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피살 ← 김옥균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의 미국 조계에 있는 일본 여관 동화양행 1호실에서 수구파의 자객 홍종우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44세였다. 당초 피살자와 살해범의 이름이 이와다와 다케다로 알려졌으나 청나라 경찰의 조사결과 이들은 일본인으로 가장한 조선인 김옥균과 홍종우로 나중에 판명됐다. 살해범 홍종우는 암살 후 제주목사, 황국협회 간부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 갈가리 찢긴 채 버려졌으나 일본으로 빼돌려져 도쿄 진정사에 묻혔다. 김옥균은 그후 김옥집 등의 상소로 반역죄가 풀려 순종 때는 규장각 대제학에 추존됐다. 이로써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일으킨 갑신정변의 주역들 중 김옥균과 홍영식은 살해됐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 등은 대부분 변절해 오랫동안 권세를 누렸다./조선일보
1894년 3월 28일 오후, 3발의 총성이 중국 상하이(上海)의 공기를 갈랐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꽤 오랫동안 이날을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자객의 총에 맞아 숨진 날로 기억했다. 하지만 이날은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급진 개화파를 쏜 날이기도 하다. 김옥균과 홍종우. 지향이 같되 길이 다른 두 사람은 이렇듯 생(生)과 사(死)도 엇갈려야 했다. 김옥균은 한중일 3국이 합쳐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주창한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자였다. 또 일본의 힘을 빌려 조국을 근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홍종우는 38세에 파리로 간 인텔리다. 개화사상에서는 김옥균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이 중심이 되는, 국왕이 주도하는 주체적 근대화에 매달렸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사살한 뒤 경찰에 끌려가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라고 소리쳤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김옥균을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처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에 돌아온 홍종우는 고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조정의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외국 군대 철수와 대한제국 연호의 화폐 유통을 추진했다. 그러나 홍종우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빌미로 조선을 더욱 압박했다. 내부적으로는 개화와 관련한 논의구조마저 사라져 버렸다.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홍종우 역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 왕정제의 부조화를 읽는 데 실패한 셈이다. 김옥균과 홍종우의 대결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채 끝나지 않은 듯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외교정책은 친미냐 자주냐를 놓고 홍역을 치렀다. 역사학계에서는 홍종우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활발했다. 반면 얼마 전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김옥균을 근대화를 추구한 선각자로 묘사했다. 그간 따라붙었던 친일파 딱지도 떼었다. 어쩌면 김옥균과 홍종우가 남긴 유산은 이 땅이 천형(天刑)처럼 지고 가야 할 짐인지도 모른다. 도포 차림의 개화사상가 홍종우가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또 다른 개화사상가 김옥균을 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8.03.28 03:21 | 최종수정 2008.03.28 04:40 고기정 기자
[1871년] 파리코뮌 수립 ← 바리케이트를 치고 정부군과 싸우는 시민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중심의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이 1871년 3월 28일 수립됐다. 시청앞에 운집한 20만 군중은 `코뮌 만세`를 외쳐대며 감격했다. 혁명의 도화선은 보불전쟁에서 싹튼 애국심에 있었다. 전쟁이 패배로 기울어지자 공화주의자들은 1870년 9월 나폴레옹 제정을 폐지하고 제3공화정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체결하자 파리민중은 반정부-반프로이센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 코뮌은 재산의 국유와, 노동자의 최저생계보장 등 사회주의적 혁신을 주창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수립 2개월만인 5월 27일 부르조아 공화파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3만명이 사망하는 참극속에 붕괴되고 말았다. 파리코뮌의 모체는 1870년 9월 파리 20구(區)의 노동자-시민이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천명하며 결성한 `20구 중앙위원회`였다.
[1868년] 고리키 Maxim Gorky 출생 1868년 3월 28일 태어남 / 1936년 6월 14일 죽음 고리키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시한 소설가이다. 니주니노브고로트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이 시절의 경험이 자전소설 <유년시대 Detstvo>(1913~14)에 그려져 있다. 1892년 '쓰라림'이라는 뜻의 고리키라는 필명으로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 Makar Chudra>를 발표했다. 이후 <첼카슈 Chelkash>(1895)를 비롯해 떠돌이나 범죄자 등 러시아 하층민들의 생활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작가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해 체포되기도 했으나, 국내외의 거센 항의로 석방되었다. 1906년 그는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귀국을 거부당해 이탈리아의 카프리 섬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보기로 일컬어지는 <어머니 Mat>(1906)를 발표했다. 1913년 대사면으로 귀국해 <아르타모노프 일가의 사업 Delo Artamonovykh>(1925) 등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9년] 프랑코의 반란군, 마드리드 입성 1939년 3월 28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함으로써 스페인 내란은 종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스페인 내란은 1936년 7월 17일 스페인 전역의 수비대 주둔 지역에서 공화파를 반대하는 군사봉기가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공화파 지도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가 정권을 잡아 인민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스페인 내란의 두 당사자들인 공화파와 국가주의자들은 모두 외국의 원조에 눈을 돌렸다. 소련·프랑스·멕시코는 공화파를, 독일·이탈리아는 국가주의자들을 지원했다. 1936년 11월경부터 국가주의자들이 마드리드 외곽을 점령하기 시작해, 1938년 4월에는 공화파를 양분할 수 있었다.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가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졌다. 스페인 내란은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파시즘과 자유세력 사이의 국제적 갈등으로 평가받는다.
[1947년]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ESCAP) 설립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ESCAP)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의 하부기구인 지역경제위원회 가운데 하나로서 UN 의 지역위원회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다. ESCAP은 1947년 3월 28일, 제 4 차 국제연합 경제사회이사회 결의 37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ECAFE)라고 하였는데, 점차 아시아 이외의 서사모아·통가·나우루·파푸아뉴기니·피지 등 태평양 여러 섬나라 및 지역의 가맹이 증가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경제개발과 함께 사회개발·사회복지의 중요성이 증대되자 위원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기구 명칭에 반영시킬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74년 9월 12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개최한 제 30회 ECAFE 총회에서 지금의 명칭으로 바꾸었다. 설립할 때 ESCAP의 목적은 아시아의 전후(戰後) 부흥의 도모였는데, 지금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경제협력·사회개발을 위한 협력기관으로서 여러 가지 지역협력안과 개발계획을 입안, 실시하고 있다. 가맹국은 2004년 현재 61개국이며 그 가운데 홍콩·브루나이 등 9개국이 준가맹국으로 되어 있다. 한국은 1954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본부는 처음 설립할 때에는 중국 상하이에 두었으나, 1948년 이전한 이래 태국의 방콕에 있다.
[2001년] 김포국제공항, 국제공항 시대 마감 김포공항(金浦空港)은 1942년 준공되어 1957년까지는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었으나, 1958년 1월 국제공항으로 지정되어 1959년 종합청사 1,539㎡를 신축하고 그후 각종 시설의 확충과 기능의 확대를 통하여 한국 영공(領空)의 문호(門戶)로 발전하였다. 1971년 1월 여의도 공항이 폐쇄되면서 김포국제공항에 합류되고 1979년 12월 국제공항관리공단법이 공포되어 1980년부터 한국공항공단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 2000년 3월까지 미국·일본·프랑스 등 28개국 71개 도시에 항로가 개설되어 이곳에서 이착륙하였으나,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으로 국제선 운항은 모두 인천공항으로 이관되었다. 2004년 현재 국내선은 김해·제주·대구·광주·울산·여수·목포·포항·사천 노선이 운항되고, 국제선은 서울과 도쿄 하네다 간만 운항되고 있다.
[1985년] 프랑스 화가 샤갈(Chagall, Marc) 사망 샤갈 [Chagall, Marc, 1887.7.7~1985.3.28] `나와 마을`로 유명한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이 1985년 3월 28일 그림만큼이나 화려한 생을 마감했다. 샤갈이 추구한 작품들은 회화 이론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이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런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 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는 1887년 비테브스크에서 출생했다. 비테브스크는 모든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러시아의 정신과 유태인의 전통이 함께 섞인 곳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에서 미술관련 단체 일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파리에서 작품 활동중 나치로 인해 미국에 머물렀다가 프랑스 방스로 돌아와 그의 고향과 소박하고 열정적인 국민들을 그리면서 그의 생애를 보냈다.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79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자력발전소서 방사능누출사고 발생 펜실베이니아주(州) 해리스버그에 있는 스리마일섬(Three Mile I.)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고는 냉각장치 파열로 핵연료가 누출된 유례 없는 사고였다. 처음 이 발전소의 제2호 가압수형 경수로(加壓水型輕水爐)가 전기출력 95만 5,000kW의 거의 전출력으로 운전 중 증기발생기 2차계(二次系)에 물을 공급하는 주급수(主給水) 펌프계통이 고장을 일으켰다. 거기에 경수로 안을 냉각하는 긴급노심냉각장치(緊急爐心冷却裝置:ECCS)가 작동하였는데도 운전원이 계량을 오판하여 얼마 동안 ECCS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등의 실수가 겹쳐 냉각장치가 파열, 대량의 핵연료가 외부로 누출, 주변 8km 이내의 주민 가운데 임신부와 미취학 아동의 일시피난이 있었다. 주민의 피폭총량(被曝總量)은 약 3,500인(人) ·rem이었으나, 방사성요드방출량은 예상외로 적어서 젖소의 오염(汚染)도 거의 0에 가까웠다. 그러나 원자로는 사용불능이 되고, 약 1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미국 대통령 스리마일섬 사고 조사특별위원회 보고서(케메니보고)는 ① 경수형 원자력 발전기술의 불완전함, ② 규제행정의 결함, ③ 방재계획의 결여 등을 사고원인으로 지적하였다. 미국 원자력 발전사상 최대의 사고였으므로, 원자력발전소를 가지고 있는 세계 각국에 원자력 누출사고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이 되었고, 사고방지책에 부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4년] 한국-오만, 국교수립
오만과 남북한은 동시수교국으로 1974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92년 북한과 수교하였다. 1976년 주(駐)오만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고 그후 항공협정(1983), 문화협정(1994), 중동담수화 연구소 설립 협정(1996) 등을 체결하고 다수의 한국 건설업체가 진출해 있다. 1984년 주한 오만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69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사망 아이젠하워 [Eisenhower, Dwight David, 1890.10.14~1969.3.28] 제34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1969년 3월 28일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운명했다. 향년 78세였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지난 11개월동안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1890년 10월 14일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교육으로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해 1911년 육사를 수석입학했다. 소위 임관후 평범한 군인이었던 그가 군 최고계급이었던 원수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2차대전 참전에 있었다.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의 양상을 일거에 바꾼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지휘해 전쟁의 영웅으로 부각됐다. 1946년 군최고계급인 원수로 임명됐다. 그는 두번 대통령(1953년~61년)을 지냈지만 흐루시초프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무능하다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대통령은 아니었다. 우유부단해 덜레스 국무장관이나 애덤즈 비서실장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중용과 선의의 정치인으로 미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10년] 앙리 파브르, 최초의 수상기 개발. 비행 성공 항공초기의 수상기의 개발과 커티스의 실용 수상기 항공초기에 개발된 비행기는 그 대부분이 육상기였으나 그 때부터 수상기에 대한 착상이 있었다. 그리하여 . 육상기에 이어서 개발된 것이 기체에 프로트(float)를 달고서 물에서 뜨고 내리는 수상기였다. 수상기는 중량이나 공기저항이 증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추진력이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물위에서 뜨고 내리는 것은 사실상 어려움이 많았다. 프랑스의 브와쟁의 친구 앙리 파브르(Fabre, Henri, 1882~1984))는 항공사상 처음으로 수상기 이드라 비온을 개발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3월 28일 말세이유 근처의 호수에서 이륙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 앙리 파아망도 수상기를 개발했다. 그러나 수상기를 본격적으로 실용화 한 것은 미국의 커티스(G. H. Curtiss:1878-1930)였다. 커티스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라함 벨의 지원을 받아 1908년 7월 4일, 그의 복엽기 준 버그(June Bug)를 개발하여 1508m를 비행하여 항공사상 최초로 항공 트로피 Scientific American award를 받았다.
[1884년] 그리스의 시인 시켈리아노스(Sikelianós, Angelos, 1884~1951) 출생 20세기 그리스의 선구적인 서정시인.첫 주요작품인 〈알라프로이스키오토스 Alafroiskïotos〉는 1909년에 출판된 것으로 그의 서정적 역량을 보여준다. 이어서 뛰어난 서정시를 계속 썼다. 다음의 창작기는 철학적 시 〈삶에 대한 서문 Prólogos tés zoí〉·(1917)을 시작으로 장편 〈신의 어머니 Meter Theou〉·〈그리스의 부활절 Pascha ton Hellenon〉을 거쳐 〈델피코스의 말 Delphikós lógos〉(1927)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그리스의 전통과 국가의 역사적·종교적 상징들 대신 신비주의 작품으로 전환하여 우주의 의미를 표현했다. 1930~40년대에 시켈리아노스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제2단계의 서정시들이 등장했다. 이 작품들은 풍부하고 날카로운 언어와 힘있는 상상력을 이용하여 세계의 미(美)와 조화에 대한 작가의 신념을 표현했다. 장편 극시 〈장미의 찬가 The Dithyramb of the Rose〉에 의해 소개된 시켈리아노스의 비극, 즉 〈시빌라 Sibylla〉·〈크레타의 다이달로스 Daedalus in Crete〉·〈로마의 그리스도 Christ in Rome〉·〈디게니스의 죽음 The Death of Digenis〉·〈아스클레피오스 Asklepius〉 등은 극적인 면보다는 서정성으로 더 유명하다. 시켈리아노스는 자신의 성숙한 작품을 통해 그리스의 전통과 서구의 사상을 접목시키고 의식적인 문어로서 민중의 언어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1880년대 민중운동의 이상을 시로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종종 과장된 언어로 시적 효과가 반감되기도 했으나 그의 서정시들 가운데 몇 편은 서구 문학사에서 정수로 꼽힌다.
[1851년] 포르투갈의 대통령 마샤두(Machado, Bernardino Luis, 1851~1944) 출생 1915~17년, 1925~26년 2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지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 코임브라대학 인류학 교수로 재직한 후 1882년 하원의원이 되었고, 1895년 학계 대표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1897∼1922년 공화당 당수로 있으면서 제정붕괴 후인 1910년 임시정부 외무장관, 1914년 총리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즈음해서는 영국 원조를 선언하였다. 1915∼1917년 대통령으로 재임하였으나 S.파이스의 반란으로 물러났다. 1921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군부 쿠데타로 사임하였고, 1925년 재차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1927년 역시 군부 쿠데타로 추방되었다.
[1750년]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미란다(Miranda, Francisco de, 1750~1816) 출생 베네수엘라 군인. 독립전쟁 선구자. 카라카스 출신. 부유한 크리오요(criollo;식민지 출생의 백인)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771년 에스파냐로 건너가 군에 입대하여 미국독립전쟁에 참가했고, 1781년 육군중령이 되었다. 그 뒤 아바나·카르타헤나에서의 밀무역 및 위험사상 등의 죄명으로 추방되었다. 유럽과 미국 등 각지에서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을 위한 자금조달을 위해 분투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T. 제퍼슨대통령의 협력으로 1806년 200명의 병사를 고국 땅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국내의 반(反)식민지운동이 무르익지 않아 국외에서의 진공작전(進攻作戰)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영국으로 피신하여 S. 볼리바장군을 만난 끝에 1811년 독립운동이 격화한 베네수엘라로 돌아가 지휘자로서 항전의 선두에 섰으나 불행히도 에스파냐군을 봉쇄하지 못했고 게다가 비밀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 때문에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 에스파냐군에게 인도되었다. 나중에 카디스로 옮겨져 몇 해 뒤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1592년 칼빈주의 신학과 철학에 기초한 개혁 신학자,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 출생 모라비아(Moravia, 현재의 체코)의 교육자 코메니우스(Comenius, Johann Amos, 1592~1670) 헤르보른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에서 공부한 다음 고국으로 돌아가, 형제교단(Unitas fratrum)이 설립한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으로 합스브루크 왕가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합스부르그의 왕인 페르디난드 2세의 체포를 피하여 망명, 1625년 이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영국·스웨덴·폴란드 등 여러 신교 국가에 초청되어 평화를 위한 교육의 구상에 의거한 학교개혁을 실천하는 한편 유럽의 평화실현구상을 발표하였다. 30년전쟁 초기에는 절망적인 현실부정사상을 지니고 당시의 정치·학문·종교를 모두 부정하였으나, 원리적으로 인간과 사회를 다시 새롭게 포착하여 청소년교육과 민중계몽의 방법을 범지(汎知:pansophia)로서 체계화하였다. 그는 저서 《대교수학(大敎授學) Didactica magna》(1657)에서, 교육을 인간 생산의 위치에 놓고 고유한 생산방법을 전개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저서 《열려진 언어의 문 Janua linguarum reserata》(1631)과, 범지의 구상에 근거한 유아용 교과서인 《가감계도표시 Orbis sensualium Pictus》(1658)로 유명하였다. 유아교육에서 성인교육까지 이르는 일관된 교육구상, 단선적 학제안, 남녀공학의 원리 그리고 아카데미의 구상 등은 그 후의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교육방법에서의 직관주의와 언어의 결합, 교육내용에서의 실학주의, 전체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제도, 그리고 교사의 전문성 등에 관한 선진적인 구상은 현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57년에 UNESCO가 중심이 되어 그의 사상을 널리 보급시켰으며, 그의 조국에서는 대표적 저작인 《교육학총저작집 Opera didactica omnia》(1657)의 출판 300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사진판을 공간하였다.
[147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파 화가 바르톨로메오(Bartolommeo, Fra, 1472~1517) 출생 ←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하느님께 경배하는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와 성 막달라 마리아〉(1509), 이탈리아 루카에 있는 Pinacoteca Civica 소장 본명 바치오 델라 포르타(Baccio della Porta). 소피냐노 출생. 12세 때부터 코시모 로셀리에게 사사하였으나 사보나롤라(Savonarola)의 영향도 많이 받았으며, 그가 화형(火刑)당한 후인 1500년 도미니쿠스교파의 수도사가 되어, 수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504년 피렌체의 바디아성당의 위촉으로 《성(聖)베르나르두스의 환상》(1507)을 그려 화단에 복귀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법에 매혹되어, 한때 스푸마토(sfumato:가장자리를 흐리게 그리는 것)의 기법을 살리면서 온화하고 우아한 화풍을 펼쳐나갔으나 베네치아 여행 후의 루가대성당의 《두 성자가 있는 성모자(聖母子)》(1509)에서는 베네치아파의 화려한 색채를 채택하고, 명암대비(明暗對比)도 뚜렷해졌다. 그리고 1512년 《성카타리나의 결혼》과 같이, 뛰어난 인물구성과 빛의 섬세한 처리로 장중한 화풍을 완성하였다. 1514년 로마로 올라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연구하였는데, 그 성과는 《피에타》(피렌체 피티미술관:사후에 부지아르디니가 완성) 등에 나타나 있다.
[1515년] 에스파냐의 성녀 테레사(Teresa de Jesus, Teresa of Avila, Saint, 1515~1582) 출생 ‘맨발의 카르멜회’ 창시자. 본명은 de Cepaday Ahumada. 예수의 테레사라고도 한다. 아빌라의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535년 가르멜 강생수녀원에 입회했다.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영적(靈的)인 시련으로 받아들였으며, 1558년 성령을 기구하여 기도하던 중 초자연적인 신비를 체험하였다. 중년기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등에게서 용기를 얻어 초기 가르멜회의 엄격성을 부활시킨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했다. 1562년 아빌라의 성요셉 수도원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에스파냐 전역에 17개의 남녀 수도원을 세웠다. 개역가와 조직가로도 명성을 얻었고, 신비주의 영성작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그 생애는 깊은 명상생활이 현실적인 활동과 양립할 수 있음을 실증해 보인 좋은 예이다. 1622년 시성(諡聖)되었다. 주요저서에 《완덕(完德)에의 길:El Comino de la perfeccion)》 《자서전:Vida》 등이 있으며, 특히 《영혼의 성(城):El Castillo interior》은 적절한 비유를 구사, 신과의 합일(合一)에 이르는 길을 그린 것으로서, 에스파냐의 대표적 신비문학으로 꼽힌다.
[1913년] 독립운동가 규호 이규창[李圭昌] 출생 이명은 규호(圭虎 : 圭鎬). 아버지는 회영(會榮)이다. 1909년 아버지인 회영과 숙부인 시영(始榮)이 전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해 퉁화 현[通化縣]에서 출생했다. 이후 가족을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이주해 살다가 1929년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上海]로 갔다. 상하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과 남화한인청년동맹(南華韓人靑年同盟)에 가입해 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오면직(吳冕稙)·엄순봉(嚴舜奉)·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과 같이 활동했다. 1933년 3월에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당시 주중공사인 아리요시[有吉明] 암살계획에 참여했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앞장섰다. 1935년 3월 정화암과 협의해 엄순봉과 함께 조선거류민회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엄순봉은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그는 징역 13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39년 8월 옥중투쟁으로 형기가 추가되고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45년 8·15해방으로 출옥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9년] 김수환 대주교, 한국최초로 추기경에 서임
김수환 신부가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북 안동 본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의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경북 김천 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으며, 아울러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7월에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가톨릭 시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1년 8개월을 활동하는 동안 김 신부는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66년 2월 15일, 44세의 김 신부는 마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 성지여자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이때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가 바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추기경 서임] 김 주교는 이후 초대 교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교회 쇄신 정신에 따라 교구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한국 주교회의 부의장과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한국 부대표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 초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사임하면서 다음해 4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어 5월 29일 명동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졌다. 그리고 1969년 3월 28일, 김 대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성 펠릭스 성당' 명의의 서임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에 추기경은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그밖에 2004년 오스카상 수상자이자 영국의 저명한 배우 겸 극작가인 피터 유스티노프 사망 2003년 일본, ‘한반도 정찰위성’ 발사 2002년 최규선 게이트 첫 폭로 1999년 루이스 곤살레스, 파라과이 대통령 취임 1997년 정보근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상 횡령혐의로 구속 1995년 국방부, 국내기술로 개발한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 1994년 한-중 정삼회담 (북한 핵문제, 경제협력 집중논의) 1993년 변정일 WBC 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3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 구포역입구서 지반붕괴로 전복(68명 사망, 123명 중경상) 1991년 소련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관 화재발생 1990년 차세대전투기사업의 기종을 제너럴다이내믹스사의 F16으로 확정 1983년 소련, 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 사령부 신설 1982년 멕시코 치아파스의 엘치콘 화산 폭발로 약2천여명 사망 1980년 미국-터키 군사협력협정 조인 1980년 박동진 외무부장관, 스리랑카서 주최한 리셉션에 PLO대표 초청하고자 접촉 1979년 영국 캘러헌 노동당정부 붕괴 1972년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 방북(-31일) 1968년 한국경제인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 1965년 칠레에 지진, 약 5백여명 사망 1963년 공군수송기 C46 추락 11명 사망 1962년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1962년 시리아, 군부쿠데타로 쿠드시 대통령 취임 1953년 미국의 운동선수 소프 사망 1953년 북한, 부상포로 교환에 합의 1950년 남로당 총책 김삼룡 검거 1941년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 사망 1939년 ‘2차대전의 리허설’ 스페인 내전 종결 1938년 중국 남경에 일본의 괴뢰정부 수립 1930년 일본 무교회주의를 선도한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 사망 1899년 관립의학교 설립 1894년 박영효, 동경서 이일식에 피습 부상 1854년 크림전쟁에서 영국-프랑스가 러시아에 선전포고 1430년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첫댓글 구름님~28일의 역사예요^^..감사합니다.
에구....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