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늙어가나 보다
새해 첫날부터 앓았다. 제법 심하게 앓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해 마지막날 밤부터 앓았으니 해를 넘기면서 앓은 것이다. 영국 시인 존 돈은 앓아누워 사경을 헤매던 어느 날, 밤새도록 앓고 약간 정신이 든 아침녁에,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를 듣고, “누구를 위하여 – 즉, 누가 죽었다고 -- 종을 치는가” 하고 물으면서 혹시 본인이 그 주인공이 아닌지 두려워하였다. 나는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새해 아침의 차례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연말에 내가 무리를 하였나? 내가 뭘 했지?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설날 일주일 전에 작은딸네 집에 올라왔다. 50일전쯤에 출산한 이 아이가 몸도 좀 안좋고 이래저래 힘들어하여, 내가 뭐라도 도와주려고 올라왔던 것이다. 애기하고 몇십분 놀아주는 것과 역시 몇십분 동안 강아지 산책시켜주는 것이외에는 한 일이 없었지만,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며칠을 지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산모의 건강에 대하여 근심을 하였어야 하였으니……
섣달 그믐날에는 어머니집에 다녀왔다. 큰딸네 집에 들러 큰딸네 차를 빌려타고 순자(포메라니안, 12개월 정도)를 싣고 갔다. 나 혼자 간 것이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순자를 잃어버릴 뻔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끔찍하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 순간 중 하나였다. 어머니네 아파트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순자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차 안에 있는 짐을 꺼냈다. 차 문을 잠그었다. 이제 순자를 안고 주차장을 나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노인네는 아들 얼굴은 보지도 않고 순자를 보고 반가와하실 것이다. 그런데 순자가 나한테 안기지를 않았다. 요리조리 도망을 가는데,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순자는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들 밑으로 달아나기도 하고 화단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순자와 나는 몇 번 본 적이 없는, 친하지 않은 사이이며, 지금 순자는 목줄도 하지 않은 상태다. 주차장에서는 띠엄띠엄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으며, 내가 심하게 몰아붙이면 순자는 주차장 바깥으로, 즉 차도로 달아날 태세다. 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으며 내 몸은 완전히 땀범벅이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방패처럼 길을 막아주어 순자의 주의가 흩어졌을 때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순자를 덮쳤다. 아, 잡았다. 정말로 십년감수했다. 만약 나한테 10년 이상의 수명이 남아있었다면 말이다. 한참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 내 바지의 왼편 무릎이 찢어져 훤하게 구멍이 나 있었다. 물론 그 안에 든 무릎팍은 엉망으로 까져 있었으며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와 (순자를 실은 채로) 성묘를 갔다.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하였다. 그런데 차를 잘못 대었다. 이 차는 오른쪽에 주유구가 있었던 것이다. 주유소직원이 핀잔을 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하였다.
“아아 미안해요. 내 차가 아니라서. 딸네 차거든요. 흐흐.” 할아버지들은 원래 이렇게 나가게 되어있으니까.
“가만 있거라. 차를 어떻게 돌려야지?” 내가 이렇게 혼잣말을 할 때 나는 짐짓 웃는 표정을 짖고 있었지만, 주유소직원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당연하지. 내가 잘못하였으니까. 그 직원의 경멸적인 눈총을 받으며 어찌어찌하여 차를 고쳐 대었다.
“주유구를 열어주세요.”
“예. 알았습니다. 에 또 주유구 여는 단추가…… 이건 아니고, 가만 있거라……” 안경을 벗고 코를 박고 찾아도 그 단추는 나오지 않았다.
“아, 뭐하세요. 주유구 열어 달라고요. 주유구요.”
이럴 때는 침착함이 최고다. 당황하면 눈앞에 있는 것도 안보이는 법이니까. “아니 이게 어디로 도망갔지? 가만있거라…..”
주유소직원은 이제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업신여기기 시작하였고, 나는 침착함을 되찾기는커녕 완전히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 참내. 증말 짜증나게구시네. 차문을 열어보세요.” 자기가 주유구 여는 단추를 찾아주겠다는 것이다.
“……”
“뭐 하세요? 문을 여시라구요. 문요. 운전석 문 말이예요.”
“가만 있거라. 문을 여는 단추가……”
“문 못여세요? 문 못여시면 차에서 어떻게 내리세요? 타기는 또 어떻게 타고.”
의왕 톨게이트 옆 북쪽 방향에 있는 휴게소의 주유소였다. 그 녀석은 정확히 이렇게 말하였고, 그 말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평생 나의 레파토리로 삼지 않을 듯했던 말들을 쏟아내었다.
“넌 임마 내 나이 안될 줄 아니? 넌 애비애미도 없니?” 이 녀석도 50대 중반은 넉근히 되어 보였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는 정말 교양없는 늙은이였다. 진부한 상투적 표현에, 위엄도 없고...... 부끄럽다.
“평생 주유소 알바나 해쳐먹어라.” 이 레파토리까지 꺼낼 뻔했지만, 영웅적인 자제력을 발휘하여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의 이 자제력을 원망하였다. 그 차는 QM3였는데, 알고 보았더니, 주유구 여는 단추가 없는 차로, 바깥에서 그냥 주유구를 열 수 있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묘는 갔으며 그럭저럭 참배를 하였다. 고인은 생전에 막걸리와 육포를 즐겼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것들을, 정종 및 북어포와 더불어 준비하였으며, 항상 하던대로 조화 네 송이도 준비하였다. 나는 빛바랜 그 전의 조화를 제거하고, 새 조화를 두 송이씩 상석의 좌우에 꼽아넣었다. 기존의 조화가 얼마나 빛이 바래져있는지를 보면, 내가 얼마나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보다 더 슬픈 것은, 고인은, 나를 따라 산소까지 올라온 순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후 어떻게 살고있는지를 전혀 몰라.
의외로 길이 막히지 않아,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큰딸네 집에 들어왔다. 따뜻한 방에 들어오니, 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앓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몸살 증세였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구랍 그믐날 일이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비몽사몽간에 종소리가 들려서, 나는 누군가를 위한 조종의 소리인가 하고 생각하였지만, 차례 지내러온 아이들이 초인종 누르는 소리였다. 내가 차례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다. 며칠을 앓고 오늘 일어났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67.9키로. 평소에는 73키로니 5키로가 빠진 것이다. 이렇게 늙어가나 보다. (끝)
첫댓글 앓고 나았다니 우선 안도. ㅋ 많이 아프면 차례상에 초대 될수도 있음.
신혼집 일주일 더부살이.. 그거 스트레스임. 외출 시 개는 꼭 목줄 할 것.
담엔 남의 차에 절대 주유치 말 것. 5키로 감량? 소고기 일주일 들 것.
몸이 늙은 게 아니고 마음이 늙었다 여기니...약한 마음 고쳐 먹기를~
일간 얼굴 보며 한잔 빨아보자구~~ ㅎㅎ
민형이도 크게 다쳤대메? 이젠 진짜로 몸조심해야겠다.
늘 다니던 등산로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민형이가 다리 골절상을..
수술 경과는 좋은 듯... 그래 다들 힘내자~ 민형 파이팅!!
영태 고생 많았구나. 다들 힘내자~ 파이팅 ㅎㅎ
진섭도 파이팅!!!
영태가 과세 안녕하지가 않았었네...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지요 할배 ㅎㅎㅎ 이젠 몸이 아프면 전에 보다 좀 오래가 그게 나이 먹은거지. 근데 그 주유소 놈 때문에 화가 나네 알바인지 직원인지 몰라도 주유 서비스 일을 하는 놈이면 차종에 따라 주유구 여는 방법을 다 알고 있어야지 그걸 모르고 고객을 닥달하다니 나 같은면 크게 싸웠다 홍관희 같은면 더 크게 싸웠고
병진형 이젠 승질 죽일 때도 되지않았어?
관희형은 본성이 그러하니 냅둬야겠지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