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하남 낙양의 북쪽 근교에서 출토되었다는 고자(高慈)의 묘지명(墓誌銘) 비문(碑文)이 현재의 요서(遼四)지역이 고구려의 옛 영토였다는 명백한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고자(高慈)의 부친 고문(高文)은 647년 당장(唐將) 설만철(薛萬徹)이 거느린 군사 3만여명이 박작성(泊灼城) 성주 소부손(所夫孫)의 고구려 군사 1만여명을 격파하고 성을 포위하자 오골성(烏骨城) ·안시성(安市城)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고구려가 패망할 당시 당나라에 투항하여 669년에 명위장군행우위위익부좌랑장(明威將軍行右威衛翊府左郞將)과 운휘장군행좌위위익부중랑장(雲麾將軍行左威衛翊府中郎將)의 벼슬을 지내면서 식읍 2천호를 받고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대조영(大祚榮)의 발해 건국에 계기를 마련해 준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696년부터 697년까지 아들과 함께 거란족과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마미성(磨米城)에서 부자가 함께 전사하게 된다.
이 마미성의 기록을 보는 순간 필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바로 고구려의 요서경략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리도 사료를 중요시하던 강단사학자들은 이 비문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읽었더라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문외한들인가?
당황(唐皇)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한 후 옛 고구려 땅에 9도독부, 40주를 두었다. 이후 남은 것은 14주라고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미주(磨米州)이다. 바로 고자(高慈)가 전사한 장소인 전사한 마미성(磨米城)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지명이다. 따라서 마미성은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다. 당시 이진충(李盡忠)은 송막도독, 손만영(孫萬榮)은 귀순주 자사였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곳은 영주였다.
다시 비문에서 고자(高慈)의 전사 장면을 보도록 한다.
“이윽고 도적이 세를 떨쳐 압박하고 주야로 공격할 때 외로이 싸우는데 구원(救援)은 멀고 양식이 다하고 화살은 떨어져 죽음을 보기를 삶과 같이 했으니 그 기개가 높았다. 부자가 모두 전사하고 적정(賊庭)에 항복하지 않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 5월 23일 마미성(磨米城) 남쪽에서 죽으니 춘추 33세였다.” (寇賊憑陵晝夜攻逼?孤?闊糧盡矢?視死猶生志氣?勵父子俱陷不屈賊庭以萬歲通天二年五月?三日終於磨米城南春秋?有三 )
아마도 고문(高文), 고자(高慈) 부자는 홀로 적진 깊숙이 남아 최후까지 구원병을 기다리며 전투를 벌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구원병은 오지 않고,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져, 결국 마미성 남쪽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것이다.
이 비문에서 결정적 증거는 그 다음 명문에 있다.
“짚으로 만든 개가 한번 이르자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의지하고, 백랑성(白狼城)의 구원이 끊어지자 황룡수(黃龍戍)에 사람이 드물구나.”(有違芻狗一致美惡同依白狼援絶黃龍戍稀)
위 비문의 내용과 명문을 하나하나 비교하면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도적이 세를 떨쳐 압박하고 주야로 공격할 때 외로이 싸우는데 구원(救援)은 멀고” ------“백랑성(白狼城)의 구원이 끊어지자”“양식이 다하고 화살은 떨어져 죽음을 보기를 삶과 같이 했으니 그 기개가 높았다. 부자가 모두 전사하고 적정(賊庭)에 항복하지 않았다.” ----- “황룡수(黃龍戍)에 사람이 드물구나”
마미성의 구원병은 백랑성에 있었다. 백랑성에서 구원이 끊겼지만 고문(高文), 고자(高慈) 부자는 최후까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벌였다. 바로 황룡수(黃龍戍)에서 말이다. 그리고 결국 마미성 남쪽에서 최후를 맞았다.
황룡수(黃龍戍)는 바로 황룡성이 있었던 곳이고, 강단사학계에서는 지금의 조양 남쪽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최후까지 전투를 벌였으니 황룡수는 결국 마미성이다. 따라서 지금의 조양(朝陽) 인근이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인 당나라의 마미주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조양인근이 고구려 땅이라는 증거는 통전(通典)에도 나온다. 진(晉)나라 때의 요동에 대한 설명에서 “分遼東為平,治昌黎;今安東府”라고 하였고, 당나라 때 안동부에 대한 설명에서 “大唐置安東都護府,前上元中,移於所.今府於遼東城”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안동부=요동성=창려 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창려는 수경주에 의하면 백랑성과 황룡성 사이, 백랑수 가에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의 조양(朝陽)보다 서쪽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을 명백한 증거로 입증할 수 없어 계속 사서에서 영주-유성의 위치만을 찾아 헤메었는데 고자(高慈)의 비문 소식은 필자의 궁금증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이제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
요동성은 창려다. (아마도 능원과 조양 사이) 마미주는 조양이다. 따라서 당나라와의 전투를 벌인 요수는 난하 이서의 강이 되어야 한다.
이거,,웃기는 얘기군요. 글쓴이가 문맥에서 황룡수=마미주란 등식을 넣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황룡주가 마미주가 될 개연성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비문에서 마미주를 전부 마미성으로 등치시키고 있는데 이때만 황룡수로 바꿀 껀 또 뭔가요? 또한 성과 수는 엄밀히 말해서 다른 형태의 방어시설입니다. 주로 편입될 정도로 규모가 있는 마미성이라면 鎭이라면 모를까 戍로 표현할 수 없지요. 따라서 이 글의 결론은 헛소리입니다.
한단인님. 윗글은 제가 과거 다른 곳에 올렸던 글인데 문장이 조금 바뀐 경향은 있으나 내용은 전적으로 동일하므로 제가 책임을 져야겠군요. 1. 고문, 고자 이 두 부자가 죽은 곳이 마미성 남쪽이고 황룡수였다는 제 생각에는 동의하시는지요? (앞은 비문이고 뒤는 명문입니다. 따라서 황룡수 라고 표현한 이유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 2. 마미성은 마미주의 성이라는데 동의하시는지요? (계 또는 탁현하면 우리가 유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3. 백랑성과 황룡수의 관계에서 황룡수를 무엇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수경주를 읽어보면 백랑성 다음에 나오는 황룡은 황룡성 밖에 없지 않을까요? )
계속... 당시 거란의 반란으로 황룡성은 폐허가 되었을 것이고, 구원병도 없는 상황이니 이를 황룡수라고 한다고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더구나 명문인데... 마지막 문장 '요동성은 창려다. (아마도 능원과 조양 사이) 마미주는 조양이다. 따라서 당나라와의 전투를 벌인 요수는 난하 이서의 강이 되어야 한다.' 의 부분은 제가 글을 올린 곳에 유성에서 발견된 손씨 무덤군의 비문이 있으므로 가능성에 없을 것 같다고 수정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만 나머지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웃기는 얘기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음,,일단 제가 무턱대고 웃기는 소리라고 한 건 사과드립니다. 별로 안좋은 옛 버릇이 튀어나오는 통에,,일단 지적하신 부분을 보면 다른 건 어느 정도 동의를 하겠습니다만 1번의 경우 는 쉽게 동의할 수 없군요. 고문, 고자 부자의 전사지가 마미성 남쪽인 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마미성 남쪽이 황룡수라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문장을 보면 白狼援絶 黃龍戍稀 라고 되어 있는데 문장 자체에 별다른 어조사가 없는 걸로 봐서 두 문장은 앞문장이 뒷문장에 종속된 인과 관계가 아닌 별개의 사건, 즉 동격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직역하면 백랑의 구원이 끊어지'고' 황룡수가 희박하니 라고 해석되어 지는 겁니다.
또한 자신의 상황을 서술 할 땐 따로 고유명사를 붙이지 않고 대명사로 서술하는게 보통입니다. 만약 황룡수가 마미성이면 고자는 백랑절색 성희 라고 써야지 황룡수 희라고 쓰는 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즉 저것은 고자가 이는 마미성 자체의 현지 상황이 아닌 마미성 구원 가능 세력에 대한 서술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저건 청골님이 지적하신대로 명문입니다. 고자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 고자 주변의 사람이 전해들은 것을 옮겨적은 것인데 그렇다면 고구려 사람인 고자가 중국식 지명인 황룡수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전해들은 사람이 당시의 행정 명칭인 마미주나 마미성을 놔두고 굳이 황룡수라 쓰는 것도 어색합니다.
그리고 수와 성의 개념 설명에서 성의 상황이 나빠졌으니 수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는 설명은 좀 작위적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후한 때 군으로 편제된 현도군의 경우 계속된 전쟁으로 소속된 민가의 수가 수백호 단위로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으로 편제되지도 않고 현으로 불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 급이나 될 정도 규모의 마미성이 황폐해졌다고 수로 표현된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마미성이 주로 편제되었다는 것은 군사, 행정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진, 수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시설이죠. 북위 때 예외가 발생하지만 북위 말 특수한 일시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마미성은 수가 될 수 없습니다.
비문과 명문을 비교해보자는 것이지요. 명문은 비문을 근거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白狼援絶黃龍戍稀 중에서 黃龍戍稀는 바로 고자 부자의 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문에 따르면 孤?闊糧盡矢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ㄸ라서 고자부자가 사망한 곳인 마미성 남쪽은 황룡수와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와 성의 개념에서.... 는 백랑은 백랑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 평주에 보면 백랑은 백랑수입니다. 당시 거란의 반역으로 현재의 요서지방은 중국인이 전무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자리만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황룡성을 황룡수라고 한다고 하여 잘못된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미주가 비록 주(州)라고 하나 실제 당이 통치하지 않았던 기미주에 해당하니 수(戍) 자리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른거 하다가 잠시 들어와서 댓글을 짧게 남깁니다. 황룡수희의 부분이 정확히 고자 부자의 전사지인지, 아님 거란 원정 이후의 상황인지, 혹은 전투 중 거쳐가던 곳인지, 혹은 마미성을 구원할 지원 세력이 될지는 이 문장만으로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즉 청골님의 해석은 확대해석인 감이 없지 않다는 겁니다. 또한 마미성이 황룡수일 경우 인근의 백랑수도 645년 당시 고구려 영토라는 말씀이신데 백랑성은 본래 북연의 영역이었다가 436년 4월 북위에 의해 함락된 이후로 고구려가 이 지역 부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황룡=마미라는 등식은 모순이 생깁니다.
그리고 진과 수는 제가 당의 행정, 군편제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진, 수는 기미주 같은 속령에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본토의 변경지대에 설치되는 군사 시설로 알고 있습니다. 진의 경우 최대가 500명, 수의 경우는 최대 50명으로 편재되며 요즘의 대대와 소대 정도 규모로 주급의 성이 편제되지도 않고 기미주라 설치도 안됩니다. 행정 편제에서 황룡수가 마미성에 속한 수라면 모를까 황룡수가 마미성이라 볼 여진 없으며 설사 속했다고해도 비문이 마미성 남쪽을 황룡수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시설에서 전투를 치른게 아닌 마미성을 나오다가, 혹 성 남문에서 사망한 것이지 특정 수에서 전사한게 아니란 것 아닐지요?
솔직히 말해서 댓글을 저렇게 적긴 했는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청골님이 저런 추론을 내린게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합니다. 몇 시간 동안 생각을 해봤는데,,저도 긴가 민가해졌습니다. 분명 저 부분은 문맥상 고자 부자의 마지막 상황을 나타내야할 부분이긴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썼던 부분이 미심쩍은 면이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북위의 백랑성 점령 이후 시간이 지난 뒤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 여부를 따져봐야겠죠. 일단은 명문에서 저 문장이 나온 배경이나 정황을 좀 더 고찰해야할 필요가 있는게 아닌가 싶군요. 제 능력이 모잘라 아직은 이렇게 밖에 생각할수 없나 봅니다.
첫댓글 4번째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논외거리는 되지 못한다 생각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지식이 짧은 저로서는 처음 보는 내용이니 살짝 참신하기까지 합니다.
혹시 당서 지리지 인용한 내용중 마미주가 언급된 부분...백제지역 아닌가요? 현경5년백제를 평정하고 설치한 주...그리고 요동도호부는 여러번 이동했는데...그럼 평양성=요동성=신성=...?
고구려 지역에 당이 설치한 마미주가 있긴 있습니다.
이거,,웃기는 얘기군요. 글쓴이가 문맥에서 황룡수=마미주란 등식을 넣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서 황룡주가 마미주가 될 개연성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비문에서 마미주를 전부 마미성으로 등치시키고 있는데 이때만 황룡수로 바꿀 껀 또 뭔가요? 또한 성과 수는 엄밀히 말해서 다른 형태의 방어시설입니다. 주로 편입될 정도로 규모가 있는 마미성이라면 鎭이라면 모를까 戍로 표현할 수 없지요. 따라서 이 글의 결론은 헛소리입니다.
흠, 그렇군요. 윗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내용이 옳은 게 아니라면, 결론도 틀려질 수 밖에 없겠죠.
한단인님. 윗글은 제가 과거 다른 곳에 올렸던 글인데 문장이 조금 바뀐 경향은 있으나 내용은 전적으로 동일하므로 제가 책임을 져야겠군요. 1. 고문, 고자 이 두 부자가 죽은 곳이 마미성 남쪽이고 황룡수였다는 제 생각에는 동의하시는지요? (앞은 비문이고 뒤는 명문입니다. 따라서 황룡수 라고 표현한 이유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 2. 마미성은 마미주의 성이라는데 동의하시는지요? (계 또는 탁현하면 우리가 유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3. 백랑성과 황룡수의 관계에서 황룡수를 무엇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수경주를 읽어보면 백랑성 다음에 나오는 황룡은 황룡성 밖에 없지 않을까요? )
계속... 당시 거란의 반란으로 황룡성은 폐허가 되었을 것이고, 구원병도 없는 상황이니 이를 황룡수라고 한다고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더구나 명문인데... 마지막 문장 '요동성은 창려다. (아마도 능원과 조양 사이) 마미주는 조양이다. 따라서 당나라와의 전투를 벌인 요수는 난하 이서의 강이 되어야 한다.' 의 부분은 제가 글을 올린 곳에 유성에서 발견된 손씨 무덤군의 비문이 있으므로 가능성에 없을 것 같다고 수정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만 나머지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웃기는 얘기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음,,일단 제가 무턱대고 웃기는 소리라고 한 건 사과드립니다. 별로 안좋은 옛 버릇이 튀어나오는 통에,,일단 지적하신 부분을 보면 다른 건 어느 정도 동의를 하겠습니다만 1번의 경우 는 쉽게 동의할 수 없군요. 고문, 고자 부자의 전사지가 마미성 남쪽인 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마미성 남쪽이 황룡수라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문장을 보면 白狼援絶 黃龍戍稀 라고 되어 있는데 문장 자체에 별다른 어조사가 없는 걸로 봐서 두 문장은 앞문장이 뒷문장에 종속된 인과 관계가 아닌 별개의 사건, 즉 동격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직역하면 백랑의 구원이 끊어지'고' 황룡수가 희박하니 라고 해석되어 지는 겁니다.
또한 자신의 상황을 서술 할 땐 따로 고유명사를 붙이지 않고 대명사로 서술하는게 보통입니다. 만약 황룡수가 마미성이면 고자는 백랑절색 성희 라고 써야지 황룡수 희라고 쓰는 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즉 저것은 고자가 이는 마미성 자체의 현지 상황이 아닌 마미성 구원 가능 세력에 대한 서술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저건 청골님이 지적하신대로 명문입니다. 고자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 고자 주변의 사람이 전해들은 것을 옮겨적은 것인데 그렇다면 고구려 사람인 고자가 중국식 지명인 황룡수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전해들은 사람이 당시의 행정 명칭인 마미주나 마미성을 놔두고 굳이 황룡수라 쓰는 것도 어색합니다.
그리고 수와 성의 개념 설명에서 성의 상황이 나빠졌으니 수로 불러도 상관이 없다는 설명은 좀 작위적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후한 때 군으로 편제된 현도군의 경우 계속된 전쟁으로 소속된 민가의 수가 수백호 단위로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으로 편제되지도 않고 현으로 불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 급이나 될 정도 규모의 마미성이 황폐해졌다고 수로 표현된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마미성이 주로 편제되었다는 것은 군사, 행정을 모두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진, 수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시설이죠. 북위 때 예외가 발생하지만 북위 말 특수한 일시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마미성은 수가 될 수 없습니다.
비문과 명문을 비교해보자는 것이지요. 명문은 비문을 근거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白狼援絶黃龍戍稀 중에서 黃龍戍稀는 바로 고자 부자의 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문에 따르면 孤?闊糧盡矢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ㄸ라서 고자부자가 사망한 곳인 마미성 남쪽은 황룡수와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와 성의 개념에서.... 는 백랑은 백랑성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 평주에 보면 백랑은 백랑수입니다. 당시 거란의 반역으로 현재의 요서지방은 중국인이 전무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자리만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황룡성을 황룡수라고 한다고 하여 잘못된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마미주가 비록 주(州)라고 하나 실제 당이 통치하지 않았던 기미주에 해당하니 수(戍) 자리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른거 하다가 잠시 들어와서 댓글을 짧게 남깁니다. 황룡수희의 부분이 정확히 고자 부자의 전사지인지, 아님 거란 원정 이후의 상황인지, 혹은 전투 중 거쳐가던 곳인지, 혹은 마미성을 구원할 지원 세력이 될지는 이 문장만으로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즉 청골님의 해석은 확대해석인 감이 없지 않다는 겁니다. 또한 마미성이 황룡수일 경우 인근의 백랑수도 645년 당시 고구려 영토라는 말씀이신데 백랑성은 본래 북연의 영역이었다가 436년 4월 북위에 의해 함락된 이후로 고구려가 이 지역 부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황룡=마미라는 등식은 모순이 생깁니다.
그리고 진과 수는 제가 당의 행정, 군편제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진, 수는 기미주 같은 속령에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본토의 변경지대에 설치되는 군사 시설로 알고 있습니다. 진의 경우 최대가 500명, 수의 경우는 최대 50명으로 편재되며 요즘의 대대와 소대 정도 규모로 주급의 성이 편제되지도 않고 기미주라 설치도 안됩니다. 행정 편제에서 황룡수가 마미성에 속한 수라면 모를까 황룡수가 마미성이라 볼 여진 없으며 설사 속했다고해도 비문이 마미성 남쪽을 황룡수라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시설에서 전투를 치른게 아닌 마미성을 나오다가, 혹 성 남문에서 사망한 것이지 특정 수에서 전사한게 아니란 것 아닐지요?
솔직히 말해서 댓글을 저렇게 적긴 했는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청골님이 저런 추론을 내린게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합니다. 몇 시간 동안 생각을 해봤는데,,저도 긴가 민가해졌습니다. 분명 저 부분은 문맥상 고자 부자의 마지막 상황을 나타내야할 부분이긴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썼던 부분이 미심쩍은 면이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북위의 백랑성 점령 이후 시간이 지난 뒤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 여부를 따져봐야겠죠. 일단은 명문에서 저 문장이 나온 배경이나 정황을 좀 더 고찰해야할 필요가 있는게 아닌가 싶군요. 제 능력이 모잘라 아직은 이렇게 밖에 생각할수 없나 봅니다.
'한심한 밥벌레들'이라는 욕부터 하고 시작한 이야기치고는 참을 수 없이 가볍네요. 대체 저런 근거도 없는 추측으로 누굴 설득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