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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륙조선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진실한사람이여
우리 태조太祖는 여기에서 왕업을 창시하여 뒤에 계통을 물려주었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0월 7일 정유 2번째기사
1395년 명 홍무(洪武) 28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0007_002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새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다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그 경복궁에 대하여 말하였다.
"신이 살펴보건대, 궁궐이란 것은 임금이 정사하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신민(臣民)들이 다 조성(造成)한 바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성을 보이게 하고, 그 명칭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감동되게 하여야 합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래로 궁전의 이름을 혹 그대로 하기도 하고, 혹은 개혁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상을 일으키게 한 뜻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여 먼저 종묘를 세우고, 다음에 궁궐을 경영하시더니, 다음 해 을미일에는 친히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쓰시고 선대의 왕과 왕후를 신묘(新廟)에서 제향을 올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새 궁궐에서 잔치를 베푸셨으니, 대개 신(神)의 혜택을 넓히시고 뒷사람에게 복록을 주심이옵니다. 술이 세 순배 되어서, 신 정도전에게 분부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하셨으므로, 신이 분부를 받자와 삼가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그러나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말씀드립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하늘과 땅은 만물(萬物)을 봄에 낳게 하여 가을에 결실하게 합니다. 성인이 만백성에게 인(仁)으로써 살리고 의(義)로써 만드시니, 성인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므로 그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천지의 운행(運行)을 근본하므로, 동쪽의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 소침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여, 전하께서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 정령을 밝히게 한 것입니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노리갯감으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편안히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신실하게 한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84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경복궁의 대내에 화재가 나다
명종실록 15권, 명종 8년 9월 14일 정사 1번째기사
1553년 명 가정(嘉靖) 32년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09014_001
경복궁의 대내에 화재가 나다
경복궁(景福宮)의 대내(大內)에 불이 났다. 【태조가 즉위한 뒤 3년에 창건한 강녕전(康寧殿)·사정전(思政殿)·흠경각(欽敬閣)이 모두 불타 버렸다. 이 때문에 조종조로부터 전해 오던 진보(珍寶)와 서적 및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고명(誥命)과 복어(服御) 등도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이때 삼전(三殿)이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으므로, 궁인들이 변고를 듣고 달려가서 재물을 꺼내려 하였으나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서책 몇 궤짝만을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있던 작은 배에 내다가 실었을 뿐이었다. 이에 앞서 유성이 동쪽으로부터 서쪽을 향하고 빛이 서울을 환히 비추었으므로 화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이 화재가 있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대내가 모두 불타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혼령을 놀라게 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망극하다.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에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는 일을 예조에 말하라."
【태백산사고본】 11책 1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0책 156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군사-금화(禁火)
경복궁이 완성되다
명종실록 17권, 명종 9년 9월 18일 병진 1번째기사
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909018_001
경복궁이 완성되다
경복궁(景福宮)이 완성되었다. 【지난해 10월에 내장고(內藏庫)에서 불이 나 대내(大內)가 모두 재가 되었다. 조종들이 세운 궁궐이 모두 타버렸는데 올봄에 비로소 다시 짓도록 명하여 이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니, 상께서 독촉했기 때문에 공사가 매우 빠르게 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20책 233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근정전은 곧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열성(列聖)들이 청정(聽政)하던 곳인데, 왜란(倭亂) 때 불탄 이후로 터만 남고 전(殿)은 없어졌다.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1월 1일 기사 1번째기사
1756년 청 건륭(乾隆) 21년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201001_001
대왕 대비전·육상궁·임금 등이 존호를 받다
임금이 존호(尊號)를 받았다. 이날 묘시(卯時)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뭇신하들을 인솔하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여 ‘융화(隆化)’라고 하였다. 임금이 사배(四拜)하고 꿇어앉아 옥책(玉冊)·옥보(玉寶)를 올리고 치사(致詞)·진전(進箋)을 마치자 또 사배하고 나왔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을 받들어 칠순을 축하하니, 실로 드물게 있는 경사이다. 영어(囹圄)를 활짝 열라."
하였다. 드디어 태묘(太廟)에 배알하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시호를 더 올렸는데, ‘휘덕(徽德)’이라 하였다. 임금이 재배(再拜)하고 꿇어앉아 죽책(竹冊)·은보(銀寶)를 올렸다. 먼저 관천(祼薦)을 행하고 이어 삼헌례(三獻禮)를 행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근정전(勤政殿)의 옛터로 거둥했는데, 근정전은 곧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열성(列聖)들이 청정(聽政)하던 곳인데, 왜란(倭亂) 때 불탄 이후로 터만 남고 전(殿)은 없어졌다. 임금이 중관(中官)에게 궤장(几杖)을 받들고 전도(前導)하라고 명했는데, 막차(幕次)를 설치하고 나아갔다. 이에 뭇신하들이 전하의 휘호를 가상(加上)하여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라 하고 중궁전(中宮殿)의 휘호는 ‘강선(康宣)’이라 하였다. 옥책(玉冊)·옥보(玉寶)를 의식대로 올리고,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리고 죄를 입은 조신(朝臣)을 서용(敍用)하여 하반(賀班)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난가(鑾駕)를 길가에 멈추고 영어(囹圄)의 죄수를 불러 위유(慰諭)하여 석방해 보냈다. 또 이달 15일 이전까지 제사(諸司)에서는 금패(禁牌)001) 를 내지 말라 명하고, 조신(朝臣)으로서 70세 이상인 사람과 사서인(士庶人)으로서 80세 이상인 사람을 모두 가자(加資)하게 하였으니, 대개 추은(推恩)한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0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왕실-비빈(妃嬪)
[註 001] 금패(禁牌) : 금제 사항(禁制事項)의 위범(違犯)을 단속하기 위하여 나가는 관리에게 증표(證票)로 주어 휴대하게 하는 목패(木牌). 금란패(禁亂牌).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 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했다.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4월 2일 병인 1번째기사
1865년 청 동치(同治) 4년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204002_001
대왕대비가 경복궁을 중건할 것을 명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경복궁(景福宮)은 우리 왕조에서 수도를 세울 때 맨 처음으로 지은 정궁(正宮)이다. 규모가 바르고 크며 위치가 정제하고 엄숙한 것을 통하여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우러러 볼 수 있거니와 정령(政令)과 시책이 다 바른 것에서 나와 팔도의 백성들이 하나같이 복을 받은 것도 이 궁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란에 의하여 불타버리고 난 다음에 미처 다시 짓지 못한 관계로 오랫동안 뜻있는 선비들의 개탄을 자아내었다.
지금 정부(政府)의 중수(重修)로 인하여 왕조가 번창하던 시기에 백성들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훌륭한 신하들도 많이 등용되었던 것을 늘 생각하면 사모하는 동시에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돌이켜보면, 익종(翼宗)께서 정사를 대리하면서도 여러 번 옛 대궐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개연히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고, 헌종(憲宗)께서도 그 뜻을 이어 여러 번 공사를 하려다가 역시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마치 오늘을 기다리느라고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주상은 왕위에 오르기 이전부터 옛터로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조종조(祖宗朝)께서 이 궁전을 사용하던 그 당시의 태평한 모습을 그리면서 왜 지금은 옛날처럼 못 되는가 하고 때없이 한탄한다. 이것은 비단 조상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성의(聖意)일 뿐만 아니라 넓고도 큰 도량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의 복이며 국운의 무궁할 터전도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내 마음은 경사와 행복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 궁전을 다시 지어 중흥의 큰 업적을 이루려면 여러 대신들과 함께 타산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내일 음식을 내린 다음에도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은 머물러서 기다리라."
하였다.
【원본】 6책 2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82면
【분류】건설-토목(土木) / 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우리 태조(太祖)는 여기에서 왕업을 창시하여 뒤에 계통을 물려주었고...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11월 17일 병인 1번째기사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411017_001
대신, 종정경, 유신, 규장각 관리들을 소견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종정경(宗正卿), 규장각(奎章閣)의 관리, 유신(儒臣)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궁전을 중수하고 자리에 나가 축하를 받으며 선왕의 계책에 따라 성대한 위업을 이어받아 300년 동안 미처 겨를이 없어 하지 못한 훌륭한 전례(典禮)를 빨리 거행함으로써 나라를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고 능히 억조나 되는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축원하는 정성에 부합되게 하여 환성과 화기가 모든 지역에 넘쳐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천만 번에 한 번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찬송하고 경축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 전각의 현판 이름은 바로 근정(勤政)입니다. 역대 성인들이 서로 전해온 심법(心法)이 여기에 있고, 만대토록 태평하게 다스리는 방도가 여기에 있어서 하(夏) 나라 우왕(禹王)의 근면에 부합되게 하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무일(無逸)에 힘쓰게 하여 다스리는 방법과 각종 명령이 일에 나타나는 것이 곧 정사입니다. 정사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말이 이것입니다.
온 나라 모든 백성들이 믿고 살아나가는 까닭은 바로 대궐에서 어진 마음으로 정사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에 있어 동작 하나하나에 하늘이 보고 듣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백성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따라야 하며, 만 리를 보는 것을 바로 섬돌 앞을 보는 것처럼 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린 아이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역을 덜어주고 조세를 박하게 하며, 거덜이 난 것을 추켜세우고 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정사를 조석으로 시행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힘쓴다면, 상서로운 기운이 가만히 돌고 온갖 복들이 길이 이어질 것이니 이것이 주나라 왕조가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한 초기에 소공(召公)이 백성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영명(永命)을 비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이 말을 올리는 것이니 성명(聖明)께서는 힘쓰소서."
하니, 봉조하(奉朝賀)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이 대궐을 중건(重建)하는 것은 30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인데, 이제 공사가 거의 완공되어 정전(正殿)에 나가 조하(朝賀)를 받는 데 이르렀으니, 신하와 백성들이 경사로 여기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어 삼가 생각건대, 역대 임금들이 이 대궐에 임어하여 훌륭한 위업을 이어나가면서 태평세월을 거듭 빛냄으로써 다스리는 방법과 정사하는 계책이 삼대(三代) 때와 맞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이 전각을 다시 일신한 것은 바로 옛날의 융성하던 때와 같은 것입니다. 다스리는 방법과 정사하는 계책 또한 응당 역대 임금들의 훌륭한 덕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며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체현하여 어떤 일에 있어 내리는 정령(政令) 하나하나에 매번 그들을 흠모하는 뜻으로 선대의 위업을 계승하여 나가는 일을 더욱 나타내어야 그들의 뒤를 잘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칭송하고 축하하던 끝에 감히 이것을 진술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이 대궐은 바로 우리 태조가 왕조를 세운 터로서, 중엽 이후로 보수할 겨를도 없이 300년 동안 내려온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성상(聖上)께서 어린 나이에 대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에 정신을 가다듬어 치화(治化)를 도모하시면서 개연히 선대의 뜻을 이어나갈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점을 쳐서 결단하니 백성들이 자식처럼 와서 무리를 이루고 건물의 채색이 일신하여짐에 따라 겹 문이 환하게 열려 신기한 빛과 준걸한 기운이 무기를 창고에 넣어두고 학문을 닦는 초기와 같이 엄연하니 아름답고도 훌륭합니다.
근정전(勤政殿)의 정전은 성인이 왕위에 오르는 곳입니다. 그러니 동작 하나하나가 공명정대한 것은 모두 전하의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만 가지 교화에 근본하고 만 가지 일에 응하는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이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고, 어진 마음으로 정사를 하여 편안히 지내지 말고 태만하지 않으며 옛 규례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임금의 자리에 나가서 명예를 돌아다보고 의리를 생각하여 왕업을 창시하고 계통을 물려준 그 훌륭한 덕과 큰 위업을 이어나간다면 3대에 걸쳐 태평세월을 누리는 것은 팔짱을 높이 끼고 오게 할 수 있고, 복이 많고 경사가 많으며 자손들이 능히 번창하여 억만년토록 뻗어갈 것을 오늘날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반경(盤庚)과 광무(光武)는 모두 나라를 중흥(中興)시킨 훌륭한 공적이 있지만, 은(殷) 나라 땅에 옮겨가서는 미처 경읍(耿邑)에 다시 살지 못하였고,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는 미앙궁(未央宮)을 지을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옛 것에 나아가 계책을 새롭게 하여 그 혁혁한 성과가 온 나라에 가득 찼으니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수도를 정하던 초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태조(太祖)는 여기에서 왕업을 창시하여 뒤에 계통을 물려주었고, 우리의 역대 조상들과 12명의 성인들도 여기에서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융성하게 하였으니, 성명(聖明)께서 조상을 본받아 오래도록 그 법을 이어나가는 복을 크게 열어 놓는다면, 이른바 백대가 지나도 백대가 똑같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이르기를, ‘오직 공손하게 폐백을 바쳐서 임금이 하늘에 영명(永命)을 비는 데 이바지합니다.’ 하였으니, 신이 이에 대하여 어떻게 능히 관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이것으로 훌륭한 왕조를 위하여 칭송하고 축원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큰 것을 도모하는 위업을 어루만지고,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천명을 새롭게 하는 터전을 만들어 이미 완공된 정전(正殿)에 앉아서 축하를 받고, 276년 뒤에 큰 절차와 훌륭한 의식을 가짐으로써 하늘과 사람들이 다 같이 믿고 따르며 조상들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상서로운 좋은 기운이 다 같이 모여들고 착한 칭송이 서로 등귀하여 춤추고 환호하는 정성이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으로 되고 있으니, 보잘것없는 신의 마음에도 감격하여 축하하게 됩니다.
대체로 이 궁전으로 말하면 사실 우리 성조(聖朝)들이 밝게 향도하고 정사를 하던 곳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명령을 내려 정사를 베풀고 바로 여기에서 훌륭한 법과 좋은 규례가 나왔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억만년 무궁한 복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다시 이어서 흥기(興起)시켰으니, 신은 감히 전하께서 앞으로 무엇을 잘하여 선대 임금들의 눈에 들게 할 수 있고, 또한 앞으로 무엇을 베풀어서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보답할지 모르겠습니다.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린 지극한 덕과 중요한 방도는 오직 부지런히 힘쓴 것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전의 이름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쓴다는 ‘근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순(舜)과 같은 성인에게도 태만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고, 위대한 우(禹)와 같은 성인에게도 반드시 부지런히 힘쓴 미덕을 칭송하였습니다. 닭이 울 때 일어나서 부지런히 착한 일을 하고, 한 번 음식을 들 때 열 번이나 일어나 일을 봄으로써 세상을 위하여 수고하였으니 그가 부지런히 힘쓴 것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문왕(文王)은 만백성을 모두 화락하게 해주기 위하여 새벽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음식을 들 경황이 없이 일하였기 때문에, 〈무일(無逸)〉에서 문왕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입정(立政)〉에서 문왕이 편안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무일편(無逸扁)〉은 바로 주공(周公)이 성왕을 경계하기 위해서 쓴 글인데, 여기에서 문왕이 정사를 하는 데 부지런히 힘쓴 것을 서술하였던 것입니다. 소공 또한 밤낮으로 혹시라도 부지런히 힘쓰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봐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덕은 부지런히 힘쓰는 것보다 더 숭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덕이 있는 선대 임금을 길이 생각하고, 하늘이 스스로 굳세게 하는 것을 그치지 않은 것을 체현하여 잠깐 사이라도 이 뜻을 잊지 않고 뜻과 생각을 분발하여 일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유후조(柳厚祚)가 아뢰기를,
"이번에 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한 일은 실로 역대 임금들이 수백 년 동안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도 우리 전하는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선대 임금이 구상하였던 일을 독실하게 이어받아 나라를 다시 높이고 정전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좋은 날을 잡아서 임어하여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니, 온 나라가 경사로 기뻐하고 온 뜰에 춤판이 벌어졌습니다. 억만 년 끝없을 복이 실로 여기에 기초하게 되었으니 구구한 마음이 그지없이 칭송하여 마지않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정전이 완공된 데다 또한 축하까지 받고 보니 현재에 무엇보다 힘쓸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뿐이다. 여러 대신들이 진술한 것이 또 이와 같이 간곡한 만큼 마땅히 한순간이라도 명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본】 8책 4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76면
【분류】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건설-건축(建築)
"반경(盤庚)과 광무(光武)는 모두 나라를 중흥(中興)시킨 훌륭한 공적이 있지만, 은(殷) 나라 땅에 옮겨가서는 미처 경읍(耿邑)에 다시 살지 못하였고,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는 미앙궁(未央宮)을 지을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옛 것에 나아가 계책을 새롭게 하여 그 혁혁한 성과가 온 나라에 가득 찼으니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수도를 정하던 초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盤庚、光武俱有中興盛烈, 而遷于殷, 未復耿邑之居, 都于洛, 不遑未央之治。 我殿下就其舊而新其謀, 赫赫爲四方之極, 其與宅師定鼎之初, 奚異之有哉?
우리 태조(太祖)는 여기에서 왕업을 창시하여 뒤에 계통을 물려주었고, 우리의 역대 조상들과 12명의 성인들도 여기에서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융성하게 하였으니, 성명(聖明)께서 조상을 본받아 오래도록 그 법을 이어나가는 복을 크게 열어 놓는다면, 이른바 백대가 지나도 백대가 똑같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我太祖創業垂統於此, 我列祖、十二聖制禮樂持盈成於此。 惟聖明動法祖宗, 於千萬年, 誕啓繼繩之休, 所謂由百世而等百世也.“
“반경(盤庚)
중국 상나라의 제19대 왕(재위 ? ~ ?).
성은 자(子)이며, 이름은 반경(盤庚/般庚)이다. 반경이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의 천간(天干)이 경일(庚日)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중국 상(商)나라의 제16대 왕인 조정(祖丁)의 아들이자 제18대 왕인 양갑(陽甲)의 동생이며, 제20대와 제21대 왕인 소신(小辛)과 소을(小乙)의 형이다.반경은 형인 양갑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반경은 탕왕(湯王) 때의 도읍인 박(亳)으로 다시 천도를 하고,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다. 상나라는 제10대 왕인 중정(中丁) 때에 오(隞)로 천도한 뒤에 제12대 왕인 하단갑(河亶甲)과 제13대 왕인 조을(祖乙) 때에 상(相)과 경(耿)으로 잇달아 도읍을 옮겼다. 그러다 반경 때에 다시 황허 남쪽의 박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한 것이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를 했기 때문에 상나라 백성들은 걱정과 원망을 하며 천도에 반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반경이 제후와 대신들에게 탕왕의 정치를 본받아야 한다고 설득해 천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반경은 도읍인 박(亳)을 다시 정돈하고 그곳을 '은(殷)'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오늘날 상나라 시대의 유적지인 은허(殷墟)가 발견된 곳으로 상나라를 '은나라'로도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사기》 ‘은본기’에는 반경이 탕왕의 정치를 시행해 상나라를 부흥시켰으며, 그가 탕왕의 덕정(德政)을 준수하자 제후들이 다시 입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따르면, 반경은 2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동생인 소신(小辛)이 왕위를 이었는데, 소신의 재위기간에 상나라는 다시 쇠퇴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반경을 기리며 3편으로 된 〈반경(盤庚)〉이라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반경〉은 《서경(書經)》의 ‘상서(商書)’에 전해지는데, 반경의 정치에 대해서 “옛 일을 전범으로 삼아 법도를 바로잡았다(以常舊服 正法度)”고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반경 [盤庚] (두산백과)
(네이버 한자사전)
“유수(劉秀)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전한 효경제(孝景帝)의 자손으로 신하의 지위에 내려 있다가 왕망(王莽)이 찬탈한 한(漢) 나라를 도로 찾아 중흥시켰음. 후한의 초대 황제로 세조(世祖)라고도 함.
王業中興似漢劉 況今經濟有伊周(왕업중흥사한유 황금경제유이주 ; 왕업이 중흥하여 후한의 유씨 같은데, 나라 정사 다스릴 이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있어라.)<유숙柳淑 차운증박의중장원문생次韻贈朴宜中壯元門生>“
[네이버 지식백과] 유수 [劉秀] (한시어사전, 2007. 7. 9., 국학자료원)
“후한 광무제
한 세조 광무황제 유수(漢 世祖 光武皇帝 劉秀, 기원전 6년 ~ 57년)는 중국 후한 황조의 초대 황제로, 아명은 호(呼)며[1] 자는 문숙(文叔)이며 남양군 채양현(蔡陽縣) 사람이다. 전한의 초대 황제 고제의 9세손으로, 신나라 말기의 혼란을 통일하고 한 왕조의 재흥으로서 후한 왕조를 선포하였다.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광(光)」, 화란을 평정하였다는 뜻에서 「무(武)」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다.[2]
-중략-
광무제는 낙양을 첫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한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한 왕조를 화덕(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었다. 또한 중국 통일을 전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조세를 가볍게 줄였으며 군사를 귀농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정책을 통해 왕조의 기초가 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통치 기구를 정비하고 지배 체제를 확립한다(후술).
56년에 연호를 건무중원으로 바꾸고 봉선을 행했으며, 그 이듬해 2월에 낙양의 남궁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하략-
(위키백과-후한광무제)
염립본의 제왕역대도권 중 광무황제 유수 부분
“은(殷)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의 중국 고대의 왕조로, 상(商)이라고도 한다. 전설상의 하(夏) 왕조에 뒤이어 나타나고 주(周) 왕조로 이어졌다. 은 왕조의 문화는 후기 룽산 문화에서 발생하였다고 여겨진다. 처음에는 군소 국가의 연합체였으나, 뒤에는 강력한 정치 기구가 생겨났다. 안양 현에 도읍한 B.C. 13세기경 뒤에 최고 전성기를 누린 은 왕조는 청동기 주조 기술, 전차, 왕릉의 구축, 갑골 문자의 사용 등 문화적으로도 최고의 단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세력은 황허 강, 양쯔 강 중 · 하류 전역에 미쳤다고 한다. 제정일치의 정치 형태를 지녔고, 중요한 일은 복점으로 결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 [殷]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상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B%82%98%EB%9D%BC
낙양(洛陽)
중국 허난성[河南省] 서부에 있는 도시.
룽먼석굴뤄양[洛陽] 남쪽 약 14 km 지점.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황허강[黃河]의 지류인 중국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연평균기온 14℃, 연평균강수량 703.9mm이다. 부근 일대는 뤄허강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베이평원[華北平原]과 웨이수이[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요지를 이루었다. 장안(長安:지금의 西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하였다. 그뒤 BC 770년에 주왕조가 현재의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 하였다. 한편 정식명칭은 전한(前漢) 때에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 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뤄양으로 고쳤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493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산시[山西]의 다퉁[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을 헤아렸던 당시의 모습이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기술되어 있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에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뤄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뤄양의 전신이다. 당(唐)나라도 부도로서의 뤄양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도하남부(東都河南府)라고 불렀으나, 수·당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대하여 뤄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었고, 1933년에는 난징[南京] 정부가 이전해 왔던 적도 있다. 1948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오늘날 뤄양은 다시 발전하여, 정저우와 더불어 허난성의 2대 공업도시가 되었다. 중국 최대의 트랙터공장을 비롯하여, 베어링·유리·화학비료 등의 공장이 입지하고, 대규모의 면방직 콤비나트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부근에는 석탄 및 기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또 대도시 중에서는 싼먼샤[三門峽]댐의 수력전기를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한편, 미사일·항공기지 등이 있어서 군사적으로도 크게 중요시된다. 부근 농촌에서는 밀·옥수수·콩·목화 등의 농산물을 산출하며, 특히 무단화[牡丹花]가 유명하다. 룽하이철도[連雲港~蘭州]와 쟈오즈철도[焦枝鐵道:焦作∼枝城]의 교차점이며, 310·207국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고, 민항(民航)도 통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바이마사[白馬寺]·중국 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이밖에 톈진교[天津橋]·관린[關林]·뤄양구무[洛陽古墓]박물관·무단[牡丹]공원·백거이묘(白居易墓) 등 명승지가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뤄양 [Luoyang, 洛陽(낙양), 洛阳] (두산백과)
낙양(洛陽)
미앙궁(未央宮, Weiyanggeong)
한대[漢代]의 궁전으로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쪽에 있었음.
(네이버 검색-문화원형 용어사전)
“한시대의 도성 및 궁전건축(漢-都城-宮殿建築)
한(漢)시대는 전한(前漢)시대(B.C. 206~A.D. 8)와 후한(後漢)시대(A.D. 25~220)로 이루어지며 그 중간 15년 동안은 왕망(王莽)이 지배하였던 신(A.D. 9~23)나라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시대는 두 시대로 나누어서 B.C. 2세기~B.C. 1세기를 전한시대, A.D. 1세기~3세기 초까지를 후한시대로 생각하게 되며, 또한 전한의 수도는 창안[長安(장안)]이었고, 후한의 수도는 뤄양[洛陽(낙양)]이었으므로, 전한을 서한(西漢)이라 칭하고 후한을 동한(東漢)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시대에 중국의 국력은 더 많이 발전하였으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유럽으로 통하는 육지의 도로들을 사용하고 광둥[廣東(광동)]을 기점으로 하는 바다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방세계와 경제·문화의 교류가 증진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방문물의 영향을 받아 중국문화가 새로운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인도의 불교가 A.D. 1세기부터 중국에 전래하였다. 목구조를 주로 하는 중국의 건축구조 체계가 이 때 형성되었으며, 당시 상당히 앞서 있던 중국 건축문화는 한국·일본·인도차이나 반도 각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의 고조(高祖)는 처음에 뤄양을 수도로 삼았으나, 얼마 후 B.C. 200년에는 서쪽에 있는 창안을 수도로 정하였다. 한의 장안성(長安城)은 현재 산시성[陝西省(섬서성)] 시안시[西安市(서안시)]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진(秦)나라의 이궁(離宮)이었던 흥락궁(興樂宮) 자리에 만든 장락궁(長樂宮)과 미앙궁(未央宮)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그 도성의 평면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형상으로 되었고, 남쪽은 남두성 형상으로 굴절되어 있는 까닭에 두성(斗城)이라고 속칭되었다.
장안성의 성곽 길이는 동측벽이 5,940m, 서측벽이 4,550m이며, 굴절된 남쪽과 북쪽의 성벽길이는 각각 6,250m와 5,950m이고, 전체 연장된 성벽의 길이가 25.1㎞에 이르는 큰 도성이었다. 성벽 사방에 각각 3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발굴조사에 의하면 각문마다 3개의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성문지에서는 전(塼)이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성문에는 아치 구조가 없었다고 추측된다. 문 입구의 양측벽면은 판축공법으로 만들었고, 문의 중앙통로 폭은 7.7m, 좌우의 통로 폭은 8.1m, 중간 벽의 폭은 4.2m이었으며 입구 양측에는 초석(礎石)이 있었다.1) 한 장안성은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 장인국영조(匠人國營條)에 따라서 계획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漢)시대의 창안청지[長安城址(장안성지)] 평면도
전한 말기부터 왕망에 의한 신이 들어선 때는 혼란한 시기여서, 장안성은 황폐하게 되고, 후한시대는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허난성[河南省(하남성)] 뤄양시[洛陽市(낙양시)] 동남쪽에 남아 있는 낙양성(洛陽城)은 망산[邙山(망산)] 밑에 축성되었으며, 남북의 길이가 9리, 동서의 길이가 6리이었음으로 속칭 구륙성(九六城)이라 하였다. 이 때의 낙양성은 주(周)시대의 성주(成周)를 확장한 것으로 성곽의 평면은 굴곡 있는 장방형으로 서북쪽 끝에는 후에 위(魏)시대에 만든 금용성(金墉城)이 돌출되어 있었다. 길이 3.8㎞의 서쪽 성벽은 직선에 가깝고, 동쪽 성벽은 굴곡이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3.9㎞이다. 남쪽 성벽은 뤄허[洛河(낙하)]에 인접되어 수몰하여서 그 자리가 분명하지 않지만, 직선거리 약 2.6㎞이며 성곽 주위 전체 길이는 약 12.8㎞이다.2)
한(漢)·위(魏)시대의 낙양성(洛陽城) 평면도
장안성의 처음 궁전이었던 장락궁은 진시대의 궁전을 수복하여 사용해서 그 규모가 적었으므로 한나라의 고조는 성 내부 서남쪽에 규모가 큰 미앙궁을 B.C. 200년에 새로 건설하였다. 미앙궁의 건물배치는 남북을 주축으로 하여 주요건물인 전전을 남향으로 만들고 정문은 북향으로 세웠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대전(台殿)이 43, 지(池) 13, 산 6이라고 기록되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cid=51209&docId=2271441&categoryId=51209
서안 미앙궁-장락궁 위치
낙양성(洛陽城) 위치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반경(盤庚)과 광무(光武)는 모두 나라를 중흥(中興)시킨 훌륭한 공적이 있지만,
반경은 은(殷) 나라 땅에 옮겨가서는 미처 경읍(耿邑)에 다시 살지 못하였고, 광무는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는 미앙궁(未央宮) 같이 대규모 궁전을 짓기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우리 태조(太祖)는 여기에서 왕업을 창시하여 뒤에 계통을 물려주었다”
태조임금님은 반경(盤庚)과 같이 천도(遷都)를 하고도 수도(首都)에 다시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수도에서 계속 살았고,
광무는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도 미앙궁 같이 큰 궁궐을 짓지 못했으나 태조임금님은 미앙궁 같은 큰 궁궐인 경복궁을 지어서 살았다는 말이 아닌가?
낙양(洛陽) 일대가 한양(漢陽) 지역이었고, 경복궁은 미앙궁과 같이 대규모의 궁성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것 아닌가?
낙양의 위치
낙양(洛陽) 주변에 있는 대규모 궁성을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찾아보고,
한양(漢陽)의 위치를 추정해 보았다!
숭산(崇山) 남쪽에 남아있는 궁전터로 보이는 자리
숭산(崇山) 동쪽에 있는 궁전
숭산(崇山) 서쪽에 있는 소림사(少林寺)
그런데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고...
http://cafe.daum.net/warong84/HzOs/80
“정조실록 52권, 정조 23년 12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http://sillok.history.go.kr/id/kva_12312021_002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상차하여 《흥왕조승》 4편을 올리다“
“조선은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고,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箕子)께서 동쪽으로 건너 왔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뉘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 그 사상으로 말하면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반반을 차지했고 그 풍속으로 말하면 화융(華戎)의 것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자질을 갖추고 천년에 한 번 있을 운세를 당하여 남쪽 지방과 북쪽 지방을 정벌하심으로써 삽시간에 삼한을 통일하였다.
Map of Shang Dynasty from Bamboo Annals
이에 유구(琉球)에서 조공(朝貢)을 바쳐 오고 섬라(暹羅)-태국에서 귀순해 오는가 하면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족속들까지도 서로 이끌고 와서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서쪽으로는 발해(渤澥)와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를 다 차지하였으며, 귤과 유자 같은 과실이나 담비와 표범 같은 희귀한 가죽들도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잇따라 실려오곤 하였다. 어염(魚鹽)의 풍족함이 오(吳)나라나 초(楚)나라와 겨룰 만하였고 견사(繭絲)의 이로움도 제(齊)나라나 노(魯)나라에 뒤지지 않았다.
동방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동쪽이었다!“
낙양(洛陽)-한양(漢陽)과 은(殷)나라 도읍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
안양현(安陽縣)에 있는 태극(太極)
낙양(洛陽)-한양(漢陽)과 안양(安陽)
서울과 안양(安養)
안양(安陽)은 한양(漢陽)의 북서쪽으로 243Km이고!
안양(安養)은 서울의 남쪽으로 19Km이다!
한반도 조선은 대륙 조선의 약 1/12 축소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