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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구제(2)
행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설 교 >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홍모목사 / 행 11:19-26
2012년의 12월이 되었습니다. 오늘로 주의 강림을 대망하는 대림절이 되었습니다. 예배신학자들은 이 절기를 대림절(Adven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강절, 강림절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교회력에 있어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은 대림절로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4번의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탄절- 12월 25일이 되기 전의 4번의 주일을 대림절이라고 하고, 성탄절에서 4주 전에 맞이하는 주일을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라고 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고 준비하는 사순절을 본받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40일전부터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준비하는 전통이 교회에 정착되었는데, 4번의 주일을 대림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가장 먼저 다시 오시는 예수님, 주님의 재림을 선포하며 기다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천국-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며 기다리고, 후반부로 와서 주님의 탄생을 선포하며, 기다리는 것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2012년 12월이 되었습니다. 2012년 12월 19일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초미의 관심사는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쪼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민족의 역사를 길이 빛내는 인물, 국가의 번영과 한반도 통일에 초석을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사람, 국민 모두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편 가르기를 잘하는 민족으로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장년층과 젊은 층, 때로는 많이 가진 사람과 조금 가진 사람들로 나뉘어 갑론을박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이북과 이남으로,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뉘어 다투고, 질시하고 반목을 일삼았습니다. 중국과 같이 넓은 땅이라고 하면 동이니 서니, 북이니 남이니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좁은 땅에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지고 갈등이 불거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암담하고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우리는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여 대화를 하다보면 대놓고 화를 내는 것을 봅니다. TV에서 대화하다보면 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웃으며 개진하는데, 몇 사람이 모여 좌담하다보면 중도의 온건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진정 걱정하며 이야기하면, 자기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몰아붙이고, 십중팔구 색깔논쟁으로 비화됩니다. 나중에는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시비하고 정죄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나중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불편한 관계요, 앞으로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낙인찍으면서 어색하게 헤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시대 대통령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로서 정직과 신뢰와 세계성을 심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도자는 첫째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두고두고 인정받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not popularity but recognition) 두 번째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는 리더여야 합니다. (not knowledge but wisdom) 세 번째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not mind but heart) 마지막으로는 군림하기보다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리더여야 합니다. (not reigning but servant)
이런 지도자상을 놓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나는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이러한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도자인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12제자들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길에서 다투고 있을 때에,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6)고 하셨습니다.
지도자란 “남을 가르쳐 이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구원받은 그의 자녀들이요, 섬기는 종들입니다. 섬기는 종으로서의 지도력, 서번트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우리도 몸을 낮추고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실천하지 않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큰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과연 누구이며,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삶을 말합니다. 이 제목은 신앙과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데,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라는 말이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교’라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하면, 사실 무슨 뜻인지 한문자로 보아도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기독교(基督敎)라고 할 때, ‘기’라고 하면, 터기(基), 근본 기, 라고 하여 기초가 된다는 말입니다. ‘독’(督)라는 말은 감독할 독, 살필 독, 거느릴 독, 꾸짖을 독, 독촉할 독이라는 말입니다. 한문자로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기독교인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중국인들이 만든 가차문자(假借文字)를 그대로 사용한 말입니다. 가차문자라는 말은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 음(音)만 비슷하면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을 말합니다. 취음(取音)이라고 합니다.
마카오에 가보니 햄버거 파는 맥도날드 간판에 맥당노(麥當勞)라고 써놓았습니다. 맥도날드 로고는 분명히 맥도날드 로고인데, 맥당노라고 쓰여 있습니다. 읽을 때에는 비슷하게 맥도날도라고 읽겠지요. 영어 간판을 안 쓰고, 자기네 한자와 비슷한 발음이 날 수 있게 가차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음만 비슷하다면 빌려 쓰는 문자를 가차문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중국에서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표기하였느냐 하면 기리사독(基利斯督)라고 했습니다. 중국말로 그리스도를 ‘지리스두’라고 발음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리사독’이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길다고 하여 축약형으로 기독(基督)이라 쓰고, ‘지두’라고 발음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우리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한 가차문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기독교(基督敎)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기리사독(지리스두)이 되었고, 다시 축약하여 지두(기독)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중국에서 사용하던 말대로,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정말 전혀 엉뚱한 말이 되고 보니 현대에 와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한참 설명하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기독교’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교’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칭호는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11: 26에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라는 사도가 다소에 찾아가서 바울을 만나고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고, 두 사도가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부를 때에 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그 이름은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본문 외에 두 번 나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성도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26:28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벧전4:16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은 사람, 제자, 도를 좇는 사람, 성도, 형제들, 믿는 무리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드디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여 이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멸시하고 조소하는 요소가 배어 있으면서도 철저한 정신과 생활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경멸하고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 ’라고 할 때에는 ‘지독하게 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라, ‘예수쟁이’, ‘예수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말하였어도 그 말에는 뼈가 들어 있습니다. 정말 제대로 보고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시시하게 믿는 중에 들은 말이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 의의를 정리해보면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종교로 보아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칭호는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었습니다. 저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 분을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왕으로,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디옥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답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라는 주제를 내어걸었습니다. 지난 11월 16일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연세대의 한인철교수는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부정적인 영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받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처럼 사는 삶의 방식을 전면 전환하는 것에 대해서는 꺼리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이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많은 시간을 기독교인으로 변화된 삶을 말하기도 보다는 구원받는 교리에 치중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창의의 교리를 가르치고, 전파하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자기가 구원받게 된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 알고 말하고 강조해도 구원받은 사람으로 변화된 삶에 대하여는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교리 개혁에 머물렀습니다. 이제는 제2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안디옥교회를 통해 모름지기 교회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본질에 충실할 때에 듣게 된 이름이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21에는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예수를 전하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살전1: 5에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전파가 일어날 때에 능력도 함께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다닐 때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주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22-24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고 했습니다.
두 사는 강조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의 종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였습니다.
빌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갔습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나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을 배울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5-26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에 대한 말씀, 인격적인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교회의 생활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격적인 예수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잘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형편없을 때도 있습니다. 잘 믿으려고 힘쓰고 있는데, 수준이 오르지 않습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님들은 장로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되고서,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목사가 되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을 들어 말씀드리면, 장로의 자격이 있어 장로 되실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에만 머물지 말고, 장로다운 장로님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조만식장로님 같은 분들이 나와야 합니다. 역시 목사도 한경직목사님 같으신 분을 본받아 한국교회의 귀감이 되고, 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의 부정에 대하여 신문에 보도될 때에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떤 장로님 정치가가 구속되거나 비리에 연루되어 발표될 때에, 아니 먹고 살만큼 있고, 그 자리까지 올라갈 때에 얼마나 피땀 흘렸을 터인데, 아니 그 자리에 올라가서 구속되느냐고 쫓아가서 혼내주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수준을 보시고, 하늘나라에 데려가는 것입니까? 물론, 신분이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맞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소속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였다가 이제는 우리 주님에게 속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입니다. 그리스도의 당원들입니다. “너도 같은 도당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들고 추종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님, 내 안에, 나 주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님을 배울 때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격적인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삶 부분적으로 배우지 말고, 통째로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느 곳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디옥교회의 탄생
이상웅목사(마중물교회) / 행 11:19-30
축구를 보면 경기는 선수가 하지만 감독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독은 상대 팀에 따라 전술을 다르게 가질 뿐 아니라 경기중 상황에 따라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어려운 국면에서도 반전을 꾀하는 것을 봅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있었던 맨유의 감독으로 27년간 한 팀에서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의 별명이 ‘헤어 드라이어’였습니다. 경기가 잘 안 풀리면 전반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머리카락이 휘날린 정도로 선수들에게 호통을 친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승리를 위해 진두지휘를 하는 것이 감독입니다.
사도행전의 감독은 누구일까요?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 그 일선에서 증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사도들과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와 성도를 훈련시키고 능력을 주고 적재적소에 등판시켜 그 일을 감당하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복음이 이방인 고넬료에서 전해지기까지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이제 예루살렘교회와 베드로의 이야기는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중심으로 등장하게 됩니까? 안디옥교회와 바울입니다. 복음전도의 중심축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왜 선수교체를 했을까요? 지금까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예루살렘교회와 베드로에서 안디옥교회와 바울로 그 중심축을 옮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앞으로 남은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예루살렘교회보다는 안디옥교회가 더 적격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예루살렘교회와 사도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남은 이방인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는 예루살렘교회와 히브리파 유대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너무 컸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것처럼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먹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서 무마가 되었지만 앞으로도 이와같은 갈등은 계속될 우려가 컸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문화적 간격을 극복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새로운 상황에 더 적합한 교회와 일꾼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디옥교회이고, 바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앞으로 이방인 선교의 중심으로 일할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예루살렘교회의 다음 주자로 안디옥교회를 택하셨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합당한 모습이었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열린 교회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고, 아시아의 심장부로 불렸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동방의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를 두려워했는데, 안디옥은 그들을 막아주는 핵심도시였습니다. 안디옥에는 로마인, 헬라인, 유대인, 시리아인들이 살았는데 대개 구역을 나누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한 도시안에 있었지만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안디옥에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19-20절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처음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스데반의 일로 흩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떠나온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처음에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사도가 아닌 핍박으로 흩어진 무명의 개척자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세워졌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수고와 섬김을 통해 세워졌던 교회였습니다.
그후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와서 헬라인, 즉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인 헬라인들도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헬라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 안에서 논의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비난에 처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에게 열린 사고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린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예배하며 지체가 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디옥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주의 손이 안디옥교회와 함께 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유대인교회로 출발했지만 이방인들을 향해 손을 내민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동질성보다 모든 인간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급성에 더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선교를 위해 쓰임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편견과 차별의 강을 넘어야 합니다.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열린 사고를 가진 열린 교회가 될 때,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바나바와 바울이 동역한 교회
안디옥에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22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의 일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기 때문에 즉시 바나바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을 뿐아니라 구브로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처음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구브로 사람이었기에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본 것이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헬라인 신자들을 보면서 그들도 자신과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바나바는 비록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와는 독자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같은 복음 가운데 한 형제된 성도였음을 확인하고 기뻐했습니다. 오늘날도 처음 만난 사람인데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쁘지 않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교제를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슬픈 일입니다. 세계 어느 곳의 성도라 할지라도 그 출발점이 하나님의 은혜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기쁘게 사역을 했습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바나바는 자신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5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동역자를 구하기 위해 다소에 있던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바나바는 부족한 사역자를 충당하기 위해 자신을 파송한 예루살렘교회에 도움을 청하지 않고,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 나섰습니다. 바나바가 사울과 계속 연락하며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찾으러 다소에 갔다고 했는데, 이 ‘찾다’는 단어가 ‘샅샅이 뒤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사역에 사울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울이 회심 후 3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모두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맞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그를 환영해주었고, 사도들과 만남의 자리를 주선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났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부르심을 받을 때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을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다는 사울의 간증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사울을 찾아나서 안디옥에 데려와 함께 일년간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동역을 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교회였고, 좋은 일꾼들이 동역한 교회였습니다. 바나바는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들을 잘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 ‘권면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여진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목표의식이 강하고, 역경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물론 한 인격안에서 조화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은 없기에 동역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발견되는 마중물교회, 좋은 일꾼들이 세워져 동역이 이루어지는 마중물교회 되길 소망합니다.
3. 말씀을 실천한 교회
바나바와 사울이 일년간 부지런히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6절입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어에서 ‘가르치다’는 동사 ‘teach’에 접미사 ‘er’을 붙이면 가르치는 사람, 교사가 됩니다. 영어의 ‘er’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라틴어 접미사 ‘ian’입니다. 당시 헤롯(Herod)을 따르는 사람들을 헤롯당원(Herodia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Christian)은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물론 이 말이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마치 ‘저 예수쟁이들’ 이런 경멸의 의미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깊은 일입니다.
첫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의 한 종파로 인식되지 않고,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내가 왜 이스라엘 역사를 알아야 하냐?’, ‘서양종교를 왜 믿냐?’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인식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당시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주의의 한 종파나 나사렛 이단이란 꼬리표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런 딱지가 떼어지고,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가 중심에 위치한 신앙그룹으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이방인 사회에 복음이 전해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안디옥 성도들의 특징은 순 그리스도 이야기만 하고, 맨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인상이 깊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저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꼴통들’이라는 의미로 불렀겠지만, 이는 바나바와 사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큰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던 예루살렘교회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29-30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도왔다는 것은 이방인교회로 유대인교회를 형제로 인식했다는 것이고, 도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역의 중심이 이동했다는 미묘한 전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부릅니까? 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외에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요소로 인식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감염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나오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것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인 안디옥교회의 탄생 이야기는 예루살렘교회의 탄생 이야기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교회를 이어 이방인 선교의 중심기지가 안디옥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열린 마음, 열린 사고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좋은 일꾼들이 동역한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따라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 교회였습니다. 또한 어려움에 처한 교회를 돕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를 앞으로 전개될 이방인 선교의 중심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날 가장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이 위도상으로 10-40도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10/40 window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 이슬람, 힌두, 불교의 중심이 모두 있습니다. 한국은 그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는 뉴스를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은 한국이 최초라고 합니다. 한국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한국과 한국교회를 많이 축복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경제만이 아니라 K-pop, K-드라마, K-방역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감사하지만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남아있는 미전도지역이 서구권 교회보다는 한국이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중물교회가 안디옥교회처럼 잘 준비된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남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를 쓰실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좋은 일꾼들을 많이 세워가고 힘써 말씀을 실천하는 마중물교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오랫동안 쓰임 받는 마중물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안디옥의 그리스도인
대구성서아카데미 / 행 11:19-26
흩어진 신도들
고르넬리오 이야기에서 초기 기독교 선교의 절정을 보여준 누가는 19절을 새로운 호흡으로 시작한다. 한 박자 쉬어가자는 걸까? 스데파노의 순교 사건 당시에 흩어진 신도들이 전도했다는 내용은 곧 8장4절 “흩어져 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말씀과 연결된다. 8장4절 이후에 사마리아 전도,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사울의 개종과 전도활동 및 예루살렘 방문,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에네아와 도르가 사건, 10장의 고르넬리오 이야기에 이어 11장(1-18)의 예루살렘 보고가 이어졌다. 누가가 8장4절 이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진술했으면서도 그 구절을 거의 그대로 빼다 박은 표현을 여기 19절에서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전승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새롭게 편집하는 방식으로 사도행전을 집필하다보니 이런 착각이 일어난 것인지, 또는 8장4절 이후의 전도는 지역적으로 팔레스틴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11장19절 이후의 전도는 벗어났다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반복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누가는 스데파노 사건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가 받은 박해가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두 번에 걸쳐 강조한 것일까? 어쨌든지 ‘흩어진 신도들’이 팔레스틴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진술은 오늘 본문이 최초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박해를 받아 흩어진 신도들이 원래 헬라파였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에서 주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가 앞에서 한번 확인한대로 나사렛 예수를 추종하지만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려 했던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 유대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했던 헬라파 기독교인들 사이에 벌어진 의견 차이로 인해서 초기 공동체가 분리되었으며, 그 여파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았다면 그들의 관심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문화적 배경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속사정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걸 보면 누가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 전도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바울의 선교가 반드시 이방인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거의 전방위였다는 사실을, 어쩌면 바울은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우선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은 당분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안티오키아
흩어진 신도 중의 키프로스 사람과 키레네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다(20절). 이들이 누구인지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바르나바가 키프로스 출신이며(4:36), 루기오가 키레네 출신이라는 사실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13;1). 어쨌든지 이들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말씀은 구약성서를 가리키고, 복음은 예수 사건을 가리킨다. 초기 기독교도 그렇지만 지금 우리도 역시 유대인들에게 전승된 구약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인 신약성서를 함께 우리의 신앙 지침으로 받아들인다. 이 말은 곧 기독교 신앙이 계시의 역사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계시는 역사를 뛰어넘는 게 아니라 의존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그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모든 텍스트는 과거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래가 단지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역사에 속한 성서와 기독교 신학을 충분하게 이해해야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과거로부터 풀어놓아야 한다.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21절)은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이 바로 이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시키는 율법 문제가 바로 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의해서 불거졌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들이 바로 안티오키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안티오키아라는 지명은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원래 시리아 안티오키아이며, 다른 하나는 비시디아 안티오키아인데,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지역은 시리아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안티오키아는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서 인구가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지중해에서 35km 떨어져 있으며, 시리아 공사가 거주하던 곳으로서 이 안티오키아에는 매우 강력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바르나바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냈다고 설명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듯한 이 보도에 의하면 이미 이방인 선교가 실행된 다음에 바르나바가 파송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바르나바가 곧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전한 흩어진 신도들 중의 대표일 개연성이 높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가는 바르나바에 관한 전승을 세 가지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그가 재산을 팔아 예루살렘 공동체에 기부했다는 이야기(4:36,37), 둘째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지도자 중에 선두라는 사실(13:1),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야기(11:27-30)이다. 누가는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바울의 선교 역사에서 바르나바를 적당한 위치에 배치하면서 이 사도행전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실제의 바르나바 위상보다 사도행전에는 축소된 모습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에 의하면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이었다(24절). 이런 표현은 교훈적인 의미에서 관용적으로 쓰인 것이다. 스데파노에게 붙은 수식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나(행 6:5), 아리마대 요셉에 붙은 수식어 ‘착한 사람’(아네르 아가토스)이 그대로 바르나바에게 쓰였다. 여기서 바르나바는 가장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묘사된 셈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이었던 바르나바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 나오게 되었다.(24). 누가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인물로 단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피력한다. 더군다나 고향인 다르소에 은둔하고 있던 바울을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는 사실이라면 세계 선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분명히 바르나바라 할만 하다.
그리스도인
바르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티오키아에 일년 동안 머물렀다(26). 역사비평에 의하면 이런 일 년이라는 숫자를 비롯해서 전체 텍스트 자료가 그렇게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르나바에 관한 몇 가지 전승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이방인 선교를 해명하려고 한 누가의 집필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하기만 한다면 그 이외의 요소들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장소가 안티오키아이며,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르나바였다는 사실이 이 텍스트에서 핵심이라는 말이다.
왜 초기 공동체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이방인 선교를 복음 역사의 ‘에포크’(신기원)라고 생각했을까? 거꾸로 왜 그 당시 공동체의 주류는 이방인 선교를 외면했을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사람들인데도 한쪽에서는 이방인 선교를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추구했을까? 지금 역사가 흐른 다음에는 이방인 선교가 당위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 그 당시에는 숨겨져 있어서 아무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가능성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역사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의존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결단과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의존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인지 아닌지는 늘 훗날에 판명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직 명시적으로 인식되거나 동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안티오키아 선교를 선택한 흩어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지혜로웠을 뿐만 아니라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누가는 바로 이때부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졌다고 확인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단지 유대교에 속한 ‘나사렛 파’ 정도로 불렸다는 말도 된다. 어쨌든지 예수 추종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건 획기적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라는 보호망을 포기하게 된 셈이다. 그 이전에는 이들이 유대교라는 큰 틀에 속한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로마정권에 의해서도 별로 종교적인 억압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특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앞에서 박해에 관한 보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율법 문제로 인한 유대교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것이었지 훨씬 거친 로마 정권과의 마찰은 아니었다.
둘째,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체를 훨씬 분명하게 갖추어나가야만 했다. 유대교인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앙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은 곧 신학작업이며, 이 작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곧 바울이었었다. 바울 이후로 기독교는 교부들 시대에 이르러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종교가 갖추어야 할 전반적인 체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런 작업은 사실 지금도 계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담긴 새로운 현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는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나름의 안정감이 있었겠지만 인류 역사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등장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에 관한 성찰을 끊임없이 끌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는가? 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게 일종의 ‘영성’이다.
새 이름 얻은 사람들
정 우목사(미암교회) / 행 11:19-26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주전 4세기에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까지 정복한 대왕입니다. 알렉산더가 어느 날 군법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병사 하나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보초도 제대로 서지 않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한 마디로 말하면 군인답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알렉산더입니다.” “뭐라고, 내 이름 묻지 않고, 자네 이름 물었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예, 제 이름은 폐하의 이름과 똑같은 알렉산더입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오늘부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인생을 바꾸던지.”
자기 이름을 지키는 것 쉽지 않습니다. 저는‘정우 목사’라는 네 글자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어디 가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 ‘나는 정우 목사인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그래야 제 이름과 직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차가지일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 조심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잘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름에 대한 말씀입니다. 2,000년 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이라는 지명이 두 개가 나옵니다.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옛날에는 시리아의 땅이었지만 현재는 터키 땅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터키 중서부에 있는 도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은 전자의 안디옥입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일로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잡아 죽입니다. 그래서 사도들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어떤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9, 2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지도를 보십시오. 베니게(갈릴리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땅), 구브로(터어키의 남쪽에 있는 섬, 키프로스 섬), 안디옥(시리아 안디옥, 터키 안디옥), 구레네(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이 살던 곳, 아프리카 땅. 현재 지명으로 하면 리비아의 트리폴리)
이렇게 여러 나라들로 피난을 갔습니다. 피난 간 사람들은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피난 간 사람들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하는 안디옥 교회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일입니다. 마치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을 때 백인들과 흑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는 안디옥 교회가 생겼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두 가지 목적으로 그곳에 파송합니다.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잘 지도하시오.’
바나바는 가다가 다소에 들려 사울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이 둘이 안디옥에 가서 일 년간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안디옥에 사는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아침 이 이름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서‘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았기 때문에>
먼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 어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는‘크리스티아노스’입니다. 라틴어로는‘크리스티아누스’입니다. 이 단어는‘크리스티(그리스도)’에 ‘아누스(속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크리스찬(Christian)’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안디옥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고향 땅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집과 재산 다 두고 나왔습니다. 왜요? 사울 같은 유대인에게 붙잡히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둘러 피난 갔습니다. 언제 고향 땅으로 다시 갈 수 있을 런지 기약도 없습니다.
자, 남의 나라에 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풍습도 다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교육시키는 것까지 산 넘어 산입니다. 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피난 왔기 때문입니다. 왜 피난 왔습니까? 유대인들이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유대인들은 꼴도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또 유대인들에게 접근합니다. 전도하려고요.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곳 안디옥에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고난도 달게 받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고난당하고 있는데, 그들의 표정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고, 행복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사람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달게 받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1990년도에 독일에 여행을 갔습니다. 그 해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동서독이 통일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행은 15명이었는데, 목회자와 교수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인솔자는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한완상 박사였습니다. 저는 목회자 중에서 막내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동독 출신 목사와 서독 출신 목사, 그리고 우리 일행, 이렇게 세 그룹이 여러 차례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동독 출신 어느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공산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신앙생활을 했기에 고난이 많았겠습니다.”그러자 동독 목사님의 대답입니다. “물론 고난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잘 믿으려고 하면 어떤 체제든, 어떤 곳이든 고난은 있지 않겠습니까?”옳은 말입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에는 세 가지 종류의 고난이 있습니다. 첫째, 애매히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당하는 고난입니다. 둘째,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셋째, 스스로 선택한 고난입니다. 의를 위해서 선택했기 때문에 고난당합니다. 주님을 믿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고난당합니다. 선택적 고난입니다.
어느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 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 만에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그 후 재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녀를 무려 이십 명이나 낳았습니다. 그 중의 열 명은 열 살 전에 죽었습니다. 남은 열 명 중 하나는 정신박약아였습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또한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난 속에서도 불후의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자기의 작품 첫머리에는‘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썼고, 작품 끝에는‘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 –1750년)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감동적인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요? 일평생 고난이 많았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하의 생애에 고난이 없었다면 그런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고난 속에서 더 빛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 왔습니다. 피난 왔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아마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거처를 정하는 것. 둘째, 일자리를 구하는 것. 셋째, 아이들 학교 보내는 것. 이런 것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부터 했을까요? 19-20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말씀을 전하였다’, ‘주 예수를 전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고난당했고, 또 피난까지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왜요? 그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부터 하는지(우선)를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갔습니다. 풍랑을 만나 죽기도 하고, 질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도착하자 낯선 땅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얼마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그것으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신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둘째 해에 거둔 것으로는 학교를 지었습니다.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삼년 째에 거둔 것으로 마침내 자기 집들을 지었다고 합니다. 자기 집이 소중해도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당이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우선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재판정에는 왕을 비롯하여 고관들이 앉아 있습니다. 심문이 있은 후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입니다. 석방되느냐 감옥에 가느냐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순간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들 증거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직장에 출근하면 먼저 기도부터 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퇴근할 때에도 역시 기도하고 퇴근합니다. 그러니까 시작과 끝이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실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상관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니 이 집사님도 싫어합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래도 이 집사님은 내색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퇴근하려는데 상관이 집사님을 부릅니다. 이야기 좀 하자는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소. 꿈속에서 당신을 보았는데,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소. 요즈음 나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었는데, 오늘 그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어 해결된 것 같아요. 그동안 당신을 힘들게 해서 미안하오.’
이 집사님이 일을 시작할 때,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와 그 사무실에 있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때가 되니 그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우선순위를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우선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에>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가 새로 믿은 사람들에게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라는 말은‘주와 함께 살라’는 뜻입니다. 왜요? 주와 함께 살면 주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면 닮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 닮습니다. 30년, 50년, 함께 사신 부부들을 보십시오. 많이 닮습니다. 식성도 닮고, 취미도 닮고, 심지어는 얼굴도 닮습니다. 그래서 오누이 같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12 제자를 세우신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 목적은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전도하라고 부르셨고, 세 번째 목적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목적이 뭐라고요?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님을 닮습니다. 말하는 것도 닮고, 생각하는 것도 닮고, 행동하는 것도 닮습니다.
코로나19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야,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야 하나님도 닮고, 예수님도 많이 닮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 닮을 것을 보고‘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가운데 사랑의 눈빛도 보았고, 용서하는 아름다운 마음도 보았고, 이웃을 배려하는 태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로부터‘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귀한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지켰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얻게 되었다고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았기 때문이요, 또한 그리스도 전파가 우선이었기 때문이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 아름다운 새 이름 잘 지켜, 우리도 축복이요,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잘 물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부흥하는 자랑스러운 교회
조봉희목사(지구촌교회) / 행 11:19-24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교회에 관하여 근원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저는 토마스 머튼의 대답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하시던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그렇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주력해야할 네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소위 교회의 핵심가치입니다. 첫째, 상향성(Upward) :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적 관계인 예배 둘째, 내향성(Inward) : 교인 상호간의 교제와 양육 셋째, 외향성(Outward) : 교회 밖을 향한 사역과 전도 넷째, 미래성(Forward) : 다음 세대를 향한 교회의 사명과 비전 그러면 우리 지구촌교회가 어떤 기초적인 특징을 지녀야 성령으로 부흥하는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 축제예배를 드리는 교회 교회가 최우선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배를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가까이 하고 싶어 하며,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곧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축복하려고 찾고 계십니다.(요한복음 4:23~24) 구약성경을 보면 예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축복이 임했습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배의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첫째, 성전중심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일주일동안 흩어져 살다가 주일이 되면 모여서 예배해야합니다. 현대인들은 주일성수와 함께 교회중심의 예배를 회복해야합니다. 주말개념이 아닌 주일개념으로 살아야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입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모든 예배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체험하고, 기도응답을 받고, 축복을 누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성공하면 인생 성공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축복하십니다.
2.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에 총력하는 교회 지상교회의 목적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큰 소원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 2:4)예수님의 최후명령도 전도입니다.『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우리가 전도하는 만큼 교회는 구원받는 새 생명이 더해가는 부흥과 성장을 이룹니다. 제가 신학교 때 읽었던 책 중에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제 목회방향을 힘차게 설정해주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가장 건강하고 왕성하게 목회하시는 J. Boice 목사님의 구령열입니다. 교회가 1,500명 정도로 성장했을 때 교인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얼마나 더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한 2천5백 명 정도면 될까요?' 목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야심이 큰 것 같다고 생각하여 다시 물었습니다. ‘한 오천 명 정도면 될까요?’목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열을 받아 ‘한 만 명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짐 보이스 목사님의 대답이 제 목회비전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필라델피아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믿을 때까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지구촌교회의 전도목표와 비전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동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때까지 적극 전도해야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표어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을 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5만 영혼 전도운동은 아주 간단합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제리 폴웰(Jerry Falwell)의 ‘포화전도’(saturation evangelism)를 시도하면 됩니다. 전교인이 자기가 사는 지역(아파트) 가가호호를 3개월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오르내리며 기도 운동을 합니다. 저는 311전도라고 명명해보았습니다. 3개월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기도로 전도합니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 인사를 나누며 교제합니다. 에드 실보소(Ed. Silvoso)는「걷기 기도전도」(walking prayer evangelism)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Come structure to Go structure, 오는 구조에서 가는 구조로 … 지역주민들이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듣도록 계속 초청하고, 또 계속 복음을 들고 나가야합니다. 우리가 영혼을 사랑하는 가슴으로 전도하면 성령께서 열매 맺어주실 줄 믿습니다.
3. 교인들이 친밀하게 교제하는 교회 교회는 본질적으로 가족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라면 서로 자주 만나야합니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집을 왕래하며 교제했습니다. 소위 meeting & eating을 병행했습니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입니다. 즉 나눔의 교제와 친교를 강조합니다. 원래 헬라어의 뜻은 ‘너그러운 나눔, 풍성한 나눔’을 말합니다.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나눔입니다. 현대인들은 대중 속에서의 소외감과 고독을 느낍니다. 외롭습니다. 그래서 더욱 친밀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훈훈한 사귐이 필요합니다.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렸지만 한 교회 안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6~7명만 있어도 교회를 쉽게 옮기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금세기 훌륭한 정신 상담자 Paul Tournier는 이런 말을 합니다.“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공동체입니다. 성경에서는 몸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모든 구성원과 지체들이 함께 연합해야합니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양떼로 비유합니다. 양은 혼자 있으면 맹수의 공격 대상이 됩니다. 서로 같이 있어야합니다. 금세기 영성운동가요 저술가인 필립 얀시가 교회를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도 교인들 간의 교제에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잠시 교회를 떠나 있을 때면, 고통 받는 쪽은 언제나 나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3가지 B의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 Believing, 믿음이 자랍니다. 둘째, Belonging, 교제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셋째, Being, 닮기가 이루어 집니다. 교제를 통해 서로 본받고 균형잡힌 성숙을 이루어갑니다. ‘그래도 등록 안하시겠어요.’
4.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기 위해 훈련받는 교회 현대교회의 병리적 현상은 건강하게 성숙한 교인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교인은 많으나 거듭난 신자가 적으며, 신자들 중에서도 잘 훈련받고 성숙한 제자들이 적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으나 여전히 초보적 신앙상태에 머물러 쉽게 흔들리고, 시험받고, 성숙하지 못합니다. 금세기 예언자적 목회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합니다. 첫째, 교회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서 그 능력(power)이 세상을 강력하게(powerful) 변화시켜야 할 텐데 오히려 무력한(powerless) 교회가 되었다. 둘째, 교회가 소망을 잃고 허덕이는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소망없는 교회가 되었다. 셋째, 교회가 불쌍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인생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오히려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 체계적인 양육과 훈련을 받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곧바로 성숙한 제자의 상태로 올라섰습니다. 그 당시는 신앙생활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많았습니다.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헌신된 제자로 살았습니다. 그만큼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점을 강조합니다.(베드로후서 3:18)『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는 일과 그분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저는 두 단어로 정의합니다. 체험적인 신앙과 체계적인 신앙의 균형잡힌 성숙을 이루어가자는 것입니다. 다양한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잘 공부해서 건강하게 성숙하는 것입니다. 신자 개인의 성숙이 곧 교회성장을 가져옵니다. 내가 자라는 만큼 교회도 자랍니다. 우리 함께 성숙하여 지구촌교회를 힘차게 성장시켜 나갑시다.
5.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두가 사역자가 되는 교회
교회의 궁극적 사명은 섬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섬기고, 교회 밖에서는 사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비전선언문을 잘 숙지하셔야합니다. 『사람들로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교회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도록 한다.』 우리는 그동안 헌신의 개념을 폭이 좁게 제한시켜 왔습니다.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의 본질은 교회 밖으로 나가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의 본질입니다. 선교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시해야 하지만, 그 현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회봉사도 함께 해야 합니다. 소위 빵과 복음을 같이 주어야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했던 일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개척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고아원을 세우는 등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일꾼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적극적인 단어로 사역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단순히 일회성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분야에서 섬기고 헌신하는 사역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역자입니다. 교회에서의 직분도 사역자요, 사회에서의 직책도 사역자입니다. 그야말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영역에서 사역자로 헌신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 사역자, 비즈니스 사역자, 의료 사역자, 교육 사역자, 전문인 사역자로 헌신하십시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안디옥교회가 그 표상을 보여줍니다. 성령으로 부흥하는 자랑스러운 교회! 안디옥교회와 우리 지구촌교회는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지역 인구가 50만 명입니다. 선교 지향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열린 교회입니다. 개방적입니다.(19-20절)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역사회로부터 존경 받는 교회입니다.(26절) 지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신임 받고, 존경 받는 교회입니다. 주시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목 받는 교회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힘차게 부흥하는 자랑스러운 교회로 부상한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지구촌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제예배의 성공자가 됩시다. 영혼구원을 위해 전도에 총력 합시다. 교회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므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합시다. 성숙한 제자가 되기 위해 양육과 훈련에 참여합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헌신사역자로 살아갑시다.
주께 더하여지는 역사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 행 11:19~26
오늘은 1월 둘째 주일로서, 해마다 신학대학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주일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리교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는 대학교는 저의 모교인 서울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그리고 수원에 있는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특별히 이들 세 학교와 이곳에서 미래의 한국 감리교회를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들로 훈련을 받고 있는 신학생들과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교수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두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버리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됨으로 찾아오는 여러 가지 곤고한 상태에서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많은 내용들이 결국은 이 두 가지 큰 틀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한쪽 이야기는 누가 하나님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떠났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또 다른 한쪽 이야기는 누가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잘 섬겼는지,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어떤 복을 주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 그리고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삶과 그 삶의 결국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크게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두 개의 커다란 갈림길이 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그러하며,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역사 이야기가 그러하며, 하나님께 순종했던 왕들과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왕들의 역사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반복적으로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며, 하나님의 징계 이후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며,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어드렸던 한 여인의 삶이 그러하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쓸데없이 낭비한다고 분개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챙겨가지고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던 탕자의 삶이 그러하며, 기근 중에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전의 삶을 회복했던 돌아온 탕자의 삶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제자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성령 충만함으로 순교의 길을 가면서까지 복음을 전했던 제자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결국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은 죄인, 심판과 저주, 불행과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하나의 길과 의인, 구원과 영광,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탄의 역사이며,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탄의 역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힘이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의 긴장 상태를 만들어 가게 되는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갈등과 대립의 역사는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될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의 틀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가시는 생명의 역사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강탈해 갔는데, 하나님은 강탈당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출해 내시기 위해서 쉼 없이 일하고 계신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야기, 곧 해방의 역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이 구원의 역사, 해방의 역사는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 품으로 만들어졌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의 동반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에덴동산은 마치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기 위한 신혼 살림집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거닐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던 그 에덴동산에 사탄이 몰래 찾아오더니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배반하고 사탄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불행과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를 사탄에게 빼앗김으로 불행해 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탈환 작전은 아담과 하와를 먼저 다시 찾아오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홍수 심판과 노아 가족의 구원으로 이어졌으며,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는 것으로 계속 이어져 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져버리고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찾아오셔서는 인간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몸값을 지불해 주시고는 결국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 탈환 작전이 일단락 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사랑 탈환 작전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탈환을 위해서 헌신할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훈련시키시며, 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신 사실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성경의 호세아서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가슴 절절한 사랑이 구약성경의 아가 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이 세상 역사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결국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옴으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게 하시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의 최종적인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또한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소원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취하신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이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신 일입니다. 또 하나는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루게 함으로써 연합된 힘을 통해서 그 소원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신 일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과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의 희망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1장 19절~26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이방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분부를 하셨습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분부를 명심한 제자들과 제자들을 따르던 무리들까지 약 120여명의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고, 그 결과 오순절 날이 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용기를 가지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하루에도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초대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부흥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후에 그동안의 긴장을 풀고 있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요 고민거리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취한 행동은 예수님 당시처럼 다시금 박해를 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공회로 끌고 가서 협박을 하면서 심문을 하기도 했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게 되었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초대교회 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명의 집사들이 맨 처음으로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남다르게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힘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시는 이러한 역사를 사탄이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탄이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슴에 불을 붙여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순교하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일시적으로는 사탄의 승리로 보였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된 일로서, 오히려 복음이 예루살렘 담장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까지 확산되어 나가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곧 사랑 탈환 작전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전환점이었습니다. 본문 전반부인 19절~2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스데반의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 떠나 이방 세계로 흩어져 나간 성도들이 이방 지역에 가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래서 생겨진 교회가 바로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서 장차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역할을 했던 안디옥 교회입니다.
본문 후반부인 22절~26절까지의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견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게 하였는데, 그는 회심 이후에 자기 고향 다소에 가서 머물고 있었던 사도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일 년 동안 함께 사역을 감당한 결과 본문 24절을 보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24절 말씀처럼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바울과 함께 동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로소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 또한 이방 세계로 복음이 왕성하게 확산되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가 어떻게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는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함께 동역한 결과였고, 셋째로 성도들이 오직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향기, 곧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한 결과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심으로 오로지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힘을 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다 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받들어 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삶속에서 증거 하는 성도들, 교회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하여지는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하나님의 소원을 더불어 이루어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역동적인 교회
배영진목사(하늘문교회) / 행 11:19-26
오늘은 역동적 교회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역동적이란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런 뜻입니다. 6월 한달동안 우리가 교회론을 생각하는 중인데 오늘 마지막으로 안디옥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 유명한 교회가 둘인데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입니다. 성경에 최초의 교회가 예루살렘교회, 그 다음이 안디옥교회! 이땅에 어떻게 교회가 탄생했는지 우리가 그 스토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 120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오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들이 놀랍게 변화됩니다. 담대해집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지고 예루살렘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크게 설교를 했는데 그날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스데반이 순교를 당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핍박때문에 여기저기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19절 보시면 스데반에 가해진 박해 때문에 흩어진 성도들이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까지 갔고, 그래서 거기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게 안디옥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안좋은 일이 있고 그걸 가지고 좋은 일을 만드십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하나님은 그 핍박으로 흩어지게 하심으로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게 하신 겁니다. 22절, 안디옥에 믿는 이들이 생겨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한 사람을 담임목사로 파송합니다. 그 사람이 바나바예요. 그리고 바나바가 바울을 동역자로 초청하여 둘이 말씀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안디옥교회가 역동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목해볼 점이 이것입니다. 안디옥의 성도들을 보고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안’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로마황제 씨이저에게 충성하는 사람들, 이들을 씨저리안! 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패러디한 이름이 크리스티안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님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21절, 24절, 계속 뭐라고 했어요?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교회가 됩니다. 안디옥교회의 힘은 무엇인가? 왜 그 교회에 주님의 손이 함께 하셨고, 왜 거기서 변화된 사람들이 많았는가? 안디옥교회는 역동적인 교회였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가 없어요. 편견과 견제!
그리고 두가지가 있습니다. 환대와 존중! 편견이 없고 누구나 환대를 해줍니다. 서로 견제가 없고 누구나 존중을 해줍니다.
첫째, 편견이 없고 환대가 있다.
편견이란 뭡니까? 한쪽 편만 좋아해서 그쪽 편만 드는 것입니다. 좁은 생각이 있고 넓은 생각이 있는데, 편견은 좁은 생각입니다. 니편과 내편을 미리 가릅니다. 한쪽 편에 딱 서서 다른 한쪽 편은 아웃시키는 태도를 말합니다. 너는 아니야! 편식은 뭡니까? 먹는 것만 먹는 거죠. 편견을 가진 음식취향. 내가 먹는 음식은 이거야, 이건 아웃이야! 저는 음식 편견이 별로 없습니다. 뭐든지 다 먹습니다. 편애는 뭡니까? 이뻐할 사람, 미워할 사람을 갈라놓고 그렇게 사람 대하는 거죠. 콩쥐 팥쥐엄마죠. 팥쥐엄마가 팥쥐 사랑하는 것 죄가 아닙니다. 콩쥐를 소외시킨 것이 문제죠. 편견을 갖는 것은, 내 마음에서 너는 내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줘! 여긴 내 구역이야, 그리고 너는 여기서 아웃이야! 교회안에 편견이 있으면, 장애물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요즘 매일성경 고린도교회를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죠. 고린도교회는 왜 힘없이 갈라졌는가? 그 교회는 편견이 많아요. 교회가 네 개로 깨져버립니다. 공부많이 한 사람, 교회창립멤버, 모태신앙출신, 체험이 많은 사람, 이들이 각자 편견을 갖고 차별을 하면서 서로 담을 쌓고 살아요. 교회가 그래요.
오늘 안디옥교회를 보면 편견이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하나님이 역동적으로 쓰신 이유가 이겁니다. 19절과 20절을 잘 보실 필요가 있어요. 아주 상반된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스데반의 환난으로 흩어진 자들은 사마리아, 페니키아, 키프로스, 안디옥으로 갔는데 이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보면 편견이 있습니다. 19절 누구에게만 복음을 전해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의 한계예요. 편견이 있습니다. 난 유대인이니까 유대인만 전도할래! 나는 내 스타일에만 맞는 사람들이 좋더라, 그렇지 않으면 낯설어서 싫더라! 예루살렘교회 출신들은 유대인들이 많은데, 유대인들의 자부심이 뭐냐? 우리는 이방인들과 달라! 우리는 너희와 달라! 우리는 우리끼리 전도하고 우리끼리 기도할래! 사실 유대인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그런 편견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일부러 전도안한 게 아닙니다.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 그래요. 유대인은 유대인에게만 하는 거예요.
그런데 20절 잘 보세요. 그런데 키프로스 사람들과 구레네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들은 어땠어요?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어요.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의 문제는 뭐였나요? 유대인은 유대인에게만 전도한다! 인종적 편견입니다. 이게 심합니다. 질문할까요? 예수믿는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왔습니다. 예수믿는 유대인들이 예수안믿는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잘못되었습니까? 전도한 게 잘못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가 없었나요? 아닙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편견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아웃시킨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복음들을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키프로스의 성도들과 구레네 성도들,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인종적 편견이 없습니다. 이들은 안디옥에서 누구나 만나면 말을 걸었어요. 누구에게나 전도를 했습니다. 당시 시대에 인종적 차별과 편견이 심했는데 이 편견의 분위기를 바꿔버립니다. 유대인에게만 전도한 게 아니라 그리스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러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편견을 갖고있으면 거기서 많은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안디옥교회의 특징은 편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따뜻하게 환대를 해요. 우리가 따뜻한 교회를 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는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에게 덜 따뜻하게 대하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흑인 남자 한명이 목눌려 죽었습니다. 플로이드 사태입니다. 흑인 남성이 백인경찰에게 목이 눌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뭡니까? 아직도 미국사회에 편견이 심하게 존재합니다.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얼굴색깔에 대한 편견입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 아메리카 신대륙때부터 흑인노예무역입니다. 노예무역으로 나라가 부유해진 나라. 영국 프랑스도 마찬가지예요. 영국에서 윌리엄 윌버포스 국회의원에 평생을 걸로 노예무역을 폐지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에이브라함 링컨, 그가 대통령때 흑인노예를 해방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미국 안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남북전쟁입니다.
60년대 마틴 루터 킹, 흑인목사가 일어나 I have a dream! 유명한 설교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안에 차별이 존재합니다. 얼굴색깔에 대한 편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편견을 갖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견을 갖고 삽니다. 초대교회때 이러한 편견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야고보서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회당에 있었던 일입니다. 야고보가 보고있는데 너무나 안좋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교회! 회당안에 화려한 옷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면 환대합니다. 복장이 좀 남루한 사람이 오면 아무도 환대를 안해줍니다. 소홀히 취급합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아파트인가? 어떤 차인가? 어떤 직업인가? 이 편견이 심합니다. 안디옥교회는 달랐습니다. 그런 편견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내가 말 걸 사람, 내가 교제할 사람, 내가 전도할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인종이나 학문이나 재산이나 직업을 보고, 속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가 역동적입니다. 21절 다같이 읽어봅니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님앞에 돌아옵니다. 24절도 사람들이 돌아와요.
안디옥교회의 힘은 뭔가? 교회 안에 편견이 없고 누구나 환대하는 분위기입니다. 서로간에 심리적인 거부현상이 없어요. 13장에 보면 리더들 출신도 다양합니다. 왕족출신 흑인들, 바리새인출신, 이방인출신, 이렇게 아무런 거리감이 없었어요.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매우 좋게 보십니다. 이렇게 되면 거기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어떤 편견이 있는가를 살펴보세요. 편견이 있으면, 역동적인 삶이 안됩니다. 내가 선호하면 스타일, 내가 안좋아하는 스타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껴안는 스타일, 내가 밀어내는 스타일이 있어요. 이게 너무 강력하지 않도록 나를 넓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편견은 장벽입니다. 주님이 그 장벽을 허물어주셔야 합니다. 하늘문교회 다니면서 그런 장벽이 허물어지기 바랍니다. 베를린장벽 허물어지듯이, 심리적 편견의 장벽이 허물어지면, 하나님이 그를 편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역동적으로 살게됩니다.
둘째, 견제가 없고 존중이 있다.
오늘 25절을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은 바울의 개종전 이름입니다. 바울을 동역자로 데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바울을 데려왔을까요? 바나바는 바울이 주님 만난 사건을 들어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와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바울이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와서 열심히 말씀가르치는데 혼자 버거웠습니다. 바나바는 본래 사람이 착합니다. 긍휼의 은사, 격려의 은사가 많아요. 그런데 바나바가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탁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혼자 감당하기가 벅찼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생각합니다. 나와 함께 말씀을 가르칠 동역자가 필요하다. 누구를 데려올까? 아 바울이다!
바나바는 사실 청년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실을 들었어요. 그때 이 사울이 구약율법에 해박한 것도 알아요. 그 사울이 예수님만나 회개하고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동안 주님이 친히 사울을 가르치신 것을 알았습니다. 갈라디아 1장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3년 아라비아에서 주님께 직접 계시를 받습니다. 그 사울이 자기고향 다소에 있어요. 25절 바나바가 바울을 만나러 갑니다. 이게 놀라운게 뭔가, 바나바는 바울이 안디옥에 와서 가르치면 학식과 계시가 자기보다 바울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바나바보다 바울에게 더 많은 리더십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바나바가 예상못하지 않아요. 나중에 현실이 됩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견제가 없습니다.
여러분 국가나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가 가장 힘을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리더들끼리 반목과 견제입니다. 우리나라 조선 5백년의 비극이 당파싸움입니다.
19세기 중반 임진왜란 쳐들어오기 직전, 조선왕조에 남인 북인 당파싸움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청나라파와 일본파의 반목, 대원군파와 명성황후파가 있었습니다. 20세기 중반, 해방후 이승만파와 김 구파가 있었죠! 안타깝게 김 구가 피살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비극, 바로 견제의 비극입니다. 우리 한민족이 힘있게 일어서려 할 때마다 주저앉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나 견제가 심한 것입니다. 구약 사무엘상 보면 사울이 다윗을 견제합니다. 다윗의 출현했을 때, 사울이 다윗을 시기합니다. 다윗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군가를 견제하려고 살면 그 사람 그 자신이 잘되지 않습니다. 사울을 하나님이 폐하십니다. 사울 때 이스라엘이 정말 힘없는 나라였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견제하지 않았다! 바나바와 바울이 둘이 서로 존중을 해줍니다. 저 사람의 장점을 보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단점이 너무 잘 보여요. 그런데 나 자신도 단점이 많은데, 그거 고치는 것도 힘들다고 못하면서 상대의 단점을 보고 말하고 깎아내리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편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안디옥교회의 두 지도자 바나바와 바울이 얼마나 서로 존중하고 일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역동적 교회가 됩니다. 26절, 둘이 함께 말씀을 가르치고 보니까 교회는 아주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사람들이 뭐라고 불러요? 크리스티안! 저들은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들이다! 마치 씨이저에게 충성하는 씨저리안같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안디옥교회같은 특징이 우리 하늘문교회에 많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교회의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안디옥교회는 편견이 없어요. 환대를 합니다. 견제가 없어요. 서로 존중을 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우리 이거 연습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편견을 갖고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 주변 누군가 복음이 필요할 때, 아 근데 저 사람은 아니야 내 타입이 아니야! 내 마음에서 편견이 없는 거예요. 누군가 새 얼굴이 우리 목장, 우리 교회에 오게 되었을 때, 어떠한 편견도 없이,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것입니다. 다가가서 환대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교회역동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학연이나 지연이나, 이런 것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견제가 없는 교회, 바나바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간 어떤 견제도 없이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늘문교회가 역동적인 교회, 힘있게 자라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최초의 이방 교회
행 11장 19~30절 / 이동휘목사
1. 베드로가 가이사랴 주둔군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식솔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설교하고 세례를 베푼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고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거룩한 민족이라는 의식 가운데, 다른 민족 소위 이방인들은 세리나 죄인, 그리고 창녀들과 같이 상종해서는 안되는 더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들과 자리를 같이 하거나 식사를 함께 하면 자신을 더럽히는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가서 식사로 함께 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과 함께 어찌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느냐?’ 며 여지없이 그를 비난합니다.
(행11:2-3)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러한 비난에 대해 베드로가 그 사건 경위를 설명합니다.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하루는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며 하나님께서 그 보자기에 담긴 것들을 잡아 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보자기에 담긴 것들을 보고,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며 거절합니다. 베드로가 거절하게 된 이유는 그 보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하나같이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 결코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보자기에 담긴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규정하여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종도 하지 않던 짐승들이었습니다.
(레11:2-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너희가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낙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곧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신 14:3-20)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담긴 것들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굽이 갈라져 쪽발이긴 한데 새김질하지 않는 짐승이어서 부정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있었는데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의 종류와 까마귀 종류 등등이었습니다. 또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등 온갖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인 베드로는 태어나서 한 번도 먹지 않았던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먹을 수 없다며 하나님 말씀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행10:14)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10: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 환상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소리쳐 부르며 ‘베드로라는 시몬이 있느냐?’ 고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보여 주는 뜻을 몰라서 깊이 생각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 “(행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 가게 됩니다. 고넬료는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로 가득한 고넬료 집에 도착하여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찾아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을 때 내가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습니까?’(행10:28-29) 하고 자신을 부르게 된 목적을 묻게 됩니다.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주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행10:34-35)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며 설교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느 민족이든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 주셨는데 이 예수님이 바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를 전파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 전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셔서 예수님은 사방으로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3일 만에 다시 살리셔서 그분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증인, 곧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후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신 우리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으며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우신 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모든 예언자들도 증거했습니다.>(행10:34-43) 베드로가 이같이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됨을 보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에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 곧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2. 바로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이 고넬료와 그의 식솔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음으로 이방인들도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때’, 스데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체포되어 순교당하는 사건, 당시 교회로서는 충격적인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은 날로 심해져, 그 박해가 이방인 지역인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으로 성도들은 더 멀리 이방인 지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행7:55-8:3)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교회에 대한 박해와 핍박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 그리고 그 범위가 멀리 이방 지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베니게’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지역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도시가 속해 있는데, 이미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 당시 이 두 곳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바 있습니다.
(막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따라서 베니게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생소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브로’는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한 섬인데 안디옥과 다소, 그리고 길리기아 지역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키프러스’(Cypr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교회에 내놓아 섬긴 바나바가 바로 이 구브로 섬 출신입니다.
(행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구브로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훗날 바울도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행13:4-12) 또한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습니다.(Josephus)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A.D.37-41년에는 로마 황제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되었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흩어져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각각 흩어진 그곳에서 그곳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성도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중 일부는 이방인인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20입니다.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박해를 피해 구브로와 구레네에 갔던 유대인 성도들 몇몇이 안디옥에 가서 그곳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 도시로서 이곳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출신지이기도 합니다.
(눅23:26)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3.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가 듣고 교회 사역자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송하여 안디옥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사역을 책임질 사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에 부여된 복음 전도 사역에 필요한 적임자는 적어도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는 유대적 전통에서 자라난 유대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이방인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안디옥을 기독교의 중심지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위에 교회에 대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 충분한 이론과 율법에 박식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적임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그에게 가편 투표를 던져 성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 섰고, 더 나아가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까지도 체포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울이 있습니다.
(행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9:15)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울이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역자로 변해, 다메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배신한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를 알고 그를 밤 중에 피신시킵니다.
(행9:20-25)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이러한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터라, 사울의 제자됨을 두려워하고 그가 변하여 제자가 되려한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가 다메섹에 박해하려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과, 다메섹에 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바나바의 인물 됨됨이와 그의 인품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설명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자 그를 다소로 보냈습니다.
(행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다소가 간 사울에 대해 약 10년간 그의 소식을 전혀 모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었습니다.
(행 21: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행22:3)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의심없이 바울은 약10여년이란 세월을 자기 고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맡아야 할 사명, 즉 이방인에 복음 전도의 사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을 최초의 이방인 교회 책임자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갔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이 바울로 바뀌어 나오게 된 곳은 사도행전13:9입니다.
(행13:9)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 후로 바나바보다 바울이라는 이름이 먼저 등장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바나바의 이름이 항상 사울보다 먼저 나왔는데, 이제부터는 사울의 바뀌어진 이름인 바울이 바나바의 이름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전까지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라고 하는 한 지역에 계속해서 머물면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똑같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똑같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한 지역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역지를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울의 복음 전도 대상이 주로 헬라 사람,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바울로 바꾼 것은 아닙니다.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헬라식 이름인 바울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또한 정통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울이 주로 만났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자기와 같은 동족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계속해서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나라들을 다니면서, 유대인이 아닌 로마 제국에 속한,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이제부터 사울이 만나야 하는 주 대상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가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인 이방인들을 더 쉽게 만나고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사용했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9:17-23)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더 많은 사람을 복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신을 만나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사역자로 삼으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섬기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제자된 우리들도 모든 사람들을 섬길 때에만 그들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과 관습,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 가서 전도할 때, 그들의 그 모든 것들을 무조건 거절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 말고 복음 전도를 위해 충분히 이해하는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말이나 한국의 옷과 음식 등을 싫어하고, 자기들이 서양에서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자신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적응시킨 것은 결국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아무쪼록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낮고 천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빌 2:7-8) 바로 이것이 사랑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고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정신이 없으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치 경기하는 자처럼 자기를 쳐 복종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경기하는 사람이 절제하지도 못하고 자기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을 때 그는 훌륭한 경기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경기자는 경기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달리거나 적을 보지도 않고 무작정 공중을 치는 권투선수도 아닌 것입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성도는 자신의 삶과 복음 전파의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조 코치인 벨라 카롤리가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의 체조 코치로 나디아 코마네치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휴스턴에서 미국의 체조 선수 300명을 길러 냈습니다. 그는 선수들을 연습시킬 때 세 가지 조건을 요구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평안을 포기하고 코치의 훈련 방향에 순종할 것, 둘째는 생활의 우선 순위 중 체조를 1위에 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체조에 헌신할 것 등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평안을 포기하고 자기 희생적인 절제 생활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삶의 우선 순위를 항상 복음 전파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훌륭한 경기자, 즉 복음 전도자는 죄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 영혼을 성결하게 보존해야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는 복음을 위하여 태어났고 복음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며 이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은혜와 은사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롬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으며, 여러분의 존재 가치도 복음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고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시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울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희생하고 손해 볼 수 있으며,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받은 소명은 이렇습니다.
(행9:15)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말씀에서 보면, 사울이 복음 전도를 위해 부름받은 대상은 제일 먼저 ‘이방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지금까지 사용했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받은 바 소명을 위해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이름인 ‘사울’ 대신에 ‘바울’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모든 초점을 선교에 맞추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왜 자기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서 사용했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잘 감당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책임지시고 그가 필요한 것은 다 채워주셨으며, 그가 처한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건져주셨으며, 그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셔서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사울처럼 우리 삶의 초점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세상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좀 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더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바울과 협동으로 목회한 결과 안디옥 교회는 영적, 물적 큰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행11:25-26)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 사람들이 교회를 더 이상 유대주의의 한 종파와 일부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로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나 ‘성도들’이라고 불렀고, 유대인들은 주로 ‘나사렛 이단’, ‘도를 좇는 자’ 등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는 안디옥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유래되었으며, 이것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마시거나 먹거나 무엇을 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얻게 된 별명,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전 세계가 알게 될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살아 계신 분으로 말미암아 멸시될 이름을 모든 사람이 놀랄 용기와 사랑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 아가보가 큰 기근을 예언했을 때,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곧 사도들의 지시를 좇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대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돌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제 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들을 가르쳤던 두 선생님들에게 그 임무를 위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점을 계시하는 멋지고 은혜로운 행위입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언에 복종하여 앞으로 있을 큰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유대의 형제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서로가 하나됨을 깨닫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한 부분이 고통을 당하는데 다른 한편이 가만히 있다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들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성 크리스토퍼라는 성자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펠로는 시리아에 사는 힘센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리아 왕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은 노래 가사 가운데 악마라는 말이 나오자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악마를 찾아가서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나쁜 짓을 하며 금은보화를 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마와 함께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악마가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보고 몹시 무서워하며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악마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십자가는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는 예수의 상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악마로부터 빠져나와 예수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펠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나룻터의 사공이 되어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직 예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흘 동안 장대같은 소낙비가 퍼부어 홍수가 졌습니다. 오펠로는 물이 불어서 나룻배를 띄우기가 위험해지자 일단 휴업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펠로가 머무는 거처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습니다. 한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위독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 나루를 건너가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펠로는 소년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강을 건너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물결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배로는 어려워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소년은 더욱 무거워만 갔습니다. 그래서 오펠로는 “너는 무엇을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무겁냐?”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는 어른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만나려고 하던 예수다.” 이 전설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권력(왕)의 신하나 재물(악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바른 주인인 예수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섬긴다고하는 것은 곧 한 이름없는 아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유대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낸 것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죄악이 가득한 곳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진주가 진흙 속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악된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길 때 그 진가(眞價)를 더욱 발휘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죄 많은 곳 은혜가 더욱 넘치는 교회, 형제 사랑으로 뜨거운 교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말씀이 충만한 생명수 넘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생명의 빛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벤치마킹(bench-marking)하고 싶은 교회
문성욱 목사 / 행 11:19-30
어느 분야이건 그 분야에서 모델이 될 만한 사람과 단체를 선정하고 그 대상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벤치마킹(Bench Marking)’한다고 합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4강에 올라가자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축구인들은 한국 축구를 기적적으로 4강으로 올려놓은, 전(前) 한국축구국가대표 히딩크 감독을 벤치마킹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500일 동안의 히딩크의 족적을 세밀하고 냉철하게 살피며, 히딩크가 기적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고, 어떻게 추진했으며, 어떤 시련을 뚫고 왔는지, 승리의 환호 뒤에 가려진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내며 그를 벤치마킹하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서도 이 벤치마킹은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의 인물 중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을, 요셉으로부터 ‘비전’을, 다윗으로부터 ‘용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바울로부터 ‘선교’를, 바나바로부터 ‘동역’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벤치마킹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랑을 닮고, 예수님의 비전을 벤치마킹할 수 있습니다. 다른 교회를 벤치마킹한다고 자존심 상해 할 필요도 없고 수치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모범이 되는 교회, 칭찬 듣는 교회, 건강한 교회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교회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11장과 13장에 등장하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특별한 배경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성도들이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되자 예루살렘을 떠나 베니게와 구브로, 안디옥에까지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의 무엇을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까요?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마어마한 물질을 소유한 부자의 손이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의 손이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손이요, 세상의 그 어떠한 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의 손입니다.(시편 89편 13절) 모세가, 사도 바울이 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21절) 여기에서 말하는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인데, 신약에 와서는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주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자 안디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손은 엄청난 능력입니다. 주님의 손이 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인생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손에 붙들렸느냐,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계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13:1) 먼저 언급된 바나바는 귀족 출신으로서 땅을 교회에 기증할 만큼 큰 부자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디옥교회 안에는 귀족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니게르라고 불리 우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그는 흑인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젊은 청년에 이르기까지 ‘세대 차이’를 극복하였던 교회였고,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물질 차이’를 극복한 교회였으며, 인종과 지역 차이를 극복한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특징은 ‘하나 됨’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 용납하고 서로 품어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 안에 이러한 특징이 사라져갔습니다.
좋은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본질에 충실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는 그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에 목숨 겁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양보하지만, 본질적인 것에는 목숨 걸고 지키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엄연히 구분 지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학연이나 지연이나 혈연이나 취미 안에서가 아닌, 모든 장벽을 허물어놓으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나이와 성별과 신분과 학벌과 직위를 초월하여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주의 사랑을 나누는 교회’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흉년으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예루살렘과 유대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안디옥 교회가 헌금했습니다.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하고, 적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적게 하고, 없어서 못하는 사람은 못하고, 형편에 따라 ’각 사람의 능력대로‘ 물질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디옥교회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던 교회였습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디옥교회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안디옥교회는 스데반 순교 이후 박해로 인하여 흩어졌던 성도들이 세운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했습니다. 사랑을 누리려고만 하지 않고 나누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 바다의 차이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헐몬 산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을 계속해서 요단 계곡을 통해 내려 보내지만, 사해바다는 요단강으로부터 물을 받은 후 다른 지역으로 단 한 방울도 내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사해바다는 염분 함유율이 4~8%인 일반 바닷물과 달리, 염분 함유율이 28~33%이나 되는 엄청나게 짠 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기들 교회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내보내었습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그들에게 더 큰 복을 주셔서 계속해서 소아시아와 유럽에까지 선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웃사랑초청 잔치 발대식을 갖게 됩니다. 6주 동안은 한사람이 태신자 세 사람씩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그 다음 6주 동안은 그들을 찾아가고, 차를 마시고 초청하여 식사도 나누면서 인간관계를 맺어 성탄절에 교회에 초청하여 이벤트 행사를 하면서 교회를 소개하고 1월 첫 주부터 알파를 해서 교회에 정착시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안디옥 교회를 닮아서 주의 손이 함께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 되고, 받은 은혜로 나누어 줌으로 안디옥 교회에 일어났던 부흥과 기적이 우리교회와 성도들 가정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흩어진 사람들
양인순목사(성지교회) / 행 11:19-26
찰스 스탠리 목사의 아들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앤디 스탠리가 있습니다. 사역 중에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낙심과 좌절 속을 헤맬 때였습니다. 그때 나이 드신 어떤 성도님이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심방은 앤디 스탠리를 위로하기 위한 요청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벤스(Rubens,1577~1640)라는 화가가 그린 “사자굴의 다니엘”이라는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사자 몇 마리와 굴 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 그리고 다니엘이 보입니다.” “더 자세히 보십시오. 중요한 것을 보십시오.” 끝까지 앤디는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이 드신 성도님이 말했습니다.
“다니엘의 눈빛을 보십시오. 그의 눈은 사자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것을 보십시오.”
앤디는 이 대화를 성령께서 자기를 깨우치기 위한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살다보면, 다양한 문제들이 밀려옵니다. 크레파스처럼 다양한 색깔의 고난이 다가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심지어 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의 시선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고난이라는 사자에게 눈길을 주는 순간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순간 우리는 문제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고난의 사자를 보지 마시고, 그 사자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만약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달려드는 사자를 보았다면 그는 사자가 물기도 전에 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리 죽음의 사자 굴에 있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다니엘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그 순간 사자는 온순한 양처럼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고난이라는 쓰나미가 언제나 닥쳐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다가오시는 능력의 주님을 신뢰하고, 바라보십시오. 그 속에 고난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최초로 세워진 이방교회를 소개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집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는 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이들은 주로 구약의 전통과 율법을 지키던 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인들이 아닌 선민으로 택함 받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떠나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들이 함께 교회 공동체를 섬기면서 갈등이 야기됩니다. 정통 히브리인들과 해외에 흩어져 살면서 이방인처럼 변한 유대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의 문제를 두고 표면화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일곱집사를 세우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여전히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깨뜨린 것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 사건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핍박이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유대교를 신봉하던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을 이단시여깁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섰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확산되는 복음을 막기 위해서 핍박을 가합니다. 정치적인 명분을 내세워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집단으로 매도하여 믿는 자들을 잡아 죽입니다. 핍박을 견디다 못해서 예루살렘에 머물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땅으로 도망을 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겼습니다. 유대인들만을 중심으로 선교하고 있는 편협된 복음을 순교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집중했던 복음을 이방세계로 흩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편협적인 배타성을 가지고 동류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비이커 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현실의 편안함에 안주할 때 하나님께서는 흩으십니다. 자기들끼리 동류의식을 가지고 안주하고, 즐길 때에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성도 간의 친밀한 교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교제에 매여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선교라는 목적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친목단체가 되고 맙니다.
왜 작금의 한국교회가 갈등과 분열에 휩싸여 있을까요? 어제도 용천노회 아동부 연합회 모임이 저희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타 교회 장로님, 집사님들과 대화를 하는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성도들이 예수 믿기 참 어렵습니다.” 그 말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담겼습니다. 자기들의 삶이 힘들고 곤고해서 예수님을 믿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잘 믿고 싶은데 목사님 때문에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교회가 목사와 성도 간에 갈등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목사 때문에 예수 믿기 힘들다?’ 이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담임목사와 당회 간에, 당회와 안수집사, 제직 등 서로 간의 갈등과 알력 속에 싸우다가 결국 교회가 깨집니다.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성지교회는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담임목사와 당회 간에 갈등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당회가 싸움을 안하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담임목사들이 회집을 피하고, 회를 안 먹는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당회 때 하도 힘이 드니까 <회>자만 나오면 자다가도 경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회를 너무 좋아합니다. 당회를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라는 본질에 충실하면 교회가 싸우거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면 싸울 시간이 없습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데 언제 싸우겠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생각해서 교회를 키우려고 하거나 정치적인 일에 빠지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장로님들도 노회나 총회에 가서 정치를 하려고 교회를 이용합니다. 그러다보면 교회가 문제가 생깁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들은 서로 노회를 안가려고 애를 쓰시기 때문에 순번을 정해서 총대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들은 서로 가려고 싸우고, 그러다가 당회가 갈라지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깨뜨려서라도 흩어놓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차선이라고 여겨집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이라는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할 때 하나님은 핍박을 도구로 흩으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빌립집사가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더 본격적으로 이방선교를 이루기 위해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사도 베드로를 만나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을 위한 제2의 성령강림사건임을 지난 주 배웠습니다. 그 결과 모인 모든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 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 퍼졌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에대해 베드로는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요 성령님의 역사인데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새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이로서 본격적인 이방선교의 시대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그때는 바로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중심의 교회가 이방 지역으로 흩어진 때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의 복음이 전해진 때입니다.
예수를 믿던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베니게-오늘날 시리아 레바논의 접경지역으로 나갑니다. 구브로-지중해로 연결되는 사이프러스 섬으로 갑니다. 아프리카 북부인 구레네-오늘날의 리비아입니다. 오늘날 터키 남부인 수리아 안디옥까지 갑니다. 이때까지도 전도의 대상은 주로 유대인들입니다. 아직도 유대인이라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건이 소개됩니다.
환난으로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에게도 예수를 전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 안디옥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됩니다. 당시 안디옥은 인구가 50만명이 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안디옥은 로마의 부와 헬라의 미 그리고 동양의 풍요를 모두 가진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 5마일 떨어진 곳에는 아폴로와 아르테미신 숭배의 중심지인 다프네(Daphne)숲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성적타락과 방종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세계에서 안디옥은 부도덕한 도시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곳을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환난이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 안디옥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터키로 들어가서 우상숭배의 도시인 안디옥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봅니다.
비록 타락한 도시에 소수의 사람이 복음을 전했지만 안디옥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다같이 21절 말씀을 읽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
몇 사람이 복음을 전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 돌아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입니다. 주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려다가 쫓겨났거나 자발적으로 떠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린 자들입니다. 이방 땅에서 사는 것조차 힘겨운 삶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것도 유대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그것도 우상숭배와 성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안디옥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결국은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입니다. 내가 어디에, 무엇을 더 큰 가치를 두느냐에 달렸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면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복음에 가치를 두면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 집에 사는 가족들에게도 복음 전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매일 보고 사는 이웃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회사의 동료나 친구들, 사업의 파트너들에게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러나 흩어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열악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합니다. 사도바울의 권면처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이 소수의 사람들의 헌신과 복음의 열정이 안디옥 교회를 세웁니다. 이방선교의 전초기지를 세운 이들의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명의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헌신이 위대한 이방선교의 초석인 안디옥 교회를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소수의 작은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이뤄집니다. 대단한 구호나 전략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열정에 사로잡힌 창조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 위대한 역사가 이뤄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와 전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 초창기에는 제 힘과 능력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꿈꿨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한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은 리더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그것이 내 계획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냐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욕심 내지 야망을 위한 목표일 때가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 날 제가 품었던 생각들이 얼마나 교만했던 가를 깨닫습니다. 이제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 방법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셔야만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여기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임할 때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줄 믿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 성지교회에 이런 부흥의 역사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연약한 우리를 통하여 주의 나라와 주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도구로만 쓰임받게 하옵소서.”
이런 간절함과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개포동을 구원하고, 강남을 살리고, 민족과 세계 복음화를 이뤄가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흩어진 소수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이 만연한 안디옥에 짧은 순간에 복음이 확장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요인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복음 전하는 자들의 삶의 태도가 안디옥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이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칭하는 이름이 붙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12)
지금까지는 예수를 믿거나 전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 땅 안디옥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15:19)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할 수도 있고, 세상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증거가 무엇일까요?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면 예수께 속한 증거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속한 자로 살면 ‘왕따’를 당합니다. 왕따는 ‘왕을 따르는 사람들’ 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살면서 바르게 예수님께 속한 자로 살면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미워하는 흔적이 있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비난과 조롱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억이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증거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흩어진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기가 살던 도시를 떠났습니다. 형제 자매를 떠났습니다.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포기했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미움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인들은 ‘나사렛 이단’ 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친 놈들’ 정도의 경멸조로 부른 이름이지요.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이 별로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안디옥 사람들과는 확실히 구별됐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주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우리와는 분명히 달라.”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처럼 그렇게 불려 지기를 축복합니다. “저 사람 진짜 예수쟁이래.”“저 사람은 진짜 예수냄새가 나.”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 성지공동체 안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미인대칭을 생활화하십시오. 내가 먼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인사하세요. 그리고 따뜻한 칭찬과 축복의 말을 하세요. 그것이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이것만 잘해도 교회는 부흥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도 말과 행동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 예수님을 보고, 성지교회를 봅니다. 항상 먼저 밝은 미소를 짓고, 먼저 인사를 하세요. 긍정의 말로 칭찬하고, 축복하세요. 그리고 성지교회를 자랑하세요.
그리고 좀 바보 소리를 들으세요. 너무 똑똑한체 마세요. 사람은 자기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좀 어리숙해 보이면 좋아합니다. 좀 손해를 보라는 것이죠. 물건을 살 때도 좀 손해보세요. 더 가지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 팔라고 하고, 주는대로 받아오세요.
그리고 공중장소에서 매너를 지키세요. 종업원들에게 상냥하게 대하시고, 조용히 말하세요. 저 사람들은 뭔가 다르네? 알고보니 성지교회 교인들이래. 이런 소문이 나야합니다. 내가 좀 손해보고, 양보하고, 구별된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이방에 세워진 교회요, 이방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요, 이방지역에서 “예수쟁이”이라고 존경과 인정을 받습니다. 그 주인공들은 바로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무명의 소수의 헌신된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니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자굴 속의 다니엘처럼 사자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붙드십시오. 그 속에 세상을 이기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어제 예수마을교회 장학일 목사님이 보낸 사연입니다. 그 교회 안희성 집사 얘기입니다. 이 분은 시 의원이었는데요. 그런데 위암 말기였답니다. 암덩어리가 식도까지 차올라서 물 한 모금 삼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한 달간 뼈만 남은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사사기 15장의 삼손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삼손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물이 솟게 하십니다.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 이란 뜻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주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아니 내가 더 감사하지. 너는 일찍 깨달았잖니”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또 다시 통곡하며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치유율 0%인 상태에서 깨끗하게 완치시켜주셨답니다. 할렐루야! 너무나 감사해서 지금은 감신대 신대원에 재학중이랍니다. 6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암 환우 그리고 가족 여러분! 진정으로 진정으로 권합니다. 예수 안에서 암은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바람에 찔리고 고통이 구름을 찌를 지라도 암엔 아멘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멋있지 않습니까? 암엔 아멘 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지금도 얼마든지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질병이 떠나가고, 문제가 응답되고,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우리 성지교회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흩어지는 기적의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날마다 흩어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속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라고 인정과 칭찬을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조롱받고 비난받는 교회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성지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교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거룩한 성지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흩어진 무명의 사람들이 되어서 날마다 그리스도인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찬양드리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 까지>
♫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주 예수를 전파하니
양향모목사 / 행 11:19-21
현대교회가 원래 교회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의 교회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이전에 교회의 기준이 되어야 할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중심에 계셔야 할 하나님이 없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려는 온갖 프로그램들이 교회 속에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 다시 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를 다시 한 번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뜻을 되새기며 참된 교회의 모습을 되찾아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사도행전교회로 돌아가자고 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적들이 재현되는 교회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교회로 돌아가자고 할 때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단순히 교회가 시작되는 역사가 아니라 교회가 시작되면서 강조한 것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질이 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약속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구약중심의 유대교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나 제사나 할례나 성전이나 이런 것들을 완전히 다른 것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고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고 율법을 통하여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지켜서 오히려 위선자가 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율법의 사용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더 이상 교회의 중심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전이나 제사나 여러 절기들이 예수님을 알게 하는 예표로서의 의미는 있지만 이제 신약교회의 성도인 우리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거나 절기를 그들처럼 지킨다거나 유대교인의 상징인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런 구약의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언약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신약교회의 또 하나의 변화는 유대인들 중심에서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로의 변화입니다. 구약중심의 유대교는 유대인들에게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어 누구나가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교회의 성도들이 따를 핵심 진리의 말씀이고 교회가 전할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복음이 중심이 되었을 때 참된 교회이고 이 복음이 중심이 되지 못한 교회는 아무리 대형교회라고 할지라도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유대인에게서 세상 만민으로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뀐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사도행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고안해서 만든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싫어하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몰아내고 만든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시작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만드신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우리 교회의 원래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본문 19절 말씀에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환난으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스데반은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이나 성전에서 제사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통해서 발견해야 할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증언한 스데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돌로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한 증언을 순교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증언하다가 피 흘림의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증언이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을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돌로 치거나 위협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무슬림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아닌 이상한 다른 복음을 전하고 복음과 반대되는 사상들을 설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으로 이내 일어난 환난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감옥에 넣기도 하고 사형을 시키기도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환난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이스라엘을 떠나서 먼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세도시를 살펴보면 베니게와 안디옥은 이스라엘 북쪽 터키의 아래에 있는 도시이고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라는 지중해 바다의 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들로 가까워서 피신하기가 쉬워서 그곳으로 피난을 갔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도 그들은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해서 타국까지 왔으면 조용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인데 거기에 와서도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까요? 복음을 믿고 따르다가는 불이익을 당하고 잡혀가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면 당연히 믿는 것을 포기하고 살든지 안 믿는 체 하면서 마음으로 믿고 살든지 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승자 편에 서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 편에 서기를 좋아합니다. 소수의 연약한 사람들 평에 서 있다가는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늘 약자 편에 소수의 무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일을 목격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외국으로 도망 온 사람들이 외국에 와서도 또 그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가진 복음의 능력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으로 인해서 복음이 오히려 세계만방을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위대한 복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진리의 핵심이요 세계만방까지 전해야 할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본문 20,21절 말씀에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19절의 말씀대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살길을 찾아서 고국을 떠나 타국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었을 것이며 이왕이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는 자기 민족이 먼저 이 복음을 알고 믿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외국 사람인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유대인들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알렉산더대왕을 중심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사람들이요 그들이 형성한 문화는 그때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약성경은 당시의 제일가는 언어인 헬라어로 써졌습니다.
그리고 헬라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과 대칭되는 말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이방인의 대표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유대인들이나 세계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적용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었던 가난하고 작은 나라를 사용하여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국가로 발전시키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이 선교의 임무를 더 잘 감당할 때 더 부자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선교를 포기할 때 다시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바른 복음을 전하고 세계선교에 앞장설 때 우리나라가 잘살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교회를 위해서 복음전도를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이 그냥 나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늘 그런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복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 먼 이국에 왔고 거기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주의 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사람들이 믿게 할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를 통해서 복음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다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허랑방탕하게 살던 사람들이 삶의 목적을 정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의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손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잃지 않고 사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이 진리의 복음을 이웃에게 먼 아방나라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
정방원목사 / 행 11:19~30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의 회심은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선교 역사상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기념비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갖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에게 담대히 나아갑니다.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활짝 열고 화평의 복음을 전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고넬료의 심방 요청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체험하며, 물 세례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은 고넬료의 회심 소식을 듣고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와 교제를 나눔으로 유대인의 정결법을 어겼다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석 제자이고, 선임 사도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할례자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화를 내거나 권위를 부리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나에게’라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태도로 겸손히 그들을 대하며,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간 것은 ‘성령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둘째,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셋째, 이방인인 고넬료가 회심한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베드로를 비난하던 할례자들은 잠잠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마도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행 11:18>“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여기서 ‘이방인에게도’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만 독점하라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 화평의 복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지상명령을 주시는데, 유대인은 선민의식을 갖고 이방인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독점하고 복음도 독점하며 구원도 독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생각 자체를 전혀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진리를 모든 사람이 알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깝게도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습니다. 예배당 밖의 사람이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치 베드로를 비난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행 20:21>“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할까요?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듯,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마저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안디옥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활짝 연 후에 맨 먼저 회심한 사람은 고넬료이고, 맨 먼저 세워진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세상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이지만,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교회보다 안디옥 교회가 훨씬 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교회 구성원이 유대인과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에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는 바나바라는 의미입니다. 바나바가 목회하는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19~21절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 순교하게 됩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인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데, 심지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가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 사람은 헬라인에게도 예수님을 전합니다. 본문 19절에 “유대인에게만”이라는 표현과 본문 20절에 “헬라인에게도”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의 전도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 배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표면적인 배경입니다.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혹은 ‘이방인에게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붙들어주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 하실까요? 마태복음 28장에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지상 명령을 주시면서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마 28:20>“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와 함께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성결 교회의 초창기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정빈과 김상준 두 사람은 일본 동경에 있는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1907년 서울 종로에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회심한 사람을 가까운 교회로 보냅니다. 그런데 계속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고, 결국 무교동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 교회가 바로 중앙성결교회입니다. 여러분,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갖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훈련받는 교회입니다.
본문 22~26절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서 일어난 이방인들의 회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급히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 24절에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그의 본명은 요셉이고,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구제 헌금을 드립니다. 그 헌금이 불씨가 되고, 많은 교인이 구제 헌금을 드리며,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바나바가 파송을 받고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그가 안디옥에서 사역한 이후 큰 무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바나바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장과 부흥이 일어납니다. <본문 24절>“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결국 바나바는 길리기아 다소에 거주하는 사울을 직접 찾아갑니다. 안디옥 교회에 사울을 초청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제자들을 1년 간 열심히 가르칩니다. 일명 제자훈련을 시킵니다. 그렇게 제자훈련을 받은 안디옥 교인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안디옥 사람들이 맨 처음에 부정적으로 사용한 이름이지만,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제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말씀 사역자입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교인을 진정한 제자,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안디옥 출신이고, 아마도 이 때 바나바와 사울에게 제자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훈련받는 일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이방인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제자훈련을 통하여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통하여 훈련을 받고,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구제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27~30절을 보겠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 제국 전역에 큰 흉년이 임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기 전에 몇 명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오고, 그 중에 아가보 선지자는 ‘조만간 천하에 큰 흉년이 임한다.’고 예언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아가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지혜롭게 대비하며 뭔가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마치 창세기 41장에 요셉은 애굽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흉년을 대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로 황제 때의 흉년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흉년입니다. 성경 표현 그대로 ‘큰 흉년’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닥칠 위기를 조금이나마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큰 흉년이 임할 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표현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서로 협력하며 목회하지만, 구제하는 일을 바나바가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나바는 일찍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위로할 정도로 구제의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바나바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아마도 바나바는 사울에게 제안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랑의 손길을 펼칩니다.
안디옥 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구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구제에 대하여 두 가지 오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는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기 때문에 혹은 구제의 은사가 있기 때문에 구제한다는 오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디옥 교회는 미리 준비하여 넉넉하기 때문에 구제한다는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제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복음 전도와 구제 사역은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손에는 사랑을!” 여러분, 우리도 힘들지만 힘 닿는대로 더 열심히 사랑의 손길을 펴서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이고,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의 회심입니다. 둘 다 이방인 선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로 이방인을 향해 복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선교의 첫 열매이고, 안디옥 교회도 이방인 선교의 첫 열매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전도하는 교회, 훈련받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입니다. ‘한 손에는 복음을! 한 손에는 사랑을!’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문기태목사 / 행 11:19-26
2023년 기준 세계 인구 현황을 찾아봤더니 80억4,500만명으로 나옵니다.
이 가운데 약 35%는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스스로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명령만 내리시고 뒷짐지고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명령을 능히 이룰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지혜가 되어주실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해야 되는데요.
그것은 성령을 통해 능력을 먼저 주시고 그 뒤에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은혜를 먼저 주시고 나서 그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십계명을 주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지요. 주님이 주신 것으로 하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은혜와 능력으로 행할 때 세상이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권능을 받은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가장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사도행전을 마주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특별히 창립 40주년을 맞이한 우리교회가 사도행전을 계속 묵상하게 하신 것은 우리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라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주 창립 40주년 축제가 이 자리에서 있었지요. 그날의 열기와 감동이 아직도 식지않고 느껴지는데요. 축제를 통해 ‘지난 40년동안 우리 교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풍성하였구나’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창원침례교회 6글자로 실시한 6행시를 보면서 제출한 71명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참으로 깊고 풍성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이고, 어떤 자랑거리가 있고, 교회를 통해 받은 은혜와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 표현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들이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그리고 목장별 장기자랑 시간의 감동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국노래자랑 상반기 결선을 치르는 줄 알았습니다. 장기자랑이 이렇게 다양한 장르로 준비될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요. 악기연주, 노래, 율동, 에어로빅, 코믹댄스, 시낭송, 마술쇼까지.. 정말 다양하게 준비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참 다양하게도 빚으셨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하고 빛깔도 다양한 그릇들로 빚으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맞이하게 된 40주년, 하나님의 손길로 빚어오신 40주년을 통해 앞으로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완공이 없는 건축공사라고 그날 설교하였는데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기가막힌 건축재료가 되도록 주님이 준비하셨는데 앞으로 어떤 교회로 아름답게 지어가실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모퉁잇돌 되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시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교회로 더 부흥케 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교회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안디옥교회와 같이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과 선포가 믿음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를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 시대와 교회에 ‘바나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필요한 이유를 바나바에 대해서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말씀들로 나누려 하는데요.
첫째로 바나바는 위로자, 격려자입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인데 본명보다 별명이 더 알려진 사람이지요. 마치 시몬보다 베드로라는 이름이 더 알려지고, 호세아보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더 알려지듯이 말입니다.
바나바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말씀이 사도행전 4:36절인데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에게서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사실 요셉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좋습니까. 애굽의 총리로 하나님이 높혀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쓰셨기에 요셉의 이름을 유대인들은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름이지요. 그런데 요셉의 이름은 4장에서 한번 나오고 그 뒤로 바나바라는 이름으로만 계속 소개하게 됩니다.
바나바의 뜻이 무엇이라고 나옵니까? 위로의 아들!
교회 안에서 또는 목장에서 여러분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에게 “럭비공”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늘 시비를 걸고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은 “싸움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뭘 해도 마음이 통하지 않고 맞는게 없는 사람은 “로또”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요셉의 별명은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쉽게 오늘의 상황에 적합한 말로 바꾸면 만나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위로와 격려는 인생의 용기를 얻게 만들어 줍니다.
또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에게 새 힘을 얻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위로와 격려를 통해 슬픔은 줄어들고 기쁨은 더 커지게 만들어 줍니다.
바나바는 생명 언어의 삶을 수강한 적이 없지만 인정 해주고,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말로 연약한 지체들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니까 말로만 위로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를 팔아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곁을 지켜주고, 마음을 만져주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빚진 자들이 교회 안에 가득하여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바나바와 같은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더 중요한 질문이죠. 여러분을 바나바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었고, 초대교회의 7집사도 아닌 그야말로 평신도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평신도에게 신앙과 삶을 나타내는 별명을 지어준 경우는 바나바 외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 격려자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서로 지체가 되어 하나되기 위해서도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 격려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해 2월4일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데이터가 있습니다.
기독청년 1,000명에게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기대하는 소망의 키워드를 조사했는데요.
여러분야 가운데 교회의 ‘설교’와 ‘예배’에 대한 설문 결과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설교는 ‘성경에 충실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설교’가 59%로 가장 많았고,
예배는 ‘좀 더 따뜻한 위로가 있는 예배’가 52%로 가장 많았습니다.
예배와 설교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키워드가 무엇입니까? 위로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불신자가 교회를 찾아올 때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위로와 평안을 얻고 싶어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교회가, 성도가 바나바가 되지 않으면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의 영혼들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판단과 비판이 먼저가 아니라 존재를 먼저 품어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바나바를 찾아서 방황하는 사람들로 우리 주변은 가득합니다.
우리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가 담긴 말 한마디, 작은 섬김이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 인도하는 통로가 됨을 믿고 가정의 바나바가 되시기 바랍니다. 직장과 사업장의 바나바가 되시기 바랍니다. 학교와 캠퍼스의 바나바가 되시기 바랍니다. 목장과 교회의 바나바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인격과 신앙에 대해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지요.
11장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착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은 바나바 한 사람입니다. 대체 얼마나 착해야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착함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착함을 증명하는 열매에 집중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는데 그 착함이 이유가 되어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착한지 안 착한지 무얼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인가요? 나를 통해서 주님께로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려는 착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인정받는 착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구제일교회를 시무하셨던 이상근 목사님은, 집사를 세울 때는 동네 반장에게 물어서 세우라고 했다고 하지요. 교회 직분자를 세울 때, 기도하고 세우라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이 목사님은 ‘동네 반장에게 물어서 세우라’고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에서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동네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라야 교회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일군은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누가 보아도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요. 이런 사실을 악한 사단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 마귀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면 다 도망하여 넘어질 사람이 별로 없겠지요. 그런데 고후11:14을 보니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말씀합니다. 천사처럼 변장하고 거짓으로 착한 행세를 하며 미혹하여 넘어지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한다고 하잖아요. 신천지의 모략전도라는 수법이랑 완전 똑같은 방법아닌가요. 잘 믿던 교인들이 어느날 얼굴이 안보여 알아보면 자기에게 착하게 대해주는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단에 빠진 분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VIP를 품고 기도하는데 VIP가 전도가 되지 않는 이유중에 하나가 혹시 내가 충분히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는 아닌지 주님께 묻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될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공동체입니다. 구원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에베소서 2장 10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기대하는 것도 착한 공동체이다. 선한 사람을 기대한다.
전도의 문이 막히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착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악한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들 때문아닌가요. 돈, 명예, 성적인 문제에 넘어져 악한 일을 행한 일들에 실망하고 기대가 사라지게 되면서 교회의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배하면 민원을 넣고, 찬양하고 기도소리가 크면 민원을 넣고, 전도하면 민원을 넣고 신고를 하게 되잖아요. 복음마저 소음으로 여기는 안타까운 시대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다시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착함이다.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사람들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해오름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최낙중목사님의 간증가운데 나온 이야기입니다. “1975년 9월5일에 있었던 일이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며 용기를 내어 술집 사이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10평쯤 되는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술집 색시들을 전도하고픈 열정의 결과였다. 주일 밤마다 술집에서 상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합창하니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금식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온 한국인 처녀 간호사 한 분을 만났다. 이 자매도 금식을 마치고 대방동 친척집에 전도하러 가는 길인데 그 지역을 잘 모른다며 내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금식으로 힘들었지만 5리 동행을 요구하는 자에게 10리 동행을 명하신 주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런데 자매가 전도하려던 친척은 이사가고 없었다. 자매는 교회 구경하겠다며 왔다가 술집 사이의 교회를 보고 놀랐다. 그녀는 비엔나로 돌아간 후 150만원을 보내왔다. 당시 집 한 채 값이다. 결혼 준비금으로 모아놓은 돈을 모두 보낸 것이다. 그리하여 술집 사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작은 선행으로 큰 것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다 보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9,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의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비신자들에게 교회와 목장은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처럼 느껴지기에 다리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받고 교제가 끊긴 성도에게 관계회복을 위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나바처럼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삶이 아닌 이타적인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디에 있든지 누구에게든지 인정받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세상과 예수님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나바와 같은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위로자 격려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도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한 두 번 해본 것을 가지고 바나바라 부르고 착한 사람이라 부르며 소개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바나바 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기에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나오도록 착한 것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한 사람이 교회 부흥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방법이에요. 우리 교회가 부흥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바나바와 같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줄 믿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바울을 도와 사역했던 바나바 많은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큰 무리를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의 부흥은 숫자적인 부흥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26절에 보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일 년간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기에 붙여진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세상속에 있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은 거룩한 공동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여지기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대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위로와 격려의 사람 바나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변화시키신 착한 성품으로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할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한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큰 무리가 주님께 나오도록 교회에 바나바가 많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디옥교회의 설립
행 11장 19~21절 / 김영규목사
흩어진 자들의 전도 활동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내용은 예루살렘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의 전도 활동과 안디옥 교회의 설립입니다. 먼저 흩어진 성도들의 전도 활동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행8:4) 그 여파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19) “OiJ me;n ou\n diasparevnte" ajpo; th'" qlivyew"” “흩어지다”(diaspeivrw)는 말은 “널리 뿌리다”는 의미로 유명한 “디아스포라”(diaspora)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흩어진 곳은 어디일까요? 본문에 보면 몇몇 지명이 나타납니다. 이 지명들은 아주 중요한 곳들입니다.
첫째로, 베니게입니다. 베니게는 헬라어로 “Foinivkh”(포이니케)이며 흔히 페니키아라고 부르던 지역입니다.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약 200KM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북쪽으로는 카비르(Kabīr) 강에서 남쪽으로는 카르멜(Carmal, 성경의 갈멜) 산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페니키아는 하나의 정치 단위로 통일된 적은 없으나 시기마다 강력한 세력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도시연맹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는 베리투스(Berytus, 오늘의 베이루트), 티레(Tyre, 성경의 두로), 트리폴리(Tripoli), 시돈(Sidon), 아크레(Acre, 아코: Akko), 비블로스(Byblos), 우가리트(Ugarit, 오늘날의 라스샴라: Ras Shamra) 등이 있습니다. 아마 이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구브로(Kuvpro") 입니다. 현재에도 키프로스라고 부르며, 혹은 사이프러스라고도 합니다.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9,250평방KM) 오늘날 이 섬에는 키프로스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란 나라(인구 약80만 명)가 세워져 있습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지역입니다. 키프로스 공화국은 그리스계 사람들이 주가 되어 세운 나라입니다. 이에 반발하여 일부 북부 지역 터키계 사람들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별도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대부분의 나라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 구브로에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셋째로, 안디옥(!Antiovceia)입니다. 지중해안에서 동으로 27km 지점, 오론테스 산 앞, 오론테스 강변에 있는 도시로 로마 시대 시리아 주의 수도입니다. 안디옥의 외항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루기아(Selelucia)입니다. 로마제국에서 안디옥이란 도시는 16곳이나 되며, 그 중에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곳은 두 곳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주전 30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하나인 Seleucus Nicator가 건설하여 자신의 아버지 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세운 곳입니다. 한 때 자유도시였다가 로마의 직할시가 되었습니다. 신약 시대 안디옥의 인구는 5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였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보면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동방의 여왕, 동양의 로마라 불렸습니다.
넷째로, 구레네(Kurhnai'o")입니다. 구레네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금의 리비아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흑인들만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북부의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지역은 셈계나 유럽계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쪽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로마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구레네란 도시는 크레타 섬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건설했습니다. 그 후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고, 프톨레마이오스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가, BC96년 경 로마에 양도되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이기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이 도시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구레네 출신 시몬이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 역시 구레네 출신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면 이같이 흩어진 성도들이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부지런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19-20) 그들은 가는 곳마다 전도했습니다. 이들은 사도가 아닙니다. 알려진 집사들도 아닙니다. 무명의 성도들입니다. 각자 직업이 있고 생업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생활 기반을 잡아야 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먼저 전도에 주력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지표입니다. 성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직업이 뭡니까? 내 직업적인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복음 전도는 계속해야 될 사명입니다. 2008년은 힘든 한 해였습니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고, 어느 때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전도하는 일을 내팽개쳐도 될까요? 아닙니다. 힘든 때일수록 더욱 복음 전파에 주력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목적이 바로 영혼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 건설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오늘 특별히 주목할 곳은 바로 안디옥에서의 전도 활동입니다. 안디옥은 화려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매우 타락한 곳입니다. 안디옥에서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고대 시리아의 아테미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전 매춘(RITUAL PROSTITUTION)의 장소였습니다.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사도 시대에도 로마의 아테미스와 아폴로 신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단순히 작은 교회 하나가 세워진 게 아닙니다. 이 교회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선교사 바울이 보내졌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장차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된 것은 전 유럽이 복음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런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몇몇 평신도들이 이런 일을 했습니다. 오늘 작은 무명 전도자들의 전도 활동이 장차 세계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전도는 위대합니다. 전도는 역사를 바꿉니다. 전도는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도함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안디옥 교회의 설립입니다. 최초의 이방 땅에서의 전도, 최초의 이방인 교회의 설립입니다. 이제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를 떠나 이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주역들이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유대인에게만 전도를 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19) “lalou'nte" to;n lovgon eij mh; movnon !Ioudaivoi".” 왜 유대인에게만 전도를 했을까요? 전도하는 사람들이 다 골수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 자손의 것이고 이방인은 다 그 수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전도자들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왜 꼭 유대인에게만 전도해야 하나? 구스 내시가 구원 받고, 고넬료가 구원받았다면 이방인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섰습니다. 순수한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ejlavloun kai; pro;" tou;" @Ellhnista;" eujaggelizovmenoi to;n kuvrion !Ihsou'n. ” 재미있는 것은 전도의 내용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말씀”(to;n lovgon)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PREACHING THE WORD(KJV) 그런데 헬라인에게는 “주 예수를 전했다”(eujaggelizovmenoi to;n kuvrion !Ihsou'n.)고 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요? 유대인들은 이미 구약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도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경에 있는 메시야가 왔다고 하면 됩니다. 어쩌면 이방인보다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쉬웠을지 모릅니다. 헬라인들은 성경을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의 신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은 그들에게 만물의 주인이신 “주 예수”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함께 전했을 겁니다.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잘 믿지 않고, 이방인들은 쉽게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결과입니다. 어찌 성경을 아는 유대인은 안 믿고, 성경을 모르는 이방인은 잘 믿는다는 말인가? 이런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이방인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주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대로 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이방인 구스 내시와 고넬료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순수한 이방 땅에서 이방인에게로!
오늘 우리에게는 모든 장벽과 경계를 넘어서는 전도가 필요합니다. 복음에는 국경도,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장벽이 없습니다. 다 넘어설 수 있습니다. 안디옥에서의 이방인 전도는 요즘 경영학에서 말하는 블루오션 전략입니다. 블루오션에 대해서 들어보셨지요? 블루오션 전략이란 프랑스 유럽경영대학원 인시아드(INSEAD)의 한국인 김위찬 교수와 르네 모보르뉴(Renee Mauborgne) 교수가 1990년대 중반 가치혁신(value innovation) 이론과 함께 제창한 기업 경영전략론입니다. 블루오션(푸른 바다)이란 수많은 경쟁자들로 우글거리는 레드오션(red ocean:붉은 바다)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경쟁자들이 없는 무경쟁시장을 의미합니다. 기업은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경쟁시장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합니다. 즉, 산업혁명 이래로 기업들이 끊임없이 거듭해 온 경쟁의 원리에서 벗어나,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고객이 모르던 전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블루오션은 다른 기업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무경쟁 시장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치열한 RED OCEAN 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전도라기보다는 머리통 터지는 교인 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큰 교회 다니는 것 자랑하고, 목회자는 신문 방송에 얼굴 알리려고 애씁니다. 부끄러운 단면입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에 입주가 시작되면 각종 유치 작전이 시작됩니다. 신문 보급소에서 텐트를 치고 마케팅을 합니다. 우유 배달 업소, 인테리어 회사들이 뒤 이어 자리 잡고 영업을 합니다. 그 곁에 교회텐트가 쳐 지고 비상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일까요? 대부분은 믿는 사람을 유치하기 위한 작전입니다. 오늘날 교인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기업입니까? 숫자 가지고 자랑하게? 성경 어디에 숫자 자랑이 있습니까? 모세를 따르던 603,550명 장정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소수입니다. 작은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규모와 크기가 자랑이 아닙니다. 한 사람 요셉이 애굽 왕실을 바꿨습니다. 한 사람 다니엘이 바빌론, 페르시아 왕실을 바꿨습니다. 한 사람 바울이 로마 제국에 복음을 심었습니다. 규모와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영혼 구원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텐트 치고 전도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도 텐트 칠지 모르니까? 제 말씀은 이미 믿는 교인 데려가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참 전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블루오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블루오션이 어딥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안 믿는 가족들 속에 있다면 내 가정이 블루오션입니다. 내가 속한 회사가 사장님부터 다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곳이 바로 블루 오션입니다. 내가 속한 동창회, 내가 사는 동네, 내가 거래하는 사람들, 모두가 블루 오션입니다. 선교사업도 블루오션을 찾아야 합니다. 케냐나, 우간다 같은 나라는 기독교인이 70%가 넘는 RED OCEAN 선교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 네팔에 선교사를 보낸 것도 블루 오션 전략입니다. 전도의 블루 오션은 전도가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전도해 보면 쉬운 곳이 또한 블루 오션입니다. 우리 이민철 선교사님 버럿풀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시고, 이제 군자너걸에 제2교회를 세우기 위해 땅을 사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힌두교권에서 가장 전도하기 힘든 상대가 브라만 계층입니다. 지난 번 우리는 다수의 새신자들과 함께 몇 사람의 브라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전도가 안 되리라는 선입견을 가지지 마세요. 저도 과거에는 종교를 무시하던 불신자였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다 한 때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전도하려면 불신자들 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오래 믿다 보면 대개는 주변 사람들이 믿게 되고, 그래서 신자들 속에서만 머물게 됩니다. 전도할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러므로 항상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전도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망월동으로 옮긴 후에 많은 지역 주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새로운 전도지를 찾아 도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게서 큰 부흥을 주심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안디옥 교회의 부흥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전혀 예상치 않았던 지역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예상치 않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기로 작정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고, 바울과 바나바 같은 지도자를 키우시고,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세계 선교를 담당케 하셨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지만 믿고 회개시키고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전도의 도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전도하세요. 내가 전도할 때 상대가 받아들일까 거절할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결과는 하나님 몫입니다. 전도는 사도만의 몫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의 몫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전도자가 될 때, 하나님은 큰 부흥을 주십니다. 특히 성경도 하나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큰 부흥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면 우리 영혼이 부흥합니다. 영혼이 부흥하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합니다.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려서 영혼 구원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비결
행 11장 19~21절 / 박봉수목사
지난 1월 2일 이명박 대통령께서 신년 국정연설을 하셨습니다. 30분간의 연설에서 “위기”라는 말을 무려 29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09년 이명박 정부는 비상경제정부 체제로 나가겠다.”고 밝히셨습니다. 정말 위기는 위기인가 봅니다.
1월 8일 청와대 지하 벙커에서 제 1차 비상경제대책 회의가 열렸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들이 논의됐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 뒤편에 상징적인 슬로건이 걸려있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이 위기를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삼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이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정말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2009년이 우리 대한민국이 오히려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꿔 도약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1990년대 말 IMF 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 사회가 뼈를 깎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와 세계 최고품질의 TV와 같은 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금융권은 관치금융의 오랜 관행을 떨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직장인들은 근무태도를 획기적으로 바꿨습니다. 그 결과 위기가 기회가 되어 2만 불의 소득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번 경제 위기도 오히려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낡은 관행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잘못된 구조적인 문제들을 털어버릴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선진국 대열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초기 기독교가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도약해 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초기 기독교에 최대의 위기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스데반의 일로 환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스데반의 일이란 행 6장에서 8장까지에 소개된 사건을 말합니다. 스데반이 7명의 집사 가운데 하나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할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다 공회에 끌려가서 종교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공회에 끌려가서도 자기를 변호하기 보다는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게 됐습니다.
이일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행 8:1-3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스데반의 순교 후 유대교 지도자들이 작심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잔인한 박해를 가해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후 그 여세를 몰아서 그 땅에서 기독교를 발본색원하겠다는 계산입니다. 결국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고 기독교인들이 유대 지방으로 그리고 사마리아 지방으로 박해를 피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에서 더 나아가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에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베니게는 지금의 레바논 땅이고,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 섬이고, 그리고 안디옥은 지금의 터키 땅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박해를 피해 이 먼 곳까지 피난을 오면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헬라인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만의 종교에서 로마 전역의 이방인들까지 아우르는 세계인의 종교로 뻗어나가는 전기를 맞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에는 위기였지만 기독교의 세계화를 여는 결정적 기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위기가 왔을 때 주저앉지 않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위기의 본질을 파악한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왜 이런 위기가 찾아왔을까요? 이제 막 출범한 교회에 교인들이 피난을 가야하는 이 큰 위기는 왜 생겼을까요? 도대체 이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행 1:8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교회가 세워지면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말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가 세워졌고, 크게 부흥했고, 집사를 세우는 등 체제도 잘 정비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선교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기본 목적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저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는 우연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위기는 하나님도 모르시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기가 찾아오면 우선 도대체 이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경을 종합해 보면 위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기입니다.
우리가 겪는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기가 있습니다. 일부러 하나님께서 위기를 만드셔서 우리를 그 안에 빠지게 하신 위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요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합니다.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욘 1: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요나에게 큰 위기를 만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 위기 한 복판에서 깨닫습니다. 욘 1:12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지금 자기 때문에 이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이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위기입니다.
우리가 겪는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위기가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 연루되어 겪는 위기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잘 아시면서도 그 위기를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욥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불릴 정도로 늘 하나님 앞에 옳았습니다. 사탄이 시기하여 욥을 시험합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합니다. 갑자기 욥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됐습니다. 게다가 자식들까지 다 잃게 됐습니다. 욥에게 참혹한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 위기를 믿음으로 견뎠습니다. 욥 1:22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위기는 우연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위기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위기의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만일 그 위기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라면 빨리 돌이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라면 빨리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요나처럼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만일 그 위기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면 잘 견뎌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연단될 수 있습니다. 행여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욥처럼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2. 믿음을 지킨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은 피난을 가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위기 한 복판에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 14장을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청했습니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자기 손을 잡아주시면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셔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시작합니다.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람이 불어온 것입니다. 그 바람을 보는 순간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그러자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원해 주신 뒤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그렇습니다.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두려운 일은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의심이 물 밀 듯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의심에 빠져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위기로 인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왔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 ‘의심의 골짜기’를 지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이 이 의심의 골짜기에서 믿음이 흔들려 크게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실망감을 따지듯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한참 기도하는 도중에 동굴 속에서 눈을 떠보니 자기 곁에 어미 늑대와 새끼가 누워있는 것입니다. 원래 새끼를 키우는 어미 늑대는 그 어떤 맹수보다도 위험합니다. 그 때 그가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로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가 믿음을 회복하면서 의심의 골짜기를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의심의 골짜기를 지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이 때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3. 돌파구를 찾아 나선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 교인들이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베니게로, 구브로로, 심지어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먼 타국으로까지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단순히 숨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래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단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숨거나 피하기만 하면 안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돌파구는 있는 법입니다.
KFC 창업자 커널 샌더스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23년 간 해오던 식당이 완전히 실패해서 문을 닫게 됐습니다. 이미 나이도 60이 넘었고 몸도 병들었고 학벌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 인생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수많은 닭들이 날아가는 그림을 보게 됐습니다. 기도만 하면 그 그림이 떠올라 더 이상 기도를 깊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교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답이 “닭이 울기 전에 회개하라는 것이겠지” 하더랍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나름대로 독특하게 닭 요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했더니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식당을 열고 닭요리를 팔았습니다. 소문이 나서 가게가 그런대로 잘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근처에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자기 가게 쪽으로 사람들이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또 문을 닫게 생겼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차에 닭튀김 기구를 싣고 다니며 팔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점점 확산되면서 체인점이 하나씩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 모든 도시에 이 가게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결코 가만히 앉아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돌파구를 찾아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결국 돌파구를 찾아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옵니다. 이 때 위기의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인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해야 하면 변화하고, 견뎌야 하면 견디며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위기가 찾아올 때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위기는 우리를 의심의 골짜기 한 복판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 때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믿음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돌파구를 찾아나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결국 돌파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위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행 11장 19~21절 / 안양준목사
말씀을 보겠습니다. 행 11:19-21의 말씀입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시간 읽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그 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부족하지만 담임목사님과 모든 성도님들을 열심히 섬길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제가 금년 2월에 뉴욕에 있었습니다. 물론 짧은 기간이었지만 평상시에 동경하던 곳이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맨하탄 거리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인상 깊게 본 것은 세계 제일의 부자라고 하는 록펠러가 세운 록펠러 센터입니다. 그 입구에 커다란 동상이 있는데 거기에는 근육질의 한 사나이가 두 손으로 지구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구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데 사람이 들 수 있을까?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지구의 무게가 6테리온톤이라고 하는데, 테리온톤이 얼만한 무겐지 알아야지요. 그래서 테리온톤을 찾아보니까 천 빌리온톤의 천 배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차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평상시 알고 있는 Kg으로 환산하니까 6테리온톤은 6×1025Kg입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를 26개를 붙여놓고 읽으려고 하니까 읽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단위가 조 이상을 넘어본 본 적이 없어서 어릴 적에 배우기는 영십백천만억조경해자양극간정재극 이런 순으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몇 경, 몇 해, 몇 자하는 단위는 쓰지 않쟎습니까? 하여간에 지구의 무게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거기에다가 지구 위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무게, 그리고 60억이 넘는 인구의 무게까지 합치면 말로 할 수 없는 무게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구를 어떻게 한 남자가 두 손으로 들고 서 있는 겁니까?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는 이렇게 무거운 두 손으로 들고 있지 않아도 혼자 공중에 떠 있다는 겁니다. 이 무거운 지구를 허공에 혼자 떠 있게 아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의 궤도를 돌게 만드는 존재가 과연 누구입니까?
성경은 이 물음에 대해 시 19:에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놀라운 우주의 질서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손은 인류의 역사까지도 섭리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까지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혼자 무작정 달려온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손을 확실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배경에 대해 그리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 ‘하나님의 손’이 누구를 통해 역사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은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커다란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태양의 신 아폴로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처녀 대프니이라는 여신을 열렬히 숭배했고, 그리고 도시들이 다 그렇듯이 안디옥도 음란과 방탕이 판을 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런 안디옥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억 속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행 11:26에는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안디옥 교회 전에도 교회들이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인정하게 된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부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상 숭배와 타락의 도시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아름답게 성장될 수 있었던 동기가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본문이 우리에게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손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의 손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그들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라고 쓰여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결과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핍박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몇사람이 안디옥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불과 몇 사람… 그들이 복음의 불씨를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정작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느냐가 아닙니다.
감리교회가 처음 시작된 것도 웨슬리 형제를 비롯해서 몇몇의 경건한 대학생이 ‘홀리클럽’을 만들고 매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구제하는 일을 하면서 이후엔 전 영국을 복음으로 뒤덮어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각성운동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 18:20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적은 수가 모였어도 주의 손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주의 손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회의 가장 큰 자랑은 속회입니다. 작은 수로 모인 속회, 그러나 거기에는 기도가 있었고, 말씀이 있었고, 무엇보다 주의 손이 함께 하셨습니다. 속회를 통해서 감리교회는 점점 더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저희 경신교회가 그렇게 되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이야기가 앞서고, 하나님의 일보다 세상의 일이 우선하는 그런 속회가 아니라 주의 손에 붙들린 작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그런 속회가 되어지길 원합니다.
두 번째로 볼 때 그들은 유력자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환난을 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보면 실패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유력자들이 나서야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어쨓든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할 문제들이 우선일 수도 있습니다. 보금자리를 찾는 일이 우선일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교회가 인정하는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두 순수한 평신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의 손이 함께 하였습니다.
아무리 교회 일이라도 그래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해야지. 그런 공식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는 힘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주의 일을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십니다.
삼상 16:7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가 얼마나 중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입니다. 많은 경우에 세상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든지, 많은 재물을 갖고 있다는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 19:23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계산과 맞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고전 1:26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계산으로는 미련스러운 사람들보다는 지혜있는 자만 골라서,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들로, 천한 자들보다는 있는 자들을 고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약한 나를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유력자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 등 국외로 쫓겨나다시피 흩어졌지만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곳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많은 결실을 얻고 선교지를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박해가 없었다면 과연 그 지역에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환난이 오히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당하는 환난에 대해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갖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주님의 손이 역사하시는 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이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에 대해 평소엔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어쨓든 많은 이들이 하는 수없이 떠나게 된 것이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개척교회가 어렵다보니 세계의 어느 곳이든 가는 것입니다. 알라스카같은 곳은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교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런 곳에도 가는 것입니다. 마치 사도행전의 디아스포라같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한국을 쓰고 계십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도 불같이 뜨겁게 복음을 들고 선교지로 뛰어드는 나라가 없습니다.
현실의 모습으로 교회 다니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교인이라고 말하기가 창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교회에 다닌다고 나를 업신여기는 경우가 있습니까? 괜챦습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룰을 스스로 깨뜨리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얼굴을 향해 침을 뱉는 그런 수치를 견디셨습니다.
사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힘이 없어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디서든지, 무얼 하든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들 자랑하지 말고 예수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없어질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가진 권력없어도, 가진 재물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담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 믿는 사람은 더 큰 권력있는 사람 앞에서 약해지고, 재물 가진 사람은 더 많은 재물 가진 사람 앞에서 약해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언제나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인도 선교사인 맥스웰이라는 분은 언어를 익히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인도는 마을마다 언어가 달라서 새로운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 힌두교인 한 사람을 붙들고 내게 말 좀 가르쳐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내게 와서 말을 가르쳐주시오”
그런데 이 힌두교인이 거절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당신하고 함께 있어 그리스도인으로 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 사람하고 만나면 누구나 기독교인이 됩니다. 함께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지나간 흔적 안디옥 교회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구원받은 영혼보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주의 손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셔서 믿지 않는 영혼들은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의 손이 사랑하는 성도들과 또한 우리 경신교회에 있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 빛나는 희생
행 11장 19~21절 / 류영모목사
I. 값진 희생이 필요하다
여기 해달같이 눈부신 기백과 정열, 끝없이 타오르는 횃불이 있다.
보라, 지축을 박차고 내딛는 정의의 부르짖음 너와 나 가슴마다에 메아리친다.
뿜어서 장미를 피운 향기론 피속에 거룩한 불사신의 이름을 새겨
산과 강과 조국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우뚝 선 의기의 상징이여
오, 살아있는 배달 겨레의 참모습이여!
1965년 10월 4일 월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홍천근교 맹호부대 훈련장에서 마지막 수류탄 투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 부하의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위기 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강재구 대위는“비키라”는 외마디와 함께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작렬히 산화해 갔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는 노산 이은상님의 헌시가 이와같이 적혀 있습니다. 이 땅에 많은 군인들이 있었고 장교와 장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관학교 교정에는 젊은 장교 대위의 신분으로 죽어간 강재구 소령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가 한 사람 군인으로 가장 값지게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흘린 피는 영원히 빛나는 희생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빛나는 사람은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탄에게 빼앗긴 원수를 되찾기 위해서는 아까워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치료하고 잃은 영혼을 되찾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값진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기까지는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하더란 말입니다. 한 송이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희생의 거름이 필요하고 하나의 구원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고의 땀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없는 전도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전도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열매가 없습니까? 희생하지 않고 전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희생없이 생명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II. 한국교회 위기가 큰 만큼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한 2년전 한국 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의식과 한국개신교의 신앙의식"이란 제목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보고는 참을 충격적이었습니다. 최근 약 370만명이 종교간 이동을 했습니다. 불교신자들 가운데 기독교과 천주교회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불교와 기독교로,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불교와 천주교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절반이상인 58%가 기독교에서 불교와 천주교로 이동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아픈 통계가 있습니다. 3대 종교 불교와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종교를 떠난 사람이 1,094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이던 사람이 종교를 떠난 %가 78%입니다. 이래저래 기독교를 떠난 사람이 천만명이 넘는다는 통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종교를 표방하던 2천2백만의 사람들 가운데 다시 종교를 가진다고 하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겠습니까? 물었더니 겨우 20%의 사람만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왜 오늘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추락을 하게 된 것입니까? 이 민족의 근대화를 가져온 기독교가, 이 백성의 해방의 문을 열었던 기독교, 민족의 등불이요 민중의 희망이었던 기독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역사하는 그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종교 생명의 종교란 그 기독교가 날개없이 추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교회가 이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빛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를 두고 우리 민족의 종교적 유아성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를 악세사리 정도로,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가지고 놀던 악세사리에 실증나, 종교행각에 실증나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자들 가운데는 위복주의 신앙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복 받으려고 교회 왔습니다. 그런데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집도 가졌고 자동차도 가졌고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갈만한 돈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에 눈이 멀어서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사람들의 구미와 입맛에 맞춘 설교와 목회를 했기 때문이라고 아픈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추락해 가는 한국교회에 날개를 달아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방황하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갈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어떻게 이 땅에서 잃어버린 교회의 공신력을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 - 그 위기가 큰 만큼 큰 기도와 큰 수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큰 처방이 필요하고 큰 희생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데는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희생은 값진 것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것이요 천국에서도 빛나는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다니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인도한 사람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구요.(단 12:3)
C.S. 루이스는 빛나는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책들을 다 모아도 그 책의 값어치는 한 영혼을 구한 것만큼 가치 있지는 못하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언제나 온 세상의 변화는 한 영혼의 변화에서 시작이 되어지는 법입니다.
III. 지옥의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왜 그토록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까? 죄인인 인간이 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는 언제나 성도들의 희생위에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또 다른 피 흘림을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진 희생이 지옥에 갈 영혼을 건져냅니다. 그래서 그 희생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요 그 희생은 영원한 천국에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의 강연집 가운데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날 생도들이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 훈련을 받고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후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500마리의 닭과 200마리의 앙고라 토끼가 있는 농장에 불이 났습니다. 한 밤중에 가족들과 생도들이 뛰쳐나가 보았지만 아비규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불이 붙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살아보겠다고 몸부림하다가 잿더미가 되어 뚝뚝 떨어지는 닭들, 털많은 앙고라 토끼에 불이 붙었을 때에 빨간 폭탄처럼 동동뛰다가 허무하게 쓰러지는 토끼들을 바라보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그냥 지켜만 보십시다. 모두들 멀찌기 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죄악을 걸머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참함이 저렇겠구나.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예배당은 통곡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날밤 예배당에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경찰관에게 폭행을 일삼던 깡패 두목이 그날 회개를 하고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유망한 청년이 거기와서 훈련을 받던 중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는 농군이 되어서 장로님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뉴욕에 있었던 110층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그 콘크리트 더미에서 한달쯤 후 한 생명이 누군가의 끈질긴 수고 끝에 살아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커다란 충격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영원한 멸망의 구덩이 지옥에서 한 생명을 건져내는 일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IV.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값진 일은 없습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사탄에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이것보다도 값어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은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하기에 성삼위 일체 그분 하나님이 날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외아드님을 포기하고 나를 얻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헐벗으셨고 굶주리셨는가 하면 내가 당해야 될 수치와 부끄러움과 창피를 홀로 감당하시고 벌거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채찍에 맞으셔서 살이 찢어지셨고 못과 창에 찔리셔서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 임재하셔서 교회를 세워주셨고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오늘 이 자리에도 함께 해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니라." (요12:24) 땅에 떨어져 죽기로 결단하신 분이 하나님 그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어 나를 살려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의 터 위에 우리의 구원 꽃은, 생명열매는 맺혀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 하나가 구원받기 위해서 누군가의 땀 방울이 있었습니다. 나 하나가 주님 앞에 돌아오기 위해서 누군가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눈물이 있었습니다. 값진 희생이 있었습니다.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구원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나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과 땀과 희생은 얼마나 값비싼 것입니까?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V. 생명의 꽃은 순교의 피 위에 피어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기까지,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기까지, 한국교회가 이토록 아름답게 성장되고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수많은 땀과 눈물과 희생의 피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순교의 피를 머금고 성장해 온 교회입니다.
19세기말 캐나다의 죤 맥켄지라는 젊은 신학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비참한 한반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저 불쌍한 민족에게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야지. 캐나다 장로교회에 가서 한국교회 선교사로 가겠다고 신청을 했으나 아직까지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사 파송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한국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약간의 여비를 모금하여 1893년 한국 땅을 찾아옵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 한국땅. 이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한국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한국사람처럼 입었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버터와 치즈만 먹고 살았던 선교사님은 한국사람이 되기 위해서 된장과 고추장만 먹었습니다. 위장은 불이 나는 것만 같았고 몇년이 지나 위장에 큰 탈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날 밭에나 가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사람들과 똑같이 일하다가 일사병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의 언더우드가 크리스마스날 케잌과 치즈, 우유와 설탕을 보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젊은 맥켄지는 통곡을 합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한국 땅에 선교가 불가능하게만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이것 먹고 나면 더 이상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없겠다 싶어서 케잌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우유와 설탕을 동리아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 날은 더 많은 된장과 고추장을 먹었다고 합니다. 일사병으로 고열이 하늘을 찔렀고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다가 이름없이 황해도 솔내마을에서 죽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 장로교회는 황해도에 선교사를 보냈고 함경도 원산과 황해도 솔내에 교회를 세워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보낸 많은 선교사들이 그 땅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한 알의 밀이 되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 저희 교단에 총회가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온 낯선 손님들이 인사를 했습니다. 영국 하노박 교회의 대표로 참석하신 장로님 내외분이었습니다.
그 하노바 교회는 지금부터 130년전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 땅에 보낸 교회입니다. 27세 젊은 나이에 선교의 비전을 품고 중국 땅에 건너옵니다. 중국 땅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어버립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가 접한 소식은 한국 땅의 소식이었습니다. '저 작은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가'를 깨닫고 한국 땅에 가겠다. 허락을 받아 대동강변에 나타납니다.
당시 대원국의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서양사람들만 보면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관군들이 배에 불을 질렀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한문 성경책을 가슴에 끌어안고 대동강변을 엉금엉금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뽑아들고 목을 치려는 관군에게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며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칼에 맞아 피 흘리면서도 비명을 지르는 대신 예수를 외치면서 토마스 선교사님은 성경책을 집어던졌고 그 성경책을 받아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끔 목회가 힘들게 느껴질 때에 복음의 열정이 식어질 때에 양화진을 찾아가곤 합니다.
거기 서 있는 비석에는 선교사님들의 한국사랑에 그 불길들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다시 한국 땅에 태어나고 싶다."
무엇이 그들의 가슴속에 있었기에 초개와 같이 생명을 버리면서도 저토록 당당하게 죽어갈 수 있었더란 말입니까?
비석을 한 두개 지나고 나면 어린아이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아이를 낳았지만 산모는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고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가 죽어갔습니다. 풍토병에 죽어간 무명의 선교사님들, 병든 아이를 돌보는 대신 가난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향하여 달려갔다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니 아랫목에 아이가 죽어 있었다. 이런 희생의 피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피를 타고 오늘 나에게 여러분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VI. 모진 핍박으로 흩어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주님의 십자가 피 위에 성령의 임재와 함께 세워진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성장되고 부흥되는 사이에 그들이 깜빡 잊어버린 사실이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를 주님께서는 보고만 계실 수 없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계획을 실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모진 핍박과 고난을 안겨준 것이었습니다.
환경이 순탄하고 평안하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할 것 같은데 인간은 그렇질 못합니다. 인간은 고난이 없으면 금방 게으르고 나태해 집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모진 핍박과 환란이 찾아왔습니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커다랗게 타오르는 불길을 방망이로 내리치면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고 불똥이 튀고 불똥이 떨어지는 곳마다 또 다른 불꽃이 타오르듯이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임하자 흩어졌던 익명의 디아스포라들은 흩어진 자리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주도했고 누가 복음을 전했다는 이름도 없습니다.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 무명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안디옥 땅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와 유럽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이름 하나 붙들고 복음 바로 전하기 위해서, 예수 바로 믿기 위해서 흩어져 왔던 그들. 가족도 직업도 친척도 명예도 모두 다 버리고 달려왔던 그들.
우리는 왜 이곳까지 쫓겨와야 했던가? 나는 왜 이 고생을 해야 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재산을 버리고 이곳까지 왔던가? 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렇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진 자리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맞아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핍박을 통하여 고난을 통하여 고생을 통하여 얻었던 믿음이기에 어떤 죽음도 어떤 고난도 그들의 가는 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죽어도 생명을 복음 위하여 바치겠다.
6.25는 우리 민족의 커다란 아픔이었고 우리 민족의 커다란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지는 평양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의주와 함흥 땅에서 남으로 남으로 남하해왔습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고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위대한 교회들로 자라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VII. 빛나는 희생 위에 빛나는 열매가 맺혀집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신앙, 가장 위대했던 신학자 사도 바울이 탄생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경이로운 복음이 안디옥 땅에서 시작될 수 있었더란 말입니까? 1세기를 이끌어 갔던 그토록 강력했던 성령의 불길이 복음의 불길이 예루살렘의 교회가 아니고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2-3세기까지 계속 번져갈 수 있었던 힘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론은 너무나도 자명하고 분명합니다.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사람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값비싼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돈을 조금 더 가지지 않고 가족을 버려둔채, 직장을 버려두고 명예를 버려두고 갈 곳없이 달려왔던 그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그들이 남은 것이라곤 생명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라곤 아무런 재산도 돈도 없었습니다. 생명 하나를 재산에 올려놓고 그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했길래 그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강력한 성령의 불길을 복음의 생명의 불길을 주님께서 일으켜 주셨던 것입니다.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있는 전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희생이 두려운 사람은 생명운동에 동참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전도의 현장에는 반드시 생명을 건 희생자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전도나 생명구원은 짜투리시간 따위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댓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슈텐베르크가 그렸다는 「이 사람을 보라 - 호모 에케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그 그림 밑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했다. 너 나 위해 무엇을 하느냐?”
하베글리라는 신앙인이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울며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내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11장)
우리교회 전도현장을 들여다보면 이곳저곳에 가슴 뭉클한 전도의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의 가슴을 전율케 만들었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한 전도의 간증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 한 분은 미친듯이 전도를 하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가족도 아내도 정신이상자처럼 뭔가 소중한 보석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시간이 나면 이 골목 저 골목을 뛰는 모습을 바라보고 반대를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만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하는가를 깨달은 다음에 아내도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그와 함께 소그룹을 이루어서 섬기는 목원들은 전도에 중보기도에 강력한 후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우연히 전도현장에서 술에 찌든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를 태신자로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뺨을 맞기를 여러 번, 이제는 지치고 지쳐서 포기하려는 찰라에 이 사람이 마약 중독자 자기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보다 이 사람이 예수를 더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람이 나보다 심각한 사람이니 이 사람을 전도해 주시오. 하나님 앞에 목놓아 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 사람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지쳐있습니다. 철저히 지치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전도를 포기하게 하기 위함입니까? 사탄의 궤계입니까? 주님의 뜻입니까? 나는 알 길이 없으나 이들의 불쌍한 영혼을 내게 보여 주셨고, 내게 품게 하여 주셨사오니 하나님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저들을 건져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성령님이 저들을 건져주십시오. 전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나님 날 좀 도와주십시오.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중보기도팀이 구성되어졌습니다. 집사님에게 나타난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을 세우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너지는데는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IMF로 사업장은 부도가 났고 이 일로 형제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세상에 호소할 것도 없고 억울하고 억울하여 매일 술로 하루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마약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정신병동에 갇히기도 했고 기도원에 끌려가 묶여있기도 했고 이제는 가족도 그 부모도 이 사람의 구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까지 매달리고 호소하고 애걸하던 아내도 어린 자식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사님과 목원들은 고아처럼 버려진 그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밥을 지어주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달려가기도 하고 지옥처럼 헝클어진 집에 찾아가 청소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몇 번 저러다가 포기하겠지. 고래 고래 소리지르던 이 사람이 점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만취가 된채 한소망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예배를 안내하던 교역자들은 술취한 이 사람을 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집사님을 불러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집사님이 달려나가자 집사님은 온 몸이 전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셨군요. 이 사람을 드디어 교회로 인도하시는군요. 성령님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군요. 두 사람은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냥 교회에 오는 법이 없습니다. 취해서 오기도 하고 담배를 물기도 하고 경찰서에 가 있는 사람을 끄집어 내오기도 하고, 술에 만취가 되어 전화하면 술값을 치르고 이 사람을 데려오기도 하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업어오기도 하고 아예 이 사람의 보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족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몸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기 시작했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시간마다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밤 예배에 오는가 싶더니 새벽예배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이 사람 곁에는 견고한 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는 병들어 있고 가슴에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상처가 아직도 채 아물어지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 가운데 이단에 물들어 있는 사람 - 수많은 견고한 진들이 있지만 그가 변화되기 시작하자 그의 부모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의 형제들이 한소망 교회에 발을 들여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행복동산이 열려지면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가 무엇인지, 영적인 전쟁터에서 멋지게 승리하는 아름다운 비결이 무엇인지, 설레임으로 기대함으로 행복동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대답하십시다.
나 너를 위하여 죽었다. 나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내 생명 내어놓았다. 너 날 위하여 무엇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한소망 교회는 지금처럼 은혜로운 예배 하나만으로 충분히 우리교회는 더욱 더 부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도자를 전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입니다. 저 사탄의 땅을 되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입니다. 누군가의 피를 요구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안됩니다. 이 만큼 짓밟혔으면 됐지, 이만큼 비틀거리고 달려왔으면 됐지, 이만큼 빛을 잃어버렸으면 됐지, 이만큼 방황했으면 됐지, 또 어디까지 추락해야 된단 말입니까?
일어서십시다. 기도하십시다. 성령님을 의지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 도시를 가슴에 끌어안으십시다. 내 눈에 보여주신 수많은 영혼들을 가슴에 품기로 하십시다. 주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우리 도시를 살려주십시오. 한국교회를, 우리교회를, 이 민족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다시 한번 은혜의 불길, 성령의 불길, 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영혼의 구원에서부터 이 커다란 불길은 시작되어질 것입니다. 희생없는 전도는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