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지금 한국은 변화하는 중 / 유희석 신부
발행일2017-01-22 [제3029호, 23면]
작금의 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묘하게도 최근의 두 교종들이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아마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한 분은 공산국가인 폴란드 출신의 성 요한바오로 2세 교종이다. 그가 수백 년 만에 탄생한 비 이탈리아계 교종이라서 혹은 첫 번째 슬라브계 교종이라서가 아니다. 그에겐 남다른 사목적 관심과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교회와 세계평화를 위한 열정을 배울 수 있다. 냉엄한 현실을 평화로 풀어낸 남다른 의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의 교종 프란치스코이다. 2013년에 즉위한 그의 중요함은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이라서도,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라거나 비유럽권 교종이라서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소탈함과 겸손으로 무장한 말과 행동을 배울 필요가 있다. 거창한 교황숙소가 그에겐 불필요하며, 전용차 대신 대중교통으로도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의 곁엔 가톨릭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수인(囚人)도 있고, 세상을 떠도는 난민도 있으며, 세월호의 유가족들도 있다.
그리고 이제, 문제는 우리의 모습, 우리 안의 ‘최순실’을 바라볼 차례가 아닐까. 사목과 평화의 참된 의미를 되찾고, 소탈함과 겸손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얘기만 듣거나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진실을 향한 치열함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치 두 교종들처럼, 예수님처럼.
지금의 한국 상황은 촛불정국으로 대변되고 있다. 촛불의 위대함 앞에서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꽤나 새로워졌다는 느낌이다. 촛불집회에 참가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거기엔 질서가 있고, 이웃이 존재하며, 흥이 있고, 신명이 난다. 이것이 참된 민주시민의 모습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자체가 이미 혁명이고 변화이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이참에 광화문 광장을 민주시민의 자리로 환원해 언제든 소리치고 모이고 발언하고 노래하는 자리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의 이 모습을 잊지 않고, 되살려야 한다고 믿는다. 혹여 촛불집회가 장기화되고 있다고 누가 걱정한다면 한국인의 집념과 끈기가 시험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시민운동이 용광로가 될 것인지 냄비로 끝날 것인지가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모든 한국인의 열정이 결집된 시민 참여단을 조직하여 국정의 여(與)와 야(野) 옆에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촛불모임은 가히 한국인의 명예혁명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시민의 혁명은 시작됐고, 혁명의 촛불이 어느 곳을 향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도 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항상 혁명의 끝은 진실과 진리를 향한 것이기에 종교가 종착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그랬고, 프랑스 대혁명이 그랬으며, 드레퓌스 사건이 그랬고, 홀로코스트가 그랬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책임과 무책임의 연속이었는지 모른다. 처음엔 책임이었다가 조금 지나면 무책임으로 바뀔 때가 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거룩한 지구력과 집념은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속화되어 사그라질 때가 많았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면 최대한 노력해 거룩함을 연장하고 속화를 늦출 수 있는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노력한 만큼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한 때이고 거룩한 시기이며 변화와 발전의 전환기가 될 수 있는 막중한 기회인 것이다.
이렇게 막중한 시기엔 누구처럼 듣고 싶은 얘기만 들어서는 안 되며, 누구라도 감히 왕이라고 욕심부려서는 안 된다.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 갇힌 발달장애를 걷어내야 한다. 손쉬운 측은함도 값싼 분노도 불필요하다. 치열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은 조금씩의 욕심을 갖는다지만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욕심은 금기조항이다. 서로의 소통을 어지럽혀서는 곤란하다. 이즈음엔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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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석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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