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의 기원과 삼조선의 씨앗
중앙아시아의 발하슈湖로 이리(Iri/‘아이리’로도 발음됨)江이 흘러들어 간다.
이리江은 북위 43도를 따라 동쪽으로 길게 뻗은 텐샨산맥 끝자락에서 발원하여, 텐샨산맥(天山산맥) 북사면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눈 녹은 물을 담아 초원을 형성하면서 서쪽 발하슈湖로 흘러드는 강이다.
옛적 중국 서안에서 비단길을 타고 중앙아시아로 가려던 대상(隊商)이 감숙성의 건조한 하서회랑을 통과하고 텐샨산맥 끝자락 고개를 넘으면서 고대하던 그 강 이리江이다. 건조한 하서회랑으로 진입하기 어려웠던 청동기 시대의 초원 유목민이 이리강 중류에서 알타이 산맥 북서사면에 형성된 오아시스 호수로 거치면서 바이칼 호수까지 가게 되는, 동아시아 초원길의 서편을 형성하는 강이다.
발하슈湖와 이리江은 우리 韓민족에게 태고의 기억을 각인시켰다. 아리랑이다.
아리랑 소고 - 유목민의 노래
아리江을 타고 알타이 산자락을 따라 해 뜨는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있었다. 말 타고 양 치면서 하늘을 공경했고, 불을 피우며 쇠라(금속, 청동 혹은 장수의 뜻)를 높이 들고 바리(굿, 제사 혹은 제사장의 뜻)를 지낸 사람들이었다. 땅이 펴지고 강물이 흐르는 편안한 초지를 찾아, 마리(부족 수장의 뜻)는 부족을 이끌고 하늘 길을 따라 아침의 땅을 찾아 그들은 이동했다.
바리는 무당이다. 인간과 천지만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태양과 빛, 태양으로부터 메시지를 전달하는 세발달린 까마귀(三足烏)를 신성시하며, 자연신의 대리자로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부족의 大母였다. 지금까지의 힘든 여정을 지혜로 이끌어 왔으며,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며 다독였다. 바리는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관장했고 죽은 자의 정령을 보듬는 부족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빛으로 새 생명이 잉태된다고 했다. 삼족오가 물고 온 붉은 과일(朱果)로 잉태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빛이 된어 하늘의 별이 되거나 반딧불이 된다고 했다. 여자가 해산하는 날, 부족의 가축 들이 해산하는 날, 어머니 바리는 대지의 축복을 전하며 해산을 주관하였다.
발하슈湖에서 출발했던 청동기 유목민들은 바이칼湖 동쪽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 아사달을 ‘부리야트’라 했다.
하늘족의 이동 : 아리하와 아리랑
그들 유목민을 두고 토착민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하늘사람, 환인)이라 했다. 번쩍이는 청동제기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사람들은 양달과 음달이 아늑하게 드리우는 새로운 땅을 아사달이라 했고 초원의 평지를 ‘펴라’로 불렀으며 그곳을 흐르는 강물을 ‘아리가람’이라 했다.(신채호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사 참조).
하늘사람들은 아사달에서 솟대를 높이 올리고, 불을 피우면서 ‘쇠라(청동제기)’을 모셨다. 밝은 빛을 받은 신성한 나무 주위는 소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낸다. 하늘을 우러르며 동경(銅鏡/청동거울)으로 바리를 지냈다.
하늘사람(환인의 부족)이 팽창하자 주류로부터 멀어져간 일파가 생겨났다. 먼 훗날 환인의 서자라고 표기될 환웅의 무리였다. 그는 가족과 무리를 끌고 새로운 아사달을 찾아 나섰다. 바이칼호 남쪽으로는 건조한 고비사막이 광대히 펼쳐져 세상의 끝을 이루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고비사막을 넘을 수 없었다. .
환웅의 무리는 강물을 따라 부리야트의 동쪽으로 향했다. 동경을 소중히 간직한 채 흥안령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의 아리가람을 보았다. 남으로 흐르는 阿里河였다.
아리하가 합류하는 눈강을 타고 그들은 계속 남하했다. 강변에서 구리와 아연 광석(鑛石)을 채취하여 청동기를 제조하고 사금도 채취하면서 새로운 아사달을 찾아 이동하였다. 그들 환웅의 무리는 만주 평원을 지나면서 새로운 가람, 고향의 아리가람을 보았다. 송아리江이다. 지금의 송화江이다. 제2 송화강 상류로 접어들자 그들은 산림이 울창한 장백고원을 만났다.
송화강 남쪽으로 고원이 펼쳐지고 거기에는 천산의 고향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해발 2,744m의 지금의 백두산이다. 마루에는 하얀 눈이 경외스럽게 덮여 있는, 기억 속의 天山이었다. 말 머리의 갈퀴 모양으로, 천산의 하얀 자락을 보면서 마리칸은 그곳에 소도를 마련하고 神市를 선포했다. <참조: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호랑이族이 둥지를 틀고 사냥으로 살고 있었다. 충돌은 불가피하였지만 신석기의 호랑이族은 청동기를 쓰는 하늘族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가족들이 많이 죽었다.
하늘族은 (송)아리강가에서 아리(가)람을 노래했다. 그 옛날, 아사달을 찾아 떠나가는 무리를 향해, 아쉬움에 불러주던 노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 곁을 떠나간 사랑한 사람들이 하늘과 땅 모든 곳에 정령 되어 머물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부르던 노래이기도 했다. 빛이 되어 하늘로 떠나간 사람, 반딧불이 되어 자연의 정령이 된 사람을 위한 노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아리랑이었다.
발하슈-바이칼-발해
예전에도 그랬듯이 백두산의 하늘 부족이 커지게 되자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천산산맥 자락을 타고 서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커다란 바다를 만났다. 발하슈湖보다, 바이칼湖보다 더 큰 바다였다. 그들은 그곳을 바리의 바다-발해라고 불렀다.
요하(遙河/옛 이름 아리하)를 만난 무리는 해성(현 요녕성 해성시) 일대를 새로운 아사달로 삼았다.
압록강(鴨綠江/옛 이름 아리江)을 건너 패수(浿水/청천강)를 지난 무리는 평양에 정착하여 그곳을 아사달로 불렀다.
요하를 건너 대능하에 접어든 무리는 연산산맥 기슭의 조양(朝陽)에 정착하고, 또 한 무리는 요하 상류 시라무렌江으로
접어들어 적봉(현 내몽고 적봉시)으로 들어간다. 모두 편안한 아침의 땅-아사달이 된다.
아사달에는 이미 토착민이 있었다. 신석기 문화를 정교하게 진보시키면서 농사를 짓고 있던 곰 부족이었다.
하늘族은 자연 지식(바람, 구름, 비)과 청동기 지식으로 그들을 흡수한다. 흡수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마늘, 쑥) 결국 연합정권이 출범되었다. 단군의 탄생이자 아리랑의 민족, 조선의 탄생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 참조)
삼조선의 씨앗 - 바리, 마리, 쇠라
“바리(바리의 ‘ㅏ’는 아래아)”란 유목사회의 제사장(무당)을 일컫는 말로 불(火)과 밝음(明)에서 유래했다. 중앙아시아 발하슈湖에서 시작하여 바이칼湖, 발해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 바리의 지리적 흔적을 남겼고, 發조선, 蕃조선, 番조선, 부리(夫離), 부여(夫餘), 변한(弁韓)이란 이름의 국호로 사서에 자취를 남겼다. ‘바리’란 단어는 황석영 선생의 소설 ‘바리떼기’에 사용될 정도로 현대 한국어에도 살아 있다. 신내린 여자란 뜻이다.
“마리(마리의 ‘ㅏ’는 아래아)”란 부족의 정치수장으로 말(馬)과 머리(天)의 의미를 지녔다고 보인다. AD 6세기 신라 지증왕 대까지 신라는 마립간을 임금의 호칭으로 사용하는데, 마리와 칸(Khan)의 합성어로 이해되며 마한(馬韓), 모한(慕韓)이란 이름으로도 사서에 등장한다. Khan은 징기스칸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수장을 의미하는 칭호이다.
“쇠라(쇠의 ㅅ은 반치음으로 영어의 Z와 같은 음가를 갖는다. 그리고 쇠의 ㅗ는 아래아)“는 부족의 군사지도자로, 한자로부터 금(金).태(太).각(角)을 의미로 차용하고, 발음으로 신(新).진(辰,震,眞,秦)자를 차용한다. 특히 辰은 辰國, 辰韓, 大辰國(발해)과 같이 한국 고대국가 이름으로 계속 등장하며, 新은 사로국, 서나벌, 계림으로 불리던 군장국가가 新羅로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사용되었고, 眞은 여진족(女眞族)의 이름을 구성할 때 사용되었다.
여진족은 나라 명칭을 金나라로 표기했다. 1788년 중국(淸) 건륭제에 의해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金나라 시조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Aisin Gioro)이며 신라에서 기원했다고 적고 있다.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부족’이라고 종종 해석되지만 Aisin은 金을 의미한다. 眞자는 여진이 중원 진입에 성공하여 청을 세우고 동북아시아 유목민을 대변하면서 주목받았다.
삼조선의 이름과 위치 추정
단재 신채호 선생은 三조선을 각각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으로 상정했다. 각각 큰 조선, 높은 조선, 밝은 조선을 의미하는 고유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 나온 용어(진*번*막)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역사적 근거를 세우는데 더 나아 보이기에, 바리의 음차어(音借語)로 番자를, 마리의 음차어로 莫자를, 쇠라의 음차어로 眞자를 사용하여 쇠라조선(眞조선), 마리조선(莫조선), 바리조선(番조선)이란 고조선 인식의 틀을 구성했다.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의 위치로, 신조선은 지금의 요하 이동 요동반도 이북의 만주지역을, 불조선은 요동반도와 그 이서를, 말조선은 압록강 이남의 한반도를 상정했다.
하지만 三조선의 위치에 관하여, 고고학적으로 인정된 동이족의 분포 상황, 요동의 강상에서 100여명이 순장된 BC8-7세기경의 무덤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 큰 규모의 연맹국가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 요녕과 만주에서 발굴된 동검 유적의 차별성과 문화적 차이(비파형 동검, 동주식 동검, 오르도스식 동검), 그리고 이후 마한*진한*변한으로 전개되는 역사와의 연계성을 고려한다면, 신채호 선생의 추정에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삼조선의 성격과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바리조선(番조선)은 요서의 조양(朝陽)을 기반으로 대능하 주위에 형성된 조선의 맏이로서, 제사장 우위라는 청동기 유목민의 전통을 이은 국가였다. 마리조선(莫조선)은 요동의 요양(遼陽), 해성 부근에서 정착한 동이족의 둘째로서, 한반도 평양까지 생활권을 갖고 있던 국가였다.
쇠라조선(眞조선)은 적봉을 기반으로 형성된 조선의 셋째로서, 지나대륙 東岸과 북위 43도선에 형성된 초원길을 타고 퍼져간 강력한 군사조직체 국가였다. 그리고 (古)조선의 수도는 조선의 本家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적봉, 조양, 요양(혹은 해성), 그리고 평양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삼조선의 변천과 삼한
1778에 청나라 건륭제가 발간한 만주원류고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한반도 남쪽의 지역 명으로 보지 않고 발해만 주위에 위치한 수장(首長)의 국가로 해석하고 있다. 북방유목민족들에게 수장을 의미하는 Khan이 사서에서 종종 韓, 汗, 干 등으로 음차되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내린 해석으로 보인다. 만주원류고는 이 세 나라가 춘추전국시대와 秦*漢의 패권전쟁을 피해 순차적으로 만주와 백두대간 각지로 이동한 후 한반도 남부에 정착했다고 보고 있지만, 주권국가의 이동이란 근대적 개념으로 이를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사달의 훈독으로 보이는 조선(朝鮮)은 적봉 인근에서 요하문명(하가점 하층문화)이 발원하는 BC2300여년대에 출발하였다. 초기의 조선은 종교-정치-군사 등 세개 권력 집단이 융합되어 제사장 우위의 정교 미분리 국가로 출발했지만,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이들은 기능별로 분화되어 갔다.
최초의 三조선은 “眞조선-番조선-莫조선”이었다.
BC12세기에서 BC8세기에 걸친 범세계적인 기후 변동으로 구문명이 소멸되고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할 때, 서구에서 지중해를 대상으로 그리스문명이 발화되고 동양에서는 춘추시대로 전환될 때, (古)조선 역시 세개의 조선으로 분화된 것이다.
요하 상류 적봉을 중심으로 기능했던, 고조선의 쇠라 후예들은 일찍이 대륙의 동안을 타고 남하하여 남방계 만족을 흡수하면서 지내다가 기후 변동기에 제, 오, 월과 같은 여러 동이족 국가를 세웠다. 월왕 구천의 동검은 (고)조선의 세형동검과 그 형태가 유사하여 놀라운데, 진조선의 후예들은 춘추시대에 순차적으로 중원에 진입하여 대륙의 패자가 되었다(춘추오패: 제*진*초*오*월).
BC5세기 전국시대로 진입하면서 북경을 중심으로 연나라가 세워졌다. 연은 제와 경쟁하며 세력을 확대한 후 동이강역을 통일하고자 여러 번 정복전쟁을 수행한다. 전국시대란 치열한 전쟁기간 동안 대륙 동안의 만이(동이족+남만족)들이 벼농사 기술을 갖고 한반도 남부로 유입하여 辰이 형성된다.
BC3세기 초엽(BC290년경), 연의 진개가 진*번 조선을 공략한 후 번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부여를 세움에 따라, 삼조선은 “辰-부여-莫조선”의 구도로 재편되었다. 부여는 이후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동예 옥저를 생산하면서 AD476년 고구려에 흡수될 때까지 800여년 이상을 만주에서 기능하였다.
莫조선은 BC2세기 초(BC195), 연나라 망명객 위만에 의해 한 차례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밟는다. 이전 정권의 마지막 임금 준은 요동에서 뱃길을 통해 한강 이남으로 피난하여 마한을 세운다. 마한이 정통성을 갖고 세워지자, 한반도 남부에 있던 기존의 辰은 진번한으로 구별되어 감으로써 “진번한-부여-막조선/마한”이 등장하였다.
요동과 평양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위만의 막조선은 동북아 경제 패권을 놓고 漢나라와 경쟁하게 된다. 하지만 BC2세기 말(BC108), 위만조선은 漢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막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됨으로써, 삼조선의 유산은 기원 전후기 무렵 “진번한-부여-마한”으로 재편된 삼국으로 이어졌다.
막조선의 후예들이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연안으로 유입되었고(가라의 9간, 진한의 6사로) 흉노족의 일파인 김일제의 후손이 경상도 일원으로 유입됨에 따라, 진번한은 진한과 변한으로 분화되어 한반도 남부에 “진한-변한-마한”이란 삼한이 출현한다.
기원 전후기 이들 삼한은 부여에서 파생된 고구려, 백제, 옥저, 동예와 더불어 한만지역에 고대연맹체 국가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고대 연맹체 국가들은 막조선 지역에서 기능하던 낙랑과 현도 등 한사군 정권과 병존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류를,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여족이 백제와 변한 그리고 일본열도로 남하했고, 황해/동지나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해양세력 倭가 백제, 가야연맹과 교류하면서, 고대 한만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연맹을 주축으로 한 다이내믹한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