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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 등장하는 직책들
1. 헤롯 성경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나타났던 대헤롯(B.C37~4)도 헤롯왕이고, 예수님 사역하시던 (A.D30년 쯤) 때에도 헤롯 안티파스(B.C4~A.D39)도 헤롯왕이고 사도행전에도 헤롯이 성경에 나온다. 헤롯이 죽지 않는 불사조 인가?? 나쁜 놈은 뭐 이렇게 오래 사나??
대 헤롯은 헤롯가문을 유다에 튼튼히 ‘왕’으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이다. 왕이 된 이후에도 약 30년 이상을 다스린 사람이다. 이때 당시 이스라엘 정치 상황은 식민 백성은 유대인이고, 꼭두각시 왕은 에돔사람(왜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 왕인지 궁금하면 하스몬 왕가 살펴 보세요)이고, 실권자는 로마이다. 이 꼭두각시인 헤롯왕은 유대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극장 등 등 많은 공동시설을 건축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된 사건에 등장한 것이다. 헤롯은 어떻게 해서 얻은 “유대인의 왕”자리인데, 자기 말고 누군가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헤롯이 가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유아들을 다 살해하라는 명령까지 냈는데 그만 자기가 죽어 버린 것이다. B.C4년에 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B.C4년 또는 B.C5년 겨울로 잡기도 합니다.
2. 분봉왕
위의 대헤롯이 죽으면서 한명에게만 왕권을 줬으면 편한데 3명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관할 구역을 나누어 줍니다. 안티파스에게는 갈리리와 베레아 지역(요단 동편), 빌립에게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 아켈라오에게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메(에돔)의 통치권을 줍니다. 아켈라오에게 반을 주고 나머지 두 아들들에게 반을 줍니다. 이렇게 나눠진 땅을 다스린 사람들을 분봉왕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헤롯이 유언 했다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로마의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분봉왕‘ethnarch'은 왕’king'(대 헤롯)보다 낮은 지위입니다. 한국말로는 똑같은 분봉왕이지만 분봉왕‘ethnarch'은 분봉왕’tetrarch'보다 높은 지위로 불리던 명칭입니다. 로마는 아켈라오에게는 ‘ethnarch'를, 빌립에게는 ’tetrarch' 라는 명칭을 허락합니다.
아켈라오는 마태복음 2장 22절에서 한 번 언급 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이집드로 피난갔다가 유대지역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로 올라가 살게된 이유가 유대지역은 아켈라오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주로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가 세운 도시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고향 갈리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3년 중에 나오는 헤롯왕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또한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은 아님)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왕으로 세례 요한이 이것을 질책하자 딸의 꾀임으로 세레 요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도행전에서부터 다른 헤롯왕들이 나타납니다. 이때 나타나는 헤롯왕가의 이름이 바로 아그립바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3명의 분봉왕들의 자식이 이닌 대헤롯의 형 파사엘의 혈통을 타고 내려온 다른 계열의 사람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왕으로 처음으로 아그립바라를 이름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후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헤롯 아그립바2세가 됩니다. A.D55년 경에 이르러 갈릴리와 다가볼리,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며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A.D100년 경까지 다스립니다. 바울이 가아시랴 감옥에 있는 동안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하자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가 가이사랴로 방문했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개인 간증(행22장)을 그들 과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합니다.
3. 총독
위에서 잠깐 총독(벨릭스 베스도)이 나왔습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인가?? 보통 전쟁에서 나라를 빼앗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누군가 통치자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통상 정복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통치자로 새로 세운 다음에,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 보통 식민 정책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세울 왕이 없을 때는 본국에서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 사람들을 총독이라고 불렀습니다. 포로시대 때는 느헤미야가 총독이었고, 예수님을 못 밖은 사람이 바로 빌라도 총독입니다. 왜 분봉왕이 있는데 또 총독도 있었을까요?? 설명하겠습니다. 분명 대 헤롯이 아들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에돔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만 정치를 너무 야만적으로 했습니다. 가이사(아우구스투스)는 유화정책으로 다스리라 그랬는데 폭력적으로 하자 백성들이 폭동을 일르켰고 이 때 아켈라오는 2000~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대는 (예루살렘 지역)혼란해졌고 폭동은 점점 더 심하게 번져 가자 로마의 개입으로 진정 됐습니다. 그러자 유대 지역 백성들은 더 이상 헤롯 가문의 통치를 못 받겠다고 로마에게 청원하자 가이사는 아켈라오를 소환하고 고올(프랑스)로 추방 시킵니다. 그 이후부터 유대 예루살렘 지역만은 분봉왕이 다스리지 않고 직접 로마의 직영으로 통치 받습니다. 총독이 파견 된거죠. 1대 총독 코포니우스 시작으로, 마르쿠스 얌비불루스(2대),아니우스 루푸스(3대),발레리우스 그라투스(4대), 우리가 잘아는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5대, A.D26~36)로 이어지다가 사도행전에서는 벨리스와 베스도가 그런 인물들입니다.
4. 산헤드린공의회
황제, 헤롯가문, 총독이나 그런 정복자들은 순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볼 때는 적들입니다. 힘이 없어서 정복당했지 언제든지 들고 일어나 독립하고 싶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순수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 나름대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산헤드린 공의회입니다. ‘공의회’ 라는 말처럼 ‘의회’ 로써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 기관’입니다. 유대인 공동체 속에서는 가장 높은 ‘정치 기관’으로서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파, 사두대파등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의 사람들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인 주권은 로마가 가지고 있지만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 행정적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 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요 18:31)”라고 한 말에 나타난 법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법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예외는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을 범했을 때입니다.
5. 대 제사장
산헤드린 공의회가 유대인 자치 세력으로써 최고의 기관이고, 또한 한 개인으로써 대장이 있었습니다. 누굴까요??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에스라 이후로는 대 제사장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직책이라면 대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 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주역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로써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지만, 사실 로마나 헤롯이나 총독에 붙어서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들을 착취하는 사람으로 대부분 쉽게 타락해 버립니다. ‘대제사장’이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을 정복자들 또한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사람을 임명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레위 지파 사람만이 제사장이 되지만 정복자들에게는 그것이 상관 없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사람을 아무나 임명합니다.
6. 서기관, 율법사, 랍비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율법을 배우고 유대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모이게 된 장소를 가르켜 회당이라고 부릅니다. 외국 땅에서 유대 정신을 잇게 하는 집회장소인 셈입니다. 회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지만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교육을 한 것입니다. 회당은 이방 땅에서뿐만 아니라 고국에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세워졌고, 원래 이 운동은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했던 일입니다. 에스라 이후 사람들은 율법을 쉽게 가르치기 위해 해석하고 풀어주는 서기관, 율법교사, 지혜교사, 랍비가 생긴 겁니다. 현재로 말하면 목사님이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그것을 쉽게 풀어 해석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일들을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이 한 것입니다. 또 공적인 자료들을 기록하고 필사했던 사람들(왕하 12:10)이 있었듯이 서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법률가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산헤드린의 회원이며 신학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7.바리새파
바리새파는 마카비 가문의 거룩한 전쟁에 함께 참여한 거룩한 전사들로서 구별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며 의식상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고, 정결 예식과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을 엄격하게 지켰다. 또한 바리새파들은 모세 율법이외도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구전의 구속력을 인정하였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주장하였고, 영혼 불멸, 몸의 부활, 영혼의 존재, 천사와 마귀의 존재, 사후 상벌, 성경의 영감설, 죽은 자의 미래, 인간의 평등을 믿었으며, 주로 원리적인 가르침에 치중하여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바울도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들은 로마에서 임명한 엉터리라는 것을 백성들도 알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민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니고데모,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도 있었던 점으로 보아 진지하게 율법을 연구하며, 구약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들을 통해 이어져 내려왔다. 오늘날 까지도 정통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핵심 세력들이 이들이다.
8.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유대교 안에서 제사장적 귀족 집단을 형성한다.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독’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사독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이다. 마카비 혁명을 전후로 해서 제사장 제도가 재정비되고 재조직 될 때 사두개파가 하나의 당파로 인정을 받게 되고, 바리새파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며 경쟁관계에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초대교회 당시 집권 여당세력으로서 진보 헬라주의를 표방하였다. 구전 전승의 구속력과 권위를 부정하여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고, 바리새파보다도 더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레위인의 정결의식과 제사의식,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반면, 모세오경에 없다는 이유로 내세, 부활, 영적세계, 천사와 마귀 등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이 당시 대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제사장들이 사두개인들이었고, 공회원의 상당수가 사두개인이었다. 이들이 사도들의 부활에 관한 설교를 싫어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9. 엣센파 엣센파는 쿰란 공동체로 불리며, 경건한 유대 공동체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문서들의 발견으로 이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한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들이 백성들과 접하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들은 광야에 은둔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세례요한이 이 엣센 공동체에 관계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한다. 종교 공동체로서 극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고 주로 동굴 속에서 거주했고 많은 문서들이 발견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해사본’이다. 이 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로 공헌을 합니다. 그들은 토라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였고, 재산의 공유권을 주장하여 하나의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다. 상호간의 강한 책임의식과 성경연구를 중시하였으며, 많은 성경을 복사하였다. 경건과 순종에 대한 엄숙한 서약을 하였다. 그들은 예물을 절기나 성일 때에 바쳤지만, 동물희생을 바치지 않았고, 성전 제사에 참석치 않았다. 결혼을 피하고, 운명이나 별점, 천사를 숭배한 흔적도 있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상업을 피하고 농업에 의존하였다. 모래침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은 며칠 앞당겨 화요일에 지켰다. 매우 엄격하고 의식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긴 묵상과 예배를 중시하였다
10. 열심당 이 당파는 종교적 당파가 아닙니다. 열성적 민족주의 집단으로 마카비우스 활동에 그 기원을 두며, 이들은 맹렬한 반 로마주의자면서 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기득권 세력자들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언제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티투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에 일단의 열심당원들과 그 가족들이 사해 근처에 버려진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여 로마군에 대항하였다. 이 요새에는 헤롯 대왕이 숨겨 놓은 많은 무기가 있었다. 유대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 요새를 포위하고 흙을 쌓아 성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197미터, 높이 55미터의 엄청난 경사로를 만들었다. 이 때 열심당원의 지도자였던 엘레아자르(Eleazar)는, "나의 진실한 친구들이여, 우리는 일찍이, 홀로 인간의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주이신 하나님이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특히 로마인들에게는 결단코 종이 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제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왔습니다. . . ."라는 연설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모든 가장들로 하여금 가족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집안의 가장들은 제비로 열 사람을 뽑아 남은 자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은 자 한 사람은 요새에 불을 지르고 난 후에 자결하였다. 이렇게 죽은 자들이 960명이었다. 이 날이 니산월 15일이었다. 여기서 살아 남은 사람은 노인 한 사람과 이 일을 미리 예견하고 다섯 자녀를 데리고 숨어 버린 엘레아자르의 친척 되는 한 여인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토라(모세율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11. 이스라엘의 행정구역
신약 시대에는 로마가 이스라엘 근처 모든 지방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유대 지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북쪽으로 갈릴리도, 중간에 사마리아도, 아래에 유대도가 있으며 신약에 많이 등장하는 성읍들만 조금 공부하면 됩니다. 근처 지방으로는 요단 동편으로 알려진 베레아도, 갈릴리 호수 동남쪽의 이방인들의 땅 데가볼리도, 갈릴리 지방 북쪽의 두로와 시돈(베니게 지역)지역 등이 있었다. |
출처: 오늘도 감사함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무화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