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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율목(我又栗木)
나도 밤나무다
我 : 나 아(戈/3)
又 : 또 우(又/0)
栗 : 밤 율(木/6)
木 : 나무 목(木/0)
'아우(我又)'는 '나도'이고 '율목(栗木)'은 '밤나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대한 이야기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전한다. 율곡의 아명(兒名)은 현룡(見龍)으로 출생하는 날 밤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흑룡(黑龍)의 꿈을 꿔 지었다.
현룡은 어렸을 적에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에서 자랐는데, 서당에서 돌아오자 외할머니가 물었다. "현룡아, 저 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느냐?" "예, 석류입니다. 제가 석류에 대해서 시를 한 수 지어보겠습니다. '홍피낭리 쇄홍주(紅皮囊裏碎紅珠).'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아라!" "붉은 주머니에 빨간 구슬이 한껏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외할머니는 현룡의 글 솜씨에 놀랐다.
어느 날 스님이 지나가다가 현룡이를 보고 귀인상에 호랑이에게 다칠 액(厄)이 보인다고 했다. 청천병력 같은 말을 듣고 외면하려다 그냥 지날 수가 없어, 짐짓 스님을 불러 물었다. "그럼, 현룡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면 액운도 막고 훗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위 이원수(李元秀)가 들어오자 이 말을 전했다. "여보게, 사위! 밤나무를 심는 일은 하늘이 내려준 천행이라 생각하네. 그리되면 집안 살림에도 유익하고 이웃에도 좋은 일이며, 게다가 현룡이를 위하는 일 아닌가!"
밤나무를 심기 위하여 온 고을 뒤져 500여 그루의 묘목을 구했다. 파주 미추산에 묘목을 심고, 나머지는 알밤으로 정성껏 심었다. 3년이 되자 밤나무를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1천 그루 중 한 그루가 모자랐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두 번 세 번 헤아려 봤지만 999그루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왜 한 그루가 안 보일까?' 그 때였다. "나도 밤나무요(我又栗木)."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잎은 분명히 밤나무인데 잎 뒷면이 하얗게 보였다. 밤나무 잎과 근사한데 스스로 밤나무라고 하니 그 후부터는 이 나무를 '나도 밤나무'라고 불렀다. 이렇게 1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이웃과 나눔으로 액을 때웠다.
예부터 밤나무는 신목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왕의 목관으로 사용했다. 또 밤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배(梨)만하다고 했다. 수서(隋書)와 북서(北書)에 백제에서는 큰 밤이 난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불기설화(元曉不羈說話)에는 일꾼에게 한 끼 몫으로 밤 두 알을 주었는데, 관청에서는 한 알만 주라고 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23권에는 복숭아만 하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는 커야 호두알만 하다.
씨에는 향기가 없어도 꽃에는 향기가 있고, 열매는 달고 맛있으며, 씨는 작아도 아름드리 나무로 자랄 수 있다. 또 큰 나무에 몇 개의 열매가 열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씨에는 크기와 모양과 맛과 향기가 설계되어 있어 열매를 소중히 여긴다.
율곡의 행적을 일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홉 차례나 장원 급제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지나가는 과객의 소리도 하늘이 내린 소리로 듣고 실천 했던 가풍과, 왜란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창한 통찰력은 미래를 예측한 선견지명이었다.
율곡은 당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쌍벽을 이루어 영남학파(嶺南學派)에 이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태두가 되어 한 시대를 이끈 대학자였다.
■ 나도밤나무
나도밤나무는 나도밤나무과의 나무를 말한다. 동아시아 지방에 분포하며, 꽃은 여름에 피고 색은 노란색이다. 자신도 밤나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름과는 달리 밤나무가 아니다.
밤나무와는 무려 목 단위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식물로서, 나도밤나무는 무환자나무목, 밤나무는 참나무목이다. 이는 영장목인 사람과 식육목인 고양이를 비교하는 수준이다. 게다가 이름이 비슷한 너도밤나무와도 역시 과 수준에서 전혀 다른 식물이다.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는 둘 다 밤나무가 아닌데, 나도밤나무의 경우 한반도 본토에서 볼 수 있지만, 너도밤나무는 울릉도에만 존재한다는 차이가 있다. 낙엽수이며, 잎이 밤나무와 닮아서 나도밤나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율곡을 임신했을 때, 꿈 속에서 현무가 나와 말하기를 율곡은 호환으로 죽을 운명이지만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호환을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사임당은 밤나무 100그루를 다 심었지만, 한 그루가 말라 죽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결국 밤나무 100그루를 다 심지 못했다며 호랑이가 율곡을 잡아가려고 했는데, 옆에 있는 나무가 "나도 밤나무다!"고 말해서 간신히 호환을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설화는 너도밤나무의 설화와 거의 동일하다.
■ 너도밤나무(Engler Beech)
너도밤나무는 참나무과 교목으로, 밤나무나 나도밤나무와는 다르다. 나도밤나무의 경우 아예 거리가 먼 식물이고, 밤나무는 같은 참나무과의 가족이다. 한국에서는 울릉도에서만 서식하므로, 울릉도의 솔송나무, 섬잣나무 군락과 함께 너도밤나무 군락도 천연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울릉도 이외에는 화석으로만 발견되는데, 너도밤나무가 1년 내내 습도가 고른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겨울 날씨가 극단적으로 건조한 한반도 본토에서는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울릉도의 너도밤나무를 한반도 본토에 심으면 말라죽어 버린다.
일본에서는 부나(ブナ)라고 부르는데, 한국의 상수리나무 만큼이나 흔하게 보인다. 유럽에서는 F. sylvatica종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피나무처럼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그러나 북유럽과 러시아에서는 한반도 본토처럼 기후조건상 이유로 자라지 못한다.
열매는 잣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구워서 먹을 수 있다. 다만 은행처럼 독성이 약간 있어서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한다. 최근 중국에서 동일한 종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기에 따르면 개화시기는 3~4월, 또 여기에 따르면 개화시기는 5월이다.
너도밤나무의 이름에 대해 유명한 민간설화가 있다. 등장인물이나 장소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어떤 아이를 보고 얼마 못 가 호환으로 죽을 운명이라 말했다. 아이 아버지가 깜짝 놀라 대책을 물으니, 스님은 사람 1000명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 일천명을 어떻게 구하냐고 묻자, 인명 1000명 대신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재앙을 피하리라 답하였다.
이윽고 호랑이가 왔다. 아버지는 밤나무 1000그루를 심었으니 물러가라고 말했지만, 호랑이는 한 그루가 말라 죽었다며 아이를 잡아가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나무가 "나도 밤나무다." 하고 끼어들자 호랑이가 물러갔고, 아버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나무에게 "그래, 너도 밤나무다." 하였다. 그 후 그 나무는 너도밤나무라고 불리게 됐다.
비슷하게 밤나무와 종이 다르지만 생김새가 비슷하여 "나는 밤나무. 너도 밤나무"라고 했다 하여 너도밤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그저 민간어원일 뿐이다. 국립국어원에서도 정확한 어원은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한반도 본토에 너도밤나무 자체가 아예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이야기는 나도밤나무 관련 설화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스웨덴의 식물학자로서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현대 식물학의 시조로 불리는 카를 폰 린네(Linné, Carl von)가 식물을 분류하다가 밤나무 종류가 하도 많이 나오자 '그래, 너도 밤나무다!'라고 한탄한 종류가 너도밤나무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퍼져 있다.
◼ 나도 밤나무다
글 / 신현배(시인, 아동문학가)
금강산 어느 골짜기에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부부는 이른 새벽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삼신 할머니,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습니다. 저희 부부에게 자식이 생기게 해주세요."
부부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이런 지극한 정성에 삼신 할머니도 감동받았는지, 어느 날 아내는 드디어 아이를 뱄습니다. 그리고 열 달 뒤에는 귀여운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기를 번갈아 안으며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가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랄 뿐이오. 그래서 아이 이름을 '무럭이'라고 지었으면 하는데…" "무럭이요? 좋은 이름이네요. 정말 이름처럼 무럭무럭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무럭이는 부모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무럭이의 돌날에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멀리 사는 친척들을 부르고, 금강산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이웃들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성대한 돌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돌잔치 다음 날이었습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집 마당에 성큼 들어섰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소만한 호랑이를 보고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해치지 않을 테니 겁내지 마십시오. 나는 비로봉 골짜기에 살고 있는데,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호랑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말아 피웠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호랑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사람처럼 말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해칠 것 같진 않아 보였습니다.
잠시 뒤, 호랑이는 주머니에서 밤알을 꺼내 마룻바닥에 쏟아 놓았습니다. "세어 보십시오. 모두 백 알입니다. 이 밤알로 싹을 틔워 밤나무 백 그루를 키워 주십시오. 10년 뒤에 다시 와 밤나무를 파 가겠습니다."
무럭이 아버지는 굽실거리며 말했습니다. "호랑이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밤나무 백 그루를 잘 키워 놓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 계십시오." "꼭 좀 부탁합니다. 내 운명이 걸린 일이오. 나는 원래 하늘나라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어 호랑이가 되어 이곳에 내려왔던 거지요. 옥황 상제께서는 내가 10년 뒤에 밤나무 백 그루를 가져오면 나를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호랑이는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이 집에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무럭이요? 안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도 밤나무를 잘 키워야 합니다. 만일 백 그루에서 한 그루라도 모자라면 무럭이를 잡아갈 거니까." "예?"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무럭이를 잡아가시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옥황 상제께서는 내게 이런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만일 밤나무 백 그루를 채우지 못하면 남자 아이 하나를 잡아와야 한다. 그러니 10년 뒤에 무럭이를 빼앗기기 싫으면 밤나무 백 그루를 잘 키워 놓으십시오." 말을 마친 호랑이는 마당을 가로질러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밤나무만 잘 키워 놓으면 우리 무럭이를 잡아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정성을 다해 싹을 틔워 봅시다." 무럭이 아버지는 밤 백 알을 앞뜰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싹이 틔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듬해 봄, 드디어 밤나무 순이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앞뜰에 서서 밤나무 순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어어? 하나가 모자라잖아!"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밤나무 순이 백 개 모두 돋아나야 하는데, 하나가 모자란 아흔아홉 개였기 때문입니다.
무럭이 아버지가 돋아나지 않은 곳을 파 보았더니 속이 파인 밤알이 나왔습니다. "이런, 쥐가 파먹어 버렸어. 그래서 순이 돋아나지 않은 거야." "그럼 어쩌지요. 백 그루를 키워야 하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금강산이 워낙 깊고 넓으니 밤나무 한 그루쯤은 찾을 수 있을 거요. 틈틈이 산을 뒤져 봅시다."
무럭이 아버지는 뒷산에 밤나무 순 아흔아홉 개를 옮겨 심었습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밤나무를 가꾸었습니다. 밤나무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습니다. 줄기와 가지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갔고, 몰라보게 굵어졌습니다.
뒷산은 이제 밤나무 숲으로 변했습니다. 그리하여 초여름에는 하얀 밤꽃이 피어 그 향기가 널리 퍼졌으며, 가을에는 밤이 익어 송이가 벌어졌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밤나무 숲을 보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밤나무 한 그루를 채우려고 시간 날 때마다 금강산을 헤매 다녔습니다. 1만2천 봉우리를 신발이 닳도록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밤나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습니다. 어느 새 10년이 되어, 호랑이가 찾아오기로 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부터 금강산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곳곳에 바위와 봉우리가 수없이 솟아 있고 못과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은 밤나무 한 그루였습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다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애가 탔습니다. 이제 해가 지면 밤나무를 찾을 수 없게 되고,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사랑하는 아들을 호랑이가 잡아갈 것입니다. 호랑이가 무럭이를 하늘 나라로 데려가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무럭아!"
해가 꼴딱 서산 너머로 사라지자,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 이름을 부르며 바위 위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밤나무 한 그루가 없어 내 아들을 빼앗기다니…" "무럭아, 무럭아! 너 없이 어떻게 사니!"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도 밤나무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깜짝 놀라 소리나는 쪽을 돌아 보았습니다. 맞은편 숲속에서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두 사람을 향해 가지를 흔들며 계속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도 밤나무다! 나도 밤나무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맞은편 숲속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나무 스스로 밤나무라 외칠 만했습니다. 밤나무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던 것입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나무를 껴안으며 소리쳤습니다. "그래, 너도 밤나무다!" "너도 밤나무야!" 이때부터 이 나무는 '너도밤나무'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그 날 밤 두 사람은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잘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호랑이가 찾아왔습니다. 무럭이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호랑이님, 저희 집으로 오다가 뒷산 밤나무 숲 보셨죠? 그곳에 밤나무 아흔아홉 그루를 잘 키워 놓았습니다. 나머지 한 그루는 뒷산 숲에 있고요. 같이 가서 보시죠."
무럭이 어머니도 입을 열었습니다. "밤나무 백 그루를 다 키워 놓았으니 어서 파 가세요. 그리고 약속을 지켰으니 우리 무럭이를 잡아가시면 안 됩니다."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애 많이 쓰셨군요.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여러분이 밤나무 백 그루를 키워 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야 옥황 상제께 용서를 받고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예?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요?"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호랑이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엉뚱한 부탁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호랑이가 말했습니다. "저는 금강산에 반했습니다. 금강산을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에 남아 그냥 호랑이로 살아가렵니다."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금강산이 아름다우면 하늘나라 가기를 포기할까. 우리 금강산이 하늘나라보다 살기 좋은 모양이야.'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호랑이를 비로봉으로 떠나보내며 금강산에 사는 기쁨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금강산에는 밤나무가 많은데, 무럭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심어 가꾼 것이 널리 퍼진 거랍니다.
■ 나도 밤나무(野史)
강릉에서 내려오는 전설 같은 야사(野史) 한토막을 소개 하고자 한다. 6월초 부터 피는 밤꽃 향기는 특이한 냄새를 풍긴다. 옛날에는 남자들의 정액 냄새와 비슷한 이 냄새를 '양향(陽香)'이라 불렀다. 이 냄새에 취하여 부녀자들의 자세가 흔들릴까봐 밤꽃이 피는 요즘 무렵이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가했고 과부는 몸가짐을 더욱 조신하게 처신했다.
"혼인으로 부부의 연(緣)을 맺었지만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큰 인물이 될때 까지 부부관계를 잠시 접고 한양에 올라가서 공부를 하세요. 저는 친정에서 그림 공부나 하며 서방님의 입신양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380년전,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공부하러간 선비가 있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아내와 떨어져 공부에 전념하던 선비는 꽃같은 예쁜 아내가 보고싶어 10년 약속을 어기고, 처가를 찿아가는 길에 강원도 평창 대화의 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 서울에서 두어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그 시절에는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선비들은 진부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흔아홉구비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한양에서 평창 대화까지 걸어 왔으니 노독이 쌓여 곤한 잠에 떨어질 즈음, 주막집 울타리에 늘어선 대나무숲이 스산한 가을 바람에 사각거리고, 짝을 찿는 귀뚜라미는 애달프게 울어 대는데, 별빛 교교한 심야에 주안상을 받쳐들고 장지문을 여는 여인이 있었다. "게 누구냐?" "아낙이 옵니다." 달빛에 비치는 여인은 주막집 여인이 틀림없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 주막을 찿아 들었을때 '수려한 인물에 단아한 자태가 이런 시골 구석 주막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구나'고 눈여겨봤던 바로 그 여인이였다. "깊은 밤에 어인 일인고?" "선비님 인품이 고고하여 약주 한 잔 올릴려고 하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는 자세가 범상치 않다. 여인의 자태에서 양반집 규수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오른쪽으로 여민 말기의 품새로 보아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치마로 하체를 감쌌지만 들이쉰 숨을 아래로 내려 음기(陰氣)를 모은 뒤 깊이 빨아들이는 훈련을 한 걸음걸이로 보아 여염집 아낙은 아닌 듯 싶었다. "허허허 자네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술을 따르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지만 선비의 얼굴은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되고 있었다.
다소곳이 절을 올린 아낙이 살포시 일어나 교방탁자 넘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거문고를 가져왔다. 섬섬옥수 여인의 오른손이 술대를 쥐고 허공을 가르더니만 거문고가 팅~ 통~ 탱~ 울어댄다.
고치에서 비단을 뽑아내 듯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향이 가야금이라면 밤나무로 뒷바침대를 하고 오동나무로 울림통을 한 거문고는 음(陰)과 양(陽)이 교합할 때 들려오는 교성처럼 잦아들다 솟구치고 솟구치다 잦아드는 음색이 황홀하고 열락적이다.
여인이 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권주가와 함께 잔을 채운다. 부드러운 여인의 손에 들려있던 호리병에서 흘러나온 송화주가 선비의 입을 통하여 몸속에 흐르자, 짜르르~ 술기운이 전해온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횡재인가? 이 호젓한 심야에 술과 여자라.
회가 동하지만 근본을 알지 못하는 여인은 함부로 범접하지 않는것이 선비의 도리이니 경계 할 수밖에... "그래, 무슨 사연이라도 있느냐?" "선비님과 하룻밤 가연 맺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가연(佳緣), 요샛말로 하면 원나잇스탠드(one―night stand) 하자는 것이다.
남녀 유별이 엄격했던 그 시절에 정숙해 보이는 여인네가 처음 보는 남정네에게 통정(通情)을 청하니 놀라 자빠질 일이였으나, 촉촉히 젖은 여인의 검은 눈망울이 그 무었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었다.
여인은 겨드랑이가 깊이 파인 연분홍 항라 저고리를 벗고, 모란 무늬가 은은한 치마끈을 풀어내리고 선비의 품속을 파고 들었다. 아무리 선비의 체통이 군자의 뜻을 쫓는다 해도 혈기 왕성한 사내인 이상 불끈 일어서는 욕망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았다.
지게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여인의 속살이 눈부시다.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어깨선이 상아를 깍아내린듯 아름답다. 다 벗어 내리지 않은 치마 말기 속에 반쯤 드러난 젖무덤이 터질 듯 솟아있다. 호리병을 두손에 받쳐들고 술을 따를 때에는 봉긋한 꼭지가 선비의 팔굽을 스쳤다.
바람이 분다. 향탁에선 연향(戀香)이 타오르고 문틈 사이로 흘러 들어온 바람에 지촉등불이 살랑거린다. 흔들리는 불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발그레 물들어 있고 숨소리는 거칠어 졌다.
커진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온다. 촉촉이 젖어 있는 여인의 두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분꽃씨 같은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떠있는 조각배처럼 흰자위에 두둥실 떠 있다.
멍! 멍! 머! 밤하늘에 흐르는 달그림자를 보고 놀랐는가? 동구 밖 물방앗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랫마을 돌쇠와 과부댁을 보고 컹컹대는가? 이때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궁이에서는 남은 솔가지가 마져 타느라 타닥거렸다. 여인이 나비 등잔불을 껐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여자를 품에 안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7년전 한양으로 공부하러 떠나올 때 사랑채 문간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옷고름으로 닦던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순간 선비는 안간힘을 다하여 여인을 밀쳐내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아서라, 선비의 도리가 아니느리라."
당황한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선비님, 너무 하시옵니다. 흑~ 흑~ 흑~" 봉긋한 젖무덤까지 풀어 헤쳤던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옷고름을 여미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지게문 사이로 흘러 들어 오는 달빛이 여인의 어깨위로 부서지며 흘러 내린다.
댓잎에 스치던 밤바람이 일렁이며 툭 하고 밤송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건만, 여인의 어깨위에 일렁이는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여인의 처연한 모습을 바라보던 선비는 난감했다. "주안상을 물리고 지필묵을 들여라."
주안상을 치우고 붓과 벼루와 청잣빛 영롱한 연적을 받쳐 들고 들어온 여인은 종이를 가져오지 않았다. 선비가 눈빛으로 화선지를 찿자, 여인은 말없이 갑사 치마끈을 풀어 선비 앞에 펼쳐놓았다. 벼루에 먹을 갈던 여인의 눈가의 이슬이 벼루에 떨어졌다. 흐느낌을 감추려는 듯 여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거울에 비친 꽃이요, 물 위에 떠 있는 달이로다(鏡花水月).
이튿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린 휘호를 치마에 남겨두고 동창이 밝을 무렵, 주막을 나선 선비는 장평, 진부를 지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을 넘어 해질무렵에 처가에 도착했다. 얼마 만에 찿은 처가인가?
7년전 떠나올 때 마당에 심은 배롱나무가 몰라보게 자랐지만, 아내의 모습은 새색시 그대로 고왔다. 한 달을 처가에 머물며 쌓였던 회포도 풀고 아내와 운우(雲雨)의 정을 나눈 선비는 과거시험 때문에 다시 처가를 떠나 한양으로 길을 떠났다.
대관령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 터벅 터벅 걸어 내려오던 선비는 날이 저물자, 주막집 그 여인이 자꾸만 생각났다. 다른 주막에 묵을 수도 있지만, 다시 대화 그 주막을 찿아 들었다.
주안상을 마주 놓고 여인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그런 당돌한 청을 한 연유가 무었이더냐?" "배록 배운 것은 없어 주막을 열어 먹고사는 무지렁이오나 사람의 기색을 좀 살필 줄 아옵니다." "기색이라? 그래, 내 기색이 어떻더냐?" "그 날 선비님의 안색에서 서기가 서린 것을 보고 귀한 자식 하나 얻어볼까 하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하였습니다."
이래서 남자는 도둑놈이라 하던가? "오호,그랬었구나. 그렇다면 오늘밤에 이루지 못한 운우의 정을 풀어 보자구나." 진정으로 원할때는 거절하더니, 처가에서 실컷 배꼽을 맞추고선 식사후에 숭늉 챙겨먹는 식으로 들이대니 이런 고얀일이 있는고.
여인의 표정은 싸늘했다. "지금은 아니되옵니다. 그때는 선비님의 안색에서 서기가 넘쳐났으나, 지금은 그 서기가 사라졌을 뿐 아니오라, 이미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미천한 계집이 몸만 더럽일까 두렵습니다."
선비는 정신이 바짝들며 퍼지던 술기운까지 확 달아났다. "선비님은 아들을 얻을 것이온데, 아이는 인시에 태어날 것이며 일곱 살에 호환이 두렵사옵니다." 다소곳이 치마폭에 무릎을 접은 여인의 입에서 예사롭지 않은 말이 튀어나온다. 정신이 바짝든 선비는 지금까지 무례를 사과하고 호환을 막을 방도를 물었다.
호환(虎患)이란 무었인가? 애, 어른 할 것없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은 그 당시에 가장 무서운 일로, 특히 사대부가에서는 치욕으로 여겼다. 조상을 소흘히 모시는 집안에 호환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호랑이 물어갈 놈'이라는 욕까지 나왔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1,000그루의 밤나무를 심으면 화를 면 할 것입니다. 또 아이가 일곱 살 되는 해 낯 모르는 스님이 찿아와 아이를 보자 하거든 절대 보여주지 말고 밤나무를 보여주소서."
한양에 도착한 선비는 밤나무를 심으라는 그 여인의 말이 머리를 맴돌아 공부가 되지 않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밤나무는 죽어서 신주(神主)가 됨으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신성한 나무이기에 밤나무를 심는 것은 덕을 쌓는것이다.
과거 공부하던 선비는 고향 마을에 1,000그루의 밤나무를 정성들여 심었다. 강릉에 있던 아내도 파주에 와 있고, 사내 아이가 일곱 살 되던 어느날, 대화 주막집 여인의 말대로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노스님이 갈포 장삼에 굴갓을 쓰고 찿아왔다.
노스님이 "이 고을에 나라의 재목이 될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찿아 왔소이다." 아이를 보자고 했다. "내 아이에게 손대지 마시오." 선비가 소리를 지르며 밤나무를 가리켰다. 하나, 둘, 셋... 999에서 멈췄다. 소를 매놨던 밤나무 한 그루가 그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진노한 노스님이 하얗게 흘러내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통을 쳤다. "천명을 거역하려는 것이오?" 그때 "나도 밤나무..." 소리치며 나서는 산밤나무가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스님은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졌 버렸다.
이렇게 호환을 면한 아이가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栗谷)이며, 그 선비는 율곡의 아버지이자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이다. 율곡 이이 선생은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 송시열 선생이 율곡 선생 생전에 살던 곳이 밤나무가 많은 곳이므로 호(號)를 율곡이라 지었다고 한다.
◼ 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일까
'너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처음 안 것은 셜록홈즈의 추리소설에서 였다. 시리즈 중 '너도밤나무 집' 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루캐슬 씨의 너도밤나무 집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물론 그 저택은 오래되고 낡았습니다만, 주위가 모두 너도밤나무 숲이기 때문인지 매우 경치가 좋았어요"
'세상에! 나무 이름이 너도밤나무라니, 외국에는 참 이상한 이름을 가진 나무도 있구나'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이다운 발상이다. 너도밤나무는 우리말인데 외국이라서 그런 이상한 이름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셜록 홈즈의 나라에서는 너도밤나무를 'Beech'로, 밤나무를 'Chestnut'으로 부른다. 그러니까 너도밤나무는 매우 당연히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름이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도!' 하는 것처럼 앞에 '너도'가 붙는 식물은 밤나무뿐만이 아니다. 특히 꽃 이름에 많은데, 대표적으로 '너도바람꽃', '너도양지꽃'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너도'의 짝꿍이 있다. 바로 '나도'이다. 그래서 '너도'로 시작하는 식물에는 대부분 '나도'가 있다. 너도밤나무가 있으니 나도밤나무가 있고, 나도바람꽃, 나도양지꽃 식으로.
대체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겉으로 보기에 비슷하게는 생겼다. 그래도 '너도'로 시작하는 식물이 '나도'로 시작하는 식물보다 본래 식물에 더 가깝게 생겼다.
밤나무를 예로 들면, 너도밤나무도 나도밤나무도 밤나무는 아니다. 셋 다 다른 나무다. 그나마 너도밤나무가 나도밤나무보다 밤나무를 닮았다. 열매로 말할 것 같으면 너도밤나무에는 밤하고 비슷한 열매가 열리지만 나도밤나무에는 밤이 아니라 다른 열매가 열린다.
사람으로 치면 밤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사촌지간이지만, 나도밤나무는 아예 다른 집 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다른 집 아이가 난데없이 밤나무 집안에 들어와 '나도 밤나무'라고 억지주장을 하는 셈이다. 이런 이름을 얻게 된 연유가 울릉도에서 설화로 전해진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너도밤나무의 유일한 서식지이다. 옛날 울릉도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할 때이다. 산신령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밤나무 백 그루를 심지 않으면 큰 재앙을 내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밤나무 백 그루를 심었다.
얼마 후 산신령이 찾아와서 세는데, 그만 아흔아홉에서 멈추고 말았다. 딱 한 그루가 모자랐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재앙이 내려질 거라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산속의 모든 나무와 새들도 벌벌 떨었다. 화가 난 산신령이 밤나무를 다시 셌다. 이번에도 아흔아홉에서 멈췄다. 마을 사람들이 이제 죽었구나 싶은 순간! 밤나무 옆에 서 있던 작은 나무가 이렇게 외쳤다. "나도 밤나무!"
산신령이 "너도 밤나무냐?"고 재차 묻는데 그 나무는 계속 자기가 밤나무라고 고집했다. 결국 산신령은 "그래, 너도 밤나무다!" 인정해 주었고, 그래서 그 나무에 붙은 이름이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참 재미있고도 귀여운 설화이다.
나도밤나무에 얽힌 설화는 강원도 강릉에 있는 율목치라는 마을의 설화로 전해진다. 흥미롭게도 율곡(栗谷) 이이와 관련이 있는데 율곡의 율이 '밤 율(栗)'이다.
율곡이 강원도 강릉에 있는 노추산의 이성대에서 공부를 했던 시절의 일이다. 도사가 그 앞을 지나가다 율곡의 관상을 보더니 곧 죽을 운명이라고 했다. 율곡이 어떻게 해야 좋겠냐고 물으니 도사가 비책을 알려준다.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면 연명할 수가 있습니다."
도사가 떠난 후에 율곡은 열심히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밤나무를 한 그루씩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천 그루에서 딱 한 그루가 모자랐다.
도사는 "한 그루가 모자라니 약속과는 다릅니다." 하더니 호랑이로 변신했다. 그리고 율곡을 잡아가려는 순간, 옆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요." 하고 나서주었다. 덕분에 율곡은 호랑이에게 붙잡혀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도밤나무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약간씩 내용은 달라도 나도밤나무가 율곡을 살렸다는 마무리는 같다. 이 대목에서 율곡이 정말로 밤나무 999그루를 심었느냐 하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전설이나 설화에서 중요한 것은 진위여부가 아니라 담긴 뜻이다.
울릉도의 산신령이 너도밤나무가 밤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라봤을 리 없고 강릉의 호랑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너도 밤나무라고 인정해주고 조용히 사라져 준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벅찬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나를 위해 나서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설령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떤 존재라도 있다면, 운명도 내 편으로 돌아서 무사히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어떤 존재란 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고 애써 스스로 심지도 않은 그저 작은 나무, 평범하고 사소한 존재일 수 있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 또는 억지로 자기에게 이롭도록 꾀함을 이르는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의 공평함을 이르는 말을 아심여칭(我心如秤), 자기네 편의 무위가 드날림을 이르는 말을 아무유양(我武維揚),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 또는 자기만 잘 났다고 자부하는 독선적인 태도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일컫는 말을 물아일체(物我一體), 어떤 생각이나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자신을 잊어버리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망아지경(忘我之境),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자기가 어떤 것에 끌려 취하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을 자아도취(自我陶醉), 잘못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곡재아의(曲在我矣),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어떤 사물에 열중하여 자기를 잊고 다른 사물을 돌아보지 않거나 한 가지에 열중하여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림을 일컫는 말을 무아몽중(無我夢中), 자기 때문에 남에게 해가 미치게 됨을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유아지탄(由我之歎), 인신人身에는 항상 정하여져 있는 주제자 즉 아我가 없다는 말을 인아무상(人我無想),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이르는 말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일컫는 말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일컫는 말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일컫는 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
▶️ 又(또 우)는 ❶상형문자로 오른손을 본뜬 글자이다. 본디는 오른쪽, 가지다, 돕다, 권(勸)하다를 뜻하였으나 뜻으로 빌어 썼다. 한자(漢字)의 부수(部首)로서는 손의 거동(擧動)에 관한 뜻을 나타내며 음부(音部)가 될 때에는 돕다, 풍부(豐富)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又자는 '또'나 '다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又자는 사람의 오른손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이 옳고 바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오른 손잡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又자는 '손'을 뜻하다가 후에 '또'나 '자주'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자주 쓰는 손이라는 뜻인 것이다. 특히 금문에서부터는 손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파생되면서 又자는 손이 아닌 '자주 사용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又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손'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又(우)는 ①또 ②다시 ③또한, 동시에 ④더욱 ⑤오른손, 오른쪽 ⑥거듭하다, 두 번 하다 ⑦용서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하물며를 이르는 말을 우황(又況), 또 말하기를 또는 다시 이르되를 이르는 말을 우왈(又曰), 의뢰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의뢰함을 우뢰(又賴), 한두 번을 이르는 말을 일우(一又), 더욱이 또는 뿐만 아니라를 이르는 말을 우중지(又重之), 대청 빌면 안방 빌자 한다는 뜻으로 체면없이 이것저것 요구함을 이르는 말을 기차당우차방(旣借堂又借房), 제곱한 수를 또 제곱하여 몇 번이든지 곱한다는 말을 자승우승(自乘又乘), 몇 가지를 겸한 위에 또 더욱 겸한다는 말을 겸지우겸(兼之又兼), 오묘하고 또 오묘하다는 뜻으로 도의 광대 무변함을 찬탄한 말을 현지우현(玄之又玄) 등에 쓰인다.
▶️ 栗(밤 률/율), 두려워할 률/율, 찢을 렬/열)은 ❶상형문자로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밤송이 속에 열매가 둘이나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❷상형문자로 栗자는 '밤나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栗자는 木(나무 목)자와 覀(덮을 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覀자는 '덮다'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모양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갑골문에 나온 栗자를 보면 돌기가 있는 열매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열매를 뜻하는 果(열매 과)자와 매우 비슷하지만 栗자는 밤송이의 까칠한 부분을 강조해 그려졌다. 이것이 해서에서는 覀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栗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栗(률/율, 렬/열)은 ①밤, 밤나무 ②많은 모양 ③단단하다, 견실(堅實)하다 ④(결실이)좋다, 잘 여물다 ⑤공손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⑥엄숙(嚴肅)하다, 위엄(威嚴) 있다 ⑦춥다 ⑧(거쳐)지나다, 지나가다 ⑨두려워하다, 벌벌 떨다 ⑩건너뛰다, 그리고 ⓐ찢다, 쪼개다(렬)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추위가 맵고 심함을 율렬(栗烈), 밤나무를 달리 이르는 말을 율목(栗木), 밤을 달리 이르는 말을 율자(栗子), 밤나무 동산을 율원(栗園), 밤 껍질을 달리 이르는 말을 율각(栗殼), 날밤을 달리 이르는 말을 생률(生栗), 맛이 단 밤을 감률(甘栗), 말리어서 껍데기와 보늬를 벗긴 밤을 황률(黃栗), 대추와 밤 또는 신부가 시부모에게 드리는 폐백을 조율(棗栗), 불 속에 들어가 밤을 줍는다는 뜻으로 사소한 이익을 얻으려고 큰 모험을 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을 입화습률(入火拾栗), 제물을 차릴 때 대추는 동쪽에 밤은 서쪽에 놓는다는 말을 조동율서(棗東栗西),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동편에서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놓으며 그 외의 과일은 순서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조율이시(棗栗梨枾) 등에 쓰인다.
▶️ 木(나무 목)은 ❶상형문자로 땅에 뿌리를 박고 선 나무 모양을 본뜬 글자로 나무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木자는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함께 표현된 상형문자이다. 땅에 뿌리를 박고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를 표현한 글자라 할 수 있다. 중·고등용 상용한자에서는 木자가 부수로 쓰인 글자가 많다. 쇠를 능숙하게 다루기 이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가공하기 쉬운 성질을 가진 것이 나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무와 관련된 한자를 보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나무를 어떻게 활용했고 인식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木자는 나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나무의 종류나 상태에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木(목)은 (1)무명으로 된 것 (2)오행(五行)의 하나. 방위(方位)로는 동쪽, 철로는 봄이다. 빛으로는 푸른색으로 가리킨다. (3)어떤 명사 앞에 쓰여 나무로 된 무명으로 된의 뜻을 나타내는 말 (4)성(姓)의 하나 (5)목요일(木曜日) (6)팔음(八音)의 한 가지이다. 지어(枳敔)와 같은 종류의 나무로 만든 일종의 마찰(摩擦) 악기 등의 뜻으로 ①나무 ②목재(木材) ③널(시체를 넣는 관이나 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관(棺) ④오행(五行)의 하나 ⑤목성(木星; 별의 이름) ⑥목제 악기 ⑦형구(刑具; 형벌을 가하거나 고문을 하는 데에 쓰는 여러 가지 기구) ⑧무명(무명실로 짠 피륙) ⑨질박하다(質樸;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⑩꾸밈이 없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수풀 림/임(林), 수풀 삼(森), 나무 수(樹)이다. 용례로는 나무 인형을 목상(木像) 또는 목우(木偶), 나무 그릇을 목기(木器), 나무 도장을 목도장(木圖章), 나무를 다루어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공(木工), 나무와 풀을 목초(木草), 나무토막으로 만든 베개를 목침(木枕),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로 업을 삼는 사람을 목수(木手), 술청에 목로를 베풀고 술을 파는 집 목로주점(木壚酒店), 나무나 돌과 같이 감정이 없는 사람을 비유하여 목석(木石),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곳이 없다는 뜻으로 가난하고 외로워서 의지할 곳이 없는 처지를 이르는 말을 목석불부(木石不傅), 나무에도 돌에도 붙일 데가 없다는 뜻으로 가난하고 외로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를 이르는 말을 목석난득(木石難得), 나무 인형에 돌 같은 마음이라는 뜻으로 감정이 전연 없는 사람 또는 의지가 굳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목인석심(木人石心), 나무나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이르는 말을 목우석인(木偶石人), 나무 인형에 옷을 두른 것이라는 뜻으로 아무 능력이나 소용이 없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목우인의(木偶人衣), 나무나 돌처럼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마음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목석간장(木石肝腸), 나무 껍질이 세 치라는 뜻으로 몹시 두꺼움을 이르는 말을 목피삼촌(木皮三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