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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11 (월) 07:22 조선일보 |
신입 여사원들 "성희롱·차별 여전하더라" |
귀엽다며 볼 꼬집는 이사, 참다못해 항의하자
"우리 애기 화났구나, 3천만원 줄까?"
[조선일보 김윤덕, 신지은 기자]
여풍(女風)이 분다고? 여성 폭발 시대라고? K은행 신입사원 정연주(가명·23)씨에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지난 1월 사회생활의 부푼 꿈을 안고 K은행에 입사한 연주씨. 그러나 신입사원 환영 회식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2차로 간 노래방에서 같은 부서의 40대 남자 과장이 블루스를 청해온 것이다.
상큼한 총각 사원도 아닌 그의 느물느물한 표정이라니. “춤 못 추는데요” 하고 사양하자 과장 눈이 휘둥그레졌다. “효리 세대가 춤을 못 춰?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 남겠어? 여긴 캠퍼스가 아니야. 정글이라고!”
블루스 거절당한 上司 “효리세대가 춤 못추면 경쟁에서 살아남겠어?”
넉 달 전 전자회사에 들어간 김영란(가명·24)씨 역시 “세상의 쓴 맛을 이제야 알았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집에서도 아버지 담배 심부름 해본 적 없는 자신이 허구한 날 커피를 타서 나르기 때문이다. 함께 입사한 남자 동기가 부서에 둘이나 되는데도 40대 후반의 부장은 언제고 영란씨만 찾는다. “무슨 다방 종업원 부르듯 ‘영란아~’ 이렇게 불러요. 이게 회사예요?”
한두 달 전만 해도 ‘여자’라는 콤플렉스 따위는 없다고 믿었다. “성 차별? 오히려 개인 차(差) 아닌가요?” 하고 반문했다. 하지만 이젠 알겠다. 직장생활 하고 결혼해 애 낳고 살아보면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던 여자 선배들 푸념을!
동료 남자 직원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만 반응은 썰렁하다. “그깟 커피 심부름쯤, 블루스쯤 웃어 넘기래요. 너희가 군대를 안 갔다 와 그렇다면서.” 하지만 남자들이 알까? 여자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뉘앙스의 온갖 발언을.
대기업 E사에 다니는 김유라(가명·24)씨는 보고서에 수치를 잘못 적는 바람에 수모를 당했다. 서류를 던져버린 것까지는 좋았다. 곧이어 남자 대리 입에서 터져나온 말.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빨리 시집이나 가라.” 딱히 반박할 수 없는 성희롱 때문에도 화장실에서 펑펑 눈물을 쏟는다. 외국계 기업 인사부에서 일하는 오세희(가명·24)씨는 목둘레가 조금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출근했다가 차장에게 면박을 당했다. “남자들이 신경쓰여 일을 하겠냐?”
보고서 던지다 못해 “이런 식으로 할거면 빨리 시집이나 가라”
여의도 증권회사 직원 조인영(가명·22)씨는 아예 노이로제에 걸렸다. 툭하면 “애기 같다”며 볼을 꼬집어대는 담당 이사 때문이다. 한번은 큰맘 먹고 대들었다. “이사님, 이거 성희롱 아니에요?” 그러자 이사 왈, “에고, 우리 애기 화났구나. 3000만원 줄까?” 이사님의 볼 꼬집기는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한 해 여성부 남녀차별 개선위원회에 접수된 성희롱 사건은 112건〈왼쪽 아래 도표 참조〉. 피해자의 70%가 20대 고학력 여성이다. 당당하기로 소문난 신세대들이 왜 남자 상사들 앞에선 속수무책일까.
제약회사 8년차 최예리(가명·33)씨는 “상사의 눈에 빗나가면 인사고과가 엉망이 되고 승진도 어려워지는 한국 특유의 수직·종속적 기업문화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남자 상사들이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도 크게 작용한다. “여자들이 근무 시간 안에 일을 다 끝내려고 화장실도 뛰어다닐 만큼 부지런을 떤다면, 오버타임에 익숙한 남자들은 근무 시간엔 담배 피우며 어슬렁거리다가 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식이죠. 상사들 눈엔 그런 남자 직원들이 더 믿음직해보이지 않겠어요?” 그걸 볼 때마다 밤샘 공부해 수백 대 1 경쟁 뚫은 보람도 없이 모든 야망이 한순간에 확 꺾인다고 예리씨는 말했다.
※이 기사 작성에는 본지 인턴기자 이재원씨(성균관대 영문학 4년)가 참여했습니다.
(김윤덕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sion.chosun.com])
(신지은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ifyouar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