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본의 역사를 말할 때에
<일본서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열도가 유사이래
일본인 것으로 알고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일본서기>가 내용에서
얼마만큼 진실과 거짓이
포함되어있는지를 한번 보자.
분량이 너무 많아서 몇 차례
나누어서 실을려고 했지만,
내친 김에 다 싣기로 했다.
우리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그 일본의 역사의 시작을 말이다.
(참고로 한자가 빠진 것은
한자지원 문제이기 때문에 다 넣지 못하여
그대로 비워져 있음을 양해바라며, 원문을 참고바랍니다.)
허구의 역사가 시작되다...!!!
『日本書紀』를 번역한
성은구(成殷九: 1906∼1988년)는
한국고대사를 연구한 사람이었는데,
그 책을 번역하여
『일본서기』를 재평가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日本書紀』를
연구한 학자를 탄압했다고
밝혀 놓았다.
그 학자는 早稻田(조도전: 와세다)
대학의 교수 津田左右吉
(진전좌우길: 쓰다사우기찌; 1873∼1961년)이었으며,
1940년(昭和 15) 3월 8일에 기소되어,
1942년(昭和 17) 5월 21일에
비공개 법정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 담당 재판장은
中西要一(중서요일: 나까니시요이찌)이었으며,
그에 대한 판결은,
형량이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였다.
"… 仲哀天皇 이전의
歷代에 대하여서는
그 계보에 관한 재료가
존재한 형적(形籍)이 없고,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거의 전하여 있지 않다는 등,
황공하게도 神武天皇으로부터
仲哀天皇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講說을 감히 함으로써,
皇室의 존엄을
모독하는 문서를 저작하고,
이를 피고인 岩波茂雄
(이와나미시게오; 1881∼1946)으로 하여금
昭和 14년 6월경,
그리고, 같은 해 10월경 각 100부,
같은 해 12월 10부를 발행케 하여 …
"(成殷九,「解題」『日本書紀』
(고려원, 1993), p.12에서 인용한 것임.)
성은구는 "津田左右吉에 대한
이런 단죄는 당시
일본사회의 광기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古事記》
《日本書紀》의 두 책은
국가적 聖典으로서
神聖不可侵의 典籍으로 되어 있어,
절대로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의 연구의
제일 큰 업적은 記紀[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神話傳說은 불행하게도
민간에 전하여 내려온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점이다.
그리고, 민간 傳承도 다소
들어 있을 터이지만,
말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어느 시기에 어떤 지식인,
특히 朝廷의 지식인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으로
논증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는
(成殷九,「解題」『日本書紀』
(고려원, 1993), p.13) 것을 지적해 두었다.
이 말은 분명, 1939년(昭和 14) 전부터
《日本書紀》가 明治國家의 이른바
國體觀念에 밀착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에 어떤 지식인의 노력(?)이
일본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백제사를 포함한, 고대 역사의 연구가
일본보다도 미진했던 이유를
津田左右吉의 연구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형식(申瀅植)의
변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더구나 津田左右吉 이후
일본인의 연구성과는
「三國史記」초기 기록의 불신에 따른
歪曲된 百濟史의 先入觀으로
(津田左右吉,「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8, 1921),
pp.128∼132) 백제사의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백제 초기 사실의 부인은
대체로 近肖古王(346∼375) 이후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일본인 연구의 일관된
모습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申瀅植,『百濟史』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총서 18,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5)
이런 말들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도 서글프게 한다.
일본인이 1921년(大正 10)에
우리의 역사를 부인했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나,
《일본서기》가 일본의
聖典으로 되었다 하여
우리 조선의 역사에 영향이 미쳐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다는 것은
학자의 도리나 자세가 아니다.
津田은 일본인이면서도《日本書紀》가
천황의 존재를
상당부분 부정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어정쩡하고 우매한 태도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며,
津田의 이러한 학자적인 양심의 발로는
비록 그가 일본일이라 할지라도
학문을 접근하는 태도에 있어서
우리에게 던져주는 신선한 학자적 자세는
그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게 느껴진다.
성은구의 또 다른 지적은
"《魏志》倭人傳에
卑彌呼(히미고)라 되어 있는 것을
神功皇后라고 想定하고,
年代를 결정하는
기축으로 한 것 같다."는 것이다.
(申瀅植,『百濟史』한국문화연구원
한국문화총서 18,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p.16)
결국, 卑彌呼가 神功皇后가 아닌 것을
기라고 하였으니,
거기서 이미 심각하고
원초적인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임의로
그들의 편의에 따라
"卑彌呼 = 神功皇后"라는 등식으로
역사를 날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日本書紀』를 번역하여
출판한 의의를 밝히면서
"고대의 한일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를 통해
일본 역사의 근원이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천명함과 동시에, 1)
4세기 후반에
일본이 성립되었다고 하는 설,
2)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설,
3)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한반도 경영설 등 허구에 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역사관을 토대로
서로 유대를 강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成殷九 譯註,『日本書紀』
(고려원, 1993),「序文」에서.)
이 말은 곧 『일본서기』는
거짓에 가득 차 있는 책이며,
거짓의 기록은
가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사기가 허구라는 것은
《대망(大望: 도쿠가와 이에야스)》(전12권)
에서도 살펴 볼 수 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 1907〜1978)가
17년에 걸쳐(1950〜1967) 지은
대하소설인 것이다.
《대망》의 중심 큰 줄거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절대 대권자에 임명된
게이초 8년(1603)이
에도(江戶) 시대의 시작이다.
이 명칭은 권력의 중추기관인
막부가 에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도쿠가와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도쿠가와 시대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초기를 배경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세 사람이
날이면 날마다
싸움으로 지새우던
난세(亂世)를 끝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는 이야기이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에도막부 정권을 열어
300년간 일본의 평화를 가져온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大望》이 NHK-TV에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다.
여기서, 이 드라마를 곰곰이 보면,
거기엔 모든 장면들이
일본列圖로 펼쳐진다.
그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일본렬도가 일본임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가장 큰 소리치면서
歷史를 쓰고 있는
그 뿌리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歷史에,
그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바탕을 두고 펼친 것들이
한결같이 歷史와는 결코
상통(相通)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얼마나 歷史와
괴리되고 있는지를
한가지 사례로써 살펴보자.
《일본서기》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조선(調船) 80척(隻)”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신라에서 일본에
물건들을 바치는 규모다.
그 배의 크기가 얼마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면 그 내용을 보자.
(1) 추고천황 26년 가을 8월 1일에 고구려가
...10종 이외에 나라의 토산물과
낙타 1마리를 헌상한다.
[卷22 推古天皇二十六年 秋八月癸酉朔 高麗遣方物...
之類十物, 幷土物駱駝一匹.]
(2) 천지천황 8년 3월
병신(18일)에 탐라의 왕에게
오곡의 종자를 주었다.
[卷27 天智天皇 八年三月丙申
賜耽羅王五穀種.]
(3) 천지천항 10년 6월에
신라는 사신을 보내어
調를 바쳐왔다.
별도로 물소 1필,
멧닭 1마리를 바쳤다.
[위의 책 十年六月, 新羅遣使進調, 別獻水牛一頭 山鷄一隻.]
(4) 천무천황 8년 9월
갑자일(19일)에 신라가
아찬 김항나와
사찬 살류생을보내어
조공하였다.
조의 물품은 금, 은, 철, 솥,
비단, 베, 가죽, 말, 개, 나귀,
낙타 등 10종이었다.
[卷29 天武天皇 八年 九月甲子,
新羅遣阿湌金項那 沙湌薩虆生朝貢也.
調物, 金銀鐵鼎, 錦絹布皮,
馬狗騾駱駝之類 十餘種.]
이 밖에도 일본과 신라,
고구려와의 사이에
토산물을 주고받은
사례가 더 있다.
여기서 특이한 것만 보자.
위의 (1)과 (4)에서는
“낙타”를 신라에서
일본에 주었다는 것이다.
(3)에서는 물소[水牛]를
신라에서 일본에
주었다고 했다.
신라가 어떤 기후대에
지리적으로 존재했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나라 신라에서,
일본에 조(調)로 바쳤다는 것에
“낙타”가 있고, “물소”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낙타는 사막지대에
유용한 동물이고,
물소는 아열대와
열대지방에 사는
농사짓는 데에
유용한 동물이다.
한반도에는 낙타도,
물소도 생존할 수 없는
온대지역이다.
특별하게 관리한다면
동물원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에 그런 동물이
생존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물들을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도
적어도 유용하게
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지역을 지리적으로
일본렬도와 한반도로
결코 한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을 절대로 중국대륙을
떠날 수 없는 조건이이다.
임나(任那)가
신라의 동쪽에 있고,
일본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이나,
일본이 백제의 남쪽에
있었다는 말은
바로 일본이
중국대륙의 동쪽와
남쪽에 뻗어져 있는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부족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본서기》는
그 터전이 본디
중국대륙의 동부와
남부의 지역의 역사를
끄집어낸 것이고,
《대망》은 이와 상관없이
일본이란 연결고리를
“일본列島”에 있어서
왜(倭)의 존재를
移植시키고자, 그렇게도
가공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일본이란 그 정체가
매우 혼돈스럽게,
매우 거짓으로 꾸며놓은
歷史와 국가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출 처 : 대륙조선사연구회 까페 최두환 선생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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