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을 보았습니다 (외 2편)
백상웅
방 한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 가면서 처마 끝 고드름을 뜯어가곤 하였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쓸쓸해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 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의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튕기며 배고픈 새떼를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소리를 뜯어먹고 있을까요?
꽃 피는 철공소
철공소 입구 자목련은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망치질 소리가 앞마당에 울려퍼지면요
목련나무 우듬지에 남은 살얼음에 쨍 하고 금이 가요
내 친구 스물일곱 살은 강철을 얇게 파서 봄볕에 달구죠
한 잎 한 잎, 끝을 얌전하게 오므려 묶어서
한 송이 두 송이, 용접봉 푸른 불꽃으로 가지에 붙여요
내 친구 스물일곱 살의 팔뚝에도 꽃이 벙글거려요
팔목에 힘을 줄 때마다 자목련 꽃이 팽팽하게 열리죠
자색 화상 위에 푸른 실핏줄이 돋아나요
그걸 보고 여자들이 봄날처럼 떠나기만 했대요
용접봉을 손아귀에 쥔 내 친구 스물일곱 살
오늘은 철공소 마당에서 철목련을 매달아요
가지마다 목련꽃이 벌어져서 햇볕을 뿜어대죠
꽃 핀 철문은 허공에 경첩을 달고 식어가고 있고요
밤에는 하늘에다 꽃잎을 붙이느라 잠도 못 자요
지문의 세공
지문 없는 세공사에게는 격동이 없다.
강도 높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거, 그럭저럭 빛나는 돌 같은 거,
갈고 자르며 육면체가 태어나는 시간에
세공사의 지문이 사라진다.
우리가 다른 무늬를 가진 것은 세공사의 고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직 세공사였던 나의 외삼촌 경우가 그렇다.
고요 때문에 외가의 무늬는 복잡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출생을 지우려고,
머리가 일찍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외삼촌은 밤낮없이 보석을 깎았다고 본다.
지문이 다시 생겼다는 외삼촌,
요즘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나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듣기를, 언젠가 보석은 종족을 다스리는 제사장의 신비로운 무기.
또 언젠가 보석은 굴러가는 돌 따위,
이제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도구.
오늘도 세공사는 단단하게 빛나는 시간을 깎는다.
우리도 조용히 지문을 바꿔보려고 한다.
불변의 그것은 잠시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문득 슬픔을 느끼며 길을 걷는 건
평생 변할 수 없다는 출생에 대한 각인 때문이다.
나의 외삼촌이 세공 일을 접고 육면체의 근육 속에 갇혔듯이
—시집 『거인을 보았다』
-------------
백상웅 /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시집 『거인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