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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 사건>과 <청산리 대첩> |
번호 5087 글쓴이 문화산맥 조회 51 누리 0 (0/0) 등록일 2009-3-31 10:03 | 대문추천 0 참고자료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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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4) 룡정촌의 3.13반일시위운동후 연변 각지에서는 간도국민회, 대한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신민단, 의민단, 훈춘한민회 등 허다한 반일무장단체들이 분분히 출현하였다. 이런 단체들은 연변 각지에서 반일근거지를 설립하는 동시에 수시로 조선경내의 일제식민통치기구를 습격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조선족반일부대들이 입조작전한것이 무려 24 차에 달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조선족반일부대는 중국경내에 침입한 일본군에게도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20년 6월 4일부터 7월까지 두만강북안에서 진행한 삼툰자전투와 봉오동전투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조선족반일무장을 "심복지환"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일본제국주의는 연변조선족반일부대를 "토벌"한다는 명의로 소위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 일제의 사촉하에 토비 400여명은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두갈래로 나뉘여 훈춘현소재지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입성한후 직접 일본령사관에 달려가서 기관총과 양총으로 일본령사관을 지키는 중국 경찰을 진압하고 포탄으로 담벽을 허문후 일본령사관에 진입하여 불을 질렀다. 동시에 동대문을 공격한 토비들은 살인, 방화하면서 미친듯이 발광하였다. 아침 8시에야 토비들은 비로소 동서 두갈래로 나뉘여 로흑산으로 철거하였다. 이번 습격에서 일본령사관과 상점 6개가 타버렸다. 그리고 일본인 11명, 중국조선족이 6명이 피살되고 무고한 주민 200여명이 랍치되였다. "훈춘사건"이 발생한후 일본군은 당일로 경찰수비대를 선봉으로 삼아 연변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같은 달 9일 일본 륙군대신의 명의로 조선군사령부에 "출병"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변에 침입한 동지대는 17일 화룡현 청산리와 이도구일대에 반일부대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선후로 토벌대를 파견하여 청산리일대의 김좌진부대를 추격하였다. 그후에 동정언은 직접 본부주력을 인솔하여 이도구에서 남완루와 북완루에 주둔한 홍범도련합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침략군 동지대와 조선족반일부대지간에 화룡현 삼도구, 이도구일대에서 백운평전투, 약수동전투, 완루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곡전투, 맹가구전투, 서구전투, 천보산전투 등 격렬한 싸움을 10여차 벌리였다. 이번 전역에서 일본침략군은 조선족반일부대의 매복과 기습에 걸려 참패를 당하였다. 청산리전역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야수성이 발작하여 무고한 로백성들에게 보복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간 일본군이 간 곳이면 즉시 력사상 보기 드문 참혹한 학살과 피비린 폭행이 감행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이번 토벌가운데서 무고한 백성이 3664명이 피살되고 155명이 체포되였으며 민가가 3520채가 불탔고 학교 59개소, 교회당 19개소, 곡물 5만 9970석이 손실당하였다. 총적으로 청산리전역의 위대한 승리는 조선족반일무장운동사상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였다. 강대한 일본군의 무력침략앞에서 조선족반일부대의 장병들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약소한 병력으로 기동령활한 "운동전"과 "매복전"으로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이로 하여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의 반일투지를 고무한 동시에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일열정도 지대하게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국 각지의 신문들은 청산리대첩소식을 륙속 보도하였으며 민중과 청년학생들은 각종 집회와 반일시위를 련속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성토하고 일본침략군의 철군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연변일보 2008-8-12 19:17:55)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5) 로씨야의 10월혁명의 승리로 하여 동방약소민족들은 각성하기 시작하였고 식민지, 반식민지나라의 반제반봉건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았다. 1920년초부터 조기조선족공산주의자들은 동북조선족집거구에서 맑스레닌주의 단체와 혁명군중조직을 설립하고 맑스주의사상을 전파하였다. 따라서 조선족선진분자들은 맑스레닌주의사상을 접촉하고 공농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 일본제국주의가 "대소탕"을 감행할 때 쏘련의 씨비리야에서 조선족진보적청년들은 쏘련홍군에 가입하여 백비의 반혁명세력을 숙청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이 과정에 맑스레닌주의와 10월혁명의 경험도 학습하였다. 그들은 귀국한후 선후로 동북, 북경, 상해, 광동 등지에서 혁명사업을 계속하면서 맑스주의를 전파하였다. 1920년초, 일찍 로씨야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리동휘와 공산국제제2차대표대회에 참가하였던 박진형 등은 북경, 상해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진독수, 리대소 등과 함께 동방 각국에서 공산주의활동을 전개할데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후 리동휘, 박진형 등은 북경, 상해 등지에서 조선족청년들에게 공농혁명사상을 전수하고 로씨야의 10월혁명경험과 공산국제의 식민지, 반식민지국가의 약소민족에 대한 지지와 성원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들의 영항을 받아 당지의 조선족청년들은 사회주의연구회, 조선인사회과학연구회 등 마레주의연구소조를 설립하였다. 1921년 리동휘 등은 공산국제원동부의 방조하에 상해에서 유신인쇄소를 꾸리고 조선문으로 된 <<공산당선언>> 등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번역출판하였다. 이런 서적과 간행물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동북의 조선족집거구들에 전파되였다. 이외에도 관준언 등은 연길에서 신문서사를 개설하고 문구를 경영한다는 명의로 선진서적과 간행물들을 구입하여 청년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런 서적과 신문, 간행물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였다. 1, 로씨야의 10월혁명을 소개하고 사회주의혁명만이 비로서 공농계급이 진정으로 해방되는 길임을 주장한것. 2, 자본주의가 선양하는 <<정의인도>>, <<민족자각>>등 구호의 허위성과 반동성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오직 사회주의혁명만이 자본주의의 부패한 제도를 타도하고 무산계급과 조선민족을 철저하게 해방시킬수 있다는것을 주장하것. 3, 공농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는 사회제도의 부패성을 폭로하고 공농혁명사상을 선전한것. 4,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통치의 죄행을 질책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뒤엎어야만이 조선이 비로서 민족독립을 쟁취할수 있다는것을 주장한것 등이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기공산주의자들은 연변지역 룡정의 여러 학원, 중학교에서 맑스주의사상을 광범위하게 선전하였다. 1922년 리주화, 리린구 등 조기공산주의자들은 대성중학, 동흥중학에서 맑스레닌주의사상을 학습하는 광복회 등 과외학습소조를 설립하고 맑스레닌주의사상을 공동연구하였다. 1923년 김사국 등은 대성중학교에서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그 산하에 공산주의선전부와 특별부를 두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초 박윤서 등은 쏘련에서 룡정으로 돌아와 동흥중학교의 진보청년 김광세 등과 함께 비밀단체인 고려공산주의청년회를 설립하였다. 동년 9월 광복회와 련합하여 사회과학연구회와 친목회 등 맑스주의연구단체를 공동설립하고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0년대초 조선족조기공산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하여 연변지역의 대성, 동흥, 은진, 영신, 명신, 명동 등 중학교는 선후로 청년학생들이 맑스레닌주의사상을 학습하고 선전하는 중심으로 되였다. (연변일보 2008-8-18 21:40:21)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6) 지난 세기 10년대부터 20년대에 이르기까지 1910~1920년대에 상해, 광동, 북경, 남경, 무한, 천진 등지에는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거주하고있었다. 1916년부터 허다한 조선족청년들은 운남의 강무학교, 한단군사강습소, 북경학병퇀, 락양학병퇀, 락양군관학교, 귀양륙군강무학교, 항주군관학교, 보정군관학교 등 군벌정부의 군사학교에서 학습하였다. 그중 학원이 가장 많은 학교가 바로 황포군관학교였다. 황포군관학교는 손중산이 쏘련의 도음을 받아 중국공산당과 련합하여 창립한 군사정치학교였다. 대혁명시기 황포군관학교에서 학습한 조선족학생은 무려 200여명에 달하였다. 그중 허다한 조선족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나 지휘관으로 초빙되였다. 당시 조선족청년들은 이 군사학교에서 정치, 군사 지식을 학습한 동시에 국민혁명에 직접 참가하였다. 1924년 10월 광주상단을 평정하는 전투 등에도 참가하였다. 1927년 7월 12일 중공중앙은 남창기의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당시 엽정의 제11군 제24사, 화룡의 제20군, 주사제의 제25군에는 허다한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용무쌍하고 지혜로운 조선족청년들의 전투마다 영웅적기개를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뒤이어 1927년 11월 26일 중공광동성위는 또 광주봉기를 결정하고 엽정이 총사령, 엽검영이 부총사령으로, 리용(조선족)이 참모장을 맡았다. 기의전 총지휘부는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족골간들을 기의군의 각 요해부문에 배치하였다. 이를테면 량대보가 광주기의총지휘 엽정의 군사참모로, 김산이 엽정의 군사참모겸 한어번역으로 배치한것이다. 그리고 리용이 제1영영장의 군사고문으로 리빈이 북부전선지휘관으로 최석천, 김규광 등이 특무영과 교도퇀의 련급지휘관으로 임명되였다. 그외에도 대부분 조선족장병들이 기의주력부대의 교도퇀에 편입되였다. 그중 2영5련은 대부분이 조선족장병들로 구성되였다. 1927년 12월 11일 기의군 각부는 공격목표에 총진공을 발동하였다. 박영, 박근만, 박근수 등 조선족으로 구성된 소분대는 적군의 사령부를 야습하였다. 김규광 등 교도퇀 제2영 5련의 조선족전사들은 사하진전투에 참가하였다. 리빈이 거느린 소부대는 적군의 비행장을 습격하여 적기 10여대를 격파하였다. 기의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쏘베트정부를 설립하자 국민당반동파들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제국주의렬강들과 야합하여 기의군에 향하여 발광적인 반격을 감행하였다. 유생력량을 보전하고저 기의군총지휘부는 사하를 건너 해륙풍방향으로 전의하였다. 다른 방면으로는 박영이 거느린 조선족소분대 60여명을 포함한 200여명 도강돌격대는 적군의 겹겹한 포위와 련속되는 공격을 련속 5차나 물리치면서 진지를 고수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박영은 영용하게 희생되고 기타 조선족전사 50여명도 체포되여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광주기의후 량대보,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 등 조선족용사 15명은 교도퇀, 경위퇀 등 부대를 따라 12월 13일 광주를 떠나 16일 화현에 도달하였다. 그후 이 부대들은 중국공농홍군 제4사에 편입되고 19일 해륙풍쏘베트구역에 도달하였다. 1928년 1월 2일 그들은 해륙풍에서 거행한 중국공농홍군제4사 환영대회, 15일에는 조선족용사 15명을 환영하는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해륙풍지역의 인민들과 함께 해륙풍쏘베트정권을 설립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연변일보 2008-8-19 23:3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