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의 원갑사를 찾아가다
올해는 석가 탄신일이 주말과 겹쳐서 3일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단다. 서울의 큰 아들이 전화를 했다. 이번 기회에 20년 쯤 전에 근무하였던 신안군의 자은면을 찾아보고 싶다면서, 아버지도 전라도 땅을 구경도 할 겸 가실래요 했다. 신안군은 천 네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여 천사도라고 했다. 그 증에 제일 큰 섬이 자은도이고, 큰 면이 자은면이다. 아들은 군에 복무하는 대신에 무의촌에 근무하라는 명을 받고 진료소에서 2년 간 근무한 곳이었다.
집사람과 나도 좋다고 했다. 무안군의 육지에서 큰 다리를 놓아서(김대중 대교라고 하였다) 무안에서 자은도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아들의 차를 타고 함께 가기로 했다.
나는 욕심이 하나 더 있었다. 차가 없는 나로서 전라도의 먼 먼 땅까지 갈일이 없다. 그러니 전라도 땅의 절집 답사는 불가능이다. 아들에게 이왕이면 신안군으로 가는 길목에 절이 있으면 들려보자고 했더니, 아들이 인터넷 검색에서 찾아낸 절이 무안군 해제 반도의 원갑사라는 절이었다. 설명에는, 무안 해제 원갑사는 전라남도 3대 갑사 중의 하나이다.
아들이 물었다. ‘전라도 3대 갑사 중의 하나라는데, ’갑사‘가 무슨 뜻인데요’한다. 내가 불교미술을 공부한다니까 절에 대해서도 훤히 아는 줄 안다.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설명서에 원갑사는 영암 도갑사, 영광 불갑사와 더불어 전라도 3대 갑사 절이란다. 그러나 내가 직접 절을 찾아가서 느낀 것은 산골 절의 풍광과는 많이 달랐다. 산골 절은 눈 앞에 골짜기가 골을 만들면서 멀어지고, 첩첩으로 겹쳐있는 산능성이 속세와는 병풍을 둘러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갑사는 산이 아닌, 서해 바다의 갯벌이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이절은 사찰 창건기가 백제 성왕 때라는 말도 있고, 신라 36대 해공왕 때라고도 하나, 나는 전해오는 창건기는 믿지 않는다. 이 절을 새로 짓기 전부터 원갑사에는 강산사에 대한 현판이 전해오고 있었다, “무안군지”에 강산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금성지”에도 원갑사가 강산에 있다고 쓰여진 것으로 볼 때 이름이 강산사였다가 원갑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무안군지는 오래된 절이 무너지자 신도들이 중수하기 위해 돈을 모았는데 목우암(무안군에 있는 법천사 암자이다.)의 신도들이 이야기를 듣고 도와 1908년에 다시 세웠다고 하였다.
아들의 차를 타고, 좁은 옛 아스팔트 길을 달려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붉근 빛의 황토가 깔린 밭이었다. 황토는 아주 비옥한 땅이라서 농산물 재배지로는 뛰어나 토양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최대의 양파 생산지이다. 다양한 작물이 자라 푸른색으로 뒤덮인 오월의 들녘에 비하면 오히려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절이 아니라서, 초라하리라 생각했는데, 절 뒤로는 얕으막하지만 산세가 뛰어나다. 산 중턱에 위치한 절은 성벽 처럼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라남도 3갑사라는 말에 어울릴만큼 규모도 넓은 꽤나 큰 절이었다. 절은 다른 큰절처럼 대웅전과 무량전, 스님이 거주하시는 요사체 등을 모두 갖추고 있어 절집으로서 낯설지 않다. 규모도 상당했다.
이 곳 원갑사 입구에서 바라보는 들녘은 양파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농심과는 별개로 그 모습들이 한폭의 풍경화라고 할까? 지금은 썰물이라서 바닷물은 아득히 멀리 보이고, 눈앞의 갯벌이 황량하다.
이 절은 본래 이곳 해제 반도의 제일 끝자락에 있어서 바다와 손잡고 있었다. 그곳 절이 무너지고, 사라지면서 잊었다가 새로 절을 일으켜 세울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였다. 이런 내력으로 보아서는 이 절을 찾았던 사람은 신분이 낮은 뱃사람이나, 밭농사를 짓던 하충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선지, 우리 가족이 이 절에 들어갔을 때는 왁자한 스피커 소리가 요란했다. 절에서는 최고의 어른이신 부처님의 생신날이니 잔치를 벌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골의 노인들을 모셔놓고 효도 잔치를 하는 모습이다. 주름살이 많은 노스님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시골 아낙네 모습의 여인들이 나와서 우연이의 우연이를 산나게 부르고, 아주머니들은 몸을 요란하게 한든다. 의자에 앉아 게시는 분들은 거의가 할머니이다.
절에서 하는 사찰 음악회가 속세의 노래처럼 시끌벅적하니 기분이 야릇해졌다. 절집인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 종교가 너무 엄숙주의에 빠지 있지 말고, 이런 방법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서 민중의 마음에 신명을 일으켜주는 것도 괜찮다 싶어진다.
사회하시는 분이 우리 절은 저도 분이 많이 찾으시는데, 오늘도 저도에서 오신 분이 많지요. 라고 하는 걸 보니, 섬이나 해안에서 갯벌과 친숙한 사람들이 찾는 절인 듯하다. 하기야 그런 분들에게 식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보다는 이처럼 시끌시끌한 분위기로 즐거움을 전하는 것이 맞을 듯도 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신안군 자은면 소재지이다. 자은면은 자은도 전체를 아우른다. 섬 고장이다. 예전에 아들이 이곳에서 무의면 진료의사로 근무하였으므로,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이다. 신안군은 섬으로 이루어진 고을이라서 바다로 길이 끊여 고립된 지역이었다. 육지와 신안군을 잇는 다리(김대중 대교)가 개통되었다니 가보고 싶다는 것이 아들의 말이다. 그러니 아들과 내가 여기를 찾아온 이유가 달랐다.
바다를 건느는 다리는 길이가 자그마치 10킬로미터 라고 하였다. 신안군은 천 네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천사도라고 한단다. 섬들로 빼곡한 바다 위를 자동차로 달리면서 바라보는 기분도 즐겁다.
예전에 아들이 무의면 공보의로 근무할 때 아내와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가본 일이 있었다. 아들이 근무했던 보건진료소는 지금도 예전 그대로 였다. 오늘이 초파일이라 휴일이기도 하지만, 마을 전체는 숨도 쉬지 않은 듯 조용하다. 나는 시골의 분위기에 질린 경험이 많다. 내가 자란 시골마을도 이랬다. 숨이 막힐 듯 조용한 마을 분위기는 어린 나를 숨이 막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은 조금은 시끌벅적한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은퇴를 하고 도시에 머물러 사는 것도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다. 간혹 친구들이 조용한 시골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면 동조하기 보다는 ‘살아봐라’라고 했다.
아들 내외는 감개무량한 듯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우리는 차를 타고, 아들의 추억이 서린 섬의 여기저기를 함께 돌아다녀 보았다. 그러나 섬 마을은 여기도, 저기도 적막했다. 섬이라면 으레 어촌 마을로 생각했는데, 이곳은 농사가 주 생업이락 하였다.
관광지로 개발한 해수욕장이며, 갯벌을 몇 군데 돌아보고 우리는 다시 김대중 대교를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