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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上谷)과 구원(九原)과 오원(五原)의실체는?
○ 상곡(上谷)과 구원(九原)과 오원(五原)!
어찌 보면 전혀 관련(關聯)이 없어 보이는 듯한, 두 곳의 지명(地名)이름이다. 그러나 구원(九原)과 오원(五原)은 같은 땅을 왕조(王朝)가 새롭게 들어서면서 이름만 바뀐 지역이다.
『구원 군(九原郡)』은 시황제(始皇帝)가 대륙(大陸)을 일통(一統)했다고 하면서 그 영토(領土)를 36개 군(郡)으로 나눈 그 중의 하나이며, 『오원 군(五原郡)』은 진(秦)을 멸(滅)한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구원 군(九原郡)”이란 이름을, “오원(五原)군”으로 바꿔 버렸다. 땅은 같은 곳이로되, 이름만 바뀐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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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史記) / 진시황(秦始皇) 본기(本紀)
《分 天 下 以 為 三 十 六 郡, 郡 置 守, 尉, 監 》이라고 하였는데, 36 개 군(郡)속에 “구원 군(九原郡)”이 포함되어 있다.
【 集 解 三 十 六 郡 者 ,『三 川, 河 東, 南 陽, 南 郡, 九 江, 鄣 郡, 會 稽, 潁 川, 碭 郡, 泗 水, 薛 郡, 東 郡, 琅 邪, 齊 郡,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代 郡, 鉅 鹿, 邯 鄲, 上 黨, 太 原, 雲 中, 九 原, 鴈 門, 上 郡, 隴 西, 北 地, 漢 中, 巴 郡, 蜀 郡, 黔 中, 長 沙 凡 三 十 五, 與 內 史 為 三 十 六 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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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
五 原 郡, 【秦 九 原 郡, 武 帝 元 朔 二 年 更 名. 東 部 都 尉 治 稒 陽. 屬 并 州.】 戶 三 萬 九 千 三 百 二 十 二, 口 二 十 三 萬 一 千 三 百 二 十 八. 縣 十 六 : 오원 군(五原郡) 【주석(註釋) : 진(秦)의 구원 군(九原郡)이다. 한(漢)무제(武帝) 원 삭(元朔) 2년에 이름을 바꿨다. 동부(東部)도위(都尉)가 고양(棝陽)에서 다스렸으며, 병 주(幷州)에 속했다.】39,322 호(戶)에, 인구는 231,328인이 있었으며, 16 개 현(縣)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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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원(九原) 곧 오원(五原)』 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
➊ 대륙(大陸)의 지도(地圖)를 보면, 『섬서 성(陝西省) 장안(長安) 직 북방(直北方)의 내몽고(內蒙古) 땅의 황하(黃河)의 본줄기【남하(南河)】와 북 하【北河 : 오가 하(烏加河)라고도 한다.】사이의 땅에 있다.【 먼 옛날에는 하나의 하천(河川)으로 흘렀을 것이나, 오랜 세월 본류(本流)와 지류(支流)에서 흘러내려온 토사(土砂)인 황토(黃土)가 쌓여 삼각주(三角洲)가 된 것 일게다. 】이곳은 장안(長安)으로부터 약 900 km【구-글 어스】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과거(過去)에는 유목민족(遊牧民族)들이 “하늘이 베풀어준, 천혜(天惠)의 땅‘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곳의 인구(人口)를 보면 당시(當時)의 흥성(興盛)함을 알 수 있다.
➋ 또 이곳에는 “도요장군(度遼將軍)”이 주둔(駐屯)하고 있었던 곳으로, 오원(五原) 서북방(西北方)에 주둔(駐屯)지인 “도요 영(度遼營)”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대륙 사(大陸史) 원전(原典)에서는, 이곳을 흐르는 하천【河川 : 하(河)인 황하(黃河)를 말함】을 도하(渡河)하는 군대(軍隊)를 총괄(總括)하는 직책(職責)으로 “도요장군(度遼將軍)”이라고 하였으며,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휘하(麾下) 군대(軍隊)는 서역(西域)이라는 오늘날의 신강 성(新疆省) 땅까지도 출정(出征)하였다.
➌ 이곳 『오원(五原)땅에서 북쪽으로 900 리를 또 가면, 조양【造陽 : 상곡 군(上谷郡)에 속한 곳이다.】의 옛 성(城)이 있다』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통전(通典) 및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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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원(五原)과 관계(關係)되는 조선사(朝鮮史)』
자치통감(資治通鑑) / 秦 紀. 始 皇 帝. 上 / 三 年을 보면, 《 其 後 燕 將 秦 開 爲 質 於 胡, 胡 甚 信 之 ; 歸 而 襲 破 東 胡, 東 胡 卻 千 餘 里. 燕 亦 築 長 城, 造 陽 至 襄 平, 置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東 郡 以 拒 胡. : 그 뒤에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는 호【胡 : 조선을 말한다.】에게 인질(人質)이 되었으나, 호【胡 : 조선을 말한다.】에게 신임을 얻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호【東胡 : 조선을 말한다.】을 불의에 쳐, 동호【東胡 : 조선(朝鮮)을 말한다.】를 천여(千餘)리 밖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연(燕)나라에서는 또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長城)을 쌓고는, 『상곡(上谷). 어 양(漁陽). 우 북 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군』을 두었는데, 이것은 호【胡 : 조선(朝鮮)을 말한다.】를 막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원전에는 요서 군(遼西郡)이 누락되어있다. 또한 다른 원전(原典)에는 2천여리라고 기록(記錄)된 것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주석(註釋)들을 보면,
● 본인(本人) 주(注) / 두우(杜佑)통전(通典)에서는 “진(晉)태강지지(泰康地志)”를 인용하여, 《『晉 太 康 地 志 「 自 北 地 郡 北 行 九 百 里 得 五 原 塞 , 又 北 出 九 百 里 得 造 陽 」 ,即 此 。史 記 云 :「 燕 亦 築 長 城 , 自 造 陽 至 襄 平 ,置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郡 以 備 胡 」》라고 하였다.
● 본인(本人) 주(注) / 사기(史記)에서는 오원(五原) 북방(北方) 900 리를 『9 리』라고 하였다.
㉠ 위소(韋昭)가 이르길 : 조양(造陽)은 지명이다. 상곡(上谷)이다. 여안(余按) 한서(漢書)의 이른바, 상곡(上谷)의 두(斗)가 “조양(造陽)”이다. 【韋 昭 曰 : 造 陽, 地名, 上 谷. 余 按 漢 書 所 謂 上 谷 之 斗 造 陽 是 也.】
㉡ 두우(杜佑 : 통전(通典)의 저자)가 이르길 : 진(晉)태강지지(泰康地志)에 : 북지군(北地郡)에서 북쪽으로 900 리를 가서, 오원(五原)성채를 득(得)하고, 또 북쪽으로 900 리에 있는 조양(造陽)을 얻었는데, 곧 ‘린 주(麟州) 은성(銀城)현’이다.【杜 佑 曰 : 晉 泰 康 地 志 : 自 北 地 郡 北 行 九 百 里, 得 五 原 塞 ; 又 北 出 九 百 里 得 造 陽, 卽 麟 州 銀 城 縣】 【 이 설명은 곧 장안(長安)의 북방(北方)과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북지군(北地郡)’으로부터 그 북(北)쪽으로 1,800 리에 당시의 ‘조양(造陽)’성채가 있었다는 뜻이다. 거리(距離)로 판단(判斷)하면, 이곳은 현 외몽골의 수도(首都)인 ‘울란바토르’ 남쪽에 있는 몽골 고원(高原)지대(地帶)이다. 】
㉢ 사기 : 연(燕)이 장성을 쌓은 곳은,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른다. 【史 記 : 燕 築 長 城, 自 造 陽 至 襄 平.】
㉣ 위소(韋昭)가 이르길 :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에 있다. 상세한 것은 무엇도 알려지지 않았다. 【韋 昭 曰 : 造 陽 之 在 上 谷. 未 詳 孰 是. 】
㉤ 사기(史記)정의(正義) 이르길 : 상곡(上谷)은, 규 주(嬀州)이다. 【史 記 正 義 曰 : 上 谷, 今 嬀 州.】
㉥ 왕은(王隱)지도지(地道志)에서 이르길 : 군【郡 : 상곡(上谷)군을 말함】은 곡(谷)의 맨 앞에 있어, 고로 상곡(上谷)이란 이름이 되었다. 반지(班志)에서 : 양평(襄平)현은, 요동군(遼東郡)의 치소(治所)이다. 【王 隱 地 道 志 曰 : 郡 在 谷 之 頭, 故 以 上 谷 名 焉. 班 志 : 襄 平 縣, 遼 東 郡 治 所. 】
㉦ 어 양(漁陽)은 당(唐)의 계주(薊州)이며, ( )주이다. 【漁 陽, 唐 薊 州, ( )州.】
㉧ 북 평(北平)은 당(唐)의 평주(平州)이다. 【北 平, 唐 平 州.】
㉨ 요동(遼東), 그 땅은 대 요수(大遼水)의 동쪽에 있는데, 당(唐)에서 일찍이 요주(遼州)를 두었고,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치소(治所)이다. 【遼 東, 其 地 在 大 遼 水 之 東, 唐 嘗 置 遼 州, 又 嘗 爲 安 東 都 護 府 治 所.】
● 위의 자치통감(資治通鑑) 기록을 보았는데, 『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에 있으며, 상곡(上谷)은 규 주(嬀州)에 있고, 규 주(嬀州)는 규수(嬀水)의 이름을 취해 주(州)의 이름으로 했다.』고 전회(前回)에 여러 원전(原典)으로 고증(考證)하였다. 『 改 名 媯 州 , 取 媯 水 為 名』
그런데 『규수(嬀水)』는 『오호 수(烏滸水)이며, 오호 하(烏滸河)이며, 오서 하(烏墅河)』이며, 중아(中亞 : 중앙아세아)지방에 있는 “아무 강 또는 아무다리아강”이라는 점이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이긴 하나, 엣 고대(古代)조선사(朝鮮史)를 위의 설명(說明)에 따라 전개(展開)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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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중아【中亞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있는 ‘아무다리아강’의 서(西)쪽 지방에 있었던 『연(燕)』나라는 동쪽에 있었던 동호(東胡) 곧 조선(朝鮮)에 의해 압박(壓迫)을 받자, 연(燕)의 현장(賢將)이라고 일컫던 “진개(秦開)”를 인질(人質)로 보낸다.
➋ 인질(人質)이었던 “진개(秦開)”는 동호(東胡) 곧 조선(朝鮮) 천자(天子)에게 아부(阿附)와 성실(誠實)과 신의(信義)를 주고, 동호(東胡)라 불리던 조선(朝鮮)천자(天子)는 그를 믿고, 풀어준다.
➌ “진개(秦開)”는 인질(人質)로 잡혀있었던 조선(朝鮮)의 허실(虛實)을 잘 파악(把握)해 놓고 있다가, 연(燕)으로 귀환(歸還)하는 길에, 연(燕)과 사전(事前) 밀통(密通), 조선(朝鮮)의 서(西)쪽 변경(邊境)지방 1천 여리를 빼앗고, 『“아무다리아강”으로부터 그 동쪽으로 1 천 여리에 걸쳐 성(城)과 성루(城樓)와 역참(驛站)을 두고, 다섯 개 군(郡)【상곡(上谷). 어 양(漁陽). 우 북 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군】을 설치(設置)하게 된 것이다.』
➍ 따라서 오원(五原)이니, 구원(九原)이니 하는 곳은, 중원(中原)의 북쪽지방이 아니라, 중아【中亞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의 “아무다리아강” 유역(流域)의 “키질쿰사막지대와 그 동쪽지방”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이것은 옛 연(燕)나라와 동호(東胡) 곧 고대(古代)조선(朝鮮)시대의 구도(構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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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다면, 한(漢)과 화(華)는 누구인가? 라는 당면과제(當面課題)에 부딪치는데, 한(漢)은 고려(高驪 : 고구려)를 말하는 것이요, 화(華)는 조선(朝鮮)의 중조(中朝)지방을 지칭하는 것이다. 『화(華)는 조선(朝鮮)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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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事實)이 하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한기(漢紀) / 세종(世宗)효무(孝武) 하(下) / 원정(元 鼎) 5 年
《 匈 奴 入 五 原, 殺 太 守. 【五 原, 即 秦 九 原 郡, 帝 更 名 ; 唐 為 鹽 州. 宋 白 曰 :五 原 郡 有 原 五 所 ,故 名, 謂 龍 遊 原、乞 地 于 原、青 嶺 原、岢 嵐 真 原、橫 槽 原 也. 五 原 故 城 ,在 今 榆 林 縣 界。】 : 흉노(匈奴)가 오원(五原)에 들어와 태수(太守)를 죽였다.【오원(五原)은, 곧 진(秦)나라의 구원 군(九原郡)인데, 황제(皇帝)가 이름을 바꿨다. ; 당의 염주(鹽州)이다. 송백(宋白)이 말하기를 : 오원 군(五原郡)에 원(原 : 큰 언덕)이 5개가 있는데, 그 이름은 무릇, 『용 유 원(龍 遊 原). 걸지 우 원(乞 地 于 原). 청령 원(靑 嶺 原). 가람진원(岢 嵐 眞 原). 횡조 원(橫 槽 原)』이다. 오원의 고성(故城)은 유림(楡林)현 지경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➊ 진(秦)나라 때는 “구원(九原)”이었는데,
➋ 한(漢)나라 대는 “오원(五原)”이었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 똑같은 땅에 있는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왕조(王朝)가 바뀌었다는 이유(理由)로 전혀 딴 판으로 바뀔 수 있을까? 『진(秦)때에 9개의 큰 언덕이나 큰 들판이 있어, 그 특이(特異)한 “구원(九原)”의 지세(地勢)를 취하여 군(郡)의 이름으로 정했는데』, 『“한(漢)”이란 나라이름과 군주(君主)의 성(姓)이 “유(劉)씨”로 바뀌었을 뿐, 땅과 백성은 똑같은 그곳에서, 갑자기 그 큰 원(原) 9 개 중에서 4 개는 없어져버리고, 5 개만이 있었기 때문에 지명(地名)을 “오원(五原)”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땅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지명(地名)을 옮겼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➌ 이것은 본래의 『구원(九原)군 땅』은 『중아【中亞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의 “아무다리아강”유역에 있었으나, 후대(後代)에 엉뚱한 곳으로 이동(移動)시킨 결과(結果)로 볼 수 있다.
➍ 여기서 또, 다섯 개의 “원(原)”중에서 “가람진원(岢 嵐 眞 原)”이 있는데, 옥편(玉篇)에서 “가(岢)”를 찾아보면, “태 원(太原)산의 이름 가(岢)” 자(字)이며, “람(嵐)”은 “산 이름 람(嵐)”이다.
『“가람(岢嵐)현. 가람(岢嵐)산, 가람(岢嵐)하, 가람(岢嵐)주”등이 몽땅 “산서 성(山西省) 태 원(太原)주위”에 몰려있다』는 것은 지명(地名)을 강제(强制)로 이동(移動), 역사(歷史)를 조작(造作)시키는 전형적(典型的)인 모습이다.
➏ 여기서 고구려(高句驪) 태왕(太王)들의 장지(葬地)가 묘하게도 “원(原)”이나 “곡(谷)”으로 된 분들이 있다.
곧 『동명성왕은 용산(龍 山), 유리명왕은 두곡동원(豆 谷 東 原), 대무신왕은 대수촌(림)원(大 獸 村(林)原), 모본왕은 모본 원(慕 本 原), 신대왕은 고국 곡(故 國 谷), 고국천왕은 고국천원(故 國 川 原), 산상왕은 산상 릉(山 上 陵), 동천왕은 시원(柴 原), 중천왕은 중천 원(中 川 原), 서천왕은 서천 원(西 川 原), 봉상왕은 봉산 원(烽 山 原), 미천왕은 미천 원(美 川 原), 고국원왕은 고국 원(故 國 原), 소수림왕은 소수 림(小 獸 林), 고국양왕은 고국 양(故 國 壤)』이다.
이러한 장지(葬地)의 이름이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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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곡 군(上谷郡)은 규 주(嬀州)에 속했으며, 규 주(嬀州)는 규수(嬀水)주변에 있다.
그것은 전회(前回)에 설명(說明)한 것처럼,『규 주(嬀州)는 규수(嬀水)의 이름을 취해 그 주(州)의 이름으로 했다』는 것이니, 당연히 “규수(嬀水) 주변에 있었다.”『 改 名 媯 州 , 取 媯 水 為 名』이러한 『조선(朝鮮)의 지명(地名)은 조선사(朝鮮史)의 영욕(榮辱)과 함께』 이리 저리로 『강제(强制) 이식(移植)』되어, 오늘날 하 북 성(河北省) 북쪽지방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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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호(胡)와 동호(東胡)는 고대(古代) 조선(朝鮮)
➊ 적대관계(敵對關係)에 있는 나라에 대한 비하(卑下)적인 말일 수 있고, 자신들을 제외(除外)한 타 인접(隣接)국가(國家)에 대한 호칭(呼稱)일 수 있다.
➋ 수경 주(水經注)를 보면, 패수(浿水)조에 “구려(句驪)호(胡)”라 하였고, 조선(朝鮮)은 호국(胡國)이란 말이 있다. 동호(東胡)란 말은 동(東)쪽에 사는 호(胡)란 이야기일 뿐이다. 그 한계선(限界線)은 최소한(最小限) 흑해(黑海)나 카스피 해(海)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 이유(理由)는 “연(燕)”이란 나라에서 조선(朝鮮)을 동호(東胡)라 했으며, 연(燕)은 규수(嬀水)의 서쪽지방에 있었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➌ 고구려(高句驪)는 타의(他意)와 자의(自意)에 의해 동천(東遷)하게 되는데, 이것은 대륙 사(大陸史) 열전(列傳)에서도 확인(確認)되는 내용이다. 당(唐)시대의 시인(詩人), 학자(學者), 관리(官吏)들의 시(詩)에서도 “연(燕)”의 위치를 “현 신강성지방의 사막지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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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양(西洋)의 산업혁명(産業革命) 업자(業者)들과 그 하수인(下手人)이었던 왜(倭)의 사주(使嗾)를 받은 남방(南方)세력(勢力)들이 기존(旣存)의 정치세력【 政治勢力) : 수천(數千)년 이어온 봉건왕조(封建王朝)였던 “조선조정(朝鮮朝廷)”】을 몰아내고, 가장 먼저 착수(着手)한 것이, 자신(自身)들만을 위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이었다. 당시(當時)로써는 천문학적(天文學的)인 돈과 엄청난 인원(人員)을 동원(動員)하여, 증보(增補) 교정(矯正)등등의 명목(名目)으로 대부분의 역사서(歷史書)가 재 편찬(再 編纂)되어【그 이전(以前) 원본(原本)은 지금 어디에 보관(保管)되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실정(實情)이다.】, 이용(利用)되었으며, 오늘날 동북삼성(東北三省)과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지대까지도 자신(自身)들의 영역(領域)으로 확고(確固)히 만들기 위해, 별의별 수단(手段)을 가리지 않고 있다.
설명(說明)하기 어려운 부분(部分)이나, 납득(納得)키 어려운 부분(部分)은, 음(音)의 차음(借音)과 전음(轉音), 토음(土音)등으로 적당(適當)하게 설명(說明)하면서, 온 대륙(大陸)의 지명(地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아 버렸다. 나중엔 자신(自身)들 스스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열도(列島)의 군국주의(軍國主義)는 팽창(膨脹)된 국력(國力)과 내부(內部)의 정치적(政治的) 혼란(混亂)을 적절(適切)하게 이용(利用), 반도(半島)를 영구(永久) 통치(統治), 지배(支配)키 위한 수단(手段)의 하나로 소위(所謂)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식민조선사(植民朝鮮史)를 만들어, 전파(傳播)하고, 반도(半島)에 있었던 세상(世上)물정(物情)을 전혀 모르고, 오직 열기(熱氣)만 갖고 있던 젊은 지식인(知識人)을 적절(適切)히 포섭(包攝)하여, 조선인(朝鮮人)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도록 뒷받침했다.
당시(當時) 어수룩했던 반도(半島)의 젊은, 혈기 넘치던 젊은이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판단(判斷)치 못하고, 오직 그들이 지시(指示)하는 대로, 조선사(朝鮮史)를 창작(創作)해 버렸다.
수만(數萬)리 영토(領土)는 삼천리(三千里) 땅으로 바뀌고, 초원(草原)을 질주(疾走)하며, 호령(號令)했던 기마전사(騎馬戰士)들은, 오직 발로 뛰어 다니는 처절(悽絶)한 비극(悲劇)으로, 동족(同族)끼리 수천(數千)년 이전투구(泥田鬪狗)을 벌이며, 수만(數萬), 수십만(數十萬)의 목을 자르는, 파렴치(破廉恥)한 역사로, 동서(東西)로 남북(南北)으로 똑같은 백성들을 차별(差別)화하여, 지역감정(地域感情)을 부추기는, 더러운 권력(權力)싸움과 오직 자신(自信)들의 가문(家門)과 가문(家門)의 영광(榮光)과 영달(榮達)을 위해, 배신(背信)을 거듭하는, 치졸(稚拙)하고, 더러운 역사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이 반도(半島)조선사(朝鮮史)는 조선(朝鮮)의 패배(敗北)역사관(歷史觀)으로 이어져, 반도(半島) 밖으로 뛸 수 있는 어떤 요소(要素) 다 없애버리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 빼앗긴 역사!
잃어버린 역사!
후손들로부터 잊혀 져 버린 역사!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역사(歷史)!
이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자존심(自尊心)과 얼과 혼(魂)을 되찾기 위한 것이다.』 이런 순수(純粹)한 것을, 도리어 『협박(脅迫)과 회유(懷柔)와 비난(非難)과 야유(揶揄)로 일관(一貫)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될 수 없으며, 지탄(指彈)의 대상(對象)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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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현실(現實)은?
● 아베정권을 보라. 수십(數十)년 침체(沈滯)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웃 나라들을 환율이라 무기로 공격(攻擊)하며, 【이것 역시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막 말을 거침없이 쏟아 내고 있으며, 국민들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위해, 이웃나라와의 영토분쟁(領土紛爭)이라는 카드까지 꺼내 들고, 스스럼없이 거친 행보(行步)를 계속하고 있다.
●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문과 방송에선 온통 청문회이야기 뿐이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도 들려온다면 다행이련만, 온갖 더럽고, 지저분한, 쓰레기 같은 이야기만 내 놓고, 부동산(不動産) 투기(投機)의혹(疑惑), 병역기피(兵役忌避) 의혹(疑惑), 주민법위반, 공금유용(公金流用), 세금(稅金)포탈(逋脫)등등 비리(非理)의 백화점(百貨店)같은 형태(形態)를 보이고 있어, 아예 뉴스를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대통령(大統領)당선인(當選人)은 공약(公約)을 해 놓고, 감내(堪耐)할 수 없는 공약(公約)인지라 아예 공약(空約)으로 만들고, 국민(國民)들은 “국민연금(國民年金)”으로 한바탕 홍역(紅疫)을 치르게 하고 있다. 그까짓 4만원 5만원 받아서 무엇에 쓸꼬........한심하다 못해 갖고 노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程度)이니, 이 나라는 어디로 가야할 건가!
원칙(原則)과 법(法)을 지키는 사회(社會)를 강조(强調)해 온 당선인(當選人)은, 앞으로 자신(自身)의 신념(信念)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누구 볼일이다. 초장(初場)부터 자신(自身)이 선택(選擇)한 사람들로부터 원칙(原則)이 무너지고 있으니 말이다. 『원칙(原則)과 법(法)이 있는 사회(社會)! 』정말 좋은 문구(文句)요, 좋은 말이며, 좋은 신념(信念)이다. 『그러나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아니함만도 못하다』는 것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우리를 위한 강력한 지도력(指導力)을 가진 지도자(指導者)』를 선택(選擇)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언제 외세(外勢)에 의한 안보의존(依存)을 벗어 날 수 있을까? 우리나라 국민(國民)들로부터 존경(尊敬)받는 재벌(財閥)이 언제쯤 탄생(誕生)할 수 있을까? 부족(不足)한 것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조차 가름할 수 없을 정도다.
반도(半島)는 이제부터라도 『건전(健全)한 정신(精神)혁명(革命)운동(運動)』을 펼쳐야 할 때다. 법(法)과 규율(規律)과 약속(約束)을 지키지 않는 자(者)들에게, 국민(國民)위에 군림(君臨)하라고 한다면, 누가 그 자(者)의 말에 순응(順應)할까? 만약 이러한 자(者)들이 국민(國民)위에 군림(君臨)한다면, 이는 스스로 무너지는 모래 성(城)일 수밖에 없는 운명(運命)이다. 『원칙(原則)과 법(法)을 준수(遵守)하는 사회(社會)!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신분(身分)을 떠나, 과감(果敢)하게 도태(淘汰)시키고 그 대가(對價)를 받게 하는 사회(社會)! 이것이 원칙(原則)과 법(法)을 준수(遵守)하는 사회(社會)가 아닐까!』
2013년 02월 23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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