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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6.6.19.) 말씀/ 욥기 7:14 공평하신 하나님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오래 전에 송명히 시인이 작사한 공평하신 하님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새기며 은혜를 받곤 하였습니다. 이 노래의 시를 작곡한 분은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아마도 송명희 시인 외에도 누구나 다 이런 문제로 원망 불평도 해보았을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자 집에 태어나고, 건강하고, 잘생기고, 또 거기다가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그런데 나는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고, 재능도 없고, 신체적 장애가 있어서 늘 놀림을 받는다면 과연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 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적어도 인간 기준으로 바라볼 때, 외적인 조건들로 바라볼 때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영적인 깊은 세계의 차원까지 내다보면 우리는 결국 송명희 시인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을 불러 달란트를 나눠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5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2달란트, 또 하나 사람에게는 1 달란트를 줍니다. 달란트는 재능입니다. 우선 이렇게 처음 나눠주는 재능의 크기를 보면 이 주인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왜 저 사람은 다섯을 주고 나는 하나를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산 때가서 보니 주인은 다섯에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둘에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똑같이 칭찬을 하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찾으시고, 최선을 다하였을 때 공평하게 칭찬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 능력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결산의 평가는 아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달란트 문제로 원망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달란트가 하나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머리가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리더십도 부족합니다. 예술적 재능도 없습니다. 아들은 장애인입니다. 부모가 부자도 아닙니다. 거기다가 사역지도 수도가 아니라 가장 변방, 제주도, 그리고 무안입니다. 벌써 시골에서 30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 적은 능력을 주셨느냐고 원망스런 마음을 갖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비교의식에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적게 주셨으니 적게 찾으시니 부담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조력하고 최선을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 양들이 적을지라도 일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오히려 인격적인 아름다운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며 삶을 나누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나눌 때 기쁨이 일어납니다. 사역을 크게 하지 않으니 마음과 삶에 여유도 있습니다. 내 바운다리를 벗어나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평안 합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달란트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오히려 많은 목사님들이 저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또 내가 10년 앞서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장 보면 내가 남보다 부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지나사로와 부자가 나오지 않습니까? 부자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배불리 잘 먹고 남부럽지 않게 지냈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너무나 운명적 이었습니다. 가난해서 한 끼 밥도 제대로 먹고 살 수 가 없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병원에도 못가니 개들이 그 상처를 할앝습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 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본다면 누가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생각 하겠습니까? 그런데 죽어서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가 보니 나사로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탁해서 나사로로 하여금 자기 형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주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국과 지옥은 골이 깊이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결과를 보니 오히려 이 땅에서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살고 힘이 없어서 주님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던 거지 나사로가 축복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문제없이 좋은 일만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킬레스 건이 한두 개는 있습니다. 평안히 잘 사는 것 같은 집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프고 문제 있는 사람이 꼭 한 사람은 있습니다ᆞ "이 문제만 없으면 정말 부족함이 없을 텐데.. 건강만 받쳐주면 행복만 있을 것인데... 돈만 좀 있으면 일이 술술 다 잘 풀릴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한 여자가 성인을 찾아가 자신이 처한 지금의 끔찍한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저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성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돌아가서 한번도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는 집을 찾아 그 집에 있는 겨자씨를 구해오시오. 그럼 그 겨자씨를 가지고 당신의 고통을 낫게 해주겠오.그래서 그 여자는 그 고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집을 찾았습니다. “분명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슬픔을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들일 것이야.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한 노부부가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전 지금 한번도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는 집을 찾고 있어요. 이건 제게 중요한 일이랍니다. 그러자 노부부는 대답하였습니다. 미안하오. 집을 잘 못 찾아오셨오.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여자는 오히려 노부부의 처지를 들으면서 위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위로하다보니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게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다시 다른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도 만나고, 대궐 같은 집에 사는 부자들도 만나며, 온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이야기라고는 모두가 슬프고 절망적인 이야기뿐 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고통이 마치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실에 처한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며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고 나만 어렵고 힘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뚜껑을 열어 보면 고통과 슬픔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황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던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당장에 잘나가는 것 같아도 감사하지 않고 자족하는 사람은 결과가 비참해지고, 또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 편에서 받아들이고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결국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결과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것도 보면 짝을 이루고 찾아와서 사랑과 감사한 마음으로 방정식을 푼 자들에게만 누릴 자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배고파 본 사람이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이 무엇 인지 알고, 아파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날을 걸어본 사람이 해빛 이 얼마나 반가운 것인지 알고, 밤을 지낸 사람이 새벽을 맞는 기쁨을 알고, 겨울을 지낸 사람이 봄의 향연에 참여할 수 있듯이 그렇게 원치 않은 반대의 상황도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론 굶어도보고, 때론 아파도 보고, 때론 실패도 체험해보면서 있는 것의 소중함도 생각해보고 감사도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각기 제 잘난 맛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하늘과 땅과 물과 공기와 산천초목 모든 것을 공짜로 누리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에 형통한 날만 주시지 않고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욥기 7장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형통과 곤고를 똑같이 나눠주셨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지만 곤고한 날에는 생각할 시간도 가져보 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무엇이 행복인지? 나는 누구인지? 세상은 어떻게 존재한 것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생각을 해야 그게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생각 없으면 감사도 없고, 다른 사람 배려도 못 하고, 아주 이기적이고 대책이 없는 본능적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아파서 기도 부탁하는 분들이 여럿이 있어 매일 아침 기도를 합니다. 주영정공 일터교회 이 공장장도 배가 안 좋다고 월요일 기도 받으러 왔습니다. 박진필 형제도 입원을 했습니다. 수요일에는 김재중 집사님 하루 종일 기계 돌리고 피곤한 중에도 공장의 아픈 분들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또 교회에 들렸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성경공부하고 합심하여 기도하고 9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세상에 직원들 아프다고 저녁 늦게 교회와서 기도하는 사장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기독병원에 찾아가 박진필 형제를 만나 전도서 말씀을 함께 보고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입원 중 읽어보라고 '행복방정식'책도 한권 드렸습니다. 큰 병이 아니라 토요일 퇴원한다니 다행이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이렇게 아파봄으로 건강의 소중함도 생각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생각해보고, 함께 인격적으로 만난 기도도하고 대화 할 시간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바쁘게 앞만 보고 달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전도서 말씀을 통해서 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춘화현상(春化現象 – Vernalization)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합니다.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습니다.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는 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습니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집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입니다. 나만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더 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축복은 오히려 불행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 공평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감사하며 은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당장 현실의 조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형통함과 곤고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적 깊은 의미를 생각하고, 또 장차 미래의 주님 나라도 바라보아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방학 동안에도 더욱 주님의 은혜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9월 개학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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