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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야고보서 1장 신자는 역경에서 경건을 이룬다
야고보서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이라고 규정하면서 신학계에 이슈가 되었다. 루터에게 정경 목록에 대한 구분을 둔 것이 문제점 중 하나이다. 정경 안에 정경의 논리가 가능했지만, 현재 루터파 연구자인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는 정경 66권의 동일 권위를 천명하고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위한 성경 해석을 추구했다. 칼빈은 야고보서의 저작 연대를 61년으로 제안하였다. ※칼빈은 <공동서신 주석: 벧전, 요일, 야고보서, 벧후, 유다서>을 최고의 그리스도인으로 칭송하며 에드워즈 6세에게 헌정하였다(1551년).
야고보서의 내용이 이신칭의 교리와 상반되는 개념인가? 전혀 그럴 수 없다. 구원에서 두 원리가 존재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방편이다. 야고보서는 신자에게 ‘훈련-권면과 경고’을 위한 서신으로 보면 좋겠다.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난다. 열매에 대해서 두 가지 방면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거짓 선지자에게 열매를 요구하였고(마 7장), 야고보서에서는 신자에게 열매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열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술에서 고백하는 언어로 판단한다.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교회를 지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은 교회 이름을 지명했다. 그러나 모든 서신은 ‘공동회람’ 서신으로 모든 교회가 읽도록 기획되었다. 다만 교회 이름이 있고 없고 차이일 뿐이다.
약 1:1-11절, 시험, 지혜, 성도의 자랑
[약 1: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된다. 저자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지 혈육의 형으로 생각지 않고 주님으로 고백한 것이다. 즉 그는 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순종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가 순종해야 할 주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쓴 서신도 있다.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는 교회가 박해를 받았던 상황이기 때문에, 야고보서의 내용이 후기 저작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1세기 초엽의 교회 상황도 세속화된 지금과 별차이점을 보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본성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부패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야고보서는 부패와 부조리(배움과 실천의 부조화)가 발생한 교회를 훈련시키는 교범이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후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사도행전 1:14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9에 ‘주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하였고 또 갈라디아서 2:9에는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하였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 여러 곳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유대인들은 유다 왕국의 멸망 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자들이 되었고 이제 예수님 믿는 유대인 성도들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였다.
[약 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rials)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the testing of your faith)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 서에 19번 사용된 ‘형제’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성도 상호간에 사용된 친근한 명칭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요한 사도나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라고 호칭하였다.
야고보는 평안을 기원하는 인사말이 없이 바로 권면에 들어간다. 당시 교회에 있는 ‘여러 가지 시험’의 상황을 지시한다. 당시 교회의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하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에게 시험은 언제나 여러 가지이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이 있고, 또 어떤 때는 실직이나 부도, 파산 등의 물질적,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있고, 어떤 때는 친구의 비방과 배신등 주변의 어려움이 있다. 어떤 때는 가정의 파탄이나 국가의 경제 공황이나 전쟁 등 사회적 어려움이 있다.
시험의 3가지 종류(test, trial, temptation)라고 분류한다. 우리 성경은 trial(시련)을 시험으로 번역하였고, testing을 시련으로 번역하였다. testing은 성장에 대한 평가 의미가 있다. 시련에서 믿음을 평가할 수 있다. 그 평가는 인내(perseverance, patience, steadfastness)이다. 성도에게 시련이 주는 유익은 인내하는 힘(능력)이다.
성도는 이런 다양한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환경이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또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5:3-4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인격의 단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했다. 신앙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하게 된다. 온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온전한 인격의 시작은 인내, 야고보서에는 혀를 통제하는 능력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단련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야곱은 20년간 하란에서 외삼촌 밑에서 고된 수고를 하였고, 요셉은 약 13년 가량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모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였고, 다윗은 10여년간 피신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랜 고난의 단련을 통해 신앙 인격의 성숙을 가졌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러 가지 시험(시련)을 당할 때 기쁘게 받아야 한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주님과 함께 걸어가서 푸른초장에 쉼과 밥상을 받을 수 있다.
시험, 믿음의 시련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18세기 유럽 지성들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으로 ‘악 존재’에 대해서 철학적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을 전했다. 야고보의 답은 신자를 온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으로 제시한다. 시련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4절) 구해야 한다(5절). 시련에서 믿음이 평가받을 수 있다. 시련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믿음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약 1:5-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double-minded)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시험을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이다. 지혜는 참으로 귀하다. 잠언은 지혜의 책인데, 지혜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에서도 언어(경우에 합당한 말)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은 귀를 간지럽게 하는 말이 아닌 이웃의 마음을 공감하고 마음에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혜,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교회의 문제점을 교정할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의지를 갖고서 함부러 나서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하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어야 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5절).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그는 그것을 후히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할 이유는 주께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7:7뿐 아니라, 마가복음 11:24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우리가 그의 뜻에 합한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필자는 두 마음을 인간의 기본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두 마음을 품지 않기 위해서 수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마치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과 유사한 훈련이 될 것 같다.
[약 1: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성도들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편, 사회적 신분이 있거나 물질적 유여함이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이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사 40:6-8)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천국과 부활에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세우는 종이 되어야 한다(롬 6:22).
둘째, 우리에게 시련이 닥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기자. 시련은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고, 인내를 양산하여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여 얻자. 믿고 구하는 자마다 지혜를 얻을 것이다. 두 마음으로 구하지 않고 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도록 훈련하자.
넷째, 우리들 가운데 낮은 형제들은 주 안에서 성도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은 세상것들이 헛됨을 깨닫고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하자. 성도의 가치와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있다.
약 1:12-18절, 시험의 원인
[약 1:12절] 시험(trial)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원어(페이라스모스)(2, 12-14절)는 ‘시련’이라는 원어(도키미온)(3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사람이 환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 복되다(3-4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원어(도키모스)도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들에게 주는 상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했다(롬 8:35, 37). 사도 요한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5:4).
영생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결과라는 뜻에서 상이라고 표현되었다고 본다. 영생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잘 참고 이겨야 한다.
[약 1:13-16절] [그러나] 사람이 시험(tempted)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tempted)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tempted)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迷惑, enticed, 유도, 미혹: 마음이 흐려 홀림)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 우리 야고보서 번역에 문제점이 있다(2절 시험(trail), 시련(test), 13절 시험(temptation)이다. trail, test, tempation에 대한 번역이 혼합되었다. 이학재 박사는 시련(trial), 단련(test),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하였다(맛싸역). 13절의 temptation을 시험으로 번역한 것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13절의 ‘시험’은 ‘유혹’으로 번역되는 것이 좋겠다.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다. 시험(유혹)의 원인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사람들이 시련에서 유혹을 하나님께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밝혔다(13절). 그것은 1세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21세기 그리스도인들까지 그런 경향이 있다. 구약 시대에 하박국 선지자도 그리했고, “Why God”, 18-19세기에 신정론이 대두되었고, 여전히 고난의 현장에서 그러한 질문을 하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미 답을 내 주었다(합 2:4). 야고보는 현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유혹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시련(trial)과 유혹(temptation)은 인과율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에서 유혹으로 평가하여 ‘하나님 왜’라고 질문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시련에서 유혹을 받는 것은 사람의 욕심에 끌려 미혹(迷惑)된 것이다.
욕심(ἐπιθυμία, desire)이 잉태하여 죄(sin)를 낳고, 죄가 성장하여 사망을 낳는다(15절). 과유불급(過猶不及), 욕심이란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선 탐욕(貪慾), 과욕(過慾)이다. 필자는 선을 넘었다는 것은 감정이나 질서를 흩트리거나 파괴하는 결과라고 제언한다. 성경에서 선한 열심을 내라고 권면한다(딛 2:11-14). concupiscence의 의미는 to desire strongly이다.
본문은 사람이 받는 시험(유혹)의 원인이 자기 욕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죄에 떨어진다. 사람은 탐욕(돈, 정욕, 명예, 권력) 때문에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한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면, 그런 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의 최고 목표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지혜롭고 공의롭고 선한 처분을 믿는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의 필요와 우리의 건강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에게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오직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선한 열심, 탐욕이 아닌 생명을 위해서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일 것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지옥 형벌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욕심을 낼 때는 그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그 결과는 죄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죄는 욕심이 잉태케한 결과이다. 욕심을 악이라고 규정하면, 악이 착상되어 죄가 되고, 죄가 장성하여 죽음이 된다. 악의 다양한 양상들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악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형제자매들은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이용해서 자기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악한 의도나 부족한 능력에서 자기 목적을 이루실 때가 있다. 그것은 인간을 책망하기 위한 것과 자기 선과 능력을 드러내는 방편이다.
[약 1: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리스도인은 은사를 받았다. 그 모든 은사는 위로부터(from above)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중생도 위로부터(from above) 온 것이고, 은사도 위로부터(from above) 온 것이다.
모든 좋은 은사와 완전한 선물로 표현하면서 단수형으로 제시하고 있다(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선물, gift)가 단수형인 것은 유일한 목적에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증진이다.
야고보는 이 은사(선물)이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고 제시한다. 야고보가 제시한 은사는 성령의 은사보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선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요 3:16). 야고보가 제시하는 아버지는 “하늘의 빛들, 변화가 없음, 회전하는 그림자 없음”이다.
[약 1: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8절은 맛싸역이 좋다. “원하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고, 우리로 그분의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어순을 바꿈으로 이해를 다르게 하였다. 우리말에서 어순이 중요하지 않게 사용하지만,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는 어순을 정립해야 한다.
칼빈은 자기의 뜻(원하심으로)으로 우리는 영생으로 중생케하였다(he has regenerated us unto eternal life)고 주석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λόγῳ ἀληθείας)으로 중생한다. 진리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를 피조물 중에서 첫열매로 삼으셨다고 규정하였다(18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 부활의 첫열매로 규정하였다(롬 8:29, 고전 15:20). 그런데 야고보는 중생한 주의 자녀에게 피조물에서 첫열매로 규정하여, 피조 세계를 선도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 열매(ἀπαρχήν)’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중생은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지만, 시련에서 미혹이 아닌 연단으로 인내를 가져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으며, 중생한 자는 온갖 시련에서 지지 않고 이기며 피조물의 첫열매로 서야 한다.
둘째, 사람에게 주어진 시험(유혹)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다, 사람은 돈과 쾌락과 명예 등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 어떤 시험(유혹)에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돈과 쾌락과 명예, 권력 등에 대한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5-16)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늘에서 주어진 선한 선물로서 나가야 한다.
셋째,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선물을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늘의 선물이 세상에서 전혀 무익하다. 그 하늘의 선물을 기뻐하는 것은 은혜이다. 세상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되어 가는 질서를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질서로 세워가야 한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생의 첫 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인지하였다. 세상은 세상의 정욕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그 세상에서 하늘의 소망을 추구하며 전도한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첫열매인 우리로 진행될 수 있다. 유혹의 열매와 하늘로부터 임한 첫열매가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어둠의 세상에서 성장하는 어둠과 하늘의 빛들로 성장하는 첫열매의 격돌이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가 보내신 아들을 세상이 믿는 것이다(요 5:19-47).
약 1: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약 1: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my beloved brothers), 너희가 알거니와 [그러므로, 전통사본, KJV Wherefore)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quick) 하고 말하기는 더디(slow)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고 있고, 모든 사람도 알고 있는 것이다. 듣기는 속히(빠르게)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화)내기는 더디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에게 보편성(universality)을 제시하며 진행하고 있다. 보편성을 제시하는 것은 합리성에 요청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말을 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怒, anger)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19절).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한다. 모든 성냄은 일을 그르게 하며 파괴한다. 우리도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20절). 우리는 성을 낼 때 말로 실수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죄를 짓기 쉽다. 성(분노, 성냄)이 표출된는 것이 화(火)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지혜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약 1: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filthiness, 불결)과 넘치는 악(惡, rampant wickedness)을 내어버리고(제거하고), 능히 너희 영혼(靈魂)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道)를 온유(溫柔)함으로 받으라.
맛싸역에서는 “온유함으로 심겨진 말씀들을 너희는 받아들일 것”으로 번역하였다. 개역(개역개정)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번역하였다. recive가 동사이고, “with meekness the implanted word(ἐν πραΰτητι δέξασθε τὸν ἔμφυτον λόγον)”를 한 절로 받으면 맛싸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제거하며, 영혼을 구원할 심겨진 말씀을 온유와 함께 받아야 한다. 온유는 급함(hurry)과 다른 빠름(quick)이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온유(溫柔, πραΰτητι, humble, meekness, gentle)은 ‘겸손’, ‘친절한’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겠다. πραΰτητι는 ‘온유’, 혹은 ‘친절’로 번역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한다. 더러운 것과 악을 제거하는 것은 회개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말씀, 마음에 심겨진 도의 증진을 제언하고 있다. 구원받는 사람은 무엇보다 죄악된 생활을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야고보는 영혼을 구원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도록 권면한다. ‘도’(道)는 ‘말씀’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복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에 율법이 돌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우리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고후 3:3).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순진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말한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가 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항하지만, 중생된 영혼은 온유함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
[약 1:22-24절] [그러나] 너희는 도(λόγου)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mirror)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도(道)를 듣기만 하지 말고(not hearers) 행하는 자가 되라(be doers of the word). 도는 신자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귀에 머문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즉 도가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야고보는 듣고 행함과 듣기만 한 상태를 거울(mirror)에 비교하였다(23절). 거울보고 기억했지만 잊어 버린다면 모양이 없는 것이다. 기억의 구조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현대 사고 체계에서는 무의식 세계로 유도하여 소유하였지만 소유하지 않는 복잡한 상황으로 구도화시킨다. 그러나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에 법적 효력이 없으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보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면 모습이 없는 것이며 어떤 능력도 없다.
야고보가 말하는 거울은 칼빈이 말하는 거울과 같지 않다. 야고보가 말하는 거울은 실체의 반사물을 본 것이고, 칼빈이 말하는 거울은 실체를 보게하는 거울이다. 야고보는 단순한 거울이고, 칼빈이 말하는 거울은 신학화된 거울이다. 그러나 거울의 공통점은 거울에 보이는 실체가 실체의 직접 피사체가 아닌 반사체로 보는 것이다.
[약 1: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법, the perfect law that gives freedom]’(25절)은 복음을 묘사한 말이다(김효성).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구하는 용도, 몽학선생의 기능이다. 그런데 구원의 실체이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율법을 성취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새계명을 주셨다. 주 예수께서 주신 새계명은 온전한 율법이며, 주께서 주신 새계명은 주의 백성에게 자유(liberty and freedom)를 선물로 주신다.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생명의 자유(liberty)와 죄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freedom)이다.
복음은 주의 자녀에게 ‘자유하게 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은 그 서신들에서 복음 안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음을 증거하였다(롬 7:6; 갈 5:1, 13).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율법 제도와 율법의 멍에와 속박과 위협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복음 진리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천하는 자이다. 즉 참 신앙은 순종의 행위를 동반한다. 로마서에서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하였다(롬 6:1-2, 15).
또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참고 계 1:3).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것이지만(히 12장), 그가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약속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때에 복을 받는다. 복은 구속의 복, 죄사함과 영생의 복이며, 창조의 복으로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등을 포함한다. 죄사함을 받은 자녀가 이 땅 위에 충만하도록 정진하자.
[약 1: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religious, 종교적, 신앙적) 생각하며 자기 혀(γλῶσσα, tongue)를 재갈(bridle)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하나님께 유혹받는 다고 생각하는 사람(13절),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21-22절)을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26절).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사두개인이다. 칼빈은 로마 교황주의를 유대주의와 연결시켰다. 교황주의는 스스로 교회라고 주장하며, 모든 경건한 모습은 다 갖고 있다. 경건(pietas)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한 심장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도 혀에 재갈을 먹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전철(前轍)에 있는 것이다. 나를 고소하는 사람은 나이다. 혀에 재갈(bridle)을 먹이라는 것은 그림이다. 말의 입에 채워진 재갈인데, 야고보는 혀(γλῶσσα, tongue)에 채워졌다고 제시하고 있다. γλῶσσα는 방언, 언어가 기본 의미이다. tongue이 혀의 의미가 있지만, 언어라는 의미가 있다(예시 mother tongue). 혀에 재갈을 먹이다라고 번역한 것이 강조된 의미가 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언어 사용에 재갈을 채우라”로 할 수 있겠다.
언어 사용에 재갈이 없으면 경건은 헛것이다(26절). 야고보는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사람이 스스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통제하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 경건을 증명할 수 없다.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참으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말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서로 사랑함에 어긋나지 않는 선한 말과 덕스러운 말과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헛것’이라는 것은 법적인 것으로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유효한 효력이다.
[약 1: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27절). 하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과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경건과 참된 믿음이 아니다. 경건은 선행과 거룩함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등장한 어휘인 사회공헌 활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업의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복음전도를 통한 교회세움을 추구하지만, 교회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합당한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칼빈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를 위한 구제, 교회 밖에 있는 이웃에 대한 구제로 고대교회의 전통을 세워갔다. 한국교회는 해외선교를 강조하면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약했다. 교회는 가난하고 약한 이웃과 우리시대에 요구되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며, 교회와 사역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죄를 회개하며 복음을 충만하게 영접하여 믿는 것은 성도에게 기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고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그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가 주신 새 계명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께서 주신 계명은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다. 복음을 듣고 행치 않는 자의 경건은 헛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 목사로부터 주어진 말씀과 자기 양심에 부합된 선한 행동으로 자기 믿음을 정진해 나가야 한다.
셋째, 우리는 무슨 말이든지 듣기는 속히 하는 것이 좋지만,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하고 성내는 것은 더욱 더디 해야 한다. 말은 실수하기 쉽고, 성내는 화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선행에 힘쓰고, 자신을 지켜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유행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돈을 사랑하고 음란하다. 우리는 그런 악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