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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의 구제(3)
행 11:19-30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설 교 >
건강한 교회란 REM이 있는 교회
행 11장 19~24절, 13:1~3 / 조상호목사
지난 8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돈이 많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신 주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에게 성전을 주셨기에 우리가 여기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또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240~250명이 모일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100명도 모일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에 이렇게 수많은 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또 어떻게 2001년도 1월 첫째 주부터 지난주까지 7개월 동안 150여명 이상의 교우들이 새롭게 등록할 수 있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축복하심의 결과인줄로 믿습니다. 또 주일예배에서, 새가족 모임에서, 특별행사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믿습니다. 인간의 언변으로는 단 한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데, 주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많은 심령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아니 작년 8월부터 오늘까지 지난 1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며 그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담임목사인 저 개인적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임해 온 후 3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자명종 시계 때문에 새벽기도에 30분에서 1시간씩 서너차례 늦은 적이 있고, 출타 등의 문제로 새벽기도에 빠진 적은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하여 단 하루도 강단을 비우지 않고 이렇게 강단에 서게 된 것 또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흔한 몸살 감기 한번도 걸리지 않고, 과거 그렇게 자주 걸리던 소화불량 한번 걸리지 않고 새벽을 기도로 열게 하신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초능력자라도 3년 동안 새벽을 기도로 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까지 달려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말씀만 들고 강단에 서면 힘이 생겼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저에게 과분하리만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성도님들을 모시고 목회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언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시간 <감사해요 주님의 사랑> 찬양을 드리면서 주님께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주님의 사랑, 감사해요. 주님의 은혜, 목소리 높여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요. 나의 전부이신 나의 주님”
저는 오늘 본 교회 창립 8주년을 맞이하여 <건강한 교회는 REM이 있는 교회>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많이 들었던 ‘개미와 배짱이’라는 이솝우화입니다. 원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개미는 1년 내내 열심히 일해서 겨울에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베짱이는 여름 내내 기타 치고 놀다가 겨울에 개미에게 와서 구걸하며 빌어먹고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즉 기회가 주어질 때,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개미와 베짱이 1탄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겨울에 먹을 양식을 쌓아두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베짱이는 여름 내내 기타 치며 놀았습니다. 여기까지는 1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개미는 너무 열심히 일한 결과, 가을에 신경통, 류머티스, 관절염, 허리 디스크, 스트레스에 걸려 죽은 반면, 여름 내내 기타 치며 놀던 베짱이는 가을에 신곡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대히트를 해서 겨울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신판 개미와 베짱이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헷갈립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죽고, 기타 치고 펑펑 놀던 사람은 잘 산다니, 세상에 그런 모순이 또 어디 있느냐?” 고 질문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변화된 현대사회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가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기준은 옛날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힘쓰고 땀을 흘릴 때에만, 일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체노동만이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삽이나 괭이를 들고 있지는 않지만, 사무실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메고 책상 앞에 펜을 들고 있어도, 컴퓨터 앞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일한다고 말합니다. 육체 노동뿐 아니라, 정신 노동도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노동의 개념이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창작노동이라는 개념도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르며 춤추러 다니면, 양아치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창작 활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신판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베짱이는 놀고먹은 것이 아닙니다. 베짱이는 기타 치고 놀고 있었던 게 아니라,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짱이는 열심히 기타 연습하고 노래연습을 하여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가 생각하던 많은 개념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개념도 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시장에 직접 가서 물건을 만져보고 들어보고 비교해 본 다음, 구입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직접 시장에 가는 대신, 인터넷을 켜놓고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전세계 시장을 방문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가장 싸게 파는 곳을 이 잡듯이 뒤져서 구매하고 전자 결재하여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물건을 받습니다. 물건을 팔고 사는 시장형태가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또 이곳 뉴질랜드에 이주해 오시는 분들의 모습이 변하고 있습니다. 94년부터 96년까지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오실 때만 해도 이주공사를 통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주공사에서 잘 이용하는 모텔만 가면 새롭게 이민오신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을 쉽게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오시는 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오시는 줄 아십니까? 인터넷을 통해서 직접 알아보고, 직접 조사한 후에 이곳으로 이주해 오십니다. 그래서 교회 결정도 옛날과 달리, 아는 사람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습니다. 교파를 보고 무조건 교회를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각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고,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보고, 여러 가지 상황을 알아본 다음, 미리 한국에서부터 교회를 정하고 이곳에 이주해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처럼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큼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세상이 급속도로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섬짓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만약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가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1:24~2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할렐루야! 사람은 변합니다. 검은 머리가 하얀 머리로 변합니다. 절친한 친구관계에서 원수지간으로 변합니다. 제도와 관습도 변합니다. 법도 변합니다. 문화도 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에서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 교회 이름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창립 8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가 닮아가야 할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우리의 모델
안디옥은 당시 수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동방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돈이 몰리던 도시였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돈이 몰리면 죄악이 들어가는 것처럼, 안디옥에도 죄악이 들어갔습니다. 안디옥은 물물교환 장소에서 쾌락 중심의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안디옥은 악한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창녀들과 이교 문화에 빠져 악행을 저지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로마의 무서운 핍박을 피해 유대 땅으로부터 피난 나온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는 주 예수를 전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우리 교회가 선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입니다. 교회가 자랑 할 것은 목사의 이름도 아니고 교회의 이름도 아닙니다. 교회의 시설과 건물은 더 더욱 아닙니다.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 예수‘의 이름과 복음이 선포되어질 때, 영혼이 살아납니다. 생명이 소생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바로 이것이 부흥입니다.
1) Revival
보통 부흥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유명한 부흥사 목사님을 초청하여 행하는 특별 부흥회를 연상합니다만, 부흥이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의 부흥의 의미는 ‘다시 살아난다, 다시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죽었던 자, 죄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듣고 거듭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죄인이 새 생명을 얻는 것이 부흥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역사는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예수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이름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들어가면 속 심령이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지존파도, 온보현도 복음 앞에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사명 1순위가 무엇입니까? 생명 살리는 일입니다. 죽었던 영혼들을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는 왜 예수 이야기만 하느냐고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들을 소개하여 출세의 비결을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또 버르장머리없는 젊은애들에게 윤리나 도덕을 좀 가르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성공과 출세, 도덕과 윤리 교육이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생명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우선순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을 합니다.
이런 우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대장장이가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시다발이 조수에게 말 발굽에 다는 말편자 하나를 건네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것과 똑같은 것을 100개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드디어 대장장이가 돌아왔을 때 시다발이 조수는 100개의 말편자를 모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00개의 모양이 다 달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시다말이 조수가 첫 번째 말편자를 만들 때는 주인이 주고 간 원형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으나 두 번째 말편자부터는 처음의 원형이 아닌 자신이 바로 전에 만든 말편자를 참조하여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째, 네 번째, 나중에는 100개를 반복해서 만들다 보니 원형과는 전혀 다른 말편자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원형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는 우화입니다.
현대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원형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붙들고 있던 많은 가치들이 지금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던 선배의 모습을 보고 배우기 때문에 자꾸 자꾸 원형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서 이곳이 성공 세미나하는 곳인지, 창업 세미나하는 곳인지, 윤리수업시간인지, 부부상담학교인지, 도대체가 분간할 수 없게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입니까? Rivival, 즉 영혼 구원인줄 믿습니다. 생명 살리는 것이 건강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인줄 믿습니다.
2) Education
둘째로 건강한 교회는 교육과 훈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두 번째 존재 목적은 교육과 훈련에 있습니다. 본문 22절과 23절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안디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으로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부흥만 있었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부흥과 함께 교육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 사도가 가서 성도들을 ‘주님께 굳게 붙어 있으라’고 말씀 교육을 하고 제자 훈련을 시켰습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은 2000년 전의 예수님 사역 현장에, 그리고 초대교회에 이미 있었습니다. 또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귀한 사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19~2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니 저와 여러분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세상사람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이끈 후 그들을 제자 삼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말씀으로 훈련하고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공부와 제자훈련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사역자가 되기 이전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평신도도 누구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나는 더 이상 훈련이 필요 없어요’라고 말한다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교회에서 왜 훈련하라고 하셨습니까? 재롱둥이나 웅석받이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당당한 십자가 군병들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과 대적하는 주님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삼일교회 전병욱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는 징징 짜는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주는 탁아소가 아니라, 세상과 싸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적하는 주의 강한 군대를 배출하는 훈련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두 번째 존재 목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아 당당한 주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선교단체와 청소년, 청년사역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20년 넘게 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수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새가족모임과 개인양육과정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통하여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새가족 모임을 통해서 제 자신이 얼마나 훈련을 많이 받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34기를 마치었습니다. 저는 새가족 모임 교재를 달달 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지기는커녕, 새가족모임을 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 앞에 매번 감격합니다. 새가족 모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개인양육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재를 거의 외우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이러한 교육과 훈련과정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힘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새가족 모임을 마치지 않으신 분들은 지원하셔서 이수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양육과정을 마치지 않으신 분들도 지원하셔서 이수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김기동집사님의 말씀대로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건강한 교회는 Education, 즉 교육과 훈련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주의 강한 용사들이 배출되는 줄로 믿습니다.
3) Mission
셋째로 건강한 교회는 선교가 있습니다. 본문 (13:1~3)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에는 복음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말씀으로 교육하고 훈련하였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선교사까지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 종종 비교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을 처음으로 받은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증거에 능동적이지 못했습니다. 현실만족에 빠졌습니다. 꼭 현대교회처럼 많이 모이고 있다고 성도수 자랑하는 것처럼 ‘이대로가 좋사오니 이곳에서 주님만 예배하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독야청청 제자리에 안주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행8: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무서운 핍박을 일으켜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사방팔방 흩어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이대로가 좋사오니 아무 곳에도 보내지 마시고 이곳에서 편안하게 있게 해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릴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을 맛본 성도가 세상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제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의 흩으시는 작전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모교회와 달랐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복음 들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리아와 소아시아와, 나중에는 마게도니아, 로마에까지 복음으로 차례차례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세상의 권력자들이 그렇게 막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구제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정치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복음전도와 말씀 증거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을 지경을 넓히는 일이요, 마귀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 교회에 할 일도 많은데 무슨 놈의 선교냐? 아직도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는데, 무슨 일본을 가고 남태평양을 간다고 난리 법석을 떠느냐, 그리고 좀 더 구제와 사회사업에 힘을 쓰면 좋겠다.” 사탄은 우리들을 자꾸 제자리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말씀을 증거하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말씀은 뒤로 한 채 이벤트나 행사가 앞으로 나오면 교회는 망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과부들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사도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2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또 4절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증거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곁가지에 신경 쓰지 아니하고 복음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젖가락 가지고 고무마를 찌르듯이 예수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딤후4:2).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있는 거위가 어느 날 알을 하나 낳았는데 황금 알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어쩌다 무엇이 잘못되어서 그랬겠지 하고 있는데 그 다음 날도 또 황금 알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진짜 황금 알인가 살펴보았더니 틀림없는 황금 알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황금 알을 낳았습니다. 노부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부부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거위를 잡아 배를 가르면 황금 알이 그 속에서 수십개, 수백개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거위의 배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홤금 알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위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거위에게 먹이를 주고 거위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주고 계속적으로 사랑의 손길로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노부부는 계속해서 황금 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건강하면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REM입니다. Revival, Education, Mission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라도 빠뜨려서 안됩니다. 이제 교회 창립 8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REM의 정신을 가지고, REM의 Spirit을 가지고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생명 살리는 Revival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살아난 생명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Education을 통해 주님의 용사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으로 가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명령이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향력이 큰 사람
행 11장 19~24절 / 문기태목사
세계는 리더십의 부재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경기의 장기불황으로 아로요 대통령이 사임을 촉구하는 데모가 연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태국은 인기가 높던 탁신 총리에 대한 사임압박을 피하고자 국회를 해산하고 게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평화롭고 발전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잇으나 그렇지 못한 지도자를 만나면 혼란의 연속이며 퇴보하고 모두가 고통스럽습니다.
21세기의 가장 크게 논쟁이 되고 있는 화두는 '리더십은 정확하게 무엇으로 구성되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리더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내는 능력과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리더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여 사람들로 그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리더는 한 마디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좋은 리더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의 모델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핍박을 피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로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지도자로 세워 안디옥교회에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자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좋은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교회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그 지역과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까지 바나바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지도력이야말로 탁월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나바라는 인물을 연구함으로 지도력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좋은 영향을 많이 끼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행복하게 섬겨야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영향을 강력하게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나바를 본받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착한 사람
성경은 바나바를 가리켜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착하다는 것은 지도자로써 별로 인정받을만한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착하다는 말을 사람들은 어리석음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순진하기때문에 늘 이용당하고 사기당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여러분 착한 사람이 사업을 잘 합니까? 좀 착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악하여 수완을 잘 부리는 사람이 사업을 성공합니까? 여러분, 착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직장에서 승진을 잘 하여 고위직에 오릅니까? 계략도 펼 줄 알고 거짓말도 적당히 둘러댈 줄 아는 사람이 출세를 합니까?
왠지 우리의 생각에는 착한 사람은 지도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성경은 무엇을 가리켜 착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착한다는 것은 순수함을 뜻합니다. 착하다는 것은 신뢰할수 있을만큼 정직한 인격을 소유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창립멤버로 보여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교회로 밀려왔습니다. 그들중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비교적 부유했던 바나바는 가난한 이들을 보며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순종하여 자신 소유의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바나바는 아주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동기도 순수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사비라도 땅을 팔아 헌금했습니다만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숨겨 놓고 전부 헌금한 것처럼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술수를 쓸 줄 모르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사울이라는 핍박자가 회개하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고 슬슬 피했습니다. 모두들 사울이 언제 돌변하여 성도들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나바가 다가가 외롭게 혼자 신앙생활하던 사울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울을 성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그의 회심이 진실함을 증거했습니다. 바나바가 신뢰할만한 사람이 된 것은 자신이 남을 믿어주는 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믿어주는 착한 마음이 바나바에게는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착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누구와 함께 일을 할꼬?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는 기업들에게 너무나 힘든 시기였습니다. 30대 그룹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1980년 이후 생긴 수십 개 그룹 가운데 두 개의 회사만 살아 남았었습니다. 당시 이랜드라는 회사는 외국인들이 투자를 결정해 살게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은 1차로 5억달러를 들고 왔는데 이랜드 외에는 1년간 투자를 더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랜드의 박성수회장이 외국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회사는 모두 헐값이어서 당신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일 텐데 왜 사지 않고 있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소. 그래서 이미 좋아 보이는 수십 개 회사를 방문해 투자를 하려고 했소. 그러나 조사 결과 모두 장부가 두 개라서 투자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랜드는 장부가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투자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그들이 투자를 결정하면 당장 은행들이 문을 활짝 열어주던 때였습니다. 박성수회장은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 규모의 회사 10개는 살릴 수 있었는데,너무 안타까웠다."
정직하면 언제나 손해를 봅니다. 정직이 요구하는 값은 크기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정직이 옳은 것을 알면서도 손해 보지 않기 위해 그 길을 가지 못합니다. 그 결과 조그만 이익을 봅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정직해야 삽니다. 보통 때는 장부가 두 개이면 더 유리하겠지만 결정적일 때에는 장부가 하나여야 살 수 있습니다. 정직의 값은 큽니다. 그러나 그 값은 지불할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은 요구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세계적인 CEO들에게 물었답니다. 성공의 필수 요건이 무엇입니까? 공통적인 답이 정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 지도력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람, 정직한 사람, 일관성 있는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올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게십니다.
2. 성령이 충만한 사람
그렇지만 착하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찾아보니 어떤 사람은 착하기는 한데 무능하고 어떤 사람은 유능하기는 한데 믿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착한 마음을 소유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능력을 갖춘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각자 그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힘쓰고 남보다 더 노력하여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실력을 갖추어도 우리는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크고 어려워서 역부족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실력을 갖추고 열심히 일을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람을 섬기고 키우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헤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지헤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유능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으면 탁월한 지도자가 됩니다. 요셉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니엘이 또한 그렇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타고난 지도자가 아닙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양 몇 마리와 씨름을 하던 사람, 집안 가족들에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며 동행하는 삶을 살더니 사람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그 어려운 통치의 복판에 서서 위기의 나라를 견고한 반석에 올려 놓았습니다.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신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말씀입니다. 엡5:18절은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명령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술기운이 그를 지배합니다. 술기운 그의 이성을 지배합니다. 그의 판단을 지배합니다. 그의 감정도 지배합니다.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그처럼 성령충만하면 성령님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판단을 지배합니다. 의지를 지배합니다. 감정도 지배합니다. 전에는 자기 생각대로 살았는데 자기 감정을 앞세웠는데 성령충만해지니까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사로잡아 당신의 뜻대로 인도해 가십니다. 바나바는 성령님께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성령께서 은사를 주셔서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게 됩니다. 바나바가 성령의 은사로 일을 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변화되고 주께 헌신하였습니다.
고대의 한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한 노인 수도사가 젊은 사업가에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서는 죽듯이 자네도 세상에 뒤엉키면 파멸케 되네. 고기는 물로 돌아가야 하고 자네는 성령께로 돌아가야 해." 그러자 그 사업가는 아연실색하며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란 말이오? 내가 사업을 통해 성취한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이오?" 그 노인은 다시 말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네. 내가 한 말의 뜻은 사업은 그대로 붙들고 있고 당신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의 사람이고 세상사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늘나라 일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3.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가 영향력이 큰 사람일 수 있었던 또 다른 큰 요인은 그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하였을까요? 바나바가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교회와 사도들에게 소개한 것이 좋은 증거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생각을 바꿨습니다. 만약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울은 쫓겨낫을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사울을 믿어주고 보호해 준 바나바는 진정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광야에 홀로 있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까지 가서 데려와 안디옥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맡겼습니다. 사울의 능력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긴 것입니다. 바나바는 현재의 사람만 본 것이 아니고 장래 이루어질 그 사람의 비전을 믿음의 눈으로 함께 보고 기회를 열어준 사람입니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팀에는 마가라는 청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본래 부유한 집에서 자라나 고생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 마가는 전도 여행중에 고생을 참지 못하고 버가성에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일로 인해 바울의 맘이 몹시 상했습니다. 다음 전도여행때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서는 마가를 보자 바울은 '마가가 함께 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마가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설득하였습니다. 그 일로 바나바와 바울은 갈라섰지만 후에 바나바가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바울은 노년에 쓴 편지에서 '마가는 유익한 젊은이다.'라고 인정했고 다시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사람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그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보호해주는 사람이었으며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확실히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영향력이 누구보다 큰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훌륭하게 이끌었으며 비전을 확산시킨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바나바처럼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회속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착한 성품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충만한 교회
행 11장 19~26절 / 성홍모목사
오늘은 우리 영주교회의 창립 5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지금도 좋은 교회이지만, 앞으로 10년 후에, 20년 후, 50년 후에도 참으로 좋은 교회, 자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지막 시대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본래적인 목적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며, 어려운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창립기념일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자축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본래적인 교회요, 기본에 충실한 교회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교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중에서도 가장 칭찬 듣는 교회로, 가장 자랑스러운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안디옥교회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선교의 중심적인 교회라고 하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세계정신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에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세계 여러 나라로 피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환난이 있은 후에 흩어진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가서 우선 유대인에게 전도하였지만,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인들은 안디옥에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전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였습니다. 베니게란 곳은 페니키아를 말하는데, 현재의 레바논을 말합니다. 두로와 시돈이란 항구도시들이 있는 지역입니다. 구브로란 곳은 지중해 안의 아주 큰 섬나라인 키프로스를 말합니다. 유명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의 안디옥을 말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안디옥이란 이름의 도시들이 있었는데, 성경에는 시리아의 안디옥과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 교회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복음 전파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교회는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이방인들의 접근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해외선교의 열매요, 해외선교의 신기원을 이루었지만 누가, 어떤 사람이 그 일을 시작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왔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들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남의 눈에 알려지기를 바라거나, 감사와 칭찬받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이름이 역사책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안디옥이란 도시는 시리아의 고도였습니다. 이 도시는 “동방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 인구 50만 명이 사는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로마였고, 두 번째로 큰 도시는 북아프리카의 알랙산드리아였으며, 세 번째로 큰 도시는 시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안디옥은 지중해에서 24km 떨어진 곳으로 아름다운 국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우상숭배가 넘쳐나고 있었고, 사치하였고, 환락의 도시였으며, 스포츠와 도박이 성행하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 도시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도시 안디옥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정신이 부족하여 해외 선교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안디옥교회로 하여금 해외선교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교회를 들어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 영주교회는 선교의 중심지가 되어야겠습니다.
21절 말씀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주의 능력 있는 손이 복음 전도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주님의 손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나라마다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이제 막 복음이 들어가고 선포되는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교회요, 거룩한 교회요 우주적인 교회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하나이어야 합니다. 유대의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하거나 안디옥의 교회가 이질적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와 신앙과 직제와 예전이나 교리적으로 하나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니요, 하나님의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를 파송하여 안디옥교회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신중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복음에 비전을 가진 사람, 복음 전파에 열정을 가진 사람, 한 사람의 지도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 사회를 이해하고, 언어 소통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을 정립한 사람으로, 교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지도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바나바는 아주 적합한 일꾼이었습니다.
사실 안디옥교회에 대한 소식은 소문으로만 아는 정도였습니다. 정식으로 어떤 절차에 의하여 보고된 것이 아니라, 들리는 소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라는 지도자를 파송하여 안디옥교회를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교회와 복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4절에서 바나바의 인격과 신앙에 대하여 그를 인정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24절에서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구브로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위로와 권면을 잘하여 “위로의 아들, 예언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근본적으로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착하지 못하고 악하거나 불성실하면 명예나 이윤을 추구하려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마음, 일그러진 마음이라고 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맙니다. 우리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이나 믿음은 찾아볼 수 없고, 지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요, 경험으로만 하겠다고 하면 사람의 소리만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나 능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어야 진정 교회를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바나바가 멀리 안디옥에 왔습니다. 소문대로 교회는 자생적으로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 중심으로 교회가 아니라, 헬라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 위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제 갓 믿는 성도들에게 외쳤습니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중심으로 살고, 예수님을 모신 사람으로 철저한 신앙을 요구하였습니다. 굳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마음, 식어지지 않는 열정, 단단한 결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안 됩니다. 주께 붙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란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이란 떨어지면 죽고, 하나로 연결되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 연합되고, 일치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그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나바는 길리기아주의 수도인 다소에 사는 바울이란 청년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 회심하고는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였지만, 반기는 사람이 없어 고향 다소로 내려가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참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란 사람은 지성과 열정을 겸비하였고, 믿음의 확실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세계선교를 위해서라면 바울을 세워주어야 하고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산다는 것만 알고 어느 동리에 사는 것을 모르고 찾아가서 마침내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의 지도자가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으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디옥교회를 통하여 교회란 모름지기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아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어나는데, 아예 초기에 쓰러뜨리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박해는 멀리 시리아의 수도였던 다메섹까지 미쳤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였고, 배교를 강요하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몇 명만 잡아들이고 죽이면 나사렛 이단, 기독교회는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부활하신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입니다. 세상 나라는 무너지고 소멸된다고 하여도 우리 주님의 몸인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요,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므로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직도 복음화 되지 않았지만,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제는 땅 끝까지 복음은 선포되었고, 교회는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도 우리 자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어는 한 순간도 멈출 수 없고, 중단할 수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전도할 때에 교회입니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남은 과제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저는 선지자 예례미야를 통하여 참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예례미야의 열정, 사도바울의 열정을 본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예례미야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소명의식을 느꼈습니다. 렘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를 선포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미칠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며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전도하는 원종수권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비비안이라는 암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 왔으나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서 수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예수님의 피만이 당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분이 간증하기를 “제가 암에 걸리게 된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약 제가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저는 원종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평생 예수님을 모른 채, 그렇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구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는 2000명 정도의 교인이 모였는데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가족 7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환자 한 사람을 전도함으로 그의 영혼이 구원받고, 그의 온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주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육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하는 사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힘쓴 부분이 있다면 일꾼을 양성하는 일, 사람을 세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일 년 간 함께 있어 큰 무리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교회는 좋은 사역자들, 지도자들을 있었습니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라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5명의 참으로 좋은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성령이 충만하였고,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부름 받은 지도자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합심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힘이 나고 좋은지 모릅니다.
교회란 교육적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을 양성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만 지도자요, 내 시대의 지도자는 오직 나 한 사람으로 족하다는 편협하고 마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시무장로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를 세우고, 권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경공부, 제자훈련, 사역자반 인도자반을 운영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일꾼이 곧 교회요, 곧 선교요, 곧 봉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전도사를 모시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각 부서를 나누고 연령에 맞게 교육하고 일꾼을 활용하였습니다. 유치부를 유아부와 유치부로 나누었습니다. 어린이 교회학교를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로 나누고 있는데, 사실 교육관만 확보된다고 하면 학년별로 나눌 수 있으면 좋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 확보된다면 대학부, 청년부, 젊은 부부반으로 나눌 수 있으면 좋습니다. 교회는 교육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연령과 취미와 신앙정도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소그룹과 공부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육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운명이 달린 문제요, 한 교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교육이란 우리 사회가 누려온 지식과 쌓아온 경험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부지런히 가르치고, 우리도 배우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은 우리 교회만이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진정한 인간교육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시키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때에 나를 알고, 이웃을 알게 됩니다. 교육이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고, 양성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로부터 지탄받지 않고, 인정받는 교회여야 합니다. 이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으로부터 시작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합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익살맞은 별명을 잘 붙이는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후에 로마의 율리안 황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는데, 그가 수염을 기른 것을 보고는 황제라고 하지 않고 염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접미사 “니아노스”라는 말은 어느 당에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었습니다. “헤로디아노스”라고 하면 헤롯당원이란 말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은 크리스토스 당에 속한 자,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족속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멸시하고 조소하는 요소가 배어 있으면서도 철저한 정신과 생활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이 말은 절반은 욕이요, 절반은 익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경멸하는 말이지만, 참으로 자랑스러운 별명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잘 할 때도 있지만, 형편없을 때도 있습니다. 잘 믿으려고 힘쓰고 있는데, 수준이 보잘것없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장로님들은 장로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되고서,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목사의 자격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목사가 되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을 들어 말씀드리면, 장로의 자격이 있어 장로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은혜로 장로가 되었습니다.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에만 머물지 말고, 장로다운 장로님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여러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있지만, 이번에 청년 단기 선교에 가서 보고는 우리 교회의 장로님과 권사님들은 정말 귀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한 분 장로님과 한 분 권사님이 참여하셨는데, 우리 청년들에게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년들과 함께 행동하시면서 땀 흘려 봉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에 청년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는 소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청년들이 섬지방으로 단기 선교 가면서 우리 청년들이 흘린 땀을 모두 모으면 우리 모두를 다 적시고도 남을 것이라고 봅니다. 완도와 소안도, 횡간도의 여러 어려운 성도들과 목사님 사택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도배하고 페인트를 칠해주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집이 아니라, 20여 집을 감당하는데, 그들이 흘린 땀은 참으로 소중하게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섬 내의 9개 교회가 모여 여름 성경학교를 개최하였는데,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운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먼저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수준을 보시고, 하늘나라에 데려가는 것입니까? 여러분, 신앙이란 소속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였다가 이제는 우리 주님에게 속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입니다. 그리스도당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입니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교가 이뤄지는 교회, 교육적인 사명을 다하는 교회, 칭찬받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와 같은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의 복음 사역 이야기
행 11장 19~26절 / 김명혁목사
‘사도 행전’은 ‘성령의 행전’이고 ‘사도들의 행전’이지만 동시에 ‘착한 사람들의 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착한 사람들이었고 일곱 집사들이 착한 사람들이었고 도르가와 고넬료가 착한 사람들이었고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고 디모데와 루디아가 착한 사람들이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한 평생 살아오면서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믿음의 사람도 좋고 성령의 사람도 좋고 능력의 사람도 좋지만 착한 사람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도 좋고 재력이 있는 사람도 좋고 예쁜 사람도 좋지만 결국 착한 사람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착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착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바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돕고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스데반과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행7:55). “형제 사울아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성령으로 충만하기 하신다”(행9:17).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자라”(행11:24). 세 사람은 또한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제의 손길을 펴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고꾸라진 다음부터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본래부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행11:24).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 사람들인 스데반과 바나바와 사울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씨앗의 역할을 했고, 착한 사람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와 기둥의 역할을 했고, 사울은 안디옥 교회를 세우는데 벽과 지붕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인 바나바가 어떻게 착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님과 조상으로부터 착한 성품을 물려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착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은행이나 집으로 가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수 있는 사람은 틀림 없이 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경제적으로 파산에 처했던 어느 여 집사님 한 분이 천만 원이 든 봉투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저에게 달려와서 건축헌금으로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은행이나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사도들에게로 달려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가 착했기 때문에 밭을 팔았을 수도 있고, 밭을 팔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성경은 바나바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또 하면 우리의 세포와 성격이 차츰차츰 바뀌어져서 착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과 시간과 몸에 인색한 사람은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나바는 물질과 시간과 몸에 인색하지 않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착한 사람 바나바가 수행한 복음 사역 세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이 뿌린 순교의 피는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멀리 이방 땅인 안디옥에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안디옥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 의론을 하다가 착한 사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내어 이방인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게 했습니다. 인종과 문화가 다른 이방 사람들을 신앙으로 격려하고 지도하는 데는 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도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을 드려 이방인 새 신자들을 격려하고 지도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착한 마음과 착한 손길을 저들에게 폈을 때 많은 이방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이방인 목회는 진리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마음과 착한 손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제주도는 이방과 같은 곳이었는데 평양 교회가 제주도에 목회자를 파송할 때 마음과 인격이 착한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을 파송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딸 이사례 권사님은 지난 금요일 아침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1908년 2월 달에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렀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완전히 말과 풍속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 아주 큰 홍수가 났습니다.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큰 통나무 가지에 매달려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모든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대열에서 가슴 아픈 광경을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여인을 발견한 즉시 죽음을 각오하고 물에 첨벙 뛰어 들어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여인을 언덕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평양 대동강에서 헤엄쳤던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주민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숨을 죽인 채 도대체 저자가 누구인가를 살폈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아버지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도 자기들이 박해했던 야소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양 귀신을 믿으라는 야소교 목사란 자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거참 대단하군' 이때부터 주민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1908년 4월에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두 달 후에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애기를 낳다가 산모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가서 거의 살아날 소망이 없는 산모를 살리고, 애기를 잘 받아내었습니다. 애기의 배꼽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간 산모의 수발을 해 주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오면 그 산모가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 예수를 믿게 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게일 선교사에게 시체를 처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상갓집에 가서 역시 묵묵히 시체를 잘 닦아내고 옷을 입혀주는 등 여러모로 어려움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 상갓집 식구들 역시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어머니는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웃 사람이 울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주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많이 지어놓고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한 그릇씩 떠서 담아 보냈습니다.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온 나환자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환우들을 더 싫어했지만 어머니가 제일 반가와 하는 손님들은 이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모님! 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황급히 나가서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앉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시자 급히 손을 움직여 밥과 국과 김치를 상에다 받쳐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찾아오는 분은 양손이 없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꼭 밥을 먹여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방인 목회는 진리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마음과 착한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아방인 목회를 착함으로 했고 바나바는 안디옥의 이방인 목회를 착함으로 했습니다. 바나바의 착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물질과 시간과 몸과 관련해서도 착했지만 동역자들과 관련해서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개척 목회를 얼마동안 하다가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사울과 함께 협력 목회를 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5,26).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그 사람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허물 많은 과거가 있는 사람 사울을 귀하게 여겼고 앞에 내 세웠고 그리고 함께 협력했던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 목회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가장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둘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는 이방인 목회 사역뿐 아니라 소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 선교 사역에도 크게 공헌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교제와 예배와 섬김과 금식과 기도가 충만했을 때 성령께서 두 사람을 지목해서 불렀습니다.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13:2). 이방인 선교의 주역은 바나바였고 조역은 사울이었습니다. 물론 후에는 사울이 주역이 되었지만 지금은 바나바가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도 진리로만 되는 것은 압니다. 이방인 선교는 무엇보다 착함으로 됩니다. 5세기 아이랜드 선교의 주역이 패트릭이었는데 그는 착한 사람이었고, 6세기 스코트랜드 선교의 주역이 콜럼바였는데 그도 착한 사람이었으며, 7세기 영국 노덤부리아 선교의 주역이 아이단이었는데 그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콜럼바에 대한 이야기만 간단히 소개합니다. “콜럼바는 불쌍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까지도 자비를 베풀었던 인자한 성품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브루스 교수가 지적한 대로 초기의 오만하고 극렬했던 성격이 깊은 참회와 영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 결국 인자한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다. 콜럼바는 폭풍에 상처를 입은 학을 치료해준 일을 비롯하여 동물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있을 때 말이 찾아와 슬퍼했다고 했다. 그의 인자한 성품 때문에 그를 ‘비둘기’ 즉 콜럼바라 불렀다고 했다. 콜럼바는 596년경 아이오나 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의 이동휘 목사님도 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주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교회의 주 사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이방인 선교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무엇보다 먼저 평양에 어린이 심장병원을 지으려는 것도 바나바의 착함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도와 선교의 방식이 성령과 착함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바나바도 예수님을 따라서 성령과 착함으로 이방인 선교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셋째, 착한 사람 바나바는 고난과 핍박을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편안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스데반의 뒤를 이어 자기의 몸과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면서 고난과 핍박을 기쁨으로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가는 선교의 길에는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들은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13:49-51).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14:1-7).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14:19-21). 나중에 사도 바울은 고난과 핍박을 몸에 짊어지는 고난과 핍박의 사도가 되었는데 바울이 그 길로 가는 데는 바나바의 격려와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바나바와 바울이 걸어갔던 고난과 핍박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이들 주광조 장로님이 지난 금요일 아침 바로 이 자리에서 아버지의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다섯 번째로 연행되어 갈 때는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 예감했던지 할머니에게 큰 절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놨습니다’ 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예배드리려 찾아오셨던 20여명의 교인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
“옥살이 7년. 마침내 욥의 고난과 인내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면회는 1944년 4월 21일 평양 형무소에서였습니다. 면회 직전, 형무 소장은 주목사님을 병보석으로 풀어주겠다고 허락했지만, 간수 등에 업혀 나온 주목사님을 뵌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목사님!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곧 조선교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고난을 이겨내도록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살아서는, 눈 뜨고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이 붉은 벽돌문을 나가지 않을 것이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병감으로 돌아서 가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해방을 1년 4개월 앞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형무소에서 기나긴 7년 여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는데, 그 때 그분의 연세가 48세셨습니다.”
주광조 장로님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으로 양식삼고, 인내로 거처 삼아, 결국 죽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제 아버님이신 주기철목사님이 그러셨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성도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 고난도 십자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오로지 축복과 은혜만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편함이나 인내는 참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에게는 욥의 어떤 고난이나 인내, 신앙을 위한 손해를 감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술은 쉼 없이 부흥을 말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갈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채, 솔로몬의 영광만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부흥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부흥은 곧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일 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가 살아날 때, 그리고 그 고난에 인내할 때 진정한 축복과 부흥의 시작이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 주기철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세월이 어느덧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어제 일 인양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평양 형무소의 묵중한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뵌 푸른 죄수 복에 짧은 머리, 그리고 깊게 패인 아버님의 두 눈은 어느 누구의 눈빛보다도 강렬했고, 아버님의 잔잔한 미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애로우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버님의 믿음과 선택, 그리고 순교를 다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아버님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분명 아버님의 순교는 저와 저희 가정, 그리고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아침 사회를 하면서 이와 같은 주광조 장로님의 고백을 들은 다음 가슴이 꽉 막혀서 도무지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참 만에야 고개를 떨구고 조그만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지금 주기철 목사님 앞에서 통곡을 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손동희 권사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고난은 최고의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이런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됐지만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추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는 이방인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수행했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수행했고, 고난과 핍박을 달게 받는 고난과 핍박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사역을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까? 착함과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착함이 너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8복 설교를 하신 다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바로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라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몸과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크게 축복하십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목회지에서도 그렇고 선교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이고 우리 강변교회와 강남지역에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이 보고 싶은 시대입니다. 바나바 같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한경직 목사님 같은 박윤선 목사님 같은 착한 사람이 보고 싶은 시대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강변교회의 성도들을 모두 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성도의 신분
행 11장 19~26절 / 유영설목사
오늘 평신도주일에 성도의 신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으로 많은 신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때로 신분이 나타내는 의미와 역할과 위상, 사명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성도의 신분이 무엇인지 이것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주일에 “내가 누구냐?”하는 정체성(Identity)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1. 복음전도자들이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안디옥까지 이주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예루살렘의 박해로 교회를 전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이방지역으로 간 사람들이 그 지역 이방인들인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자과 부활로 새 생명을 얻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다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입니다. 이 은혜가 체험되지 않으면 사명감, 열정, 기쁨, 충성, 헌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마 9:36)라고 했습니다. 이 무리들은 병들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불쌍히 여기다’(Compassion)는 것은 상대방의 형편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이 보신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상태였습니다. 현대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은 복음이 필요 없다고 매도, 부정하지만, 방황하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도할까요? 첫째는, 내가 받은 은혜, 주님 만난 삶의 변화와 복음의 능력 체험 등을 간증하는 방법으로 전도해야합니다. 둘째로, 생활로 전도를 해야 합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 이웃, 믿지 않는 가족에게 모범된 삶을 보여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 공동체의 전략적인 전도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연합해서 세상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세상은 정복과 구별의 세상이 아니라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전도현장입니다.
2. 인격과 영성을 겸비한 자
안디옥에서 예상하지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해서 사람들을 지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어떤 일군이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첫째, 그의 성품은 착한 사람입니다. 희랍어로 선을 “아가토스”라고 하는데 본래의 미는 ‘뛰어남’을 뜻하며,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좋은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동양에서는 “선”(善)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볼 때 성도의 신분에서 갖추어야 할 우리의 덕은 무엇을 하던지 뛰어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일은 항상 최상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타율적인 본성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밝은 자아상 속에서 최고의 열매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둘째,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모든 일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통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구원을 확증해야 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했는데 믿음도 성령 안에서 갖게 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 되심과 주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내 죄가 사해졌으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입니다. 이 믿음은 성령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성도의 신분은 범사에 선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됩니다.
3. 그리스도인 된 자입니다.
바나바는 관용이 있고 인자하고 동정적이 사람입니다. 바울을 돕고 존중한 사람이며 자 소유를 팔아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부흥을 바라보고 사역을 혼자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교회,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함께 동역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1년간 함께 일한 결과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사역은 자기의 위대함고 똑똑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사역은 함께 사역하고 나누어서 해야 합니다. 혼자 모든 것을 독점하면 지치거나 교만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 참여하게 하는 열린 의식이 필요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사역이 거둔 열매는 안디옥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그 지역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인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이렇게 안디옥 사람들은 성도들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 인정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예수님께 속한 자라고 여깁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잘되는 나, 형통한 나, 예수님께 속한 나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내가 압니다.”(창 21:22)라고 말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조약을 맺자고 제의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창 26:28)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잘되었다고 간증해야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알게 해야 합니다. 역시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더라.” 이런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이런 성도의 신분을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디옥교회
행 11장 19~26절 / 최응희목사
오늘 우리는 창립30주년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0년 전 8명이 시작했던 교회가 400명의 성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고 조정구 목사님과 구본영 장로님이 500만원씩 1000만원으로 전세를 얻어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기 위해서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기도와 눈물과 헌신이 이 교회 위에 부어졌겠습니까!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열심이었겠지만, 특히 담임목사님이셨던 조정구 목사님께서 얼마나 수고의 땀과 기도의 눈물을 흘리셨겠습니까! 그래도 교회가 잘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잘 성장하여 가던 교회가 다락방의 문제로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으셨는지 조정구 목사님이 병을 얻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건은 다락방 사건과 함께 교회에 큰 혼란과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새로 부임했지만 새로 온 담임목사를 환영하거나 새 결단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기에는 앞선 교회의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목사도 상당히 힘들었고, 교우들도 힘들어했던 것으로 압니다. 이어서 교회 이전 문제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옮기려고 구입했던 교회를 되팔아야 했고, 그 과정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또 이렇게 수서지역으로 교회를 연합해서 옮기는 과정도 복잡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30년의 시간 속에서 거의 15년은 실상 많은 격동의 시간으로 채워져 온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우들이 거의 흔들림 없이 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해 온 것을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웬만했으면 교회가 크게 흔들린 뻔한 여러 큰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우리 교우들이 모두 한결같이 흔들림이 없는 모습으로 굳게 서 왔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안디옥 교회를 지켜온 성도 여러분, 이 자리에 이 역사와 함께 하고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0년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30년의 세월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요, 또 다가오는 30년을 내다보며 그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30년 주님의 시간의 기점에 우리가 있었음을 감사하노라. 여기 하나님 은혜로 이 역사적 시간 한 가운데를 누구누구가 지나가며 이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노라.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일에 등록한 성도라 할지라도 함께 그 30년의 기념비에 함께 감사의 돌을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요, 이 역사에 같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역을 따라 여러 명칭을 붙이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입니다. 모든 교회의 역사는 2000년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안디옥교회의 30년의 역사는 이 2000년에 이어진 역사이고, 주님 오실 때까지 끝없이 이어질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긴 기독교의 역사의 한 줄기를 이어 가면서 우리 교회의 역사도 더욱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역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안디옥교회는 그 명칭을 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안디옥'이라는 이름이 일반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입니다. 그러나 '안디옥'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아주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안디옥교회는 무엇이든지 최초를 달고 있는 교회입니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19)
최초로 평신도가 세운 교회(20)
최초로 파송받은 목회자가 목회 한 교회(22)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교회(26)
최초로 선교사를 이방지역에 파송한 교회(13:1-3)
이것을 정리해 보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이름 없는 성도들의 충성입니다.
그 당시 스테반의 순교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에 큰 박해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를 피하여 믿는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피하여 흩어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안디옥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0-21
예수 믿다가 핍박으로 돌에 맞아 죽는 스테반을 보고서도,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고향에 살지 못하고 피하여 쫓기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자신들도 붙잡힐지도 모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를 전파하는 용기와 믿음은 성령충만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충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안디옥에 교회가 개척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뜨겁게 헌신하는 전통 그것이 안디옥교회의 전통입니다. 우리 안디옥교회가 이 전통을 이어 받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신앙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방지역에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이들을 신앙적으로 이끌어줄 지도자를 한 사람 파송합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인데,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는지 사도들이 그의 별명을 바나바--격려자--라고 붙여주었습니다. 바나바처럼 칭찬을 들은 사람은 신구약 중에 거의 없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24
1. 착한 사람: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
2. 성령이 충만한 사람: 뜨거운 열심이 있는 사람
3. 믿음이 충만한 사람: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
바나바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요, 오늘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할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열심은 있으나 덕이 없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덕은 있으나 확신이 없어 오락가락하는 사람, 확신은 있으나 열심이 없어 냉냉한 사람, 자칫 우리는 바로 그런 신앙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안디옥 성도들이 모두 바나바와 같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세째, 이곳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이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뭔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공동체에만 들어가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성령이 충만하여 무엇에든지 열심이다.
2. 생활이 깨끗하여 믿을 수 있다.
3. 항상 서로 사랑의 삶을 나눈다.
4. 항상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리스도를 높인다.
이를 지켜보던 주위의 사람들이 이 무리를 가리켜서 새로운 별명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이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2000년의 모진 핍박과, 이단의 도전과 세상의 풍조 속에서 굳굳히 믿음의 길을 지켜온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이름이 바로 거기 안디옥교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여기 우리 안디옥교회가 이름만이 아니라 이러한 믿음과 생활을 그대로 이어받는 성도들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안디옥 교인들은 누구나 성령충만하여 열심인 사람들이요, 누구나 믿을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요, 사랑이 풍성한 사람들이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사에서 신학교수, 목회자, 신학생들을 상대로 여론은 조사했습니다. '10년 후 한국교회는 수적으로 더 성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42%가 긍정적으로 답했으며, 32%는 부정적으로 답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26%는 '정체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것은 부정적인 대답의 이유로는 '목회자 및 성도의 낮은 윤리적 수준'이 41%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앞으로 삼가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도덕성 결여'(28%),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양극화'(25%), '물질만능주의'(23%) 등이라고 답했습니다. 아주 의미있는 통계라고 생각됩니다. 그 중에 교회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로 '낮은 윤리적 수준'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깊이 생각해야할 통계입니다. 믿음에는 열심인데, 교회에는 열심인데, 찬양은 아름다운데, 도덕적으로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교인들, 교회들,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것이 어찌 주님이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래 안디옥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물이 넉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그들은 세상사람들에게서조차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초창기에 다 어렵고 힘들고 숫자도 적었어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숫자는 많아지고, 재정도 넉넉해진 교회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존경과 신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 여러분, 이 2000년의 역사의 무게와 그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과 그 강한 믿음의 역사를 감당하시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넷째,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다른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 모든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 항상 그 출발지가 안디옥이었습니다.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 가장 귀한 일, 주님이 명하신 일,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로 그러한 일을 시작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본받고 실천해야할 바로 그 사명이 영혼을 구원하는 열정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직접 나가서 못하면 하도록 돕고, 시간이 없어서 못하면 물질로 돕고, 믿음이 부족해서 못하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안디옥교회의 비젼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나는 생각해 봤습니다. 안디옥교회의 비젼, 그것이 무엇일까?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것인가? 앞으로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자는 것인가? 그것은 외형적인 것인가? 외형적인 것이라면 다른 교회들처럼 말은 그럴듯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교회의 비젼인가? 5000성도, 500 교회 개척, 50 선교사 파송! 그렇게 말을 멋지게 만들 수 있다고 그것이 교회의 비젼인가? 그래서 나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교회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우선 땅을 넓혀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교회의 비젼을 3천만비젼이라고 이름지을까! 3000평의 땅, 1000명의 성도, 월 천만원의 선교비지출 교회가 되자. 그래서 3천만 비젼! 이렇게 만들면 그것이 비젼인가?
나는 그런 외형적인 것은 오히려 성도들의 믿음이 충만하고 사명감이 넘치게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외형적인 것보다 그야말로 안디옥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오늘 그 이름에 맞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 더 아름다운 교회의 비젼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충만한 교회,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 열정으로 선교하는 교회, 그렇게 하고 나서 보면, 결국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교회의 네 가지, 구원의 확신, 말씀중심의 삶, 섬김의 생활,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수 없이 우리교회의 비젼으로 말씀해 온 우리 믿음의 내용들입니다.
안디옥교회,
핍박과 고통에서도 넘어지지 않으며 복음을 증거하고,
자기 자신을 들어내지 않은 채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무리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기쁨으로 교회를 섬긴 무리들,
이러한 거룩한 무리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이것이 안디옥교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 안디옥교회가 이 아름다운 이름을 이어받아 지키고 전해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음을 깨달으면서 그 이름에 합당한 믿음과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안디옥교회 30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안디옥교회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 성경의 안디옥교회가 오늘 우리 안디옥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의 표로서 우리가 30주년의 기념비를 세우며 나아가는 복된 주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
행 11장 19~26절 / 김상수목사
1. 역발상의 힘
몇 일전 어느 신문기사 중에서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적인 기법 : 한계벽 넘은 역발상의 힘(한국일보1.27)”이라는 제목의 글을 봤다. 그 실례로 기존 생각의 틀을 깨고 비약적인 기록과 함께 우승한 선수들의 실례를 열거했다.
예) 육상 - 크라우칭 스타트(1896년제1회 아테네 올림픽 육상
100m에서 토마스버크(미국)가 시작)
예) 높이뛰기 - 배면뛰기(배를 하늘로 향하고 장대를 넘는 자세)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딕 포스베리(미국)가 처음 시도하여 우승
예) 소트트랙 - 날디밀기(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전이경선수가
여자쇼트트랙1000m 경기에서 시작)
그런데 생각의 벽을 뛰어넘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옛사람 때의 관념이나 안된다는 생각의 틀을 뛰어 넘을 때 비약적인 부흥의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의 시작도 이처럼 생각의 벽을 뛰어넘은 몇 사람의 평신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고,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챤이라는 명칭이 생긴 모범적인 교회가 안디옥교회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우리는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 처음교회를 그 모델로 삼고 그 모습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중에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처음교회의 모습들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모범적인 교회가 안디옥 교회이;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태동과 부흥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본문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체험기와도 같다. 우리도 모범적인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보면서, 이 마지막때에 처음교회와 같은 부흥을 꿈꾸는 우리들도 안디옥교회처럼 해보자. 그래서 처음교회의 부흥을 이루자.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초기 안디옥 교회에는 3차례의 큰 부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차 부흥(19-21절) - 무명의 평신도들에 의한 부흥
2차 부흥(22-24절) - 바나바에 의한 부흥
3차 부흥(25-26절) - 바나바와 사울(바울)에 의한 부흥
2. 1차 부흥(19-21절)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부흥은 앞에서 언급한 생각의 장벽을 뛰어넘은 몇몇 성도들의 전도와 함께 일어났다. 본문 19-21절을 보라.
“19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서 많은 믿음의 성도들의 흩어졌다(19절 상). 그런데 이들은 핍박에 굴하지 않고 베니게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러서 도(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19절 하반절에 보면 이들의 전도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전하는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이들은 지독히 그들의 생각 속에 뛰어넘지 못하는 견고한 생각의 벽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만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히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집의 성령강림에 대해서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들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옛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견고한 여리고성같은 생각의 장벽을 뛰어넘은 몇 몇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교회는 시작되었고, 첫 번째 큰 부흥이 일어났다. 21절의 말씀처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왔다. 얼마나 건강하고 좋았는지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 들릴 정도였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첫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생각의 장벽, 생각의 견고한 진을 뛰어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의 장벽인가? 예를 들면 우리끼리만 이라는 벽, 복음증거는 몇몇 은사받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 각종 상황의 장벽, 영적인 매너리즘이라는 벽, 우리는 안된다는 패배의 벽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벽을 뛰어넘자. 우리가 가질 생각은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못한다는 생각의 장벽을 깨고, 나는 할 수 있다(Yes I can) 의 생각이다. ‘노인, 여자이기에 안된다’가 아니라, 노인 여자이기에 더 강점을 지니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역(逆)발상을 해보자. 성경의 흐름에서 볼 때, 젊다는 것은 육신의 나이의 문제 이전에 생각의 문제이다.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했던 갈렙 등등
2차 부흥(22-24절) - 바나바에 의한 부흥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2-24절)
2차 부흥은 바나바에 의한 부흥이었다. 지도자에 의한 부흥이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했다. 이 말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었다는 말이다. 바나바는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서 기뻐할 줄 알았고, 더욱더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바나바로부터 이러한 격려와 용기를 받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힘이 났겠는가?
여기서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둘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 다른 셀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줄 알고, 용기와 칭찬, 격려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하자. 특히 리더 부리더들 또는 각 기관의 임원단들이 바나바처럼 다른 사람을 보고 기뻐하고, 격려와 용기를 주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자. 나 자신이 격려받고 싶은 것처럼 다른 셀원, 전도대상자들도 마찬가지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안전한 공동체인 셀 안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격려와 위로이다. 약한 지체들을 서로 격려하자. 이렇게 하면 물이 있는 곳에 물고기가 모이고, 추운 사람이 모닥불 옆에 모이듯이 그런 사람, 그런 리더, 그런 성도들 주변에 큰 무리가 더한다.
3차 부흥(25-26절)
3차 부흥은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서 함께 연합하여 동역한데서 비롯되었다. 바나바는 자기 혼자만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 그 당시에 이미 바나바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도자였고, 사울은 아직은 그렇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한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혼자 조명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3차 부흥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일 년간”라는 말이다. 과감하게 사울을 발탁하고 둘이 한 마음으로 합력하니까 불과 1년을 가르쳤는데 큰 부흥이 있었고,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제자양육이 제대로 되었고, 교회의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년 이라는 시간.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이 일년간 연합하여 동역하는 동안 큰 무리를 제자로 번식 시킨 것을 보면, 1년은 가능한 시간이다.
4. 2010년이라는 1년의 시간이 우리 앞에 있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부서와 부서가 연합하고, 소그룹 안에서 리더와 부리더가 바나바와 사울이 되고, 리더십과 셀원들이 합력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가르치고 전파하면 부흥은 일어난다. 2010년의 1년이라는 이 시간에 교회적인 부흥을 위해서 1) ‘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갖자. 2) 리더를 비롯해서 모든 셀원들이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자 3) 함께 합력(合力)하자.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이 시간 합심하여 성령충만을 간구하자.
나는 누구라고 불림을 받고 있는가?
행 11장 19~26절 / 노경모목사
‘40세가 넘은 사람은 자기의 얼굴에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택시를 타고 가면서 운전 기사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 같습니까?’그때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뒷 손님을 몇 번 쳐다 보더니 ‘혹시 형사가 아니십니까? 아니면 음심적에 위생검사를 다니는 보건소 직원이 아니십니까?’라고 묻더랍니다. 목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보이는가? 내가 목사인데 말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크리스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사회에는 크리스천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아닌 척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크리스천임을 드러내도 다른 사람들이 크리스천으로 인정을 안해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답지 않은 사람들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크리스천임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든지 그 사람이 크리스천임을 알고 인정해 주는 그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로 크리스천다운 사람들이지요.
과연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크리스천인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그러한 자게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까?
첫째,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기꺼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싫어하고 고난을 회피하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본다면 과연 저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맞는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과거의 야당 총재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랐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김영삼맨이고 김대중맨이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따르는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심지어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9-20절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를 인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사도 외에서 다 흩어졌습니다. 사도행전 8:1을 볼까요.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었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으로 흩어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거기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인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20절을 봅시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바나바와 바울이 일 년 동안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게 되는 사람들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있는가, 고난을 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받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손해 보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환란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한다면 우리는 불신자들로부터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당신을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연히 전제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말은 주님께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21절을 읽어 봅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님께 돌아온다라는 말은 회심한다는 말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의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의 불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이 마음이 찔려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묻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가장 먼저 한 말이 ‘회개하라’ 였습니다. 회개가 예수님을 믿는 첫 단계입니다.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그냥 가볍게 건성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7-30을 봅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회개한 사람들은 삶이 변화됩니다. 말이 변화됩니다. 생각이 변화됩니다. 행동이 변화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을 크리스천답게 변화기키고 유지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삶에서 죄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드러내고 죄를 무력화시킵니다.
히브리서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크리스천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26절에 보면,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와서 두 사람이 교회에서 일년간 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26절을 봅시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답게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벤허>라는 영화는 미육군 퇴역 장군인 왈레스(Lew Wallace)라고 하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왈레스가 이 작품을 쓴 동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친구인 봅 잉거졸이라는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소재로 소설을 쓰면 베스트 셀러가 될 것이며, 특히 예수의 생애에서 로맨스에 관하여 쓰면 대단히 인기 있는 소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왈레스는 예수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왈레스는 본래 반기독자이며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예수를 알아야 했고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또 그의 역사서를 읽어야 했습니다. 얼마쯤 읽다가 이 왈레스는 마음에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내 책의 중심이 되었고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소."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왈레스는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벤허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제 고린도후서 2:15의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마태복음 5:16의 말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천이라고 불신자들로 부터도 인정을 받고 그렇게 불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기쁘게 감당합시다. 회개의 열매를 맺읍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그대로 지키며 삽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크리스천다운 삶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행 11장 19~26절 / 박조준목사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언젠가 한번은 다가오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누구며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를 발견할 때까지는 가슴 속 깊은 곳에 공허한 마음이 깃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물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없 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해 광적으로 여러 가지 길을 모색하다가 자기 상실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폭발시키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육신의 쾌락에 빠져 버리고, 어떤 이는 권세욕에 미쳐 쫓아다니고, 어떤 이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저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것 을 봅니다. 이런 것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도 의미있는 대답을 발견한 사람이 거의 없 습니다. 지식의 무서운 폭발을 목격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 존재의 신비를 이해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 니라 (딤후 3 : 7) 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인간은 인 간의 궁극적 질문, 다시 말해서 자기가 누구며 왜 이곳에 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 한 채 헤매고 다닐 필요가 없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 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의 중심 사상 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고의 부르심이요,가장 고귀한 직분입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위대한 기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은 누구요? 하 고 묻는 말에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축복 받은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만 약 260번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최초의 열두 제자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제자라는 말은 거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상 그리스 도인은 처음에 제자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 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 : 26)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도라는 말 을 꼭 네 번 사용했고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두 번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라는 말은 스물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자다 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나은 제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 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때 우리보다 삶의 차원이 높은 분으로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되고 존경하는 분을 통계로 조사했는데 예수님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아브라함 링컨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위대한 인간,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 하신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홀로 독특한 신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과 전적으로 구분되는 신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를 불러 제자를 삼으신다는 것 자체는 독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은 세상 의 어떤 형태의 직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이 무엇이 그처럼 독특합니까? 1.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는데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인간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의 생각대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만 치 중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제외될 때 사람들은 틀림없이 쾌락주의에 치우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 출발하는 길은 진리와 완성으로 끝나는 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 의 만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지 그분을 만나려는 우리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의 전통이나 헬라의 철학 사상에 있어서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택합니다. 많은 사람 들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하나님을 따를까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요 15 : 1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체험은 그리스도께서 주장하 십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사람들, 죄인들, 버림받은 사람들, 무 능력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물론 그의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하고 안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그리스도에게서 처음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모든 사람이 응답하고 나서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래도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따르고 제자가 되도록 권고하십니다. 복음은 그 범위가 우주적입니다. 인종과 계급, 성과 신분 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제자가 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 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 사상은 우리 가 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길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아 헤매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최종 완성은 이 고마우신 부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 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내 심령에 모셔 드릴 때 비로소 제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극히 개인적입니다. 모든 사람은 완전히 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게 됩니다. 물론 동시에 그리스도를 발견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은 개인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이 일만은 대신 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 다른 사람이 대신 먹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졸릴 때 다른 사람이 대신 잠자 줄 수 없습니다.이것은 내가 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도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할 일은 그 중심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지식도 신앙도 이론도 아닙니다. 제자란 것은 어떤 사상을 받아들인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탁하므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 러 가지 사상가들이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상과 사고 방식에 젖어들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교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에 이른 분이 계십니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 자라고 하지만 부모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 다.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따르기를 결심하므로 그리스도 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사람 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내가 거듭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 고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교회 기관에 가담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매우 필요합니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있는 분을 도와주는 일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보다 앞서 할 일은 내가 거듭나야 합니다.그래야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예수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고 죄를 용서받고 거듭나는 체험을 했 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면 철저한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의제를 정하시고 규칙을 만드십니다. 또 계약서를 만드시고 조항을 만드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되는 것은 대등한 자격을 가진 쌍방의 업무 계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승과 제 자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주인이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온 것 뿐입니 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 앞에 다가올 미래의 도표를 제시해 달라고 주장할 수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그분 나름대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주 쓰는 말 중의 하나는 종 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굴레를 쓴 노예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인이요 그의 제자인 우리는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인 도자요 우리는 따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규칙을 만드시고 우리는 그 규칙을 지키는 사람입 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겐 철저한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에는 맞지 아니하지마는 하나님의 뜻일 때는 그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입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마는 주님의 명령이면 순종하는 생활, 그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과 고향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실 때 아브 라함은 하나님께 그러면 어디로 가라십니까?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순종했습니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 명령하실 때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후의 대책을 알려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맥이 빠져 있었 습니다. 그때 주님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우리 가 밤새 애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 다. 이 갈릴리 바다는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다름없이 잘 압니다. 제가 아는 대로, 그 리고 제 경험대로는 깊은 곳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겠습니 다. 그물을 깊은 데로 던졌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자기 생각이나 경험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 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감격입니다. 우리는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금년 일년 동안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누구도 모릅니 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더라도 주님을 꼭 믿고 그 하 시는 일에 순종하겠다는 마음 가지고 나서시면 됩니다.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되고 아멘 할렐루야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4.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는 길은 생명 길입니다.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 르라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 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삶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 신을 계시하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계 22 : 13) 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 로 영적인 본체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 기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 : 6)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매일의 개인 대 개인 관계의 생활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케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 어떤 방법이 자기 개선을 한다는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령의 힘을 힘입어 사는 길입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이게 하십니 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주님이 실제적으로 임재하시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 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모든 생활 환경 속에서 그의 제자들과 동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성공은 외적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돈이나 권 력이나 인기나 또는 육체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영원하 신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지 일시적인 세상 것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해서 전혀 실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해서 질병으로 고통하고 경제적인 곤란을 겪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제자에게는 내적인 자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친히 임 재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각도에서 인생을 접할 수 있습 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 혼자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이 어려움을 부딪쳐 주십니 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비용이 듭니까? 예,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위 해 나의 생 모두를 바치는 과정 속에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우리가 우리의 생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재창조하여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로 삼으실 수 있도록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내어놓은 모든 것을 토대로 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 는 재능의 수나 양에 대해서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책임이 있 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삼아 우리의 재능을 이용 하여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해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 다.여러분, 궁극적인 성공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재확인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나 자신이 응답하고 주의 명령에 절대 순 종하므로 생명의 길, 성공의 길, 승리와 축복의 길을 걸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행 11장 19~26절 / 박조준목사
안디옥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 부르게 된 곳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 사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흔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맨 처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질 그때는 그 의미가 지금과 같지 않았던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6절에 보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성도들에게 붙여진 경위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 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했습니다.
그리 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혹은 그리스도의 사람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러면 어떻게 해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까? 첫쩌 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때 태평양 한가운데서 미국 해군 함정 한 척이 적군의 포 사격을 받고 가라앉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려고 선원들은 배 안에 있는 모든 무거운 물건을 바다 속에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우선 순위를 생각해서 덜 중요한 것부 터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최후까지 던지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 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는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습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리고 해군 병사의 수첩 속에 있던 애인의 사진이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유품 중에 하나였다고 합 니다. 생명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붙들고 있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이신 까 닭은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소망이시고, 나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그리 고 나의 사랑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려면 그를 위해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는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실 각오가 서 있으십니까? 교회를 사랑 하십니까? 그러시다면 교회를 위해서 땀 흘리는 수고를 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에는 수고 가 따릅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수고하 는 것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수고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이 수고, 이 고생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수고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어려움 당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세요.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 옥까지 이르러 했습니다. 성도들은 핍박이 일어나자 흩어져서 안디옥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 있던 성도들이 박해를 못 이겨 남한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기회 있는 대로 미국을 위시해 서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진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림을 받게 되는 배경이 오늘 주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어려움을 당 하여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면서 주님을 더욱 전파하는 복음의 전도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의 원인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상정입니다. 그 러나 실제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위하여, 또는 누구 를 위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거기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의 원인에 대해서 더 강 한 애착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물론 부성애라는 말을 씁니다만 모성애라는 말이 우리에게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왜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 호소력 이 있다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어머니는 자녀를 낳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더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를 위해 더 많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자녀가 어머니에 대해서 더 강한 애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수고해 보십시오.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교회 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교회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교회에 정이 안 간다 고 불평을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신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교회에 관계해서 주님의 일을 나누는 수고에 동참해 보세요.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시간도 들여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합니 다. 제가 지금까지의 교회를 섬겨 온 경험대로 하면 정말 교회에 깊숙이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지 않고서 신앙이 자란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 깊이 관계해서 일을 하시다가 시험을 받으시고 교회 일에 관여하면 골치가 아파요 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교회에 관계하지 않고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현명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 교회 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 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수고가 없이 우리는 그 어떤 대상 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역설을 보세요.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믿는 사 람이 붙인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에게 붙인 별명입니다. 저들이 예수 때문에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흩어져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또 다시 소리 높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보니 저들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보다 해서 그들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인 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위 해서 수고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둘쩌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마음의 거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속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조심해 들어보세요. 바로 그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일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때 최권능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 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 천당 을 외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서 심문을 받는데 입만 열면 예수 천당 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이 영감, 예 수로 가득 찼구먼 하더랍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별명입니까? 19∼20절을 보세요.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흩어져 멀고 낯선 도시로 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으 로는 집 장만하고 정착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흩어져서 도 주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우선 순위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파하면 보통 사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신이야 팔자 좋고 살 만하니까 예수 믿으라 하지요. 나 같은 사람은 살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우리가 전도하는 것을 배부른 사람 의 소리라고 일축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 리스도를 변함없이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나의 주님은 안디옥에서도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순경 속에서의 주님은 역경 속에서도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젊은 날의 나의 주님은 인생의 석양 속에서도 변함없이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 뜨거워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애 정으로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전파했던 예수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이고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이렇게 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절한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로구나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최고의 관심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전하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최고의 관심이었습니다. 저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오늘 주신 말씀과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전도하는 장면이 나 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은 아그립바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 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리스도인 은 바로 전도하는 사람 이라는 말과 일치될 수 있는 말 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체험을 간 증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위해 생명을 던져 주신 바로 그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참으로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잠잠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 위해 죽은 사실을 몰라서입니까? 아니면 이 사실을 믿지 않아서입니까? 예수님이 나 위해 죽으 신 사실을 믿는다면, 나 위해 주님이 보혈을 흘리신 사실을 믿는다면, 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 을 주셨음을 믿는다면, 왜 침묵하십니까? 그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 아닙니까? 그 침묵은 부끄러운 침묵이 아닙니까? 그 침묵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이 정말 나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부어 주시고, 내 생명이 되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나는 주님을 위해서 입술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 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그리스도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과 행실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쩌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23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 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전하니. 그 당시 바나바가 성도들에게 외 쳤던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는 주께 붙어 있으라 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 붙어서 살고 있습니까? 이 메시지를 주신 바나바의 인격에 관해서 그 다음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나 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말하자면 바나바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삶은 바로 주님의 삶을 닮아 가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문서를 참 고해 보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했고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또는 작은 그리스도 라는 의미로도 해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웃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작 은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입술을 여는 순간마다 증거 되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있을까요?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 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쟁이 라고 부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말이 자신에게 붙여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 다. 혹은 예수 냄새가 난다 고 합니다.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믿지 않는 사람과 섞일 때 예수 냄 새를 지우려고 애쓰는 분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냄새 안 피우고 어떤 냄새 피 우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만나 접촉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맡는 냄새가 어떤 냄새라고 생각하십니까? 돈 냄새입니까? 자존심의 냄새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를 접촉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생명의 주님을, 우리가 자랑하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생애를 걸고 닮기 원하는 그리스도를 냄새맡는 그 신선한 충격, 그 거룩한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우리에 게는 주님과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작은 그리스도 이라 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 라는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대표 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모독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내 이웃에게 전달 되고 있다면 이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 사랑과 동정으로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변화시켜 주시던 예수님. 그 예 수님의 흔적과 냄새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군인 하나가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 폴레옹 군대의 군사들로 포로로 잡은 러시아의 병사에게 이제는 그가 나폴레옹의 군대에 속하게 되었다는 표시로 그의 팔에 N자를 새겼다고 합니다.러시아 병사는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오? 그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대제에게 속했다는 표시야. 이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 군사는 칼 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팔을 내던지면서 이렇 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한 주인만 있을 따름이요. 내게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따름이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면 오늘의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 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 사실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는 믿지만 예수 믿는 것을 숨기려 하고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교인은 없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어려움을 기쁨과 영광으 로 생각했고, 주님을 위해 땀 흘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 분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예 수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주님인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습니까? 정말 주 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 분이십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으십니까? 102장 찬송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 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 네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세상 자랑 다 버렸네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내게는 예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방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 안디옥 교회
행 11장 19~26절 / 서금석목사
예루살렘 교회가 안정되게 성장해 갈 때 심한 박해가 불어닥쳤습니다. 집사 스데반도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제거하려는 사울의 잘못된 열심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지거나 숨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까지 예수를 믿게 되자 박해는 더욱 거세어 졌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것을 보면 인간의 의도적인 계획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전략과 섭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먼저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사울이 부름을 받았고, 베드로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제거하기 위해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제 드디어 세계선교의 중심지로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1. 안디옥 교회의 설립(19-21)
"19)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의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數多)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9절부터 21절까지의 본문에서 우리는 세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1) 어떻게 복음이 안디옥까지 전파되었습니까?
안디옥 교회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8장에서 언급한대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이후 본격화된 '핍박'이 원인이었습니다. (먼저 다시 용어 정리를 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 -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에 사는 유대인, 헬라파 유대인 - 헬라어를 사용하는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이 핍박은 주로 헬라파 유대인에게 집중된 것으로 보이며, 19-20절에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익명의 전도자역시 헬라파 유대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핍박이 헬라파 유대인에게 집중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기독교가 유대교의 종파로 간주되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이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보다 반유대교적 경향이 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도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내용은 대체로 율법을 준수했던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들의 신앙보다 반유대교적 성격이 짙었으니 핍박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방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이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피했을 뿐 아니라 죄악시 했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난 사건을 두고 복음 전하고 세례주었다는 사실보다 같이 머물렀다는 것을 문제삼았던 히브리파 유대인 성도들이 핍박 때문에 이방지역에 갔을지라도 쉽게 이방인과 접촉했겠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핍박'까지도 선교의 방편으로 삼으셨습니다. 시원찮은 불은 때리면 쉽게 꺼지지만 타오르는 불은 때리면 불똥이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때로 내가 겪는 환난이나 고난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뜻하지 않은 질병 때문에 예수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고, 자녀 문제 때문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2) 왜 안디옥 교회가 세계선교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방인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편협한 유대사상에 젖어 넘어서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유대 선민의식,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우월감에 젖어 이방인을 멸시하는 자세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유대적 교회로 굳어가고 있었기에 세계선교를 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에 살았던 경험 속에서 개방적인 유대인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세계선교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울도 헬라파 유대인 중 하나였습니다.
또 하나 안디옥교회가 세계선교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엿습니다. (당시 인구 50만정도)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 떨어져 있고 지중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오른테스강 하구 근처에 참으로 아름다운 국제도시였습니다. 국제도시였다는 말은 교통이 편리하고 교류가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호화롭고 타락한 도시로 알려졌던 안디옥이 세계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에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성도 여러분. 여기서도 꼭 마음에 새겨야 할 성경귀절이 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아멘
구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실 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부흥이 목사 개인의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표준 새번역에는 "주께서 그들을 돌보시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앙생활이나 세상생활이나 주께서 돌보아 주셔야 승리합니다.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손은 붙드시는 손이요 보호하시는 손입니다.
주께서 돌보아 주셔야 내 가정이 흥황합니다. 내 가족이 안전합니다.
주께서 돌보아 주셔야 내 인생의 길이 평안합니다. 내 인생길이 형통합니다.
주께서 돌보아 주셔야 이 교회도 하나님 역사가 나타나는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a)
주의 손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는 자'에게 형통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믿음을 지키는 자, 기도하는 자
2. 큰 사람 바나바(22-26a)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안디옥의 전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몰려들게 되니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지도자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보내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신앙 인격적인 면에서는 바나바는 오히려 사울보다 크고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바나바가 어떤 인물이었는가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23절)
바나바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와서 먼저 바나바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교회에 출석교인이 얼마나 되는가? 교인들의 경제적,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교인들이 유대인들인가? 아니면 이방인들인가? -이런 것들은 보지도 않았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를 가서, 혹 교회를 선택하게 되거나 사람을 사귀게 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보아도 출신이나 사는 정도나, 학력 이런 측면보다 먼저 은혜를 보세요. 사람 사귈 때도 은혜있는 사람과 사귀면 자신도 은혜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없는 사람과 사귀다보면 자신의 믿음도 떨어져요. 이번 중국 선교여행 때 사실 음식이 제 입에 맞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청년들 보니까 잘 먹어요. 그러니까 저도 잘 먹게 되드라구요. 음식도 언제나 맛있게 먹는 사람과 함께 먹게 되면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음식점에 가서 공연히 트집 잡고 깐깐하게 종업원과 시비나 하는 사람과 함께 먹으면 입맛이 싹 사라져요. 예배드릴 때두요 은혜가 충만한 사람, '아멘' '아멘' 잘하는 사람 옆에 앉아 예배드리면 나도 은혜가 충만해 지는데, '아멘'하면 힐끗힐끗 쳐다보고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설교가 지겨운 듯 애꿎은 주보에 낙서나 하는 사람 옆에 앉게 되면 나까지 그렇게 돼요. 은혜있는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있는 사람과 사귈 수가 있습니까?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 사귈 때 돈이 많으냐? 적으냐? 공부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 따지지 마세요. 은혜있는 사람과 사귀면 나도 은혜받게 됩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면서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열심히 믿으세요. 굳센 마음으로 흔들리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사십시오. 바나바가 왜 이렇게 권면했을까요? 처음 믿음생활하고 은혜받게 되면 생기가 넘치고 힘이 넘치게 됩니다.무엇이든지 주님께 다 드릴 수 있고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뿌리가 약하므로 시련 속에서 흔들리기도 쉽습니다. 그렇기에 굳센 믿음으로 주님께 의지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굳은 마음' 프로테세이(προθεσει) 란 뜻은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듯,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주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2)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24절)
바나바는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7절에 바나바는 은혜받고 나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구제하라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은혜받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 같지 않은데 자기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삶 속에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24절을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이 본문을 원문에 가깝게 다시 풀어 설명하면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가 됩니다. 사람이 좋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내 주위에 사람이 몰려듭니까? 아니면 나를 피해서 멀리 도망갑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사람됨, 믿음, 은혜가 넘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3) 바나바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 사울을 등장시켰습니다(25-26a)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옵니다. 안디옥은 이방지역에 잇는 당시로서는 대도시로서 선교하기가 그렇게 쉬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보다 안디옥 선교에 더 적임자라고 생각한 사울을 앞장세우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유대교배경을 가졌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가려했지 않습니까? 유대교 배경을 가졌지만 헬라문화에 철학에도 능통하여 이방인에게 통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합심하여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중심지로 자라게 했습니다.
사실 후에 바울이 된 사울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기독교의 대부분의 골격과 신학적 체계, 그리고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복음이 전파된 데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사울을 등장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바나바야말로 큰 인물이요 착한 사람이요 대단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 했던 사울의 변화는 쉽게 받아들여지자 않았습니다. 사울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바나바가 사울을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변호해 주고 추천까지 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볼 줄 아는 덕망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단점보다 장점을 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두 장점, 단점이 있게 마련이지만 장점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덕있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사울만 보고 지나간 허물을 다 용서했습니다. 다소까지 찾아갔어요. 안디옥에서 다소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습니다(약13km) 그리고 사울을 데리고 와서 일년동안 합심하여 안디옥교회를 열심히 부흥시켰습니다.
바나바의 추천이 없었다면 사울이 쉽게 지도자로 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을 앞세운 바나바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나바처럼 문제있게 여겼던 사울과 같은 사람을 쉽게 추천할 수 있겠어요?
사람이 사람을 천거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닌데, 바나바처럼 은혜를 볼 줄 알고 사람도 천거하여 주의 일에 열매있는 헌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최초의 그리스도인(26b)
"26...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의 협동목회로 안디옥교회는 영적인 부흥과 양적이 부흥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세상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의 의미
이제까지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15:32, 고전5:6) '성도들'(고전1:2, 살전3:13) 이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이름으로 신약에 세 번(행26:28, 벧전4:16)쓰여지고 있습니다.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를 좆는 사람들' 이란 뜻인데 사실의 의미는 그렇다해도 실제는 '예수쟁이'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방하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에서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예수쟁이 라는 말을 듣는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는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애써 숨기려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예수 믿는 냄새가 나십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2)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신다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본적이 있으십니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환난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예수를 전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고난 때문에 그 원인에 대해서 더 강한 애착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나 어머니나 차이가 없을 수도 있지만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의 사랑이 더 강하지 않습니까?
대부분 현대교인들은 예수 때문에 받는 축복을 즐거워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싫어합니다. 교회에 나오더라도 교회일에 깊숙히 개입하거나 헌신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부담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자세로 교회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안디옥 교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받게된 환난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왔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때문에 환난을 당했지만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예수를 사랑하여 믿음에 굳게 서서 세계 선교의 중심지로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3)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낯선 도시로 이주해 왔다면 집 장만, 생활대책 마련하는 것 - 이런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안디옥에 와서도 주 예수를 계속해서 전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들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에 와서도 주 예수를 전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으로 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을 믿으십니까? 주님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감격스럽습니까? 감사합니까? 그렇다면 침묵하지 말고 그 예수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신도의 본! 바나바행
행 11장 19~26절 / 김영대목사
오늘 본문의 주인공「바나바」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평신도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며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모범적인 성도입니다. 오늘「평신도주일」을 맞이하여 성경 본문에 나타난 그의 인격과 신앙의 모습을 살펴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나바의 본명은「요셉」으로, 지중해 가운데 있는 구브로 섬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언제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지만, 초기 예루살렘교회가 유무상통 하는 삶을 실천할 때 그가 자기의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온전히 바침으로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1. 바나바의 인격
① 위로의 사람(행 4:36) -「바나바」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의 삶의 내용을 보고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 뜻은「위로의 아들 : Son of Encouragement)라는 뜻입니다. 이런 바나바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여진 것은 평소 그의 교회 생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별명은 한 사람의 삶의 내용에 의하여 붙여지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있었고 이러한 자기 동족들, 특별히 교회 안의 식구들을 바라보는 바나바의 눈과 마음은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에 모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② 착한 사람(행 11:24) - 바나바는 교회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착한 양심(딤전 1:19)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한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사람(마 5:16)이었습니다.
③ 중보자[仲保者: Peace Maker] (행 9:27) - 초대 기독교회를 심하게 핍박하였던 주동자 사울(바울)이 회심한 후 교회로 들어왔을 때 교회의 반응은 두려움과 불신이었습니다(행11:26). 이러한 교회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와 사울 사이에 막힌 담은 매우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먼저 사울을 찾아가 만나보았고 그의 회심이 진정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는 믿어주지 않는 제자들과 사울 사이에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의 진정한 회심을 대변하였고 결국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함께 교제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 만나주었고, 새 교우들의 형편을 잘 듣고 교제하며 화목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④ 긍정적인 사람 (행 9:26-27) - 예루살렘교회에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부족한 점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교회에 들어와 사귀고자 하나 예루살렘 교회는 불신과 냉대로 그를 대한 것입니다. 그의 과거 때문입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예루살렘교회는 과거에 붙잡혀 현재의 사울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에 충실하다면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갖추지 못한 부족한 면을 보고 불평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부족한 면을 자기가 나서서 스스로 채우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긍정적인 사람인 바나바를 통하여 사울을 얻게 되었고, 교회는 더 커다란 그릇으로 자라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⑤ 행동하는 사람 (행 9:27) - 그는 마음에 느끼고 판단되는 (은혜 받은) 것을 행동으로 옮겨 열매를 맺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사울을 보고 이런 저런 말로 폄하하는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행 9:26의 "다"라는 말을 보아 예루살렘 교회식구들 모두 사울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판단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교회와 사울의 문제에 행동으로 개입하려고 나서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의 사람은 교회의 문제나 부족한 것을 보고 말만하고 앉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교회의 문제와 부족한 것을 볼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인 것으로 알고 행동하였습니다.
⑥ 인정받는 사람 (행 4:36, 행 11:22,25) - 바나바는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거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인정받는데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은 그 열매를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주의 종, 사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행 4:36). 온 교회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행 11:22).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행11:25).
⑦ 동역하는 사람 (행 11:25-26) -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 혼자 독점하지 않고 언제나 함께 나누어 동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명예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동역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협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사역처였던 안디옥에 일어나는 커다란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혼자 감당키 어려움을 느낀 바나바는 즉각 사울을 생각하고 사울을 찾아가 안디옥으로 데려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알고, 일을 나눌 줄 알고, 동역자를 용납하고, 사람을 세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바나바의 신앙
① 성령 충만한 사람 (행 11:24) - 바나바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은 ㉠문제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이 아니라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 성령의 은사로 교회를 유익하게 합니다. ㉣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알게 합니다.
② 믿음이 충만한 사람 (행 11:24) -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충만은 ㉠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합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이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 현세보다 내세를 더 귀하게 여기게 합니다.
③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 (행 13:1-2) - 바나바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금식하며 기도하는 신앙은 주의 신령한 은혜를 받게 합니다. ㉡ 또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게 합니다.
④ 순종의 사람 (행 11:22, 13:2-4) - 바나바는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교회가 보내는 일에 순종하여 집과 친척과 교회와 성도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450㎞) 안디옥에 보냄을 받았을 때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 큰 교회로 성장한 안디옥 교회의 책임자가 된 바나바는 여러 가지로 인정받고 좋은 환경이었지만 성령의 명령을 따라 어려운 선교 여행의 일선에 본인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일에도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⑤ 신령한 사람 (행 11:23, 13:2) - 바나바는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령이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삶의 기쁨은 물질적인 소유나 누림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이 흥왕하는 것을 보는 것에 있었습니다.
⑥ 헌신의 사람 (행 4:37) - 바나바는 재물과 몸과 삶을 주께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전체를 다 예루살렘교회에 바쳤고, 그 교회를 떠나 안디옥 교회로 갈 때도 주저 없이 나서는 결단을 보였고, 선교 사역에 순종할 때도 몸과 삶과 생명까지 바치는 결단을 보였습니다.
⑦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 (행 11:26) - 성경은 "둘(바나바와 바울)이 교회에서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를 가르쳤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에 무지하고는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격려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
행 11장 19~26절 / 류영모목사
I. 안개꽃 같은 사람
유아기의 특징 가운데 '자기 중심성'이란게 있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온 세상에서 자기를 주연 배우로 생각한다는 거지요. 부모, 형제, 선생님, 친척, 친구 - 모두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너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최고의 인물을 들이 댑니다. 대통령! 장군! 터미네이터! 마징가 제트!
이런 주인공 의식. 자기 중심성이 어른이 된 다음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인 아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 타자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주인공 의식이 아니라 남을 세워줄 줄 아는 사람, 타인을 인정하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안개꽃 같은 사람말입니다. 모두들 자기를 나타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돋보이도록 뒤에서 이름없이 받쳐주는 안개꽃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안개꽃이 뒤에서 받쳐줘야 그 꽃이 훨씬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어디서나 누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어우러져 있을 때에,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이 드러날 때에 더욱 가치있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를 펼쳐 보이며 우리에게 한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대단한 지면을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통해 세워지는 중요한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명의 사람 사울을 세워 사도 바울이 되게 했던 사람, 초야에 묻힌 사울을 발탁해 위대한 전도자가 되도록 격려했던 사람, 버림받은 마가를 격려해 다시 일선 사역자로 세워주었던 사람, 그가 바로 격려의 사역자 바나바입니다
폭스 잭슨(Fox Jackson)이라는 신학자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기를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쳔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했으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바 컸지만, 바나바는 초대교회를 살맛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의 격려사역, 사람을 세워주는 코칭, 멘토링 사역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바나바 그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초대교회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지요. 그 뜻은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격려의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나바를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바나바 - 격려의 아들이라 부르는데 대해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오늘 우리 교회에, 특별히 셀교회로 가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있다면 바로 격려의 사역입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사역입니다. 앞장 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칭찬하고 격력하는 일입니다. 목사도 성도의 격려를 먹고 삽니다.
우리 가운데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격려는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열심 있는 사역자들에게 더 큰 힘과 추진력을 발휘토록 도와줍니다. 격려는 죽은 사역자들을 살려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격려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 입니다.
II. 격려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
켄 블랜차드라는 사람이 쓴 최근의 베스트 셀러 가운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씌여지게 된 배경이 있지요.
킹슬리라는 사람이 휴가 중 머리를 식히려고 플로리다의 해상동물원을 방문하고 거기서 돌고래 쇼를 보게 됩니다. 거대한 돌고래들이 신나게 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경꾼들에게 꼬리로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기도하고, 익살스럽게 꼬리를 흔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돌고래 쇼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고래는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킹슬리는 나는 부하 직원 몇 사람, 아니 내 자식 한 두 명을 가르치는데도 힘이 들고 지쳐 있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저토록 큰, 말도 통하지 않는 고래를 훈련시켜 묘기를 하게 했을까?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조련사를 찾아가 놀라운 통찰력을 얻게되고 이 지혜로 회사와 가정을 바꾸어 나가게 됩니다.
첫째, 돌고래는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 말을 듣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키우기를 원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요. 역으로 말하면 멘토나 상관의 마음을 얻으려면 신뢰를 얻으라는 겁니다.
둘째, 잘한 일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고래를 훈련하는 조련사들은 잘못한 것은 못 본척하고 빨리 다른 행동으로 유도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잘못된 행동에 쓰일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전환시켜 주는 겁니다. 조련사가 돌고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할 때 고래는 인간의 마음을 놀랍도록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셋째, 과정을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못했을 때 지적 받고 꾸중 듣는 문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꾸중 안하면 칭찬이라는 유교적 전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한 것을 열심히 관찰하고 열심히 찾아 열심히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 축복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물이든 사람이든 긍정적으로 칭찬하는 그 방향으로 행동과 인격이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칭찬의 열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① 칭찬할 일이 생겼을 때 즉시 칭찬하라.
②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해라.
③ 가능한한 공개적으로 칭찬해라.
④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해라.
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칭찬해라.
⑥ 거짓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칭찬해라.
⑦ 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칭찬할 일이 보인다. 칭찬할 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칭찬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⑧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더욱 격려해라.
⑨ 잘못된 일이 생기면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라.
⑩ 가끔씩 자기 자신을 칭찬해라.
III. 격려의 사역자
격려의 사역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37에 처음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시고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급성장하는 교회를 유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늘어나는 성도들 중에는 고아와 과부가 적지 아니했습니다. 선교와 구제를 위한 막대한 재원을 하나님께 구했을 때 이 일에 헌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헌신자가 바로 요셉이라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고 성경에 기록합니다.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 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과 벌꿀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구브로라는 출신지를 밝힌 것은 바나바가 그 지역에서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름난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교회내 가난한자들에게 물질적 필요를 깨닫고 그 농장을 팔아 헌금합니다. 바나바의 이 결단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어 사도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어 교회내 연약한 자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예수를 믿고 미처 시골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전도를 하던 많은 전도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으니 전도자들이 큰 격려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이다. 격려의 사역자다. 「바나바」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격려 사역이 무엇입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거기 있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없이 타인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헌신에는 물질의 헌신이 있고 시간의 헌신이 있습니다. 혹 시간을 주되 물질을 못내는 사람이 있고, 혹 물질을 주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자라 할 수 없지요.
「바나바」 위로와 격려의 아들, 그 이름은 폼으로 붙여진 이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격려 사역!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허물과 약점, 실수와 잘못까지 덮어주고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마가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도중에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전도단 가운데 커다란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가 자신도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상심하고 있는 마가, 갈등의 장본인 마가를 격려하는 사역자가 나타났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고 전도대로 다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 것이지요.
우리가 사회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 셀 목장생활을 함께 하다보면 본질이 아닌 비본질을 가지고 갈등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 - 그것을 이름하여 격려 사역이라 이름합니다.
시집온 새색시가 시집식구들이 모여있을 때에 토마토를 썰어서 방에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늘 시집오기 전에 하던 것처럼 설탕을 솔솔 뿌려서 들어갔어요. 한 입씩 먹더니 욱~ 하고 뱉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소리지르기를 "토마토에 설탕을 쳐 먹는 사람이 어딨냐고. 빨리 가서 소금을 쳐 가지고 오라고." 그럽니다. 이걸 가지고 밤새도록 둘이 싸움하게 생겼습니다. "토마토에 설탕 쳐 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럼 토마토에 설탕 쳐 먹지 뭘 쳐 먹냐?" "토마토에 소금 쳐 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이혼하게 생겼습니다. 가정법원에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왜, 그렇게 갈등을 느끼게 되었습니까?" "저 집구석은 토마토에 설탕을 쳐 먹는데요?" "아니, 이 집구석은 어떻게 된 것이 토마토에 소금을 쳐 먹는 집이 어디 있냐구요?" 판사가 하는 얘기가 "우리 집은 그냥 먹는데."
소금 쳐 먹으면 어떻고 설탕 쳐 먹으면 어떻고 그냥 먹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가끔은 비본질적인 일 때문에 상처를 겪고 상대를 용납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격려! 권면! 이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입니다. 파라 - 옆에서, 칼레오 - 소리친다. 부르짖는다. 부르다. 그런 뜻입니다. 옆에서 불러 주는 사역, 옆에서 소리 지르는 사역입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만, 저희 딸이 초등학교 1학년 처음 운동회를 할 때입니다. 운동회를 한다고 하길래 한번 가봤지요. 1학년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우리 딸이 몇 등 할까?' 궁금하던지요. 저는 초등학교 때 달리기를 하면 언제나 1등으로 달려가며 뒤를 돌아보면서 "내 뒤에 좇아오는 놈 번개내" 그러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 사람은 아직 한번도 달리기를 해서 공책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닮았을까? 궁금할 수 밖에요. 7명이 뛰는데 1,2,3등 거기에 저희 딸이 없었습니다. 중간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4,5,6등에도 없었습니다. 반 바퀴나 쳐져서 저만큼 뒤에 우리 딸이 뛰어오는데 저는 창피해서 뒤로 숨었는데 제 엄마는 운동장 가운데까지 달려가서 "단비야 뛰어라! 단비야 뛰어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딸이 달려갈 때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역, 이게 바로 권면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지쳐 있는 설기현 선수를 붙들고 "너는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될 수 있어. 힘을 내!" 페널티 킥을 실축한 안정환을 붙들고 "다시 너를 믿을 거야. 너는 다시 골을 넣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격려하는 사역. 이것이 바로 격려, 권면, 칭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하는 사람들을 더 잘 하도록 격려하는 것, 실수한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 얼마나 이것이 귀한 일입니까? 사람은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일어설 수도 있고, 말 한마디에 실망하고 낙심해서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정 사역자 짐 답슨(James Dobson)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Garfield 고등학교에 죠니(Johnny)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모범생이었고, 다른 한 아이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부모님과 선생님이 상담하는 날이 있었는데 죠니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저희 아들 죠니의 학교 생활이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저희 반에 죠니와 같은 아이가 있다는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온 반 식구들이 격려를 얻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까?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죠니의 부모님을 만나보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그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온 아이는 모범생 죠니가 아니라 말썽꾸러기 죠니였습니다. "선생님, 어제 선생님께서 우리 어머님께 해 주신 말을 기억합니다. 잘 전해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내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고 하니 저는 선생님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날 평생 처음으로 숙제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3개월동안 계속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전교에서 가장 성적이 많이 향상된 아이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6개월내에 말썽쟁이 죠니는 반에서 3등내에 드는 모범생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실수로 했던 칭찬 한 마디가, 모범생의 어머니인줄 알고 했던 칭찬, 실수로 했던 칭찬이, 이 아이의 가능성에 불을 지르게 된 것입니다. 낙심했던 아이에게 용기를 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정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만큼 사람이 바뀌어질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IV. 격려의 사역자 바나바가 있었길래 바울이 있었다
예루살렘교회 전체에 가득했던 바나바의 격려 사역은 한 사람 바울에게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9장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이어지는 내용은 예루살렘 공동체가 아무도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죽이던 그가 예수를 믿어? 복음 전도자가 돼? 아닐게야. 우릴 속이는 것일게야. 필시 우리 교회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한 다음에 모조리 다 잡아가기 위해서 작전을 펼치는 것일게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도 바울에게 격려를 보내는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이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그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신원 보증을 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신원보증을 듣고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라고 말했습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당한 증거자의 사역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나바와 같은 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능성에 불을 지를 수 있는 한 사람이 우리 곁에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우리 사회에, 침체된 한국 민족 가운데 진정으로 바나바가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꽃들이 시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젊은이들이 좌절을 겪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훌륭한 교회 사역자들이 일어나지 못하고 쇠해져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후 -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지요. 예루살렘교회에 크게 타올랐던 이 복음전도의 불길은 흩어지는 곳곳마다 또 다른 불길로 솟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방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안디옥에 큰 부흥의 불길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회의하기를 '안디옥교회에 누가 가서 목회하면 좋을 것인가?' 바나바를 선출해서 안디옥교회 목회자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목회하는 가운데 바나바는 이 안디옥교회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방선교에 전초기지가 될 것을 생각하고 혼자 일을 감당할 수 없다. 누가 내 일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나보다 더 훌륭하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이때 사도 바울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십여년전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아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다소'라는 고향 마을에 숨어 있었습니다.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꿈과 열정을 숨긴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으러갈 때까지 바울은 잊혀진 존재로 있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을 불러서 함께 동역을 하게 된 것이지요. Team ministry를 하게 된 것이지요.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그렇게 나옵니다. 조금 더 뒤로 넘어가게 되면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가 섞여서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뒤로 가게 되면 바나바가 뒤로 빠집니다. '바울과 바나바' 예외없이 '바울과 바나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을 기록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전도자로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그 무렵에는 바나바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세워서 나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자신이 당당하게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이면서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바울을 개발하여 그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전도자로 세워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는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져 갈 수 있었던 사람. 내 주변에 있는 뭇 사람들을 세워주고 내가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V. 오늘의 바나바를 찾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나바 아니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속에 바나바가 없었다면 우리는 사울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엔 부정적인 비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서로 상대의 문제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교회가 격려와 돌봄사역을 제대로만 감당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R.A. 토레이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 부릅니다. 보혜사란 격려자요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돌봄과 격려사역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오늘도 성령이 함께 하실 때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상처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되어 있을 때에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할 때에 갈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격려의 사역자, 돌봄의 사역자로 새롭게 부름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성경적교회의 핵심 - 셀교회. 나아가 G12 교회의 핵심은 「제자를 삼는 교회」입니다. 제자가 되는 교회를 뛰어 넘어 제자를 삼는 교회입니다. 앞으로 한소망교회의 과제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자기를 격려해 줄 멘토를 찾는 것입니다. 자신이 격려하고 돌보아 제자로 삼을 제자들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셀교회 목자들이여! 여러분이 섬기는 셀교회 목장의 가족들을 여러분의 제자로 삼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하신 아비의 사역, 스승의 사역, 멘토의 사역을 잘 감당하십시오. 그들이 여러분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한 복음전도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십시오.
한소망의 모든 성도들이여! 주님께서 12제자를 삼으셨듯이 여러분도 여러분이 품었던 3명, 4명, 5명, 소중한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시오. 여러분이 품은 모든 신자들을 "내 제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 사역이 우리 교회안에 꽃피울 수 있다면, 이 사역이 한국교회에 꽃피울 수 있다면, 이 사역이 한국민족 가운데 우리시대 역사가운데 일어날 수 있다면, 교회가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이 분연히 벌떡 일어나 세계를 정복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발돋음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진정으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바나바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아내, 아내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바나바와 같은 남편, 부모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바나바와 같은 자식들, 자식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일으키는 바나바와 같은 부모가 우리 땅에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나아가거든 혼자 성공하고 성취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세워주십시오. 그들을 통하여 사회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어지는 행복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학교 선생님이십니까? 여러분 지식을 나누어 주는, 먼저 배운 지식을 파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진정으로 그들의 아비가 되십시오. 스승이 되십시오. 그들이 멘토가 되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이 여러분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그 행복을 잃지않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의 교회가 부흥되어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모두다 교회를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바나바로 들어갈 때에 세상이 바뀌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란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린 딸 수지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지금 뭘 해요." "맛있는 요리를 만든단다." "뭘 하게요?" "앞집에 스미스 부인이 딸을 잃었잖니. 딸을 하나님 곁으로 먼저 보내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단다. 이럴때는 밥이 하고 싶지 않는단다. 일어나서 움직일 힘이 없단다. 그럴 때 일수록 이웃에 있는 우리들이 스미스 부인을 위해서 뭔가 해야 돼. 그래서 엄마가 음식을 만드는 거야. 수지, 수지도 착하니까 스미스 부인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스미스 부인의 가슴에 상처가 아물 때까지 수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려무나."
엄마가 요리를 할때 수지가 뭔가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앞 집 스미스 부인의 집 벨을 딩동딩동 눌렀습니다. 잠시후에 스미스 부인이 나오는데 보니까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온몸은 힘을 잃어버린채 늘어져 있었습니다. "수지구나? 수지가 어떻게 왔니?" "아줌마,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길 아줌마가 딸을 잃어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대요. 이럴 때 일수록 이웃인 우리가 아줌마를 위해서 뭔가 해야한대요. 아줌마의 마음에 상처가 아물 때까지 엄마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아줌마, 이것 마음의 상처에 붙이세요." 수지는 일회용 반창고를 내밀었습니다. 손에 상처가 났을 때에, 발가락에 상처가 났을 때에 엄마가 붙여주시던 반창고였습니다. 스미스 부인은 무릎을 꿇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린 수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다가 "얘야, 네가 보내준 이 반창고로 말미암아 아줌마 상처는 곧 낫게 될 거야." 그리고 유리 벽장속에 반창고를 두고 반창고를 바라보며 점차 마음의 상처가 아물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 딸은 하나님 곁에 갔지만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없지만 이 땅에 있는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 여러분의 도움과 격려와 위로와 칭찬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 한송이 안개꽃 그리고 하나의 반창고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부 흥
행 11장 19~26절 / 박금호목사
오늘 본문 말씀 25절에 보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크게 많아지는 것이 외적, 양적부흥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고 불림 받은 것이 내적, 질적 부흥입니다. 전자는 성장이고 후자는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이 유대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교회에 주신 부흥의 은혜를 생각해보면 참 감사합니다. 5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주신 은혜도 참으로 귀하지만 우리는 금년에 우리 교회에 주실 은혜들을 또한 바라봅니다. 이 후에 전개될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합니다. 우리 각자의 심령에, 가정에,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나아가 이 지역 광주에 복음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부흥일까요?
Ⅰ. 말씀의 부흥
본문에 보면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성도들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혼자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간 훈련받은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초청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모두가 사울을 경계하고 받아주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사울(바울)이 받은 은혜로 안디옥 교회를 말씀으로 섬기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고 해외선교사를 파견할 만큼 양적, 질적으로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부흥의 뿌리는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부흥도 성령받은 성도들이 사도들로부터 충실한 가르침을 받은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소생시키고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 삶의 능력이 됩니다. 말씀의 부흥 없이는 구원의 역사도, 성화의 삶도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바로 세우는 사람,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 말씀을 통해 소망을 붙잡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기록되어진 말씀, 선포되어진 말씀을 통해 여러분 안에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방망이라고도 말합니다. 말씀이 검처럼 여러분의 심령을 찔러 쪼개고 방망이처럼 완악하고 강퍅한 것을 깨뜨리도록 맡기십시오. 말씀은 불이요 기름이며, 등불이요 젖(우유)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회개시키며 태우고 인도하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금년 여름교육을 통해서 이런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통해 주시는 말씀 앞에 겸손히 마음을 열 때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진정한 부흥이 시작될 것입니다.
Ⅱ. 기도의 부흥
초대교회는 주의 약속하심을 믿고 기도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이 기도의 힘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위협이 심해질수록 더욱 열심히 모여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였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뒤덮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이 도에 굴복했습니다. 기도의 부흥이 초대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부흥은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며 생활과 환경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둠의 사슬이 풀어지고 저주의 고리가 끊어집니다. 어둠의 권세, 사단이 물러갑니다. 모세는 두 번이나 40일 금식을 했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기도의 부흥이 일어날 때 영적인 권세들이 회복되고 진정한 부흥이 시작됩니다. 과거에 기도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늘 당장 우리에게 기도의 부흥이 일어날 때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살수 있습니다.
Ⅲ. 나눔과 섬김의 부흥
당시 안디옥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이 모여 세운 피난민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선민의식과 율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은혜를 받고나니 이방인들과 은혜를 나누고 십자가의 복음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있습니까? 그 은혜를 나눌 때 받는 사람이 풍성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나누는 사람 그 자신이 풍성해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18장에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모세가 그의 장인과 아내, 두 아들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가족들에게 간증했습니다. 장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큰 은혜와 감동을 받고 다음날 큰 제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은혜의 나눔은 언제나 이런 놀라운 부흥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묻어두지 마시고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습니까? 받은 달란트를 사장시키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남기면 주님은 그 양이 많고 적음을 보지 않으십니다. 나누고 섬기는 만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느끼십니까?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 받은 달란트로 섬기십시오. 그러면 부흥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부흥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일은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에덴의 하나님이 부흥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여지없이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의 십자가로, 그의 부활로 우리에게 부흥은 가능성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부흥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 증인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태신자를 작정하고 교회로 인도하는 일, 8월에 단기선교로 농촌을 섬기는 일도 모두 부흥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 말씀의 부흥, 기도의 부흥, 나눔과 섬김의 부흥이 시작되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이 부흥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
행 11장 19~26절 / 박덕기목사
스위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전 스위스 국민의 47. 6%가 로마 카톨릭 신자, 그리고 44. 3%는 개신교 신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 구교를 합하여 무려 스위스 국민의 92%가 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수치입니다. 이 정도라면 가히 기독교 국가라 하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개신교 신자라 밝히고 있는 44. 3%의 스위스 국민 중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1-2%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목사님이 스위스 목사님에게 스위스 교회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아도 과연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스위스 목사님은 답변을 회피하더라는 것입니다.
카톨릭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한국의 목사님이 자신은 카톨릭 신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30대의 스위스 부인에게 매 주일 성당엘 나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이후에 단 한번도 성당에 가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또 다시 물었습니다. 카톨릭 신자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성당에 전혀 나가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스스로 카톨릭 신자라 말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한동안 생각한 후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비록 성당에 나가지는 않지만,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카톨릭 신자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어린 시절 영세를 받았는데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들이 신자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은 카톨릭 신자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117년 어간에 이 땅의 기독교인은 1200백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낱말은 듣기에 비슷한 말 같으나, 그 실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란 교회법으로 될 수 있는데 1년이면 될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6개월 이상 교회를 출석하고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면 학습 교인이 되고, 학습을 받은 후 6개월 이상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세례를 받으면 기독교인이 됩니다. 세례 교인은 법적으로 정식 교인이므로 이렇게 기독교인이 되려면 불과 1년이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5분에 될 수도 있고, 안 되려면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안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이란 그가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했는가? 죄 사함을 받았는가? 그가 거듭 났는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에 근거를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기독교가 나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가입하여 세례를 받고, 주일이 되면 예배하러 나오고 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수년 동안 교회에 다녔던 사람이 낙심하며 타락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진정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얻고,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는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사죄와 구원, 부활과 영생이 있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고 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라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갈 것이요, 결코 낙심하거나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불평하지 마세요/고난의 뒤편에 있는/주님이 주신 축복/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너무 견디기 힘든/지금 이 순간에도/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당신만은 일어서세요/힘을 내세요/힘을 내세요/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신앙의 목적은 죄 사함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한 속죄 구령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고작 자녀를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세속적인 욕망만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신자가 순전히 이와 같은 목적에서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은 될지언정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회개하지 않았고, 죄를 자복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들이지 않았고, 주 예수의 생명을 얻지 못했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독교인은 마치 품꾼과 같습니다. 품삯을 아니 주면 물러가고, 품삯을 받으면 받았으므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롬 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비록 수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니고, 설혹 장로 권사와 같은 직분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가 성령을 받지 못했으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알고 믿는 것이 성령을 받은 가장 큰 증거입니다. 고전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에게는 열매가 있고 그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갈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 신비적인 체험을 하였다, 능력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으나 성령의 열매가 없으니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 속에 거하시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원수라도 분명히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는 곳과 이르는 곳에서 화평의 역사를 이룩하고 사랑의 손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날아오는 돌무더기 속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악당들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며 용서를 빌고 숨져 간 스데반 집사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아니하고, 그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기쁨의 사람이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미합니다. 구약의 욥같이, 신약의 바울과 실라와 같이 무서운 재난이나 옥중에서라도 구원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고 기뻐하게 됩니다. 화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 없이 화평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이웃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사람과 사람끼리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생의 체험 없이,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성령을 지식적으로 알고 실제로 믿지 않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해야 됩니다. 아는 것은 지식적이요 믿는 것은 체험적입니다. 아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그리스도이이 되려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갈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육체가 못 박혔으니 마음대로 기거 동작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아무리 혈기가 끓어올라도 혈기를 못 부리는 것이며, 아무리 하고 싶지만 죄 되는 일은 못합니다. 아무리 먹고 싶지만 불의한 것은 못 먹고, 아무리 다투고 싶지만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체가 자유요, 범죄와 혈기와 탐욕과 정욕이 자유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싸우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 아래선 자유하나, 그 법칙을 떠나서는 자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불신앙자입니다. 이는 기독교적인 무신론자입니다. 교회를 하나의 정치도구로, 사업적 수단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로 또는 수양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은 사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앙 자들인 것입니다. 2)반신반의하는 자들입니다. 믿기는 믿으나 적게 믿는 자요, 확신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신앙을 통한 기쁨이나 감사나 인내나 헌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3)큰 믿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일 아침마다 고백한 신앙의 원리가 되는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와 성도의 교제, 그리고 속죄, 부활, 영생을 믿습니다. 이상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 중 첫째는 불신자요, 둘째는 기독교인이요, 셋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다 같이 내가 기독교인가? 그리스도인가?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세상에 속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후,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본문에서와 함께 신약에 두 번 더 나옵니다. 행 26:28에 보면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벧전 4:16에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불러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점차 보편화하여 2세기 초에는 신자들 측에서 받아들여 공식적 명칭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에게 붙인 프로테스탄트(항의자)나 감리교의 메소디스트(규칙자)등은 처음에는 경멸의 뜻으로 불리었으나, 후일에 영광스런 공식 명칭이 된 것과 아울러 생각해 보아야 할 이름이 ‘예수쟁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너무도 영광스런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가장 높고 존귀한 분의 이름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지 스위팅은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당신의 연합이다.’ 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이름에 따라 오는 책임이 있습니다.
1)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벧전 2:21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해야 합니다.
엡 5:2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3)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확장시켜야 합니다.
마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그의 예수 칼럼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며,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며, 그들의 의식과 사고는 그리스도로 젖어있으며,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 중심의 놀라운 삶을 바라본 안디옥 시민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은 사라지고, 교인(churchman)만 득실거리는 현실이 아닐까요?
안옥이라는 도시는 호화스런 생활과 무도덕 부도덕의 대명사와 같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미칠 듯이 열광하는 스포츠와 도박과 나이트 클럽 매음굴이 가득 찬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헬라의 아데미와 아폴로 같은 신전들이 있어서 각종의 잡신 숭배가 성행한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전의 여승들은 종교적 창기로서 예배자들과 간음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패하고 더러운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새로운 생활을 보고 안디옥 시민들이 붙여 준 이름이 그리스도인 곧 작은 예수와 같다는 이름입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에 자신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부르더냐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정답으로 예수님을 정의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왜 예수님은 이런 여론 조사를 하셨을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궁금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 본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우리 모두 ‘너는 진짜 그리스도인 같다.’는 말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불신자들은 오늘날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1999년에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믿고 싶지 않은 종교의 1위가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범죄를 저질러서 언론에 보도되는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가장 건방지고 자기 멋대로 사는 성가신 종교인들도 크리스천이라고 불신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설문결과에 의하면 종교를 떠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교를 다시 선택할 경우 어느 종교를 선택하겠는가?’를 물은 결과 1위가 불교, 2위가 카톨릭이었습니다. 기독교는 3위를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교회에 대해 실망했다는 말입니다.
본 회퍼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종교의 힘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비행을 저질렀습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살육을 자행했고, 종교재판을 열어 사람을 마음대로 처단하였습니다. 본 회퍼의 말대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무서운 종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런 종교를 처음부터 의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었으며,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는 저자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불교에서 선사들은 ‘부처를 만나는 대로 때려 죽여야 성불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실재(reality)와의 만남을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얼마 전 기독교계에서는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본질로 돌아가라! 종교를 버리고 참된 실재인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로 있을 당시 몇몇 선교사들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인도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즉각 ‘기독교인들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졸병이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그의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더러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졸병의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겁에 질려 경례를 하고 있는 졸병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네가 알렉산더라지?’ 라고 물었습니다. 졸병이 ‘네’라고 대답하자 알렉산더 대왕은 ‘내가 네게 두 가지를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그래서 그 이름의 오욕을 씻으라!’고 명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두 가지를 명령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네 이름을 바꾸어라.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우리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
행 11장 19~26절 / 김명혁목사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7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두 착한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아람에 포로로 잡혀갔던 작은 계집 아이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욥바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도르가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사랴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고넬료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게도냐의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루디아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한 요셉도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이었고 소 아시아의 많은 이방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나바가 없었다면 안디옥 교회도 있을 수 없었고 이방인 선교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수많은 이방인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까? 행11:24은 그 비결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기 위해서도 착함이 너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8복 설교를 하신 다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 앞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라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착한 사람이란 자기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 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착한 사람이란 이기적이 아닌 사람을 말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착한 사람 바나바의 모습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바나바는 재물과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밭이 있으매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7). 재물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받게 됩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아울러 받게 됩니다.
바나바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밭이 있으매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정 사용의 결정을 사도들이 했고 그 집행을 집사들이 했습니다. 재정 사용의 결정을 목회자가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은 거룩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초대교회 성도들이 재물을 바치되 그 재물 사용의 권한을 자기 손에 두지 않고 사도들의 손에 두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사용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재물에 대한 소유권도 포기했고 사용권도 포기했습니다. 모두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나바는 재물과 관련하여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바나바는 사람과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가서 개척목회를 혼자서 시작하다가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다가 사울과 함께 협력목회를 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5,26).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협력할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때 바나바는 사울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 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9:26,27). 어떤 사람이 의심과 비판을 받을 때 그를 변호하기는커녕 함께 덩달아 비판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내 세우고 그리고 그 사람과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자기보다 유능한 사울을 그리고 허물 많은 과거가 있는 사울을 귀하게 여겼고 앞에 내 세웠고 그리고 함께 협력했던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바나바는 자기와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말씀했을 때 즉시 순종하며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내어 던질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남에게 희생을 가르치기는 하면서 자기는 도무지 희생할 수 없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 동경 지하철 역에서 술에 만취하여 선로에 뛰어든 어떤 일본 사람을 구해내고 스스로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를 가리켜 일본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이수현씨를 추모하며 기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자기 몸을 고난과 박해의 현장에 내어 던진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착한 사람 바나바로부터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바나바의 조역에 불과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고 말씀을 맺습니다. 나중에 선교의 일로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고 하는 요한을 제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요한을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마가 요한이 제1차 선교여행 때 너무 힘이 든다고 선교지를 떠나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누구의 주장이 옳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바나바의 주장이 옳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나중에 이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바나바는 시종일관 착했습니다. 한번 실수했던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에 가서 선교하므로 마가를 쓸만한 일군으로 유익한 사람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행15:38). 바나바는 마가까지 옪은 데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까지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이방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두드러진 특성과 비결은 한 가지였습니다.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 착한 그릇이 될 때 믿음도 성령도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판단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선교지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도 착한 사람입니다.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판단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멸시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착한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바나바 같은 손양원 목사님 같은 박윤선 목사님 같은 착한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들을 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강변교회의 성도들을 모두 착한 사람들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시옵소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
행 11장 19~26절 / 김명혁목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인류 구원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하실까 생각하시면서 쓸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하실까 생각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다가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이방인 고넬료를 발견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넬료가 하나님 경외의 사람이었고 구제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통해서 그리고 베드로를 사용해서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 성령을 보내시고 그곳에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셨다고 지난 주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어떻게 하면 좀 더 먼 이방의 땅에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시다가 안디옥을 내려다 보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안디옥은 그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수리아의 수도였는데 로마 제국의 매우 중요한 3대 도시들 중의 하나였고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기지가 될 수 있는 전략적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떻게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어떻게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안디옥 교회는 피난민들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11:19,20).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시기 위해서 전쟁과 환난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피난민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영락교회가 그렇게 해서 세워졌고 충현교회가 그렇게 해서 세워졌고 경상도와 제주도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해서 세워졌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나 신현균 목사님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오랜 옛날 아이랜드의 교회들은 해적들에게 잡혀 갔던 패트릭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환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과 봉사와 전도에 있어서 보다 진지하게 만들고 보다 간절하게 만들고 보다 뜨겁게 만듭니다. 안일은 타락의 길이고 환난은 성화의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 군사적 환난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주 업무인 주님을 바로 믿고 복음을 바로 전하고 봉사를 바로 하는 일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박해와 환난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 성도들이 흩어져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도 했겠지요.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들이 한 일은 복음을 전한 일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한동안 민족주의적 정서와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른 유대인 피난민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런데 그곳으로 피난 온 성도들 중에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용기를 내어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11:20). 여기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방인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기질과 이방인의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이방인 전도를 하게 됩니다. 자기 기질과 자기 정서와 자기 주장이 강한 배타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안디옥에 가서 안디옥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 18절 에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고 했고, 여기 20절에서는 “헬라인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방인 출신 피난민들에 의해서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방인 출신 전도자들에게 주님의 손이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의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21). 안디옥에 이방인 교회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마련되었습니까? 피난민들에 의해서 마련되었습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착한 사람 바나바에 의해서 부흥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다한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에게로 돌아왔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고 돕기 위해서 한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사도를 파송하는 대신 바나바라는 사람을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행11:22).
바나바는 여러모로 살펴볼 때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인 교회를 격려하고 돕는데 가장 적합한 적임자였습니다. 그는 우선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인이 있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행4:36). 안디옥에 살던 이방인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게 된 것이 구브로 출신 신자들의 전도에 의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상황을 깊이 고려하여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나바의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그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름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권위자, 위로자 또는 격려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남을 잘 권면하고 남을 잘 위로하고 남을 잘 격려하는 관대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밭이 있었는데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행4:36,37). 즉 바나바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물질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인간관계가 편협하고 돈 관계가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나바를 가리켜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행11:24). 이방인 전도는 착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웃 사람 전도도 착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도 믿음도 충만하여야 하지만 기본은 착함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바나바는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했습니다.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주님 말씀을 많이 하면서 주님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하고 격려했습니다. 자기에게 붙어있으라고 하지 않았고 주님께 붙어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부흥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붙는 신도가 아닌 주님께 붙는 성도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셋째 안디옥 교회는 유능한 사람 사울에 의해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행11:25,26). 바나바는 점점 부흥 발전하는 안디옥 교회를 바라보면서 거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기지가 될 안디옥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보다 유능한 사울의 도움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다소에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을 설득해서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일년 동안 안디옥에서 협력 목회를 했습니다.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신자가 되는 것도 귀하지만 제자가 되는 것은 더욱 더 귀합니다. 제자는 주님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아 살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살도록 훈현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살기로 작정한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로부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찾아서 자기와 함께 설교하고 자기와 함께 가르치고 자기와 함께 목회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목회자들은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자기 교회에 데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보통 목회자들은 자기보다 설교를 더 잘하고 자기보다 가르치기를 더 잘하는 사람을 자기 교회에 데려오기를 꺼려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안디옥 교회는 점점 더 튼튼한 교회로 세워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 점점 더 튼튼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로 세워져 갔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교회로 세워져 갔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구제였고 그 다음은 선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었을 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힘껏 구제 헌금을 했습니다. 구제 헌금을 모아서 흉년이 든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안디옥 교회가 두 번째로 한 일은 선교였습니다. 선교를 받은 안디옥 교회가 선교를 하게 되었고 이방인 선교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행13:2,3을 읽습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선교란 말의 뜻은 '보낸다'인데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참으로 귀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구제와 선교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했습니다. 앉디옥 교회는 나중에 소 아시아 전도와 순교의 제물이 된 이그나시우스라는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시우스는 소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복음 전파의 편지들을 써서 보낸 다음 자기는 로마에 가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그나시우스 감독은 로마로 끌려가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불이여 오라! 십자가여 오라! 야수들과 싸워 뼈들이 비틀어지고 팔 다리가 잘라지고 나의 온 몸이 부서지리. 잔인한 마귀의 고문이여 오라! 다만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라 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을 모방하게 하라."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를 닮은 교회가 전주에 하나 있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자기를 위해서는 너무 인색할 정도로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면서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바치는 교회입니다. 담임 목사인 이동휘 목사는 자기 자녀들까지 전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바쳤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는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처럼 나중에는 담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저도 중국이나 북한으로 선교사로 파송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과 뜻은 우리들의 마음과 눈과 뜻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눈과 뜻은 우리 자신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자녀들과 우리 직업들과 우리 교회들과 우리 나라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뜻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시지 않았고 그 대신 이방의 땅들인 가이사랴와 수리아 지방의 인디옥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당시 악의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과 뜻이 지금 어디를 향하고 계실 것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악의 중심부라고 말할 수 있는 북한 땅과 모슬렘 땅을 바라보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가서 사랑과 복음을 전할 쓸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옛날 성부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여기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과 고통이 가득한 저 북한 땅에 그리고 저 멀리 모슬렘 땅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다 분명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나 같이 부족한 죄인일지라도 주님께서 분명한 싸인을 주신다면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저 어두움의 땅 북한으로 다려갈 수 있기를 소원하고 바랄 뿐입니다. 피난민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능한 사람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못난 우리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사랑의 도구들로, 우리들을 전도의 도구들로, 우리들을 부흥의 도구들로 그리고 원하시면우리들을 순교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남북한 민족에세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제 우리 젊은 성가대원들 나와서 '순교자의 노래'를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위로의 아들
행 11장 19~26절 / 문기태목사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19-26)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 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인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컬어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에게 위로가 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1). 여기서 '위로'는 대단히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주님이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 위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위로라는 용어는 영어로 '진통제'를 의미합니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에서도 진통제라는 단어는 의학용어입니다.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보내주신다면 우리 영혼은 언제든지 진통제를 얻은 것과 같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 사랑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을 사람, 우리의 진가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그런 사람,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위로 중 그 어떤 위로가 이런 사람을 얻는 것과 한 순간이나마 견줄 수 있겠는가?
성경에는 자기의 본명보다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려져 본명이 그로인해 잊혀질 정도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나바로 늘 불려졌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가 얼마나 위로에 능한 사람이었고 그만 보면 위로가 떠올랐으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이 되었을까요?
바나바는 엄청난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초대교회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야하고 잡혀가 고문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믿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형을 당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속에서 놀라운 기적이 보편화된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로 깨달아지는지라 당연히 믿음을 결단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엄청난 박해를 견뎌내야만 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성도들 사이를 누비고 돌아다니며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자생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그 일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바나바의 그러한 활동은 교회안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도들이 그의 사역으로 인해 큰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상처받고 신음하던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고 회복되었으며 영적으로도 강건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교회로 밀려들어와 안디옥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신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누구나 사도 바울을 꼽습니다.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그런데 그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란 사람 때문이었습니다.그의 격려 덕택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바울이 예수를 믿었을 때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교회를 파괴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8:3).그는 스데반을 죽이던 무리의 주동인물이었습니다(사도행전 7:57∼58).이러한 소식을 초대교회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바울이 예수를 믿기는 했지만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를 반길 리 없었습니다.사도행전 9장26절은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라"
아무도 바울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을 때 바나바가 담대하게 바울을 사람들에게 소개시켰습니다."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사도행전 9:27).또한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다가 바울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했습니다.다소에 있는 바울을 격려해서 안디옥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한 것입니다.원래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자,위로자입니다.그의 격려 때문에 위대한 사도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바울이 위대하지만 바울이 바울되게 한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바나바는 별명처럼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위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위로를 통하여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서 부흥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헤의 통로로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강건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위대한 사람뒤에는 위로의 사람이 숨어 있습니다. 목숨 걸고 엘리야를 격려한 사르밧 여인이 있기에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7:8∼16).다윗이 다윗될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다윗이 절망의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다윗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다윗이 그로 인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사무엘상 20:1∼3,17).격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격려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내가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을 예수 믿도록 격려해야 합니다.곤궁에,시험에 빠진 사람을 격려해야 합니다.남편과 아내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격려해야 합니다.우리 모두 바나바가 됩시다.
이번에 영국 런던 한인침례교회 수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수양회 첫날 치유수양회를 인도하면서 참 힘들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잘 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여도 튕겨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굳어있는 얼굴을 보며 그리고 억지로 마지 못해 앉아있는 그들을 보며 답답했습니다. 힘이 빠지고 의욕이 꺽이며 빨리 마치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마음을 짜내듯하여 말슴으로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음문이 열려가는 것과 은혜가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시간에 주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간증이 참석자들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간증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분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의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 몇 년동안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몇 년동안 담임목사님과 교회 중직들과 갈등이 심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기도로 서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심령은 메말라갔고 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학간다고 교회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도망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 와서도 그런 두려운 기억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몇 년동안 한 번도 설교를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수양회를 통해 주님께서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소명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가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 큰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듣고 우리 교회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따듯한 위로가 넘치는 천국과 같은 곳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하여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곳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싸우고 미워하며 상처를 주고 낙심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그렇게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위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큰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사람도 교회에 와서 위로와 격려와 성령님의 만져주심 속에 치유받고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끈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따뜻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 위로와 격려가 넘치는 교회로 세워지게 해 달라고 쉬지말고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을 위로의 아들로 삼아주셔서 찢겨진 마음을 어루만져 싸매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위로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위로를 받습니까? 고난 속에 위로의 체험을 받은 자의 위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약함, 나의 실패가, 나의 약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가난함이 고통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가 있는 곳에 사막이 오아시로 변합니다. 미움과 질투,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이 희락과 평강으로 변합니다. 증오가 있는 곳에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위로가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위로가 있는 가정이 평안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위로가 있는 직장이 흥왕합니다. 위로가 있는 기업의 노사가 화합하고 생산성이 올라갑니다.
사람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배우자나 연인을 떠 올릴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괴롭고 외로울 때 우리 교회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우리교회의 어떤 셀을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나의 모든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창원침례교회에는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고 싶어하며 달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공동체로 우리 교회가 기억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