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다락골 성지
충청남도 청양은 구기자와 청양 고추로 유명한 곳입니다. 예전에 통행금지가 있을 때에도 충청남도에서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없던 곳이고, 충청남도의 알프스라고 하는 ‘칠갑산’이 있는 청정 고을입니다. 그 청양은 대전교구에서 가장 천주교의 교세가 약한 곳이랍니다. 이렇게 교세가 약한 동네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답니다. 이 청양 고을은 옛날에는 충청도 홍주(洪州 - 홍성)목 관할구역이었습니다. 지금도 홍성에는 최씨들이 많이 살고 있고, 옛날에는 청양과 홍성에 최씨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답니다. 이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일대는 옛날에는 ‘다락골’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다락골은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입니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입니다. 성인의 집안은 원래 교회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결혼한 다음에는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몰두하였고 1836년에는 큰아들 최양업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839년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돌보아 주다가 1939년 7월 31일에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들과 일가 등, 교우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를 시킨다는 죄가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형벌로 큰 고통을 받았답니다.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다음날인 12일에 옥중에서 일생을 마쳐, 순교하셨는데 그 당시 39세였습니다. 그래서 청양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죽는다고 소문이 나서 교세가 가장 약한 본당이 되었답니다.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습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 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당신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 무덤에 대하여 두 가지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 사람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 신부님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 무덤 17기를 확인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증언은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송 아우구스티노 노인께서 "청양 고개 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 철야에 이곳 청양 산 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기선 신부님께서는 증언하십니다.>(대전교구 다락골 성지 소개서 인용)
2007년 7월 8일자 가톨릭신문 21면에 최경환 성인 5대손 최광섭 (살레시오회) 신부님의 첫 미사가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봉헌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슴이 뭉클해져 조용히 성인신부 되시기를 기도 올렸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걱정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묵상합니다.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는 아들 신부의 발에 입 맞추며 “오 거룩한 선교의 발이여, 주님의 축복을 내리소서.”하면서 눈물로 입 맞추는 부모님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이미 죽으라고 보내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감히 상상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서 믿음으로 떳떳하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고, 반드시 돌아오셔서 우리를 받아 안아 주시리라는 희망으로 행복함을 느낀답니다. 정말로 좋으신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한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베네딕토 형제님들의 영육 간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 선교의 열정과 순교의 믿음을 가슴 속 깊이 새겨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 우리 교회 안에 성소가 더 많이 증가하도록 빌어 주소서.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황혼-루치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