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2년 2월 1일
존이 뺨을 연신 핥아대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꾼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났다. 시간은 오전 11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고, 송이는 당연히 출근을 한 뒤였다. 나는 이부자리를 대충 정리한 뒤에 침대 옆 창문의 커텐을 젖히고 창을 조금 열었다. 늦겨울 늦은 오전의 기분 좋은 한기와 꽤 짙어진 햇살이 열린 창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출근 전 송이가 붙였을 포스트 잇이 냉장고 벽면에서 이따금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침은 알아서 해결! 우유랑 계란 없음! 부탁해♥
나는 포스트 잇을 떼서 쓰레기통에 넣고, 머릿속으로 할일들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재활용 쓰레기는 어제 버렸으니까 됐고, 존 사료랑 물 챙겨주고 나서 마트에서 장보고, 밥도 거기서 대충 떼우고. 그리고… 운동이나 할까? 그리고 나서는 그 다음에 정하기로 했다.
존이 침대 위에서 기지개를 펴며 낮은 소리로 그르릉 거렸다. 나는 찬장에서 꺼낸 한끼분의 고양이 사료와 미지근한 물 두컵을 받아서 한컵 반 정도를 사료통에 부었다. 남은 물은 창가의 쟈스민과 선인장 화분에 적당히 나눠 주었다. 왠지 적적한거 같아서 티비를 켜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머리를 다 감고 헹구고 있는데 존이 자꾸 욕실문을 긁어댔다.
"에이 거참, 알았어 알았어.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녀석은 꼬리를 세우고 다리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나를 간지럽혔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최초 감염자인 최씨는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어제 저녁, 별다른 증세 없이 기절 한 뒤에 혼수상태에 빠진것으로 알려졌으며, 병원 연구팀의 정밀 검사결과 혈액에서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미확인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이 바이러스는 혼수상태를 일으키는 것 외에는 신체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무슨 바이러스가 도졌나보다. 근데 혼수상태 외에 다른 증상은 전혀 없다고? 거참 희한한 바이러스네.
나는 머리의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나와 침대에 앉았다.
- ..정부는 현재 시각 특별 연구팀을 소집했으며, T1이라 명명된 이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와 치료법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YTM 이도석이었습니다.
테 없는 안경을 낀 젊은 기자는 어딘지 모를 정부 기관의 정문 앞에서 리포팅을 마쳤다. 화면이 바뀌고 다소 늙어 보이는 앵커가 딱딱한 어투로 다음 뉴스를 전했는데, 별 다른건 아니었다. 신용카드 수수료가 어쩌고 저쩌고… 나 같은 백수에게는 그야말로 영양가가 없는 뉴스였다.
나는 티비를 끄고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은 뒤에, 전기 면도기로 꽤 오랜시간 동안 멍하니 면도를 했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옷장에서 티셔츠와 면바지 꺼내 입었다. 지갑을 확인해 보니 우유와 계란을 사고 아침 (아니, 이제 브런치라고 해야하나?) 를 먹으면 대략 오천원 정도 남을 것 같았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코트와 목도리를 두르고 핸드폰의 디지털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11시 50분을 지나고 있었다. 핸드폰과 지갑을 코트 주머니에 집어 넣고, 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에 집을 나섰다. 전자 도어락의 뜬금 없는 신호음과 함께 쉬-익 하고 문고리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오피스텔 밖은 2월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따듯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못된 감상이지만, 지구 온난화 라는게 우유와 계란을 사러 대형마트까지 10분을 걸어가야 하는 나 같은 한량에게는 꽤나 유익하게 느껴졌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이어폰을 꼽고 엠피쓰리 어플로 라디오헤드의 '하이 앤 드라이'를 들으며 한산한 거리를 걸었다. 이런 아파트나 오피스텔 외엔 별다른 건물도 없는 동네에서의 정오는 아무래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시간이다. 아저씨들은 출근, 애들은 등교. 아줌마들은 집에서 아침 드라마를 다 보고 낮잠이나 쿨쿨 잘 시간이니까. 나는 엘리엇 스미스의 '비트윈 더 바'가 다 끝났을 무렵, 마트 입구에 도착했다.
우유와 계란을 사고, 아침 겸 점심을 떼우면 백수의 마트 미션 컴플리트. 나는 1층의 TBJ나 NII 같은 패션 브랜드들을 지나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해피니스 이스 어 웜 건'을 허밍했다. '행복함은 따듯한 총이야, 그래 맞아. 행복함은 따듯한 총이야' 라고 존 레논이 노래하고 있었다. 오래 전, 자신의 등 뒤에서 따듯한 온기를 내뿜고 있는 마크 채프먼의 권총을 봤을때, 존 레논은 아마도 이 노래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처음 송이가 고양이를 데려왔을때, 나는 녀석에게 무슨 이름을 지어줘야 할지 단 일초도 생각 하지 않았다. 녀석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이 검고 도도한 생명체에게는 존 레논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릴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송이는 '티티' 가 맘에 드는듯 했지만, 결국 내 의견을 따라줬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의 도도함과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릴렉스한 태도가 존 레논의 모습과 닮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오토 워크가 나를 스르륵 내려주었다. 식품 매장 특유의 차갑고 약간 비린 냄새가 났다. 나는 저지방 우유 두팩과 알이 크고 껍질에 이물질이 묻어있지 않은 계란 묶음을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을 하러 가는 중간에 일본 반찬 특별전이라고 써붙인 큼지막한 가판대가 있길래 슬쩍 구경을 했다.
실제 일본 가정집에서 만든 그대로의 맛! 드셔보고 결정하세요!
몇몇 아줌마들이 웅성거리며 시식을 하고 있길래 그냥 슬쩍 보고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화장을 너무 짙게 한듯한 시식 담당 직원이 내 팔을 살짝 붙잡았다.
"하나 드셔 보세요, 우리 입맛에도 딱 맞아서 밥 반찬으로 참 좋습니다~"
"아, 예"
초록색 녹말 이쑤시개에 뭔지 모를 고기 반찬 하나를 꼽아줬는데 너무 싱거웠다. '우리 입맛'이 도대체 어떤 집단의 입맛인진 모르겠지만, 내 입맛이 그 집단에 포함되긴 그른 것 같았다.
"어떠세요?"
"어, 맛있네요.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
직원은 입꼬리만 살짝 치켜 올려 웃으며(솔직히 웃은게 맞는진 잘 모르겠다) 말했다.
"예. 그러세요 고객님"
계산을 하고 돈을 대충 세어보니 육천원 가량이 남아있었다. 나는 같은 층의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시켜 노래를 들으며 먹었다. 멍하니 햄버거를 우겨넣고 있던 도중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서 확인해 보았다. 송이에게 온 카카오톡 메시지 였다.
- 송이: 밥 먹었어?
나: 짐 먹어.
송이: 뭐 먹는데?
나: 우유랑 계란 사러 마트 왔어. 그러니까 당연히 빅맥.
송이: 밥 먹지ㅡㅡ 속도 안좋으면서
나: 이게 땡겼어ㅋ
송이: 귀찮았다고 솔직히 말해랑ㅋㅋ
나: 귀찮았어.
송이: ㅡㅡ난 밥 먹어. 구내식당이야.
나: 남자랑 같이 먹어?
송이: ㅋㅋㅋ어! 40~50대 남자들에 둘러 쌓여서 먹는 중ㅋ
나: 맛있게 먹는척 해줘. 2차 가자면 가지 말고.
송이: 헛소리 그만해ㅋㅋ
나: ㅋㅋ열심히 일해ㅋ 나 이제 다 먹고 집에 갈라고.
송이: 웅♥ 좀따 한가하면 카톡할게.
정신차려 보니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도 충분히 즐거웠다. 송이에겐 다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표현하기 힘든 편안함 같은게 있었다. 아마 송이도 나에게 그런 종류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물론, 나의 경우엔 그 편안함이 너무 과했던 탓인지 거의 얹혀 살고 있는 상태이지만.
송이는 여의도의 신용 어쩌고 하는 회사에서 회계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처음엔 경력을 쌓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수완이 좋고 워낙에 일 처리를 잘해 일년도 채 안되서 주임 자리를 꿰찼다. 내 입으로 하긴 좀 뭣한 얘기지만, 정말 대단한 애다. 이런 말을 친구들에게 하면 팔불출이라고 놀려댔지만, 사실인걸 어쩌겠는가. 궂이 나에 비할 것 없이 같은 23살 또래의 애들과 비교해봐도 송이는 자신이 나아갈 길을 확실히 개척하고 있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행여나 비닐봉투에 든 계란이 서로 부딪혀서 깨지진 않을까 조심조심 걸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12시 28분이었다. 오피스텔까지는 10분. 음악 두 세곡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런데 한 절반쯤 걸었을까? 왠지 몸이 나른했다. 벌써 춘곤증인가? 잠이라면 실컷 잤는데. 운동은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하나? 하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집에 거의 도착했을때 쯤, 그러니까 이어폰에서 드뷔시의 '꿈'이 나올때 쯤엔 근육질의 난쟁이가 내 눈꺼풀을 잡고 벤치프레스 라도 하는 것 마냥 졸음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비몽사몽해서 현관 도어락의 비밀번호도 두어번쯤 다르게 눌렀던 것 같다. 문을 열자마자 존이 냐앙- 하고 울었지만, 나는 흔한 대꾸도 하지 않고 비틀 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와 계란이 든 비닐봉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넣은채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버렸다.
이게 도대체 왜이래?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네. 아오 졸려… 안되겠다. 자야겠다. 아 맞다! 계란! 모르고 던져버렸는데… 계란 다깨졌겠네… 계란….
존이 다가와서 또다시 냐앙- 하고 몇번이나 울었지만 울음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나는 점점 깰 수 없을 만큼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무의식의 제일 깊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나락이 질척질척한 진흙을 펼쳐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그 나락의 걸쭉한 진흙 속으로 완전히 침식 되어 버렸다.
-계속
좀비물 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