐지하고 미국 하나만 남겨야 된다할정도로 전후 체제의 균열이 시작되기도 했으며 그렇기에 이 문단이 미국이란게 없이 전간기와 같은 시대구분만이 된것이고 이는 미국의 기존 체제내에서의 패권은 부서져가는 와중 미국과 그 외 강대국들의 상대적 국력차와 기술 격차는 더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그널을 주는 초양극화와 불안정의 시대로 이어지죠.
XIII. 금융위기, 초양극화 그러나 문화적 세계화의 완성(?)
<주요 선진국 생산성 변화>
2007-2008 그 유명한 금융위기등이 오고나서 초양극화가 오고 불균형이 생겼다고 생각하시는분들도 많지만, 사실 이는 80년대말 90년대부터 조짐이 보였던것입니다. 위에서도 대략적으로 언급했지만 실제로 미국의 노동생산성등이 3~4% 올라가면 유럽 & 일본은 1~2%올라가는 수준이였고 이런게 쌓일때마다 이자 복리처럼 더더욱 커져만 갔고 10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는 도저히 쫒아가기 힘든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산성 격차가 벌어지는것은 위에서 말한 3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과 산업 효율성의 향상등이 주가 되었는데 이것을 전부 이끌던건 미국이었고, 2차산업혁명에서 같이 미국과 공동 리더였던 독일도, 1차 산업혁명 즉 산업혁명의 시작점인 영국도 이것을 따라가지 못했고, 제조업과 한때는 고부가가치산업마저 미국을 위협하며 자신들만의 표준까지 정립하려했던 일본도 실패했죠.
거기다 미국과 비교할만한 우주항공산업과 기초과학 역량을 갖췄던 소련은 붕괴되었고 그 많던 기술인력들이 해외로 탈출하게 되면서 산업은 일종의 대정체를 겪었고 미국은 아폴로 11호 이후 우주항공등 국가 전략산업에서 소련보다 한발짝씩 앞서나가던 그 격차를 더더욱 벌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정도냐면 미국 혼자서 운용위성이 4월달 이후 250개 이상 더 쏜거 합쳐서 1,560개 이상 넘어가는데, 미국 이외 전세계는 1009개이고 러시아는 167개에 불과한 미국 혼자 과반을 차지하는 격차이며 세계 우주항공 투자 비용 708억 달러 중에서 미국 혼자서 410억달러를 정도 퍼붓고 있고 러시아는 그것의 10분의 1에 불과한 41억 7천만 달러 영국 프랑스는 다합쳐서 50억 달러 중국이 58억 3천만달러수준에 불과하죠.
특히 스페이스 X 는이미 중국이나 러시아 소유즈보다 많이 쏠정도로 지분을 다 갉아먹었습니다. 상업 위성 발사에서 65%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가 2010년대초까지만해도 상업 위성 시장에서 55%가까이 차지했다는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고 스페이스 X에 완벽히 밀려서 5%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외 미국을 맹렬히 뒤쫒아가던 항공기술은 온데간데 없고, 수십년전에 이미 제트엔진을 폭격기에 탑재시킨 미국과 다르게 현대화 한 최신 폭격기가 고작 그 하위인 터보프롭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더해, 서유럽의 정치-외교자산은 별볼일 없어질정도로 미국이 수십년 세계체제의 꼭대기 자리에서 전부 취득했고 금융지위마저 점점 미국 주도로 공고해지는듯 했습니다.
허나, 이런 오만에 대한 대가였는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미국은 모기지론과 그에 연계된 여러 파생상품들까지 엮여서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들중 하나인 리먼 브라더스가 말 그대로 날라가버리는 사태에 직면하고 대공황 이후 미국에게 닥친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란 말까지 들으며 미국도 이렇게 끝나는것이 아니냐 했죠.
솔직히 단순히 국가들간의 패권다툼정도로 보았다면 이게 맞았을겁니다만... 이건 적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동안 이어져온 세계체제의 그야말로 총아이자 상징같은 국가가 바로 미국이므로 그렇게 되기가 힘들었죠. 왜냐면 이미 공산권마저 무너지고 전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엮여있는 상태라 심지어 미국을 속으로는 넘볼려고 생각하던 중국조차 미국을 돕지 않을수가 없는 그물망같은 체제였고 실제로 중국은 미국에 대해 미국채를 더 사주면서 미국에게 자본을 수혈하죠. 왜냐면 소련 이전 동구권이 먼저 무너지는 사례에서 보셨듯이 이 하나의 체제에서의 중심은 결국 최종 종착지이며 망하는것은 그 주변부들이 먼저 망하게 구조상 그렇게 되있기 때문입니다.
<지역권 공용어들>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오히려 미국과 그 외 국가들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희한한 현상이 생겨나고 문화적으로 보았을때 미국화의 가속 현상도 벌어집니다. 간단하게 과거의 예시와 현대의 예시를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일단 전근대 시절 심지어 근대초기시절 까지만 해도 '세계 공용어' 란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았는데요.
동아시아엔 한문이 있고, 고중세 유럽엔 라틴어가 있고, 근세 유럽에는 프랑스어가 있고 중동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있었고, 중앙아엔 투르크어등이 있었는데 당최 무슨말이냐 하실분이 계시겠지만 이미 여기서 답이 나오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말 그대로 해당 언어들은 '동아시아' , '유럽' , '중동', '중앙아' 등 각각 지역권의 언어로서 사용된것이지 영어와 같은 전 지구적 공용어가 된적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라틴어를 배운 수도사가 조선에 와서 라틴어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말이 통했을까요? 반대로 한문을 배운 조선의 선비가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에 가서 한자를 썼다면 약간이나마 이해했을까요. 그럴리가 없을테죠. 심지어 유라시아를 관통한 몽골제국조차도 이집트나 서유럽 혹은 인도에서 몽골어를 썼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테고 몽골제국 내부에서조차 피지배층 상당수에는 통하지 않기도 했죠.
게다가 한문이나 라틴어 이런것들은 역사를 좋아하시는분들이라면 인지하시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지식인과 상류층이나 좀 알던거고 프랑스어 또한 러시아나 독일 귀족들이나 썼지 일반 평민들이 아는 경우는 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태어나서 쓰던 토착언어조차 잘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영어는 지식인과 대중에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범용화된 사실상의 유일한 언어라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허나, 지금 수준의 영어의 세계 공용화가 된건 사실 꽤나 최근으로 이게 바로 현대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가령 프랑스 정부가 발간한 프랑스어의 사용빈도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 그러니까 냉전이 끝나고나서도 몇년이 흐른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37%의 유럽연합 기관이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48%가 영어를 썼습니다. 헌데, 2015년도에는 프랑스어는 고작 3.6% (36%가 아닌 3.6% 맞습니다), 영어는 81%가 쓰이게 되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언어로 떠오르게 되죠.
사실 영어가 성장하게 된건 18세기 중반 이후 해외 무역과 식민지에서 쓰이며 상인들간의 언어로 떠오른게 일단 본격적인 영어란 언어 위상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였는데요. 영국이 대영제국을 건설할정도로 인류사에서 가장 넓은 땅 그러니까 현재 중국 3.8~4배 정도 되는땅을 정복했음에도 1차세계대전 시기 이전까지 외교어로서는 프랑스어가 쓰였고 (그래서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게 피파등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프랑스어가 쓰인겁니다) 1차세계대전 종전 시점에 미국의 요구에 따라 영어가 외교어로 프랑스어와 같이 병기되고 영어와 영미권의 문화 강세는 미국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등에서 중국과 같은 폐쇄시장을 제외한 주요국들 시장 85~9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자본을 뒷바탕으로한 문화산업덕분에 점점 강세를 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점점 영어의 힘이 강해지다가 2차대전 이후 미국> 영프독일 + 소련 + 이탈리아등 7개국의 합보다 강해지는 말도 안될 정도로 거대한 국가가 되자 사실상 외교 및 국제기구등에서 거의 확실한 언어로 쓰이게 된게 영어가 지금 위상을 누리게 될 초석을 닦는 계기였죠. 그런데 이럼에도 1950-60년대까지만해도 미국내에서조차 프랑스어나 독일어등을 상당수 배우던 사람이 있었고 1980년대 초까지만해도 영어를 제일 잘하는 네덜란드의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호텔에서조차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이 있었다고 할 만큼 영어가 지금 현대인들이 떠올리는 그런 수준까진 아니었던것이죠. 고작 40년전임에도 불구하고.
근데 이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80~90년대 이후 문화에서 경제 부분까지 미국화 = 세계화란 말이 생겨날정도로 특히 젊은세대들이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냉전 승리 이후 지식인들마저 앞다퉈 워싱턴 컨센서스를 유일한 표준으로 받아들이면서 전세계적으로 빠르고 깊숙이 침투해가고 영어의 위상은 너무 확고해져서 이제 영미권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의 공통점이 외국어를 배우는 빈도가 급격히 감소했죠.
2016년 현대 언어 협회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3-16년 사이 프랑스어 강좌는 129개가 사라졌고, 스페인어는 118개가, 독일어는 86개, 이탈리아어는 56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5.3%의 감소율로 3년이란 기간을 생각해본다면 매우 큰 수치죠. 그와중 알제리 같은 프랑스에만 100년 넘게 식민지를 당했던 그런 프랑코포니에서조차 영어의 강세가 눈에 띌정도고, 대부분의 유럽학생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필수를 배울정도입니다.
<미국 vs 유럽 대기업 배출 숫자>
여기서 윗문단에서 말씀드린 미국 정부에서 노린 정보의 확산을 통한 침투 및 세계체제 강화라는 측면에서 인터넷이 톡톡히 제 역할을 해줬고 수많은 정보와 매체가 쏟아지게 되고 미국이 사실상 3차산업혁명의 거의 압도적인 선두주자로서 플랫폼을 독점해버리고 이건 그래도 전통문화 측면에서 약간이나마 이질감이 있던 동아시아에서도 널리 퍼져나갔지만 조금 덜한편이였으나 비슷한 기존 문화를 공유하는 서구문명권과 그외 기독교문명권에서는 거의 미국식 미의 기준부터 유머코드등 거의 일체화 수준이 되가고 프랑스어에 영어 외래어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프랑스어의 표준을 세우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émie Française)에서 나올정도가 되었죠.
게다가 경제부분에서도 미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왜냐면 이코노미스트지에서도 지적한 사항이지만 1930년대까지만해도 유럽이 배출하는 대기업들이 미국보다 많았던적도 있으나 현재 카운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20년간 30개의 대기업을 배출해내면 유럽은 고작 2개 배출해는 수준이 될 정도로 경쟁력이 밀리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여전히 석유외에는 제대로 된 산업을 구비하지 못해서 농기계도 수입해야할정도니 문명국간의 격차에서 강대국간의 격차 그리고 초양극화가 계속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 국가간의 체급 규모 차만이 아닌 국가 구성원의 소득격차로도 그 즉시 이어집니다. 여기서도 미국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국가인지 드러나는 부분이, 세계체제의 터를 잡게 만든 네덜란드가 전성기 시절 세계 gdp 평균의 약 3배이고 영국이 빅토리아 시대 최전성기에 3.6~3.7배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1950년대 4.5배, 1998년도 약 5배 그리고 현 시점에서 세계 평균의 약 6.7~6.8배를 구가하고 있죠.
여기서는 평균뿐만 아니라 강대국간의 격차 그리고 빈국과 부국간의 초양극화 현상도 명백히 드러나는데, 특히 영국은 최전성기 1870년대에도 런던 시민의 소득을 따져보자면 네덜란드나 독일의 약 1.2.~1.3배 수준이었고 빈국이랑 비교할시도 기껏해야 5.5~6배 수준이었고 1820년대 기준 영국 런던 의 시민과 아프리카 부족민의 소득은 약 3배에 불과했던데 비해 2차대전 승리 직후 기준 미국 뉴욕 시민의 소득과 중동 및 아프리카 빈국의 소득은 약 35배, 1973년에는 44배, 1992년에는 72배 그리고 현재 2020년에는 327.4배로 불어났습니다.
이것은 특히 금융위기 이후 헬리콥터 머니라고 뿌리던 미국을 위시로한 기축통화국들의 양적완화로 인한 자신들의 인플레와 자산가치 폭등에 대한 부담전가 그리고, 미국 혼자서 거의 전분야 산업의 혁신들을 이끌어가며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미국의 반등하는 자본 생산성이 약 2004~2005년도 수준으로 회춘하는 말도 안되는 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업들만 보더라도 2000년대초까지 잠시 잠잠했던 아마존, 애플등의 IT 공룡들이 치고올라오면서 정보와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이 석유보다 더 높아진다는 말까지 나올정도로 기존 석유와 금융 및 코카콜라등의 유명기업들을 다 갈아치우고 세계 시총 10위권 전부가 정보 기업들이 차지하게 되었고...석유조차 미국 자국만의 힘으로 물가를 조정할수 있는 셰일가스가 터지게 되면서 이는 더 가속화되기 시작하는 와중 이런 서방에 대해 저가 제품을 제공하며 크던 중국이 점차 도광양회의 입장을 버리고 보다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죠.
이미지수 100장 제한으로 인해 나머지 분량은 2편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출처] 현대세계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 작성자 PeterII
첫댓글 학술게시판에서 집중토론 게시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와! 이건 진짜 완전 유익한 문서네요! 정독했습니다 :) 뒷부분은 또 다음에 시간내서 다시 정독해봐야겠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