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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 : 19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고전 9: 23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
3. 바울의 복종과 절제 ( 9 : 19-27 )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 : 19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
바울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1]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 빌 3: 12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롬 1: 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2]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 고전 11: 24-25 –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 롬 9: 3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
* 고후 4: 5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3]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고전 9: 20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 처신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마치 자신도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의 의무를 지키는 자인 것처럼 처신하였다.
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 행 16: 3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
* 행 21: 17-29 –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2]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 표현이다(Thomas).
Ⓑ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 자들이다(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더 이상 그에게는 율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같이 한 것은 그가 유대인 사이에서 소외(疏外)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 롬 9: 3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갈 2: 7 -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이로 보건대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 진정한 자유자였다.
고전 9: 21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 -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그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을 인해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는데, 그 까닭은 사람들이 그의 부친이 헬라인인 줄 알기 때문이었다.
* 행 16: 3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러나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에게는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같이 처신하였다. 그것은 율법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얻고자 함이었다.
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율법 없는 자'란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성문화(成文化)된 모세의 율법을 갖지 않았던 이방인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법, 곧 양심의 법은 가지고 있었다.
* 롬 2: 14-15 –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2]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는 이방인들처럼, 즉 율법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갈 6: 12 -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결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였다.
그런 바울이었으나 율법없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율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문화적인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켰다.
고전 9: 22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
바울은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는 실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진리와 의 안에서의 처신이어야 하며 비진리와 악을 포용하는 처신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악을 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와 의 안에서, 즉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웠고 현실의 환경에 최대한으로 자신을 적응시키려 하였다.
1]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기서 '약한 자'(*, 아스데네이스)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 고전 8: 9 -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살전 5: 14 -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바울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서 믿음이 강한 상태에 있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였으며, 그들의 믿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했다(19절).
2]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 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고전 9: 23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
바울의 행동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다. 이로써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복음의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영혼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같이 복음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포기할 자는 없는가?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복음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리자.
1]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가 어떤 사본(*, TR)에서는 '투토'(*, '이것')라고 되어 있다.
즉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에 자신을 순응시켜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게 했다.
2]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참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코이노노스'(*)는 원문에 '참여자'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쉰'(*,'...와 함께')과 '코이노노스'(*, '공유자')의 합성어로서 '...와 함께 공유(共有)한 자' 라는 뜻이다.
이 명사가 '기노마이'(*, '되다')의 부정과거 '게노마이'(*, '되었다')와 함께 사용되어 본 구절의 문자적인 뜻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 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3] 사도 바울의 자유 (고전 9: 16-23)
(1) 도전받는 바울의 사도성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로 다른 부분은 접어두고 사도성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직접 제자로 부르신 12명을 사도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자리는 훗날 초기 공동체에 의해서 맛디아로 바뀌었다. 유다를 넣든지 아니면 맛디아를 넣든지 예수님의 제자 명단에는 바울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바울을 가리켜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열두 사도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교회의 전통이다.
신약성경은 오직 사도의 권위로 기록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바울의 사도적 권위는 거의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학자들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개 27권의 신약성서 중에서 9권 내지 13권 정도가 바울의 서신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신약성경으로 채택된 그의 편지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형성하는 데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어떤 제자도 바울을 능가할 수 없다.
물론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어떤 한 사람의 집필이라기보다는 이미 초기 공동체에 전승되었던 내용들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저자 자신의 글인 서신과 비교할 때 저자의 비중이 그렇게 높지 않다.
바울이 쓴 편지들-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등등,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은 사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초기 공동체에서 바울의 사도성은 계속해서 도전받았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이 살아서 활동하던 상황을 생각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비롯한 몇몇 친인척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목도한 500명의 신자들이 여전히 살아있을 때였다.
예수님을 전혀 만나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사도를 자처한다는 처신을 과연 용납될 수 있었을까? 물론 바울이 다마스커스 행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났으며, 근본적으로 자신이 추종하던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완전히 신앙의 토대를 옮겼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회심 이후로 그가 공동체를 향해서 보인 헌신이 아무리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의 사도성이 보장될 수는 없었다.
(2) 사도적 권위
바울은 사도적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썼다. 그의 심리상태가 고조되었으리라는 건 분명하다. 9장 1-2절 말씀에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바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여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비록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주님을 믿는 여러분이야말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조차 사도적 권위를 완전하게 확보하지 못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선교 2차 여행 때 세워진 교회로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세운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바울이 이렇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할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 속사정을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추정한다.
9장 15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신에게도 베드로처럼 결혼할 자격도 있고,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자격도 있다고 진술하면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써 본 일이 없습니다. 또 내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내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이 긍지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별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은 것 같다. 줏대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평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뭔가 드러나는 권위가 있어야 그 사람을 인정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을 전혀 주장하지 않고 아무런 권리 주장 없이 그냥 말씀을 전할 때는 전하고, 돈이 없을 때는 아르바이트 하고 살았다.
(3) 보상 없는 복음 선포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섭섭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자기를 알아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도들은 여러 교회에서 심적이나 물질적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바울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교회로부터 대접받는 것보다는 대접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18절에서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 곧 자기가 받을 대접이라는 진술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목사의 사례금 문제가 한국교회에서 매우 예민하지만, 아무도 공론화하지 못합니다. 어떤 교회의 목사는 연봉 1억을 받는다거나, 반면에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금을 받고 있다. 저는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거론하려는 건 아니다.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을 목사가 받아야 할 대접이라는 바울의 생각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본다. 모든 목회자들이 이런 생각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목회자 사이의 빈부격차는 줄어들어 이런 데서부터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개혁도 싹이 트리라 본다.
(4) 자유와 종됨
바울은 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일까? 복음 전하는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없다면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돈은 단지 먹고살기 위한 것,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지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복음 전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사도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내면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례비와 상관없이, 어느 교회로부터 받는 존경과 대접과 상관없이 복음의 궁극적인 가치를 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보통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돈과 권력을 통해서 자기의 자유가 확장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사람들 위에 권위적으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위치로 자기를 낮추었다. 19절에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자유와 종은 정반대 개념이지만 바울에게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5) 율법 너머의 자유
바울은 본문 20-22절에서 당시의 상황 안에서 자유 문제를 설명한다. 그것은 율법에 얽힌 사연으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매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율법은 그 절대적인 위치를 잃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본래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율법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을 수행하며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율법을 지켰다. 이런 문제가 심각한 갈등을 불러온 이유가 무엇인지 한 가지 예를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 앞에 놓였던 고기에 대한 설명이다.
그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이방 신전에 바쳤던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중에서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는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율법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고기는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그걸 먹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비난했다.
바울에 따르면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자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그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8: 9). 그는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해 않겠습니다.”(13절)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본문 20-23절에서 자신이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율법을 따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율법을 따랐다고 증언한다. 또한 그는 율법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율법 없이 살았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율법의 수행 여부가 아니라 복음만이 그의 삶을 끌어가는 힘의 근원이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도 거의 자기가 삶의 기준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두기 마련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유가 보장될까? 바울은 자기 자신마저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신뢰했다. 이런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