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는 사람
시편 19:1-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올해 교회력으로 마지막 성찬을 한다. 다음은 11월 30일 대림절 첫째주일이다. 세계교회의 다양한 교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전통과 교리의 차이로 오랫동안 주님의 성찬을 함께 나누지 못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동방정교회와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들이 함께 주님의 식탁을 나눌 수 있도록 공동성만찬을 위한 리마예식서를 제정하여, 마침내 공동의 성찬이 가능하게 하였다. 오늘이 세계교회가 함께 성찬을 나누는 ‘세계성찬주일’이다.
주님의 식탁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존 웨슬리는 “주를 사랑하는 자, 누구나 오라!”고 성찬의 자리에 초대하였다. 성찬에 나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된 존재임을 고백하는 일이다.
지난 연휴 기간은 날씨가 참 좋았다. 나들이를 다녀오셨는가?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일, 그것 역시 고백이 담긴 시이며, 기도이다.
개천절에 아내와 강원도 양구 평화누리 길을 다녀왔다. DMZ 안에 있는 두타연 계곡을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이다. 두타연은 금강산 계속에서 내려온 물인데, 여기서 금강산이 32킬로 정도라고 하였다. 아내는 들꽃을 사진에 담느라 느릿느릿 놀고, 나는 홀로 비득고개란 전방 초소까지 왕복 18킬로 산길을 얼른 다녀왔다. 곳곳에 전방 철책선 초소로 진입하는 문이 있는데, 한낮에도 사방이 고요해, 내내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어느 부부가 길 가면서 이야기한다. “여보 저 꽃이 뭐야?”. “뭐긴 뭐야 들국화지”. 내 아내가 듣고 들국화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하더니, 나더러 “당신은 알지?”하였다. 나는 속으로 뜨끔하지만 “암”하였다. “들국화가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건 구절초야. 들국화만 하더라도 수십 종이 있지만 요즘 피는 꽃들은 크게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로 나뉜다고”.
그리고 버스에 오르기 직전, 두타연 호수 가에서 가을 야생화의 여왕인 ‘물 매화’를 발견했다고 좋아한다. 아마 뜻밖의 십자가를 발견한 기쁨이 이런 것일 듯하다. 한낱 들꽃일망정 자연은 얼마나 오묘한가? 그래서 나는 아내의 야생화 취미를 적극 지지하기로 하였다.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아내를 기다리고 서있는 것보다, 자연 속에서 함께 서성거리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일까?
1)
본문에서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교훈을 잘 요약한다. 크게 3등분으로 나뉘어 첫 부분은 창조이야기(1-6), 둘째 부분은 계명이야기(7-11), 셋째 부분은 창조와 계명, 두 가지를 대하는 응답하는 사람(12-14)의 태도를 다룬다.
창조와 말씀,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이다. 자연과 창조질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을 일반계시라 하고, 말씀과 육신으로 직접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을 특별계시라고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직접적 하나님 체험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특별계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할 수 있다. 창조를 통한 계시와 말씀을 통한 계시, 이렇듯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두 가지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는 방법이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는다. 들꽃의 소박한 아름다움, 질서 있는 우주의 운행을 보면 창조주의 솜씨가 놀랍다. 시인은 창조세계를 향해 그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감탄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천지를 둘러보면 어느 한 곳이라도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곳이 없다. 자크 마리땡은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자연에는 무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훔쳐보는 것은 예술가의 하는 일이다”. 찬양하는 여러분은 모두 예술가이다.
시인은 소리 없는 소리를 예민한 감성으로 느낀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우리에게 신비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우주의 소리를 듣는다. 밤과 낮이 이야기 하는 소리, 하루해가 뜨고 지는 소리를 전한다. 사실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기에 안 보일 뿐, 진정 보고 느끼려는 사람은 창조와 자연 속에서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하나님의 기운을 맛본다. 그리고 응답한다.
우리 역시 날마다 매순간 ‘창조의 은총’을 맛보고 살 권리가 있다. 지금 그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나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특별한 피조물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성경에만 복음을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들, 꽃들, 구름들, 별들에도 기록하셨다”.
시인은 우주를 보면서 태양을 위해 지으신 장막과 같다고 멋진 표현을 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고대인들이 우상시하던 태양조차 창조질서에서는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하다. 태양의 힘과 능력을 빌려 지배 권력으로 포장한 왕들의 권력을 조롱하는 듯하다. 태양은 신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우리가 자주 범하는 불신앙이 바로 크고, 많고, 힘이 센 것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 아닌가? 그건 아니다!
2)
시인은 말씀을 가리켜 크게 여섯 가지 특징으로 요약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라는 것이다.
창조질서의 메시지는 말없이, 언어가 없이, 소리가 없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말씀으로 전해주신 성경은 문자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한마디로 ‘소리 없는’ 증거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와 말씀을 주신 것이다.
자연의 메시지는 말없이 선포되지만,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증거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과 지혜,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하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
여기에서 증거는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사랑과 구원을 베푸신다는 바로 그 증거이다. 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여 우둔한 사람에게조차 지혜를 갖게 한다.
교훈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내용이다. 이 지시는 인간에게 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훈은 기쁨을 준다.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해서, 또 사람을 대해서 지켜야할 말씀을 조목조목 밝힌 것이다. 이 계명은 우리 삶의 방향과 목적지와 그 과정을 환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어두운 밤길에 등불을 비추듯, 눈을 밝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0)고 노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별로 감동도, 긴장도, 충격도 받지 않는다. 어느 예언자가 온들, 무슨 다급한 말을 한들, 약발이 서지 않는다. 우리 마음이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산다.
스탠리 존슨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 내 처지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만날 때마다 퀘이커 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그 구절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내 습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다가 내게 주신 말씀을 발견할 때마다 이마와 입술을 연결하는 작은 성호를 긋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말씀의 음성 앞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말씀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은총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길이다.
3)
시편 19편의 세 번째 부분은 그 길과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은총을 사모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응답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2).
시인은 자신의 숨은 허물과 고의로 지은 죄 때문에 탄식한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그에게 있는 숨은 허물이든, 고의로 저지른 죄든,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가 하늘의 소리와 꿀보다 더 단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고, 용납하시는 그 은총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니 결국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실토이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그러한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기도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율법의 교훈을 통해 참된 인생의 길을 깨닫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해 살아간다. 내 힘으로 사는 듯해도,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살아간다.
‘일물일어(一物一語)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사물을 글로 표현하는데 꼭 알맞은 말은 하나의 말 밖에 없다”는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의 이론이다. 사물에 대한 정확한 표현, 그것을 잘 고를 줄 아는 좋은 눈을 지닌 사람이 바로 좋은 시인이다.
시인의 결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응답할 수 있는가이다. 본문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은 응답하는 인간에게 있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14).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시인의 감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교제하는 삶이다.
아마 ‘하나님의 은총’은 365일 양지바른 볕은 아닐 것이다. 그 은총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내가 선 자리에서 그 은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라.
비록 들꽃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일물 일어’를 고민할 정도로 시인의 감성은 지니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찬양할 수 있다. 내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음을 감사드린다. 세상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은 없다. 비를 맞지 않는 꽃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이든 아름답다. 인생의 길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창조의 향기가 있고, 섭리의 감사가 있다. 그걸 느끼라!
하나님은 나를 위해 주님의 식탁을 준비하셨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내 안에 품고 있는 나의 향기를 묵상하라. 여러분 안의 꽃씨를, 향기를, 열매가 있음을 감사하라. 삶 가득히 응답하라.
인생은 누구나 각자가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계심을 기억하라. 응답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은총으로 우리를 비춰 주신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날마다 자연 속에서 말씀 가운데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용기있게 응답하는 사람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