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한 삭개오
누가복음 19:1-10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는 길가에 구걸하는 맹인 바디메오와 세리장 삭개오 입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18:35)란 말씀에서 바디메오는 여리고에 들어가시는 입구에서 만나셨고,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9:1)는 말씀에서 삭개오는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출구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맹인 바디메오를 만나신 것과 삭개오를 만나신 것이 18장과 19장에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건처럼 보입니다. 제 개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두 사람을 만난 것을 같은 장에 함께 기록이 되었으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18장과 19장으로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쉬운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는 가장 냉소와 멸시를 받는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디메오는 맹인으로 일찍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자입니다. 눈에 가시처럼 별로 보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죄인취급 받는 세리장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두 사람을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바디메오는 맹인이요 거지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지만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맹인은 지나가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물었고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서서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니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였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바디메오처럼 예수님께 구하지 않았습니다. 바디메오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삭개오는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에게도 적극적인 성도와 소극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성도는 기도를 해도 큰 소리로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성도는 기도도 간절하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문제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디메오는 비록 맹인이요 길가에 앉아 구걸하지만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열심있는 열심파입니다. 어디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디메오보다 삭개오가 더 문제가 큰 사람입니다. 바디메오에게는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 한 마디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가져 주셨야만 했습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삭개오는 돌아오기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찾아오셔서 삭개오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셨습니다(10). 그러나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부르며 저주를 받았음에도 자신이 불쌍한 자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도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볼 수가 없어서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삭개오에게는 작은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디메오와 같은 큰 믿음이 없을지라도 삭개오처럼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작은 노력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한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모르는 척 하시고 그냥 지나가시지 않았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쳐다보시고’란 말은 잃어버린 삭개오를 비로소 찾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삭개오에게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하여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여리고까지 오셨습니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찾았습니다.
목자 잃은 양이 길을 잃고 낭떨어지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찾는 목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도 않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더 이상 구원이 없는 낭떨어지 가시덤불에 걸린 삭개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쳐다보시고 ‘삭개오야’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 ‘세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야’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야’라고 부르신 그 한 마디가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삭개오’란 이름은 ‘정의롭다’, ‘의로운 자’란 뜻의 이름입니다. 지금까지 여리고 사람들이 ‘죄인’으로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자라’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러 왔노라’는 의미로 ‘삭개오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시 봅시다 예수님은 ‘속히 내려오라’(5)고 하셨을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다’(6)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속히’와 ‘급히’는 같은 의미의 말 같지만 ‘속히’와 ‘급히’는 속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맹인에게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했을 때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 온 것(막10:50)’과 유사한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을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마치 잃은 양이 목자의 품에 안긴 것과 같습니다.
급히 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해가 저물고 하룻밤을 자야할 곳이 없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려고 하신 것은 삭개오가 그만큼 문제가 크다는 것입니다. 맹인처럼 말 한 마디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로서 너무나도 멀리,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에 살지만 아무도 자기 집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상종하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삭개오는 즐거워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냥 그날 밤에 예수님이 편히 주무셨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삭개오 역시 예수님에게 자신의 방을 비워주면서 ‘피곤하시니까 편이 주무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삭개오에게 가르치시고 말씀하시고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상담자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맺힌 한을 풀어주시려고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모든 고통을 들어주시고 상처를 싸매어 고쳐주셨을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이 이리에 쫓기고 사자에 물리고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지고 가시덤불에 걸려 찢겨진 상처투성이를 목자가 싸매고 고쳐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좋은 상담자가 되셔서 삭개오를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좋은 상담자이십니다.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마음속에 품은 한을 들어 고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께 모든 괴로운 것들을 다 아뢰고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다 들어주시는 상담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삭개오는 밤이 새도록 예수님께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위로와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날이 샘과 동시에 삭개오는 새 사람으로 예수님 앞에 서약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8)란 그냥 앉아다가 일어섰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정중하게 일어서서 엄숙한 자세로 손을 들고 서약하는 자세입니다. 삭개오의 서약은 무엇입니까? 먼저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관원과 좋은 대조가 됩니다(18:22).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경멸 받았던 세리였지만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서약을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삭개오의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위하여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를 위해 살겠다고 예수님 앞에서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범했던 잘못에 대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세리장으로 부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갈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도적질 한 것을 스스로 갚을 경우에는 도적질한 것에 1/5을 더하여 갚으면 되지만, 도적질한 것이 탄로 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도둑으로 인정되었을 때 네 갑절을 갚아야하는 것입니다(출22:1,4). 삭개오가 스스로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한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고 회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지만 삭개오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도적질로 간주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강압에 못이겨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발적으로 하는 회개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고 회개하는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축복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 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죄인취급을 받고 죄인처럼 살아 왔던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당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삭개오가 죄인의 상태가 아닌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이제 진정한 구원을 얻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잃어버려진 두 사람을 찾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해 주십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까지도 예수님은 찾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잃어버려진 자를 찾아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두 사람을 찾아 구원해 주시고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바디메오와 삭개오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에 두 사람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을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비록 바디메오와 같은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그러한 믿음이 없을 지라도,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는 작은 믿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삭개오가 나무위에 올라갔던 것처럼 작은 노력이라도 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셔서 그를 고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나무위로 올라가는 나와 여러분이 됩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고 천국에 가서 바디메오도 만나고 삭개오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영생복낙을 누리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