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
-05-
(오늘도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
알람시계가 울려서 습관적으로 거칠게 끄고 머리를 헝클였다.
아침은 괴롭다고 생각하며 일어나는데 문득 떠오른건 지욱이 얼굴이었다.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어제의 일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녀석은 없다, 혹시나 해서 살펴본 거실 욕실 현관에도 어제일이 꿈의 일부분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흔적하나 없어 속이 상했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앞에 섰는데 낯선 종이쪽지가 자석에 떡 하니 붙어 있었다. 그 안엔 녀석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써있었다.
[임규현 오늘 수업 끝나고 보자]
처음엔 놀라 입도 안다물어졌다 그리곤 곧 웃음이 나왔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수업 끝나고 보자 몇번인가를 따라 읊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세수를 하면서도 베실베실 웃었다. 침울해진 기분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어디서 보자는 말도 없고 수업끝나고 무조껀 보자고 한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를 향한 작은 배려.
소소한 마음씀씀이에 이렇게 까지 기뻐하는 스스로가 이상하다.
녀석은 자신을 모른척 하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을거다. 당당히 녀석과 다니리라 다짐했다.
이를 닦고, 구석에 쳐박혀있던 사탕 몇개를 꺼내서 교복바지에 넣었다.
앞으로 녀석이 밥을 여기서 먹겠다고 했으니까, 메뉴를 생각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어떡하지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오늘은 무슨얘기를 할까? 예전에 아빠랑 유원지 가서 생긴 에피소드 말해줘야지
아마 좀 웃겠지. 아참 그거 편지에 썼나? 그럼 무슨 얘기를 해줄까
이런 저런것을 생각하는 사이 김지욱이 너무 보고 싶어져서 시간이 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거르고 빨리 집밖으로 나와 학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낀 들뜨고 행복한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퍽퍽 하고 울려퍼지는 둔탁한 소리가 평소 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 했다.
떨려오는 다리를 겨우겨우 바닥에 지탱하여 소리의 근원지로 발을 옮겼다.
웃으며 녀석을 때리고 있는 윤경하가 시선에 잡혔다.
아마 내게 지금 칼이나 총이 있으면 윤경하를 향해 겨누었겠지..
밑에서 몸을 말고 윤경하에게 맞고 있는 녀석 김지욱..
그 굽은 어깨와 찬 바닥에 닿여 있는 신체 일부분들을 보는것만으로도 가슴에 망치를 가져다 때리는것처럼 아프다.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나와 대화를 하고 옅게 웃던 녀석이었는데..
맞을때마다 흔들리는 몸이 그 속에서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참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녀석과 대화를 하고 밥을 먹고 웃고 울고 했던 잠깐 동안의 시간이 나한텐 초등학교 3학년때 이후로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그 따뜻함을 녀석에게 받았다.
내가 다가가도 더이상 피하지 않고 따스한 눈으로 날 받아준, 순수하게 내 이야길 들어준 녀석.가까히 있던 온기가 그렇게 따뜻할수 없었는데.
눈물이 바닥을 적셨고 내 옆에 서있던 반 아이가 그런 날 보고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난 한발자국 앞으로 내 딛었다.
도울 수 없다면 나도 같이 하겠다. 이 순간만큼은 무서울게 없었다.
그때였다. 맞고만 있던 녀석이 고개를 든건.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다리가 멈추어졌다.
살짝 인상을 쓴 지욱이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섰다.
윤경하는 갑작스런 녀석의 행동에 놀란듯 뒤로 넘어졌다.
지욱이 윤경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저앉아 이를 가는 윤경하의 얼굴이 분노로 점차 바뀌어갔다.
금방이라도 윤경하의 떨리고 있는 주먹이 녀석의 얼굴을 향할 것 같았다.
윤경하의 따까리놈이 먼저 일어나 큰소리로 욕을 하며 지욱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이 씨발새끼가"
고개가 돌아간 지욱의 배를 윤경하가 가격했다.
얼굴을 찡그린 지욱의 눈이 잠시 나를 향했을때 난 뒤로 돌아 교무실로 있는 힘껏 달려갔다.
달리면서 녀석의 눈빛을 떠올렸다.나서지 말라는 눈빛.
도대체 왜? 내가 나선다고 달라지는건 없으니까? 그래 알고 있다. 내가 나선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거다
맞는건 똑같으니까 단지 두명으로 느는것뿐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보복을 당하더라도 내 방식으로 녀석을 지킬거다.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에게 확실하게 말했다. 윤경하와 그 똘마니들이 한 학생만 지목해서 괴롭히고 있다고 작년부터 계속 괴롭힘 당하고 있다고 똑박또박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곧바로 3학년 교실로 뛰어갔고 나 역시 교무실을 나와 그 뒤를 쫓았다. 작년엔 항상 고자질만하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떨었던 난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당치도않은 용기가 생긴걸까.
녀석이다, 바닥에서 일어나 무릎을 터는 김지욱 네 덕이다. 같이 하자.
지켜줄 수 없다면 곁에라도 있어줄께.
괴롭힘을 당하는 그저 불쌍한 아이인것 같아서가 아니다.
작년 널 처음 봤을때는 그저 동정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 눈빛을 보면 가슴이 떨리고 자꾸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동요된다.
난 교무실로 불려갔고, 아이들은 웅성거렸다.
선생님은 아침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난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 사이 옆으로 김지욱이 와 앉았다.
지욱인 날 보고 한숨을 쉬며 선생님 질문에 다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하필 지금와서 깨달은거지만 녀석은 목소리조차 좋다.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다. 말을 잘 하지 않아서 쉽게 느낄 수 없었지만 바로 옆에서 낮게 얘기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의 목소리에 감탄을 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선생님 말에 내가 무슨말을 하려거든 녀석이 가로막았다.
이렇게 길게 말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담임과 긴 대화 후 우리는 선도실로 향했다. 조금 떨렸다
녀석이 날 보고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선도실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같이 따르던 선생님에게 지욱이 그랬다.
"여긴 그냥 저 혼자 들어가게 해주세요"
"뭐?"
"얘는 그 상황을 보다못해 교무실로 가서 얘기한 모양인데 저희랑은 상관 없습니다"
선생님은 녀석의 말을 듣고 납득을 한 모양인지 나보고 교실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난 주저하다가 녀석이 날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교실로 돌아왔다.
애들은 내게 무슨일이냐고 하나둘 모여들어 물었고 나는 선생님이 오늘 상황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얘기했냐고 묻길래, 전같으면 아니라고 했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애들은 그러다가 윤경하한테 까이면 어쩔거냐고 되물었다.
그러게 말야 무심히 대답했다.
겁을 상실한 내 행동이 스스로도 잘 이해가 안간다.
하루가 다르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내편이 생겼다는 확신.
뭘보고 난 녀석을 내편이라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거라는 확신을 한걸까?
내가 하는 말에 짧게 대답을 하는게 전부였던 녀석에게 난 뭘 보고.
하지만 스스로 물어도 이 이상하리만큼 맘속에 꽉 들어찬 확신은 흔들리질 않았다.
윤경하패거리 그리고 지욱인 3교시가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초조해져서 선도부실로 가볼까 생각했을때 지욱이가 돌아왔다.
애들은 녀석이 들어오자 웅성웅성거렸다.
난 녀석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녀석에게 쪼르르 달려갔다.그러자 녀석이 몸을 돌려 도망가듯 교실을 나갔다 나 역시 그 뒤를 쫓았다.
걸음이 너무 빠르다. 복도끝까지 간 녀석을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휙하고 팔이 잡혀 끌렸다.
"앗"
남자둘이 들어가기엔 조금 좁은 청소도구실.
퀘퀘한 냄새가 났다. 어두운 곳에 끌려 들어와 멍해져 녀석을 쳐다 보았다.
뛰어온 만큼 심장이 뛰고 숨도 가빴지만 그게 녀석의 바로 앞이라 그런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런 좁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녀석과 둘이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설렜다. 하지만 그만큼 부끄럽기도 했다.
청소 도구실 문에 뚫려있는 얇고 긴 몇개의 구멍에서 나온 빛이 녀석의 얼굴을 옅게 비췄다.
숨막힐정도로 가까히서 뚫어져라 나를 보는 녀석 때문에 창피했다.
가쁜 숨은 나아졌지만 심장은 전보다 더 뛰었다. 몸이 마주 닿아있는데 열 오른 체온이 녀석에게 전달될까봐 걱정이 돼 귀까지 뜨거워졌다
왜 이러는거야 이러지말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면 타이를수록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 숙인 고개 위에서 한숨섞인 목소리로 녀석이 낮게 말했다.
".....나서지 말라고 했잖아"
대답없이 고개만 살짝 들어 녀석을 보았다.
"....임규현, 너 나 알아?"
"....알아....."
"..뭘"
".......김지욱이라는거..넌 분명 좋은애라는거"
내 말에 타인 얘기를 듣은 것 마냥 차갑게 웃는 녀석의 표정에 가슴이 저렸다.
"...넌 내가 어떤놈인지 몰라..."
자꾸 다른사람얘기 처럼 건조하게 말하는 녀석을 안타깝게 바라보니 눈을 피한다.
"...모르면서....나서지 말라고"
"....알고.....싶어...앞으로 서로..알아가면 돼..."
"...학교 끝나고 보자고 했잖아"
"...너가 괴롭힘 당하는걸 못보겠어"
"난 괜찮다고!"
녀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화를 내는걸까. 인상마저 쓰고 있다.
나한테는 화를 내면서 왜 때리는 상대앞에선 가만히 있는걸까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화를 내는 모습이 두렵진 않았지만 가슴안쪽은 아팠다.
"....화내지마, 미안"
미움받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사과가 아니다.
"화내지마 그냥 ...안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미안해 그래도 난 널 그냥 두고 못보겠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상대방이 싫다고 하는데도 멋대로 군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나도 물러나고 싶지 않다.
"돕고싶어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해?"
"괴롭힘 당하는걸 즐기는 사람은 없으니까."
"......"
"....나도 그래"
"...."
"너도 그럴꺼고"
"....."
"그리고..내가 직접 맞는것보다 맞는걸 보는게 더 힘들다는거, 이번에 알았다 , 돕고 싶은건 너한테만이 아니야 나 스스로를 돕고 싶은것도 있어 내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게 나를 돕는거야,"
민망하고 닭살스러운 말을 난 톤하나 바꾸지 않고 술술 내뱉었다.
녀석 팔에 소름이라도 돋진 않았을까.
여전히 내 얼굴은 뜨겁지만 피하고 싶진 않았다.
그대신 고개를 숙였다.
고백이라면 고백이다. 한 번 행동이 대담해지기 시작하니 이렇게까지 말과 행동이 도를 넘어서게 느껴질 정도로 막 나온다.
그래도 후회 하지 않는다. 친구하고 싶다는 고백 이후로 니가 좋아졌다는 식의 고백.
"...그래 알았다"
고개숙인 내 귓가에 체념한듯 작게 속삭인다.
"그대신..임규현, 앞으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돼"
"..어?"
"...이제 너도 좋은꼴 못볼거라는거 알잖아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
못말린다는 듯 타이르는 어조에 숨이 막혔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가슴이 뭉클해지는 동시에 눈안쪽이 따끔거렸다.
고개를 세차기 끄덕였다
"꼭 옆에 있을께....김..김지욱 고..고맙다"
단순한 집착이거나, 내가 처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났다는 도취감이거나, 이유가 어떻게 됐든, 난 이 녀석이 정말로 너무 좋다.
우린 그곳에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우리가 같이 교실로 들어가자 모두들 놀란듯 했다. 나는 즉시 내 가방과 여러가지 짐가지를 들고 녀석 옆자리로 옮겼다.
놀라하는 애들의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신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나를 물끄럼히 바라보는 김지욱의 시선만이 신경쓰였다.
수업이 시작됐다.
녀석을 쳐다보느냐 나는 집중하지 못하는 수업을 녀석은 생각보다 집중해서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그제야 나를 보는 녀석이 살짝 웃어준다.
심장은 자연스럽게 또 뛰었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같은 반녀석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너희들 원래 그렇게 친했냐며 묻는다.
"너네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나도 좀 끼워주라"
장난하는척 떠보는 말투가 왠지 기분 나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지욱일 응시했다. 지욱인 말없이 손에 든 팬을 벵벵 돌리며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그렇게 보는건 처음이기 때문에 나도 놀랐지만 쳐다봐진 애도 꽤 놀란 모양이다.
앞머리에 가려진 이쁜 눈동자를 내가 아닌 다른애가 본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나한테 이런 독점욕이 있었다니 놀라울 정도다.
이상하고 미묘한 공기에 기가죽은 아이는 얼마 있지 않아 노는 무리로 돌아갔다. 그애에게서 시선을 돌려 녀석을 보고 입을 삐쭉이며 물었다.
"좋지..?"
"?"
"나 말고 다른애가 너한테 관심보이니까.."
"...."
이런 질문을 하는 스스로도 짜증이 났지만 무엇보다, 대답없이 날 가만히 응시하는 그 눈이 아까는 다른애를 보았다는 것에 더 울화가 치밀었다.
절제 안되는 감정의 산이 자꾸 커져간다.
녀석이 풋하고 소리내어 웃는다.
"규현아"
"...."
성빼고 이름만 불린건 처음이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더니 단 몇 초사이에 기분이 좋아진다.
자꾸 이상한 내 마음과 더불어 나오는 행동들이 싫어서 그저 이를 꽉 물고 그러기 싫은데도 녀석을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책상으로 돌렸다
"누가 나한테 관심가지는거, 싫다"
그말에 다시 녀석을 흘끔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니 또 가슴은 울렁거리고, 그 입술끝에 걸린 웃음을 보자 손안쪽이 지끈거린다.
컨트롤 할 수 없는 이런 마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나도..싫어?"
"...그렇다면?"
"...."
녀석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 입술을 깨물고 책상에 엎드렸다.
섭섭하거나 서러운 감정은 상대방에게 기대를 했을때 생기는거라고 알고 있다.
녀석은 나한테 분명히 나서지 말라고 했고 나를 거부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제와 오늘 무척 행복했다. 계속 녀석과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녀석이랑 단둘이.
단 둘이란 단어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녀석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들은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하다. 겨우 말을 튼건 어제인데 난 마치 몇년 사귄 사람 처럼 녀석을 대한다.
그래. 녀석이 부담스러워 할만도 하다. 스스로 납득 해놓고 그것에 상처를 받는다.
무엇보다 널뛰기 하는 내 감정표현때문에 녀석이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이 됐다. 내가 만약에 왕따 같은걸 당하지 않았던 평범한 애였다면, 나중에라도 내 이런모습을 싫증낼 일이 없었을까?
이렇게 감정들이 차고 흘러넘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종이 치고 선생님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을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엎드린채 다음 수업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깐 잠에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귓가에 수학 선생님의 나이든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드르륵 하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녀석의 체취가 좀 더 가까워졌다. 심장이 쾅쾅쾅 울리며 녀석을 민감하게 의식한다. 녀석의 손이 내 머리에 닿는것이 느껴진다.
그 감촉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지욱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앞에 있다.
녀석 역시 엎드려 얼굴을 내쪽으로 돌린채로 나를 보고 있다.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웃으며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 듬어 준다.
씩 웃는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도 코도 입도 얼굴 전부다.
"...싫지 않다"
"..?"
"임규현 넌 싫지 않아"
"......"
코가 닿을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준다.
등에 닭살이 돋고 허리가 지끈하고 울렸다.
몸에 열이 잔잔히 올라와 퍼진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난...싫다.........."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를쓰다듬는 손은 멈추었지만 그 손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것같이 따뜻한 녀석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아서 눈을 뜰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싫다....."
감은 눈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오는걸 알 수 있었다.
꾹 참았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선생님한테 들키면 어떡하지 고민할 틈도 없이 눈물은 참고서를 적셨다.
녀석은 머리에 있던 손을 눈가로 가져와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상하다.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녀석은 상냥하다.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너에게 달려들었다면 이런 따뜻한 모습들은 내가 아닌 어떤 누군가의 차지었을까?
다른 녀석을 이렇게 만지고 그 온기를 느끼게 해주었을까?
내 눈물로 젖어가는 손을 거두지 않는 이 자상한 녀석에게 있어 내가 가장 특별한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랬다.
수업이 다 끝나고 녀석은 약속대로 우리집에 와 주었다.
하교길에 누군가 함께 한다는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게 지욱이기 때문에 그런거겠지만 아무튼 행복했다.
말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어제 남은 김치찌개를 데워 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있는 소고기를 꺼내 쇠고기무우국을 끓여주었다.
꽤 많은 양을 끓였는데도 다 먹는 녀석이 뭐랄까 대견스러웠다.
녀석과 있으면 나도 모르던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낯설지만 싫지 않다.
설거지를 하는 도중에도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녀석 옆에 앉아있으면서도 녀석이 돌아가는 시간이 올까봐 자꾸 시계에 눈이 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녀석과 함께 하는 시간은 너무도 금방 지나갔고 녀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서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꾹 참았다.
말도 섞지 못하던 그때보다 오래 같이 있었는데도 더 보고 싶어지는 이유가 뭘까.
지욱의 생각을 하면서 편지지를 꺼냈다.
이젠 편지를 쓸 필요가 없어졌지만 습관처럼 남아있는 버릇은 이런저런 얘기로 종이 한바닥을 다 채웠다.
오늘 밤 역시 녀석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
첫댓글 ㅎㅎ... 이 츤데레 김 지욱. 싫지 않다고 뻔히 말해줄 거면서 일부러 튕기기나 하구...u///u
어제는 김치찌개, 오늘은 쇠고기무우국... 규현이 같은 엄마 있음 좋겠어요 맨날 맛난 거 해줄 거 같아. 경하가 곧 저 훈훈한 공기를 깽판 쳐놓겠지만 그래도 둘이 어떻게든 잘 견디겠죠?ㅠㅠ
지욱이는 무뚝뚝하고 규현이는 곧 잘 붙임성 있게 굴다가도 아차 싶으면 물러서는 거 같아서 둘이 눈이 맞을 무렵은 어떨까 궁금해요. 벌써부터 질투쟁이 짓을 하는 걸 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규현이가 호모포비아면 어느 순간 자기 감정을 알고선 주춤주춤 도망가서 지욱이한테 상처 주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요.
매일 중얼거리듯 겨우 내뱉는 정도가 다였던 지욱이가 한마디 한마디 똑바로 말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규현이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남달라보일 거 같아요. 제목이 너무 아련돋아서 벌써부터 결말이 새드는 아닐까 겁을 먹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괴롭히는 것만 빼면 둘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ㅠㅠ 내일 웃으며 그 편지 건넬 규현이 모습이 상상돼서 즐겁네요. 지욱이도 같이 웃으면서 받아주려나요u///u
으으 경하가 미운 캐릭터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콕 집어서 너 싫어, 하고 분류하기 싫은 미련이 남아서 그런가 조용히 있어줬음 좋겠어요, 괜히 까불다가 궁둥이 팡팡 맞지 말구... 잘봤습니다.:)
규현이가 참 저도 못하는 요리를 슥삭슥삭 해내는 모습 보면 대견스럽고 그래요 참, 전에도 말씀드린것 같지만, cein님께선 너무 통찰력이 뛰어나셔서요...ㅇ_ㅇ 댓글 읽을때마다 눈을 요렇게 뜨게 된답니다
아무래도 제가 '너를 생각하며' 를 이미 많이 써놓은 상태라 그런지 녀석들 마음을 내다보는 듯한 cein님의 댓글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답니다
멋지십니당!! 제목 아련돋나요? 아 제목짓는거 무척 힘들었는데 아련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목짓는건 그래도 반정돈 성공한것 같아요, 마지막이 새드인지 해피인지는 이 소설이야말로 보시는분이 판단하게 될거라구 생각해요 저두 사실 궁금하기도 하구요,
저두 경하가 밉긴 하지만 아주 싫지는 않답니다..그냥 멍청이꼬마같은 인상이 강해요 하하 이런말을 제가 해도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항상 이렇게 좋은댓글 ㅠ 감동스런 얘기들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구 있습니다
저 감동백만바가지 마시고 또 글 올리러 갈게요 ~~~
왠지 지욱이가 싸움을 잘 할거 같은 생각이 드네요. 아니 잘해서 규현이 꼭 지켜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다음 편,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하하 달달콩콩님 말씀대로 지욱이가 규현이를 지켜줬음 좋을텐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지욱이가 숨기고 있는것이 많아 보이는게 사실인데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도 이 소설에 포함돼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당^^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몰아보는거라 담편이 궁금해 답글쓸 생각도 못한 윤이맘ㅋㅋㅋㅋㅋ드뎌 인공이의 실명이 공개 됐네요 임규현ㅋㅋ조금씩 달달 모드로 들어간듯 ㅋㅋㅋㅋ
닉네임이 너무 귀여우세요 인공이의 실명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규현이 행동덕에 이녀석들 달달모드로 진입한것 같긴 한데 그게 오래가길 바라지만 어떻게 될지...저도 걱정입니다 하하 앞으로도 잘 부탁하구요~ 댓글 감사해요!!
윤경하는 이름은 참~ 괜찮은데 하는 짓은 참~ 싫어요..-_- 얘 개과천선하는 날 오나요? 사회 봉사 29년 18개월에 추가로 13시간 내리고 싶네요. 망아지 같은 아이.. 크흠. 이번 편은 비록 지욱이가 구타를 당했어도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달달했어요. 소제목은 전화위복이랄까요? 아이들의 불행이 사라진 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나.. 아무 것도 아닌 관계에서 이제는 나란히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니 대단한 발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애틋한 것들. ㅠㅠ 너희에게 나를 강제로 선물하고 싶구나ㅋㅋㅋㅋㅋ 교환, 반품 무엇 하나 용납 안 되는 나란 선물ㅋㅋ 오늘 일을 계기로 하여, 앞으로 두 아이가 얼마나 더 두텁고 깊은 사이가
되고 관계가 나아가는 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아직은 둘 사이에 좀 더 신뢰가 쌓아져야 할 듯 해요. 흐흐. ^-^ 성장물은 참 좋은 장르에요. 어른들의 연애도 재밌겠지만, 아이들이의 모습을 지켜 보고 공감하면서 이해하고 같이 자라는 느낌? 몸은 이미 다 자랐지만-_-;; 애들의 생각이나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좋네요. ㅠㅠ 그리고 다 자라서 단단해진 모습 보면 괜히 내가 뿌듯해지고ㅋㅋ 아무튼 그래요~ 항상 감동 있게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11 19:39
또보러 왔어요 또 봐도 역시 재미있네요. 끝이 넘 궁금 해요 처음 지욱이 규현을 보고 느낀 감정 어떤시점에서 사랑을 느꼈는지 궁금한것 넘많아요 ㅠㅠ 작가님의 남은 이야기를 들려 주심 안될까요?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0.27 2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