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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부사 윤세임(尹世任)
▶ 인조(仁祖)11년(1633년), 식년시(式年試) 갑과3(甲科3)
1. 인적사항
생년(生年) : 1596년, 병신
자(字) : 중경(重卿)
본관(本貫) : 파평(坡平)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김기현-- 광산(光山) -기미(己未)1799
자 성소(聖素) 이고
순조(純祖) 16년(18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854년에 나주목사로 재직하여 민인의 원망을 살피고 균포법을 파했다 하고 그것이 선치라 하여
암행어사 박인하가 보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명룡--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백유(伯兪), 호는 영서(穎西). 아버지는 대승(大承)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부호군 운(雲)의 딸이다. 유년 시절에 작은아버지 중승(仲承)에게 배웠다.
홍익대-남양홍씨 자는 망여
유한식--본관기계 자는자범 순조16년 울산부사역임
유간--자는 노천 호는 후천 본관 진주 유겸의 후손 무오사화때 울산부사 역임 2년
손광연---태종 1년에 울산 지군사 역임 하고 태화루 중수하였다.
윤홍국-판관
이규목----울산군수를 지냄 울산 주연마을에 선정비가 있음
배대유-판관
류담후-울산부사---류담후(柳譚厚) 1623(인조 1)~1686(숙종12)
조선의 문신. 자는 정부(正夫), 호는 결청재(潔淸齋), 당훤(堂萱)의 아들.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65년(현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해 있다가, 1678년(숙종 4) 정언(正言)에 초임(初任), 사서(司書)·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다시 은퇴했다. 1680년 헌납(獻納)으로 등용되었고 홍문관(弘文館)에 발탁(拔擢)되어 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이어 울산 부사(蔚山府使)로서 탐학한 토호(土豪)를 다스리고 송사(訟事)를 잘 처결하여 관찰사로부터 해결이 어려운 송사를 맡아 처리했다
신원열-울산부사---울산 팔경을 노래한 학음산고가 있음-1792-1866
유석주=-울산부사---자는 희우 본관 기계
정기룡-울산부사 2번---임진왜란때 장군이며 육지의 이순신이라 하였고 하동에 모시는 서원이 있고 상주에 묘가 있다.
이산두-지울산부사---세종조에 울산부사역임-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산두(李山斗)가 일찍이 울산(蔚山) 수령으로 있으면서 감수(監守)하던 돈과 양식을 도둑질하였으니, 율이 장(杖) 1백 대와 유(流) 3천 리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장 90대를 치고 함길도 사진(四鎭)에 유배(流配)시키게 하였다.
윤득림-울산부사--. 윤득림(尹得霖) 1717~ 울산부사로 재임하면서 울산도호부 객사(客舍)를 중건하였고 본관은 해평
이순민- 울산판관---
박종민-울산부사---울산 양사재의 전신인 1814년 박종민 부사가 사림의 ‘강학소를 지음
최여해=울산 통판-
박의장--조선전기울산부사 3차례---경상좌도병마사와 울산부사 겸임함
정세필 -경사좌병사 울산부사 겸임---
황여헌- 울산 군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헌지(獻之), 호는 유촌(柳村). 영의정 희(喜)의 현손이며, 보신(保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형(從兄)이고, 아버지는 부사 관(灌)이며, 어머니는 집의(執義) 강미수(姜眉壽)의 딸이다. 맹헌(孟獻)의 아우이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저작·박사를 거쳐, 1511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15년 전적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와 울산군수를 지냈으나, 1533년 사건으로 금산(金山) 옥에서 도망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장류(杖流)의 형을 받았다.
이순 -울산염포 만호 울산 군수----1518년에 7월 에 울산군수 있다 체직 되었음
윤지태--울산 부사---ㅇ여조때 울산부사 역임 동강병원 마애선정비가 있음
조재선-울산부사----본관 풍양(豊壤)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전력 유학(幼學) -선정비가 3개 있음
유한위-행 울산부사 ---기계유씨 유언술의 아들 진사공파 후손- 그해 12월 29일 봉산(封山, 조선용 목재 산지)을 민둥산이 되게 했다는 일로 파직되었다. 술신년 (1788)1월 8일에 붙잡혀 갔다
유산보-성종때 울산 부사 역임-무관출신
유언통- 1745년에 울산부사 제수 병인년(1746) 6월에,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獄事)를 처리한 기록을 빠뜨린 것이 발견되어, 인사고과에서 중(中)의 성적으로 폄하되자 체차(遞差)되어 돌아갔다.
유은주(兪殷柱); 거주지는 홍천(洪川)이다.-순조8년(1808)에 태화루를 중수했던 유은주공의 울산도호부사 재임 기간은, 가경11년 병인(1806) 7월 24일에서 기사(1809) 7월12일까지 만3년 가경11년 병인(1806) 6월22일 대흥군수에서 7월 24일 울산부사로 도임하였다. 기사(1809) 7월12일에, 공충감영(公忠監營; 충청감영) 장계에 의해 대흥군수(예산군수) 재임시 환곡 포탈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소환되었다. 7월25일 파직되어 철원부에 유배갔다
유한식(兪漢寔); 거주지는 서울이다. 가경21년 병자년(1816) 3월 29일에 울산부사로 도임하였다. 정축년(1817) 2월 27일에 상주목사로 승차되였다
유석주(兪碩柱): 거주지는 서울이다. 도광18년 무술년(1838) 3월1일에 덕천군수에서 3월27일에 울산부사로 도임하였다. 기해년(1839) 6월 29일 충주목사로 승차되었다
김호-일학헌---본관은 연안. 자는 여습(汝習), 호는 심락재(尋樂齋). 아버지는 부사 수오(粹五)이다.
1663년(현종 4) 충청도 유생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건의하였다.
1678년(숙종 4) 통사(通仕)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지평·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87년 장령이 되어서 지평 이정익(李禎翊)·김만중(金萬重) 등을 구하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당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에도 장령으로 있다가 울산군수를 지냈다.
박명부-울산부사------박명부, 자는 여승이며 밀양박씨 시호는 문헌임, 공으로 인하여 위로 삼대에 걸쳐 좌참성, 좌참찬, 통정대부좌승지로 추증되고 1571년 생 장원급제, 호조좌랑,해주판관, 도찰방, 합천군수,공조정랑,고부군수,대구부사.당상관,죽산부사,제주목사, 울산부사,충청도관찰사, 예조참판,호조참판,형조참판, 1638년 관에서 졸.
임금을 섬김에 속임이 없고 청렴하고 관대하며 간편하여 다스림에 백성을 소생시키고 병폐를 없애는것을 본령으로 삼았고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 송사를 다스림에 공평, 공정하였음, 벼슬 50년에 일곱고을을 다스려도 재물을 가까이 함이 없었다.
한규석-울산부사----철종때의 울산부사 민란이 일어남
이충익-울산부사--- 1859년(기미년, 철종10년)에 울산부사 이충익(李忠翼, 부임기간: 1858~1860)에 의해 주변 건물 알안당(얼안당, 枾岸堂)의 재목과 기와를 수습해 중건에 보탰고, 가학루 앞, 뒤 편액과 기문, 상량문도 이충익이 직접 썼다고 전해짐
이래-柱蜂-울산부사--- 이래(李崍) : 1588(선조 21)-?, 호 명면 종산2리 신당동 사월(神堂洞沙月, 內洞) 출신, 자는 언첨(彦瞻),
호는 주봉(柱峰), 본관은 진보(진성), 대사헌 해(瀣)의 증손자, 유학(幼學) 미도(味道)의 아들, 순의 형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10년(광해군 2) 식년 생원시에 1등 5위로 합격, 1624년(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司成)과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여러 군을 다스리면서 언제나 청백하다고
일컬어졌다.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서 학문에만 열중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문집이 있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除授 1641.12.1,
이정인--울산부사----정조 때 울산 부사였던 이정인(李鼎益, 1753~1809)의 『입암정기(立岩亭記)』을 지음
정지호=-울산부사---공은 성은 정씨(鄭氏), 휘는 지호(之虎), 자는 자피(子皮)이며, 별도의 자호는 무은(霧隱)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1669)에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제수되었다.
박취문-부사----부북일기를지음
백남 김시빈-울산부사----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 영천(榮川) 출신. 아버지는 통덕랑 정휘(鼎輝)이며-1728년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영남지방으로 확대되자 채성윤(蔡成胤)의 천거로 영남의 요충을 방비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뽑혀 울산부사가 되었다. 그곳에 부임하여 폐습을 과감히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구상 시인의 할아버지 울산부사--자세한것은 모름
이계의--울산부사---자료부족
유시성 -울산부사 기계유씨---울산부사(蔚山府使) 유시성(兪 諱始成)公
1623(광해군 15) ~ 辛卯武科(1651년,효종 2)
1651년, 효종(孝宗) 2년 정축무과별시(辛卯武科別試) 병과(丙科) 급제,
현종 1년(1660) 2월 6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辛卯, 兵曹啓目, 蔚山府使兪始成, 先罷後拿事。依允。
신묘, 병조계목, 울산부사유시성, 선파후나사。의윤。
신묘,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울산부사(蔚山府使) 유시성(兪始成)을
먼저 파직시킨 후에 나문(拿問 : 죄인을 잡아다가 그의 죄에 대하여 캐어물음)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한다고 답했다
곽익-울산부사----곽익(郭익)
17세손. 자(字)는 군정(君靜). 울산공파조(蔚山公派祖)이다. 공은 남명(南冥) 조식선생 문인으로 울산부사(蔚山府使)를 지냈다.
김요산-울산부사 -관찰사 호우의 5세손. 선조때 울산부사를 역임.
이광직-울산부사---한편, 1751년(영조 27년) . 울산부사 이광직(李光),
조병성 -울산부사--조선말기 관리
석하공 안씨-울산부사 고종---안종덕 밀양출신
배응경- 울산부사 임진왜란----임진왜란중 부사로 재직
김영수의 조부-1716-1786 울산부사---김영수(金永綬1716~1786)장군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인 안동김씨(安東金氏) 군사공파출신으로 조부는 조선후기 문신이며 울산부사 안주목사를 역임
나학천-울산부사-1690년---본관 수성 호 창주 영천 출신 효종에서 영조때의 인물 1693년에 울산부사
임희무-1527-1678 울산부사---군수 지냄-임희무(林希茂) 17世 :남계공(濫溪公). 자(字) 언실(彦實) 호(號) 람계(람溪)
1527(중종 22)∼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언실(彦實), 호는 남계(남溪). 함양출생.
아버지는 참봉 각(珏)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시민(時敏)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오건(吳健)·배신침(裵愼#침07)·노정(盧禎) 등과 교의가 깊었다.
1552년(명종 7) 강익(姜翼)·정복현(鄭復顯) 등과 함께 함양에 정여창(鄭汝昌)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을 창립하였다.
1558년 문과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성균관학유·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좌승지·우승지와 순창·금산·밀양·울산부사
야로 송씨는 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부사와 목사를 지낸 광정(光廷)공으로 자는 찬재(贊哉) 호는 송간(松磵)이며, 충숙공(忠肅公) 야계산옹(倻溪散翁) 희규(希奎)
권서-울산부사-권정의 후손---자료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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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헌- 울산부사----자료 부족
김종일-울산부사--- 김종일(金宗一)은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가 볼모로... 유배되었다. 그 후에 풀려나와 울산부사(蔚山府使
임흥망- 울산부사--풍천 임씨---숙종 때의 인물
남천택-울산 무사 1665-11월---남천택(南天澤, 1619~1684)은 1642년(인조 20)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48년(인조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사헌부장령, 울산부사,
안후-울산부사-----사제문(賜祭文) - 지제교(知製敎) 안후(安垕, 1636~1710) 宗簿寺正), 울산부사(蔚山府使, 1676),
배치-울산부사---- 자료 부족
신홍망- 울산부사---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1656년 울산 부사(蔚山 府使), 1659년에는 풍기 군수(豊基 郡守)로 나아갈 때 수령들이 잇달아 관청에서 죽으며 흉흉한 소문이 일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라고 말하며 부임하였다 한다. 수령이 된 뒤에는 교육을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가난한 선비를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연승(曺演承) --1809년(순조 9)~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인수(寅叟)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출신지는 충청도 충주(忠州)이다- 1860년(철종 11) 5월에 직산현감(稷山縣監)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덕산현감(德山縣監)‧울산부사(蔚山府使)
김낙균- 울산부사----독립운동가 부친임
안복준- 울산부사----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초(子初), 호는 택헌(擇軒). 안동 출생. 헌(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현(重炫)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에 추증된 연석(鍊石)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도제(道濟)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정릉령(貞陵令)·이조정랑을 거쳐 1737년 부안현감이 되어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나, 어사 남양근(南養根)의 무고로 고생하다가 풀려났다. 1753년 부지평(指平)이 되고 이듬해 장령(掌令)에 올랐으나 또 무함을 받아 울산부사가 되었다
손영제-울산부사---조선시대 명종때 김제·울산 군수 등을 지낸 손영제(孫英濟)
유담후-울산부사------1651년(효종 2) 사마시를 거쳐 166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있다가, 1678년(숙종 4)에 정언(正言)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그뒤 사서·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다시 은퇴하였으며, 1680년 헌납으로 등용,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이어 울산부사로 부임하여 탐학한 토호를 다스리고 어려운 송사를 잘 처결하였으며, 순창군수를 지낸 뒤 다시 사직하였다가
김을적 울주부사-신라김씨----족보에만있고 자세한 자료 부족 조선초기의 문신이고 지방관을 주로 역임함
김급-울산부사- 신라김씨---족보에만있고 자세한 자료 부족
표빈- 울산부사------표빈(表贇):성종17년(1486)~명종18년(1563)
할아버지는 사복시 정(正) 표위산(表偉山)이고 아버지는 참봉 표정명(表貞命)이며 어머니는 사간(司諫) 배언도(裵彦道)의 딸이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자(字)는 수연(粹然)이며 호는 모재(茅齊)이다.
중종5년(15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15년(1520) 문과 별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장령․형조좌랑․전라도사․울산군수․안동부사․김해부사 등을 지냈고 중종 때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울산군수로 근무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김태허 임진왜란때 울산군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여보(汝寶), 호는 박연정(博淵亭). 아버지는 좌찬성 김희증(金希曾)이다.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 옥포만호(玉浦萬戶)가 되었다. 인품이 충직 순박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밀양성이 함락된 뒤 밀양부사로 임명되어 분전하였다. 이어 울산군수로 전임되고, 울산성전투에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와 큰 전공을 세워 당상관에 올랐다.
인조 5년 정묘(1627, 천계7)
7월 21일(을유) 맑음
정사가 있었다. 헌납에 이소한(李昭漢), 부제학에 정경세(鄭經世),사서에 이경(李坰), 설서에 윤효립(尹孝立), 평양 서윤(平壤庶尹)에 이영식(李永式), 울산 부사(蔚山府使)에 박경업(朴慶業),
1월 27일(정해) 맑음
김영순(金永順)을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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