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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발
행전 박영환
인간이 언제부터 신발을 신고 다녔는지 모르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주로 산야에서 먹이를 구했던 인간들은 돌부리, 가시덤불, 추위, 더위로부터, 아니면 맹수들의 급습으로부터 빨리, 안전하게 피하는 데 신발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당시 신발의 목적이 순수하게 발의 보호에 있고 보면 멋보다는 실용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멋을 찾게 되었고 따라서 신발의 목적도 발의 보호와 멋이란 이중적 효과를 얻으려했을 것이다.
얼마 전 국내 신발 업계의 최정상인 어느 회사가 그의 대부 격이던 미국의 N회사와 결별했다. 그야말로 신발을 바꾸어 신고, 다른 상표로 신발 끈을 동여맨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결별을 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별로 관심이 없지만 몇 줄의 기사가 매우 우울하게 했다. 그 내용은 고급 스포츠화의 국내 시장 판매량은 거의 천문학적 액수이며 그 신발을 제작하는 데 막대한 로얄티를 지불했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 고급 스포츠화가 판매 선전을 벌일 때 나는 별로 반응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고루한 판단이었다. 군중 심리는 회오리처럼 번져갔다.
고급 신발을 신을 때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고들 한다. 신발의 수명이 길고 신체 공학적으로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물론 멋도 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니 누구나 신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꼭 고급을 신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문제다. 학생들의 이야긴즉 자기 친구들이 새 신발을 사게 되면 첫인사가 상표부터 먼저 물어 보기 때문에 고급 신발을 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고향 마을에 연촌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다. 할머니는 개인적으로, 매우 고독한 일생을 살다가 가신 분이었다. 시집을 와서 일년도 안된 17세에 남편이 돌아가신 분이었다. 요즈음 같으면 고등학교 일학년 정도의 나이에 청상(靑孀)이 되어 수절(守節)을 결심하시고 홀로 사셨다. 가난과 고독을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채찍을 모질게 하시고 단근질을 하셨다. 정말, 당신 자신에게는 한없이 냉정하고 인색하며 용서가 없었던 분이셨다.
당신의 평생에 유일한 소망은 한 가지 - 남편의 대를 잇는 양아들을 들여 놓고 눈을 감겠다는 일념. 그렇게 하자면 양아들에게 줄 재산이 필요했다.
할머니는 변변한 옷 한 벌도 없으셨다. 평상복이 외출복이셨고 외출복이 평상복이셨다. 그러나 그 옷은 언제나 정갈하고 깨끗하게 입으셨다. 할머니는 옷도 옷이지만 신발을 이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내가 알기로 할머니께서는 평생에 신발을 몇 켤레 신지 않으셨다. 저자거리나 동리 등 사람들의 눈길이 많은 곳에서는 신발을 신으셨지만 인적이 없는 외진 곳, 즉 산길 같은 곳에서는 신발을 아끼기 위해 머리에 이고 다니셨다. 자식도 없는 처지에 궁상을 떤다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예 딴 귀로 흘려 버렸다.
정초에, 세배가 끝나고 나면 할머니는 괘를 풀어 일년의 신수를 예언하셨다. 그렇다고 점을 치는 분은 아니셨다. 지금 생각하면 토정 비결 유의 복서(卜書)였던 것 같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분이기에 동리의 아이들을 친손자처럼 사랑하시고 일일이 나이와 생일을 물어 한 해의 운세를 점치시고 특히 조심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강조하셨다.
"상곤(나의 어릴 때 이름)이는 정월과 2월에 북쪽 나들이를 삼가고 정식이는 5. 6월에 물 조심…."
한 번은 정식이란 녀석이 엉뚱하게 물었다.
"할머니는 올해 무슨 조심입니꺼?"
할머니는 약간 생각에 잠기시다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고 답을 하셨다.
" 응, 나야 뭐 항상 길조심이지…."
할머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이 되받아 꼬리를 붙였다.
"할머니 길조심은 신발만 잘 신으면 된다 아입니꺼?"
할머니께서 신발을 신지 않고 이고 다닌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온 우리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순간, 할머니께서는 가벼운 신음에 곁들인 한숨을 머금으셨다. 허공을 향하던 움푹 파인 눈자위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정말, 할머니의 점괘는 항상 길 조심이었다. 한 점의 혈육도 없이 어렵고 고독하게 살아오신, 살을 찢는 수절(守節)의 길. 호호 백발에 이른 이 시절에야 온 동리의 귀감으로 우러러 보게 되었지만 젊은 시절은, 지켜보는 집안의 눈총이 항상 따가웠다. 문고리 걸어 잠근 독수공방, 청상의 길. 비수 머금은 할머니의 점괘는 항상 조심조심 '길조심'이었다. 약점이 없는 것이 약점이었던 당신의 길.
할머니께서는 그 어려운, 당신의 숙명적 점괘(?)를 드디어 극복하셨다. 한이 서린 인생을 여든에 마감하셨는데, 평생의 염원을 기어이 이루셨다. 혼자 힘으로 문전옥답 여나문 마지기를 장만하셨고, 양아들을 들여 남편과 자신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양아들의 무릎을 베고 돌아가실 때,
"어렵더라"
하셨다. 짧지만 의미 있는 말씀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연촌 할머니 덕분에 초등학교 5 학년까지 검정 고무신만 신고 다녔다. 연촌 할머니의 근검 절약 정신에 감동하신 아버님은, '백고무신'이 입에 오를 때마다 연촌 할머니를 강조하셨다. 그 때마다 할머니가 너무 미웠다. 내 또래들이 윤기가 반지르르 나는 백고무신을 신고 으스댈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불평을 구시렁구시렁 늘어 놓았다.
사실 우리 집은 근동에서 제법 알려진 부자집이었다. 일하는 머슴이 3명이나 되고, 집터가 800평이나 되는 큰 기와집이었다. 그러니, 백고무신 정도가 아니라 가죽 구두를 신어도 욕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우리 아버님이 연촌 할머니보다 더 철저한 분이신 지도 모르겠다. 낭비라곤 전혀 모르는 분이셨다. '쇠고리'란 별명 -당신의 근검 절약적 생활에서 비롯된 것-,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연촌 할머니께서도 내 또래들이 많이 신고 다니는 백고무신을 부잣집 아들이고 또 귀한 아들 - 어머니는 아기를 가지지 못해 고민을 하다가 10년만에 나를 낳았다. - 이 신지 못한 것이 매우 딱했던지 아버님을 설득하셨다. 그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백고무신을 얻어 신을 수 있었는데, 그런데 그 백고무신이 또 말썽이었다.
백고무신을 산 지 얼마되지 어느 날, 영화 구경이 들어 왔다. 이른바 '활동사진'이었다. 그 '활동사진'이란 것도 농촌 지역 계몽 영화였다. 공짜로 보여준다고 했다. '활동사진'을 볼 기회가 없던 시골 사람들이니, 내용 따위는 뭐라도 상관이 없었다. '활동 사진' 그 자체만 해도 흥분하기에 충분했다. 면민 전체가 들썩이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장소는 초등학교 강당 - 강당이라고 하지만 교실 두 칸이었다. 평소에는 칸막이를 하여 2 개 교실로 사용하다가 필요할 때는 칸막이를 뜯어버렸다. 수용 인원이래야 200명 정도 였을까? 그런데 500명이 넘게 입장을 했고, 밖에는 아직도 입장을 못한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른들의 복판에 끼어 있던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 때 영화를 상영한다해도 화면은 전혀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른들은 담배를 계속 피워대니 연기가 자욱했다. 코가 맵고 목이 간지러워 연신 기침을 했다. 이젠 빠져나가려해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때 어디선가 '불이야' 비명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다급하게 계속 외쳐댔다. '불이야' '불이야'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심술이 나서 장난질을 한 것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일시에 출구 쪽으로 몰리는 통에 장내는 금방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사람 살려라' 모두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어떻게 창틀을 딛고, 용하게 탈출을 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백고무신, 나의 사랑하는 백고무신 한 짝이 그만 날아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게 어떤 신발인데…. '으앙' 금방 울음을 터뜨리며 구석구석을 뒤졌다. 한참 뒤, 뒷문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짝을 발견했다. 얼른 주워 발에 끼웠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이냐? 그것은 내 신발이 아니었다. 억지로 비비적거려야 들어갈 만큼 작았다. 아마 나보다 발이 작은 아이가 내 신발과 바꾸어 간 것 같았다. 어쩔 수없이 억지로 신기는 했지만 발이 너무 아팠다. 반은 신고 반은 끌면서 터덜터덜 걸어왔다. 처음에는 발가락 아픈 것이 고충이었으나 집이 가까워지면서 아버님의 무서운 얼굴이 확대되었다.
벙어리 냉가슴의 나날들. 아버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댓돌에 벗어 놓을 때도 약간 헝클어 놓았다. 자갈밭을 지나 소풍이라도 다녀오는 날은 발이 퉁퉁 붓고 뒤꿈치가 쓰려 벌겋게 충혈이 되었다. 풀이 보드랍게 돋아 있는 길은 연촌 할머니처럼 맨발로 걷기도 했다. '백고무신아, 백고무신아 빨리 떨어져라' 일부러 시멘트 바닥 같은데 문지르기도 하며 주문처럼 외웠다.
드디어 신발의 밑창에 구멍이 났다. '이제는 살았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아버님께 당당히 보여드렸다. 아버님께서는 슬쩍 내 신발을 보시더니
"오늘 마침 장날이니 학교가 파하거든 난전에 나오너라"
하시고는 자리를 떠셨다.
"넷"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전에는 낡은 신을 꿰매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신기료 장수가 있었다. 신기료 장수는 신발의 옆이 터지면 기워 주었고 밑창이 닳으면 헌 신발 조각을 잘라 덮개를 씌워 주었다. 이른바 땜질이었다. 검정 고무신도 때워 신는 판에 백고무신을 때워 신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 정도 때워 신는 것은 연촌 할머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할머니는 세 번 이상 때워 신는다."
아버님은 신기료 장수에게 단단히 때워줄 것을 부탁하셨다.
이제 연촌 할머니도, 아버님도 계시지 않는다. 그렇게 신고 싶었던 백고무신도, 지금은 퇴색된 옛날의 신발이 되었고 난전의 신기료 장수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거리엔 고급화가 물결을 이루고 있는 이 때, 대열 속에 쫓기듯 달려 가다가도, 문득 가슴에 밀려오는 소아병적 향수 때문에 풍요마저 두려울 때가 있다. 단절된 공간에서의 현실안을 염려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질서는 비약이 아니고 점진이다. 접맥된 변용 속에 신발 끈이 항상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 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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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할 고무신 때워신기. 그시절을 살았던 분들께도 이제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었네요.
그런 근검절약의 과거가 있었기에 풍요로운 오늘이 존재하겠지요. 다들 가난했지만 지나고 보니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