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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흰 예복을 입어야 삽니다
편지 - 무지개 빛깔의 옷
하나님의 옷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네? 아, 하나님께서는 옷을 입지 않으신다고요? 그냥 빛으로 둘러싸여 계시다고요? 네. 하나님께서는 빛 자체이시고, 또 늘 눈부신 환한 빛 속에 계시니까 아마 옷이 필요 없으실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옷을 입으신다면 어떤 색깔의 옷을 입으실까요?
하나님 보좌의 빛은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여러 가지 속성과 성품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께서 옷을 입으신다면, 여러 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무지개 빛깔의 옷을 입으실 것 같아요. 오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무슨 색깔의 옷을 입을지 골라 볼까요? 옷은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울과 같은데, 그리고 그 빛깔은 자신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오늘 어떤 빛깔의 옷을 골라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까요?
빨강 - 하나님의 사랑
빨간색은 사랑의 색으로 알려졌습니다. 빨간 하트는 사랑의 표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왜 무지개의 색깔이 빨간색으로 시작할까요? 그것은 사랑을 빼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창조물 하나 하나에 마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연계의 아름다운 만물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돌보심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뚜렷한 증거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고(빌 2:6,7) 인간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너무 진하게 울려, 그 생각이 스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세대에 세대를 거쳐 내려온 인간의 온갖 사랑, 심지어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끝없는 대양에 대한 작은 실개천에 불과합니다. 설사 영원이란 세월을 소요한다 해도 그 너머에는 여전히 무한(無限)이 존재할 것입니다. 결코,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려면...
사랑은 충동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변화무쌍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아 있는 능력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아, 행동의 원칙이 되고, 품성을 변화시키며, 충동과 격정을 통제하고, 또 적의를 사라지게 합니다. 하늘에서 난 이 사랑이 마음속에 거하면, 그 깊고 열렬한 사랑은 모든 이에게 가로막을 수 없는 시냇물처럼 흘러갈 것입니다. 빨간색을 보면, 어디서든 빨간 하트를 보면, 독생자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감격에 젖어보는 것이 어떨지요!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거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사랑의 옷을 입어봅니다.
주황 - 하나님의 이해
계절의 순환을 이해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가을의 단풍은 주황색입니다.
이해는 한발 물러서거나, 한 계단 내려서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물러나셔서 가만히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 부닥친 우리를, 그리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너무 잘 이해하시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시 87:5,4)라는 말씀으로 서로 다르게 태어난 우리를, 그래서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는 인간사를 이해하시며, 그냥 그 일들이 풀리도록 가만히 계실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일어난 일들을 통해 우리가 겸손히 고개를 숙이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듯이 서로에 대하여 깊어진 이해로 우리들의 사이가 한층 더 따뜻해지면, 하나님께서는 성큼 자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미소를 지으십니다. 생의 의미를 다 이해했다는 듯, 찬란한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주황빛 나뭇잎을 보면서, 우리도 오늘 이해의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어떨까요?
노랑 - 하나님의 공의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도 불립니다. 하나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평"(시 97:2)이시고, "여호와"는 "우리의 의"이시며(렘 33:16), 그분은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변하지 않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미쁘신" 분이십니다. (히 13:8, 딤후 2:13) 정직하시고, 진실하시고, 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숨은 동기까지 헤아리시며, 올바른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약한 자, 슬픈 자, 억울한 자는 오늘도 어깨를 펴고 삽니다. 모든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면서...
공의는 마치 율법처럼 인간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법이 있는 곳에 착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공의롭고 진실하므로 의인들이 해를 받지 않고 평안히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충족되었듯이,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의 생애에는 사랑과 정의가 함께 어우러져 피어나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속성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시 85:10) 절묘한 조화가 어우러져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입는 옷에는 얼마나 정직과 의로움과 진실이 배어 있는지요!
초록 - 하나님의 평화
초록색은 시각적 자극이 없고 사람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색입니다. 자연에 가장 가까운, 명도 8 그리고 채도 2의 색이 인간의 눈의 피로를 가장 많이 풀어주며, 그 색이 바로 초록색인 녹색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연을 녹색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초록색은 우리와 화평하시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평화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 9:6)이십니다.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립니다.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됩니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화평은 분쟁을 완화해 주고,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줍니다. 화평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질투가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화평을 가진 사람은 삶의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슬 같이 적셔주고,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평화롭고 부드러운 감화를 주위에 끼치며,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를 세상에 날립니다. 당신은 화평케 하는 사람인가요?
파랑 - 하나님의 자비
파란색은 무지개 빛깔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색입니다. (겔 1:22) 그래서 파란색은 하나님의 자비를 대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이 소개될 때 제일 먼저 "자비롭고 은혜롭고" (출애굽기 34장 6절) 라고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주기 위하여 풍성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시고, 우리의 상처에 자비의 향유를 발라 주시기 위해 매우 갈망하십니다. 자비로운 마음과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입니다. 영혼 속에 예수님이 거하시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마르지 않는 샘에서 자비의 샘물을 뿜을 것이며, 그 자비의 풍성함으로 다른 영혼들을 살찌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해 보면서 파란 옷을 입어보면 어떨까요?
남색과 보라 - 하나님의 인내
파란색과 어우러져 살짝 나타나는 무지개 끝의 남색과 보라색은 하나님의 인내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며 천 년을 하루 같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끈기와 열정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 이 땅의 생애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인내는, 너무나 조급하고 참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 없는 견책이 됩니다. 사흘, 아니 하루도 참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 어떤 일을 보면 내가 나서야 하고, 내가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또 조그만 자극에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조그만 시험에도 인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지구의 죄의 역사를 마치시기까지 6천 년 이상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오늘은 정말 인내의 옷을 걸치고 밖을 나서야겠습니다. 목까지 단단히 여민 인내의 코트는 오늘 우리의 마음과 입을 인내로 잘 싸주지 않을까요? 섣불리 입을 열거나 조급하게 행동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매일 무지개 빛깔의 찬란한 옷을 입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권두언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입니다. 그리고 그날 중요한 신부의 포인트는 역시 신부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입니다.
만일, 큰 기대와 상기된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는 하객들 앞에 나타난 신부가 검고 더러운 점들이 잔뜩 묻어 있는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실은 제가 젊은 시절에 그와 비슷한 형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름있는 한 방송국 합창단이 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멋진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주례인 앞에서 막 선서를 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다른 신부와 그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와서는 신랑에게 오물 세례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신부의 드레스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순결과 헌신을 상징합니다. 음행하지 않은 순수성을 상징하고 또한 한 남편에게만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로 말하고 있고,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성품을 웨딩드레스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혼인 예복은 희어야 합니다. 죄 없는 품성을 말합니다. 죄를 전혀 지은 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요. 모두다 깨끗이 씻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더는 신부의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 성도 어린 양의 신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성 안에 살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부들인 성도들이기 때문에 그 성 전체가 어린 양의 신부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잔치에 온 사람들이 혼인 예복을 입고 왔는지를 검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 말고 하객들 말입니다. 왕이 아들의 잔치에 와 있는 하객들을 환영하며 혼인 예복을 입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과 그 왕국에 대한 예의이며 또한 왕을 뵙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영적인 의미에서 다루고 있는 이번 호가 여러분께 큰 축복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정과 영성 - 하나님은 천사가 반역할 줄 몰랐나요?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몇 가지 의문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데, 왜 천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천사가 반역할 줄 몰랐나요? 또한, 왜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셨나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
자유의지를 준 이유
하나님께서 루시퍼 천사를 창조하셨을 때,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가 장차 반역할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 왜 루시퍼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도록 창조하였을까? 왜 루시퍼를 절대로 반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이 명령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오직 한 가지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16) 자유의지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으면 사랑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독재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지 않다.
만일 우리의 자녀가 결코 반항하거나 불순종하지 못하는 로봇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부모로서 자녀가 로봇과 같은 존재로 태어나기를 원할까? 또한, 자녀는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과 같은 존재로서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천사들이 자유의지나 선택할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프로그램해놓은 대로만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그들이 하늘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만일 천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거나 불순종할 수 없게 창조되었다면, 죄와 반역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과 천사들 사이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과 신뢰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이 우주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과 신뢰로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루시퍼가 범죄하였을 때 즉시로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만일 루시퍼가 그 마음에 교만을 품고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즉시로 죽임으로써, 루시퍼가 그의 동료 천사들을 반역 가운데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했다면, 죄가 이 지구까지 확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즉시로 죽이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교만이 루시퍼의 마음속에 싹트는 즉시 그를 제거해 버렸다면, 온 우주에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깊은 의심이 생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 우주의 천사들은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루시퍼를 죽이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죄를 마음에 품자마자 즉시로 죽인다면, 천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에 대한 형벌과 심판을 뒤로 미루시고, 사단의 교만과 악한 품성이 온 우주 앞에서 온전히 드러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루시퍼는 그러한 기회를 이용해서 하늘 천사 삼 분의 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하늘 천사의 삼 분의 일이 마귀 편으로 가고, 나머지 삼 분의 이가 하나님 편에 남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자, 하나님께서는 일단 그들을 하늘로부터 쫓아내셨다.
"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계 12:3-4)
땅으로 옮겨진 죄의 역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과 인격을 주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함께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셔야만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에게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줄 경우, 반역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반역이 생겼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면 지구에서도 죄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쫓겨나서 지구로 내려온 사단(루시퍼)과 그를 따르는 악한 천사들(악령)은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를 기만해서 죄를 범하게 하려고 계획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믿음과 사랑을 완전케 하려고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었지만, 사단은 그것을 이용해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명령(계명)을 불순종하고 사단의 말을 따른다면, 사단은 새롭게 창조된 이 지구에서 협력자들을 얻게 될 것이고 지구를 지배하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그의 말을 따르기로 선택하여 선악과를 따먹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서 시작된 죄가 이 지구로 옮겨지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아담과 하와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내려져야만 했지만(롬 6: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되기로 자원하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었다.
태초 이전에 시작된 십자가의 고통
하늘에 있던 루시퍼와 악한 천사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대면하며 살았던 자들이고 하늘에서 모든 빛과 진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져서 반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기 위함도 아니며, 다만 사단에게 유혹을 받아서 기만당함으로써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우주에 생기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를 위하여 구속의 계획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로 죽는 것이 포함된 계획이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지급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순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언젠가 자신이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사셔야만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순간, 죄와 반역의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구속의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그것이 영원 전에 세워진 구속의 계획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And all that dwell up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Rev 13:8)
온 우주의 구경거리가 된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은 살아 있는 동안에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6-27) 모든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진리를 발견할 뿐 아니라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진리대로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시작된 선과 악의 대쟁투가 지구로 옮겨졌기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믿는 성도들이 마귀의 시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9)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12)
하늘의 천사들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흥미 있게 살펴보고 있다. 이 지구는 하늘에 사는 천사들에게 선과 악의 투쟁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가 되고 있다. 죄의 역사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와 공의를 보면서 천사들은 감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고, 지금도 범하고 있는 지구의 끔찍한 역사의 참상을 보면서 온 우주는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타락하였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 경배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마귀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곧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의인들을 데리고 하늘로 가실 것이다. 길고 긴 죄의 역사를 지켜본 천사들과 이 땅에서 죄 때문에 고통당했던 성도들의 경험과 간증 때문에 우주에 다시는 죄가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시골생활 - 네번째 이야기
가장 중요한 습관
(이 글은 지난 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저희 형제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조용히 숨을 죽이고 들어봐라. 어떤 소리가 들리니?"
조용히 들어보니 여기저기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저 새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송한단다. 그리곤 먹을 것을 찾아서 떠나겠지. 이제부터 너희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너희만의 장소를 정해 놓고 기도하러 다니거라. 그리고 저 새들이랑 같이 찬송하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가지셨던 습관이란다." 그래서 저와 형은 각각 기도장소를 정했습니다. 저의 장소는 작은 소나무 아래 깨끗한 침엽이 깔린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먼저 그곳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은 저쪽 골짜기에서 저는 이쪽 골짜기에서 노래를 불렀지요. 때로는 제가 저희 형보다 더 크게 부르려고 아주 힘껏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찬송 부르고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아침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현범아, 엄마는 언제가 제일 행복한지 아니? 너희들이 이쪽 저쪽에서 큰 소리로 찬송 부를 때가 제일 행복하단다." 그때의 그 습관은 아직도 제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습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습관입니다. 만일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그들 스스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 보게 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우린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 활동을 많이 하고 공부를 잘하고 시골생활과 절제생활을 철저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면 그 아이는 결코 신앙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줄 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곳에서 살 때에 먹을 것은 농사를 져서 해결되었는데 용돈으로 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 말로는 소를 키우면 소가 송아지를 일 년에 한 마리씩 낳아주기에 살림에 큰 보탬이 된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저희의 사정을 아시고 소 두 마리를 살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그 골짜기엔 저희 집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들을 풀어놓고 형과 제가 돌보았습니다. 아침에 아버지께서 작은 종이에 기억절을 적어주시면 그것을 들고 나가서 소를 보면서 외우고 또 놀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형과 제가 소를 타보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가 어렸기 때문에 소등에 그냥 올라탈 수 없어서 소를 큰 바위 옆으로 가게 한 다음 그 바위 위에서 올라탔습니다. 소 등에 올라타면 소가 놀라서 막 뛰어가기도 하고 꼬리를 치면서 뒷발질도 하기 때문에 꽉 붙잡지 않으면 몇 발짝 못 가서 떨어진답니다. 푸른 하늘 아래서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햇살을 받으며, 조용한 산 언덕과 계곡에서 마음껏 노래 부르고 성경 절을 외우며 뛰어다니던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한번은 저희가 소 풀을 뜯기며 다니다 보니 어떤 나무 위에 머루가 주렁주렁 달렸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부모님께 가서 말씀드렸더니 부모님께서 오셔서 머루를 몇 바구니를 땄습니다. 입술에 물이 들 정도로 실컷 먹고 나머지는 머루즙을 만들었습니다. 머루는 포도보다 신맛이 아주 많지요. 그래서 오시는 손님들에게 맛보라고 드리면 모두 눈을 꼭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드셨답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도소리나 찬송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난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자라나면서 부모님에게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너 기도했니? 혹은 '너 오늘 말씀 봤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에 와서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셨던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목적처럼 시골생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목숨 걸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저희는 골말이라는 곳을 떠나서 선여울이라 불리는 잔잔한 강이 흐르는 곳으로 이사하게 됩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건강과 행복 - 대장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
대장은 소화의 마지막 단계인 배변을 담당하는 장기지만, 그 역할은 단순히 배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음식물이 식도를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면 위장에서 4~5시간 머물면서 소화가 진행되고, 각종 소화액이 분비되는 십이지장을 지나서 소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소장에서는 주로 음식물에 함유된 영양분과 수분이 흡수된다. 그리고 나서 도착하는 곳이 소화의 최종 단계를 책임지는 대장이다.
대장은 크게 결장과 맹장과 직장으로 구분되는데, 암이 발생하는 위치에 따라 결장에 생기는 암을 결장암, 직장에 생기는 암을 직장암이라고 하고, 이를 통칭하여 대장암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대략적인 대장의 각 부위별 암 발생률은 맹장과 결장에 생기는 암이 80%이고 직장에 생기는 암이 20% 정도로 알려졌다.
대변의 색깔은 대장의 건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된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대장의 대변 색깔은 황갈색이며 만일 변이 검붉은 색깔을 띠고 있다면 대장암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대장 내부에 "폴립"이라고 불리는 작은 혹인 대장 용종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 용종은 2~5년에 걸쳐서 1cm 정도 자란다. 1cm 이상 커진 대장 용종은 암으로 변질할 위험이 있으므로 대장 내시경 검사를 통해서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좋다.
근래에는 위암의 발병률이 내려가고 있는데 반하여 간암은 소폭 증가하였고 대장암은 크게 상승하는 추세에 있다. 한국의 어떤 대장 전문 병원의 조사에 의하면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은 사람 중 약 42%가 대장 질환으로 판정받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30대 젊은 환자들이 가장 많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대장암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동물성 지방의 과도한 섭취
대변이 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변의 독소들이 대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대장암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는 대변의 독소들이 대장 내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장암의 원인으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이 과다한 육류 섭취 혹은 고지방식이다. 포화지방 함량이 높은 동물성 지방의 섭취량이 많은 나라에서 대장암의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데, 육류 중에서도 특히 붉은색을 띤 육류가 대장암 발생률을 높인다.
2) 섬유질 섭취 부족
섬유질, 야채류, 과일류의 충분한 섭취는 대장암의 예방 효과가 있다. 섬유질은 음식물이 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발암물질과 장 점막과의 접촉시간을 단축하게 하고 장 내 발암물질을 희석하는 작용을 한다. 식물성 섬유소 중에서도 리그닌이라는 성분이 변이 대장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역할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데, 이 성분은 과일의 껍질이나 미역, 김 같은 해조류와 콩나물, 시래기 등에 특히 풍부하다. 변비가 있으면 변이 대장 내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므로 변비를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탁이 달라져야 장이 튼튼해진다.
3) 칼슘, 비타민D의 부족
칼슘 섭취가 대장암 발생 억제 효과가 있다는 연구들이 보고되고 있으며, 몸 안에 비타민 D 농도가 충분하면 대장암 사망률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4) 운동 부족
대장암 발생률이 높은 서구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들에 따르면 노동량이 많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서 대장암의 발생 위험이 감소하며, 일과 시간뿐 아니라 여가 시간에 즐기는 운동량도 대장암의 발생위험을 낮춘다고 보고되었다. 신체활동이나 운동은 장의 연동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 대변이 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대변 내 발암물질과 장 점막이 접촉할 시간이 줄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5) 염증성 장 질환
염증성 장 질환인 궤양성 대장염(Ulcerative colitis)과 크론병(Crohn's disease)이 있으면 대장암 발병 위험이 증가한다. 궤양성 대장염은 일반인보다 대장암 발생 위험률이 10배 이상 증가하고 크론병은 일반인보다 대장암 발생률이 4~7배 증가한다고 알려졌다. 따라서 염증성 장 질환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규칙적으로 대장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6) 유전적 요인
대장암이나 대장 선종을 가진 환자의 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대장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
7) 50세 이상의 연령
대장암은 연령에 비례하여 발생하는 경향이 있어 50세 이상의 나이에서 발생률이 증가한다.
대장암의 증세
초기 대장암은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증상이 없는 경우에도 눈에 띄지 않는 장 출혈로 혈액이 손실되어 빈혈이 생길 수 있다. 암이 진행된 경우에는 배가 아프거나 설사 또는 변비가 생기는 등 배변습관의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고 항문에서 피가 나오는 직장출혈의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혈액은 밝은 선홍색을 띠거나 검은색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진행된 경우에는 배에서 평소에 만져지지 않던 덩어리가 만져질 수 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증상으로는 배변 습관의 변화, 혈변, 동통 및 빈혈이며, 특히 40세 이상의 성인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있을 때에는 철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신앙 1부: 어린양의 신부는 누구입니까?
아름다운 웨딩 마치가 울려 퍼집니다. 예쁜 꽃들과 장식으로 둘러싸인 멋진 예식장에 상기된 얼굴로 참석한 하객들은, 웨딩마치에 맞추어 사뿐히 걸어 들어올 순백의 신부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신부가 멀리서부터 걸어 들어 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입장해야 할 신부가 지저분한 때와 검은 얼룩으로 더러운 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놀라는 하객들과 엉망으로 망쳐진 그 결혼식을...
머지않아 하늘에서 혼인 잔치가 열리고 아름다운 피로연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어린 양의 신부와 신부가 입어야 할 옷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는 누구일까요? 먼저 이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봅니다.
1) 어린 양의 신부와 아내
성경은 우리를 어린 양 예수님의 신부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부부 관계처럼 표현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사랑의 관계가 마치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해야 할 사랑의 관계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호세야 2장 19,20절 -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 이사야 54장 5절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 예레미야 31장 32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위의 성경 절들은 모두 하나님을 우리의 남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통하여, 가장 인간적인 표현을 빌려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을 멀리하시고 쫓아내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시고, 가까이 계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며, 마치 남편처럼 항상 곁에서 돌봐주는 보호자 같은 분이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얼마나 잘 나타낸 적절한 표현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사랑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우리의 남편이라고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호세야 11:4)
신약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여전히 이어져 나타납니다.
❖ 고린도후서 11장 2절 -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내로서의 우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 19장 7절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허다한 무리와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하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멸망 받을 악인들과 구원 얻을 성도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의해 결정되고, 지구의 죄의 역사가 종결되어 하나님의 신부인 성도들이 하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는 장면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고 은혜의 시간이 마친 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구원받을 성도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셔서 하늘 혼인 잔치를 베푸실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을 성도들은 어린 양의 신부로 표현된 것입니다.
2) 여자 = 참 교회 = 남은 자손1. 여자로 상징된 교회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에는 여자로 상징된 하나님의 참 교회에 대하여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참 교회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교회의 모습, 즉 그 여자의 모습이 어떤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a woman)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요한계시록 12:1)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이라고 기록하였으며(렘 6:2), 이사야는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 51:16).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딸(여자)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온 = 아름다운 딸 = 여자 = 하나님의 백성 = 참 교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자, 즉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교회는 해를 입고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이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에 달린 12별은 12사도들을 상징하며, 발아래 있는 달은 햇빛 되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예언을 가진 구약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구약의 예언을 기초로 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달을 밟고 해를 입은 신약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보아 참 교회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께 직접 진리를 받은 열두 제자들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 그리고 그들이 믿는 진리와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하게 빛나며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사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참 교회인 남은 자손
요한계시록 12장 2~5절을 보면, 아기를 해산하려고 하는 여자(교회)가 나옵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기서 만국을 다스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올려간 이 아기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아기를 죽이려고 하던 용은 사단입니다. 이에 분노한 사단은 남자를 낳은 여자(교회)를 핍박합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 12:13)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진리를 박멸하기 위해서 일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고, 사단이 마지막 시대에 여자인 하나님의 참 교회, 즉 하나님의 남은 무리를 향하여 도전해 올 것이라는 사실도 예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성경은 이 여자의 남은 자손인 참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손이란 원어로 "Remnant"라는 말인데, Remnant란 옷감을 파는 집에 가면 천을 큰 두루마리로 말아놓고 파는데 그 두루마리의 마지막 남은 조각을 가리킵니다. "Remnant"는 두루마리의 첫 번째 천과 같은 천으로 맨 마지막에 남는 조그만 천 조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무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과 진리를 변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무리이며, 초기 사도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르침과 동일한 변질하지 않은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는 참 교회,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손,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할 이 남은 자손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입니다.
신앙 2부: 흰 예복이 무엇입니까?
신부의 상징은 하얀 웨딩드레스입니다. 신부가 결혼식장에 입장하기 위해 반드시 입어야 하고 갖추어야 하는 것이 바로 흰 예복입니다. 성경에는 흰 예복과 흰옷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 흰 예복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입는 옷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4)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9)
"장로 중의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3)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 중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리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그 성도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흰옷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입는 옷입니다.
2) 하나님 신부의 옷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계 19:7)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입게 하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곧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흰 예복은 하나님 신부의 상징입니다.
3) 구원받기 위해서 입어야 할 옷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8)
이 성경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서 옷, 곧 흰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절대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하시며, 벌거벗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흰옷이 없으면 사서 입으라고 권고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흰옷을 입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승리한 자들이 입는 옷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4,5)
성경에는 이기는 것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은 이기는 사람은 흰옷을 입으리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기는 사람은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다닐 특권을 얻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에 승리하고 세상과 자아를 이기고 짐승의 표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사단의 세력과 싸워 이긴 사람들은 흰옷을 입을 것이며,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신앙 3부: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손님 이야기
성경에서 흰 예복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이야기 중에서 "혼인 잔치와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흰 예복의 상징과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비유의 이야기를 해석하며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마 22:2,11)
1) 혼인 잔치에의 초청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비밀이 담긴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셔서 하늘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구속의 계획의 일환으로 복음의 초청을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초림하셨던 시대부터 세상 끝에 있을 재림 때까지, 세 번에 걸쳐서 복음의 초청을 인류에게 보내십니다.
1. 첫 번째 초청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싫어하거늘" (마 22:1~3)
첫 번째 초청은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지상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기간에 유대 민족에게 보내졌습니다. 유대 민족은 진리의 전수자로서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귀한 특권과 의무를 게을리할 뿐 아니라, 진리를 거절하고 싫어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못 박아 죽임으로써 그들의 은혜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야기에 나오듯이, 혼인 잔치의 초대장을 보낸 발송인은 임금이었고,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면서 감사해야만 하였지만, 그들은 왕의 초청에 무관심하였으며 그 초청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잔치에 참석하라는 첫 번째 초청의 기별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과 칠십 인을 통해서 주어졌지만, 유대인들은 그 복음 잔치에 참석하기를 "싫어 하"였고, 그 초청은 그들의 관심을 이끌지 못하였습니다. 즉, 청함을 받았던 자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두 번째 초청
"다시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4~7)
두 번째 초청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A.D. 34년 스데반이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됨으로써,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의 은혜의 시간이 마쳐질 때까지 보내졌습니다.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리의 초청을 거절하고 국가적인 은혜의 시간이 마친 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할 때까지 보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보내진 이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후에 보내진 초청의 기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음에도,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그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오순절에 내려진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기별을 전하는 종들에게 충만하게 임했지만, 두 번째 초청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백성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5절)
3. 세 번째 초청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8~10)
세 번째 초청은, 지금 보내어지고 있는 초청으로서,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부터 세상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순간까지 보내어지는 초청을 말합니다. 두 번에 걸쳐서 보낸 초청이 특별하게 선택된 유대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하자, 임금은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세 번째 복음의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초청을 받고 찾아온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 속에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섞인 무리였습니다. 모두가 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임금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다만 이기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서 왕이 초대하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로서, 왕이 혼인 잔치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과 수고를 하였는지는 무관심하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보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잔치를 찾아온 악한 자들의 목적과 동기는 순결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임금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2) 심판과 조사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14)
고대 시대의 풍습을 보면, 왕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이야기에 보면, 혼인 잔치에 가득 찬 손님 중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에게 예복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왜 그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준비한 예복을 입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라는 임금의 질문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최종 선언을 내렸습니다. 임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합니다. 잔치에 모두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잔치에 참석하여 그 향연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비유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매주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는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결정된 심사 결과대로 상벌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니" (계 22:12)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앙 4부: 흰 예복의 상징과 의미는?
앞의 기사에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예복"을 입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예복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예복"이란 주제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그 상징적 의미를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함께 공부해보기로 합시다.
1) 흰 예복 = 흰 세마포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신부는 주님께서 입게 하신 빛나고 깨끗한 흰 예복, 즉 흰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7,8) 또 다른 성경 번역을 참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계 19:7,8 ;킹 제임스 영어성경 역)
먼저 예복에 대해서 공부하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이 마태복음 22장에는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2) 흰 세마포 = 성도의 의 = 성도들의 품성
그렇다면 흰 예복, 곧 흰 세마포는 무엇일까요?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곧 세 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義)"의 옷을 입고 하늘 혼인 잔치에 참석해야 함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5~27)
바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세상과 우주에 제시하실 교회, 즉 하나님의 참 백성인 어린 양의 신부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모습이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께서 그분의 신부에게 입게 하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상징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깨끗한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 "의", 곧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마음의 동기와 생각과 의도와 방향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곧 의롭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임금이 누가 혼인 예복을 입었는지 살피는 것처럼, 아무리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여도, 모두가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참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졌는지 조사하는 심판을 통해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복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소유해야 할 순결하고 흠 없는 품성을 표상합니다.
3) 잃어버린 옷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흰옷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흰 세마포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옷을 말합니다.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을 아는 빛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한 거룩한 생활을 살던 우리의 선조는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빛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 생애를 살았고 저희의 모든 애정을 저희 하나님께 바쳤으며, 그리하여 항상 아름다운 하나님의 빛이 그 거룩한 부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빛의 두루마기는 하늘의 순결한 영적 옷, 의의 옷의 상징이었습니다. 빛의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사랑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으며,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그들을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의 옷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 옷을 만들어 그들의 몸을 가림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빛의 옷이 그들을 가려주듯이 그들을 덮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나뭇잎 옷으로 자신을 가리려는 것이 바로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은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려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는 것은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모든 사람이 늘 해온 일입니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벌거벗게 된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이 만든 옷을 입습니다. 자신의 행위로써 자기의 죄를 가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잃어버린 순결한 두루마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함께 앉을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옷이나 세상 나라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4)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의의 옷
예복의 비유에서, 자신의 옷을 입고 도착한 그 하객이 쫓겨난 것은 불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수락했습니다. (마 22:10) 그러나 그가 온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는 결혼 예복이 필요했습니다. 임금이 마련해 준 예복, 곧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의의 옷을 입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나뭇잎 옷이 아담과 하와를 가려 줄 수 없었듯이, 우리는 우리를 가려줄 수 있는 의의 옷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락하고 훼손되어 하나님의 품성과 전혀 같지 않으므로, 사람 스스로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의 품성이 나타나 있는 거룩한 계명을 스스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 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인간의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의 훈련과 노력은 어느 정도 악한 마음과 행동을 조절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이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입니다. 혹시 교양이나 훈련이 행위나 외모적인 단정함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본연의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를 깨끗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행위와 외적인 경건함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과 그들의 관례와 유전을 따르는 일에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밭에서 나는 채소와 근채까지 일일이 따져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성경 연구와 기도 생활은 철저했으며 주위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런 규례들을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는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예복을 입기 위해 필요한 의는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의는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으며, 또 인간이 만들어낸 의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진리를 안다고 공언하고 진리의 전수자로서의 자부심과 선민의식에 빠져 있던 바리새인들은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롬 10:3)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는 열심이었으나, 정작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인간 자신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신앙 5부: 예복을 어떻게 입을 수 있습니까?(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I)
어떻게 해야 예복을 입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심판 때에 예복을 입은 사람으로 드러나며, 어떻게 하면 예복을 입은 손님으로 하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예복을 입는다는 의미와 예복을 입을 방법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으로 입는 의의 옷
앞에서 배웠듯이 예복, 흰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 곧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잃어버리고 불의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또한, 성경은 인간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롬 7:14)고, 우리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롬 7:18)며, "모든 불의가 가득한"(롬 1:29)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을 길은 단 한 가지, 의롭게 되는 것,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심판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의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의의 옷을 입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한편 또 성경은, 그 불의하게 된 인간 중의 어떤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설교에서 "아벨"을 "의인 아벨"이라고 부르셨으며, 바울도 아벨이 "의로운 자라고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라고 선언합니다. (마 23:35, 히 11:4 참조) 또 성경에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창 6:9, 7:1)는 기록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라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롯에 대하여 묘사한,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라는 언급도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부모도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호칭을 받았고(눅 1:6), 그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기별을 받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선언합니다. (롬 9:30, 롬 6:17~22 참조) 분명히 성경은 의인들로 불린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의가 없는 불의하게 된 인간들이 의인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의인"이라고 불린 이 사람들, 의로움을 입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특별한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우리보다 더 나은 기질을 타고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날마다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의로움, 곧 의의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요?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여기에 의를 얻을 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은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 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입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의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라는 말을 합니다. 그는 강조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를 얻은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우리의 의
그렇다면 불의한 인간이 어디서 의를 찾아 얻을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심판대 앞에 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에 "의"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구원을 받게 하는 의는 단 한 가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는 다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셔서 무한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고귀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본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드셨다."라고 주장하는 사단의 거짓 고소를 분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승리하는 생애, 곧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의롭고 순결한 생애를 사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연약해진 인간의 인성을 쓰시고도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사시므로,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시면서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의를 이루는 생애, 의로움을 완성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의로운 생애와 의를 죄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결코 죄는 없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사랑하시고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완전한 순종의 생애는 율법의 요구를 최고의 표준에서 충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시는 생애를 사시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확신 있게 이렇게 선언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 10:5,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사실 때에 비록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고난과 괴로움이 되었을지라도 그 쓴 잔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복종하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예수님께서 이루신 의로운 생애와 완전한 품성은,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의, 곧 인간의 의로 표현된 "더러운 옷"(사 64:6)을 가리기 위해 그분께서 주시는 결혼 예복(마 22:11), 혹은 의의 두루마기(사 61:10)로 묘사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납 받게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
우리는 모든 계명을 지키시며 사신 예수님의 순결한 삶과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란, 인간의 영광을 티끌 가운데 버리고,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연구해 봅시다.
1. 하나님의 놀라운 계약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만이 이루시고 가납하실 수 있는 "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인간이 받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놀라운 계약,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언약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 곧 예수님의 흠 없는 품성과 의를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특별한 계약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계약 관계는 예수님을 믿는 전제하에,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간에, 그리고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덧붙입니다.)
계약 1. 우리의 계정에 그분의 의를 넣어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의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받는 계약의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죄인은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회개하며, 예수님 보혈의 속죄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순종과 의를 보시고 그 죄인의 계정에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 올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 곧 우리의 불의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약입니다. 회개한 그 죄인(그렇게도 엄중한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을 거슬렸던 죄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져갑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그 죄인의 허물을 간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의 실패 대신으로 가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셔서, 그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것처럼 대하시고,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를 받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통해서이고, 바로 이 과정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과정입니다. 이제 죄인의 죄가 제거되고 의의 옷이 입혀지며, 의인이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또는 "입혀주시는 의"라고 부릅니다.
계약 2.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주시며, 그것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계약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실 때는, 반드시 그 죄인이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죄인이 회개할 때에 반드시 자신의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추한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야 의의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더러운 누더기 옷 위에 새 옷을 입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참된 회개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회개한다고 하며, 예전의 생활 그대로 살거나, 변화된 마음이 없이 똑같은 생활을 그대로 사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과거의 죄를 다 청산하고 죄에서 돌아서서 참된 개혁을 이루며 사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의 진정한 회개를 보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주시고, 그 의의 옷을 입혀주시며 그 죄인을 의인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도 그냥 살짝 의의 옷만 덮어씌우시고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속은 시꺼멓고 더러운데 겉에만 하얀 의의 옷을, 예복을 덮어씌우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죄인이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때는, 정말 그 사람이 의인이 되도록, 그리고 의로운 생활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도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 6부: 예복을 어떻게 입을 수 있습니까?(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II)
우리는 앞의 연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의롭게 만드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 영원히 하늘에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편에서 하실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하여 놓으신 것을 배웠습니다. 구속의 계획과 놀라운 계약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 몫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담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공언하며 믿음을 자랑하고 있는데, 왜 진정으로 의롭게 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진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행사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진정한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기독교에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는 복음, 사람이 진짜로 의롭게 되는 길을 가르치는 복음이 기독교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변질하였기 때문입니다.
1) 의를 받는 진짜 믿음?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고 그 똑같은 죄를 다시는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진짜 그 믿음을 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믿는 것,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의 창조 능력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은 창조입니다. 구속의 능력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과 똑같은 능력으로서, 인간을 구원하고 죄의 저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역사 하는 동일한 능력입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기를,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재창조입니다.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인간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태초에 땅을 창조하신 같은 능력이, 인간이 원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고,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엡 1:6)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창조의 능력 = 말씀의 능력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 33:6, 9)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또 세상을 창조하신 똑같은 능력으로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보아 주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사실을 믿고 그것에 대해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주께서 "어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 말씀 자체가 바로 벌써 "그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표현하실 때에 바로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존재하게 됩니다. 곧, 그분이 어떤 것을 지명하여 부르거나 이룰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 그것은 말씀하심과 동시에 곧바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똑같은 능력의 말씀이 지금의 우리를 매일매일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3) 말씀을 믿는 믿음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라고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창조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 4:5) 그것이 옳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실 수 없으신 분이신데 말입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사실은 악하고 불경건하지만 그냥 그 사람의 죄와 실수를 슬쩍 덮으시고, 보기 좋게 겉치레로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자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이 일에는 사람의 편에서 협력하는 일, 곧 믿음이 선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진정한 믿음을 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또 내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뜻대로 행하고 죄악을 따라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뜻에 굴복하며 나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감화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죄를 버리는 행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죄를 쉽게 버릴 수 있도록 감화시키시고 도와주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생애로 계명을 범하게 하거나 계명을 아무 효과가 없게 하는 대신에, 그 계명을, 하나님의 뜻을, 우리 마음 가운데 굳게 세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건하다 하시고,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고, 입혀주신 의(칭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일을 믿음으로 계속 행사해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생애이며, 이 칭의를 계속 유지하며 사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 또는 "나누어주시는 의"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3:3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의의 옷을 입는 실질적인 믿음
앞에서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시며 우리를 의인이라고 칭하시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입혀주신 그 의의 옷을 잃어버리지 않고, 진짜 믿음을 가지고 매일 의의 옷을 지켜나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곧 칭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합니다. 실질적인 믿음과 경험 속에서 성화는 이루어집니다. 성화를 이루며 사는 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의지를 굴복하는 믿음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으려면 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합니다. 의지를 바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우리의 의지를 주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뜻대로 하시기를 간구할 때, 주님께서는 즉시로 그 일이 가능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겸손하게 굴복할 때에,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마음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원하지 않던 하나님의 뜻을 기뻐 행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의지의 진정한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힘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힘이며, 모든 것은 이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애정을 억지로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으며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역사 하셔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모든 성향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우리의 애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되며, 우리의 생각은 그분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생각과 욕망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게 함으로써 영혼에 새로운 생애를 가져오고, 그러면 우리 속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역사 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킴으로써 하나님과 협력할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증거를 자신의 생애에서 실현해 보일 것이며, 마음의 목적과 생애의 실천 사이에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지의 지속적인 복종과 끊임없는 순종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2. 주님의 임재 속에 동행하는 믿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죄를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 매일 칭의를 유지해 나가는 성화의 길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내재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매일 매 순간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아 사랑과 자아 방종과 죄에 대한 유혹의 부정한 영향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악습을 버릴 수 있을 것이며 얼마 동안은 사단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마다 자신을 굴복시킴으로 하나님과 산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악에 정복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친숙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교통하고 동행하는 것만이 우리가 다시 죄 된 길로 빠지지 않게 되는 비결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가지는 산 포도나무에 접붙여져서 섬유질과 섬유질이, 잎과 잎이 연결되어 포도나무 줄기로 자랍니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그 가지의 생명이 됩니다. 그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습니다. 죄인이 그의 결점을 그리스도의 장점에, 그의 텅 빈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그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항구적인 능력에 연합시키며 그 안에 거할 때에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에 감응되며 우리의 인성이 신성에 감응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한 번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속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접촉이거나 또는 분리와 연결이 무상한 그런 결합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 받아들여 그분의 뜻과 역사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합니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하여 열려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을 계속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성장할 수도 없고, 풍성한 포도송이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의 성품과 행위 모두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개심의 경험은 가짜입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역사 하며, 영혼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한 우리의 고백은 무가치합니다. 왜냐하면, 참 포도나무의 생명력 있는 영양분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공급되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 있는 가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매일 함께 거하는 것은 성화를 이루며 사는 길의 첩경입니다.
3.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의 열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의 열매가 풍성하게 열립니다. 사람의 행실이 그 사람이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거기에는 생애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악을 품은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됩니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하고,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신 생애와 같은 삶을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이 비밀을 설명하였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으로써,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의, 옳은 행실이며, 이렇게 변화된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흰 예복, 깨끗한 세마포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우리도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보증을 줍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 흰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의로워지는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의로운 생애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이 비밀의 역사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때에, 우리는 심판대에 흰 예복을 입은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판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흰 예복을 입고 있습니까? 의의 옷을 입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매일 체험하고 계십니까? 흰 예복을 입어야 삽니다. 심판과 재림 때에 흰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에 우리 모두 흰 예복을 입은 사람들로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Do you know? -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을 아시나요?
성경에는 긴 기간의 예언이 여러 번 등장한다. 1260년간의 중세기의 핍박에 대한 예언, 490년간 유대인들에게 다시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신 예언, 여섯째 나팔에 나오는 391년 동안 오토만 제국이 세력을 떨칠 것에 대한 예언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훨씬 더 긴 기간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2300 주야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성경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 예언들의 초점이 작은 뿔 곧 짐승의 표의 막후 인물인 교황권이 하나님의 교회에 어떠한 지장과 어려움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활동을 미리 말해주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두 예언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주제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2300년에 대한 예언이 교황권이 진리를 땅에 던져 짓밟고 성소에 대한 이해를 훼파하여 버리는 일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음 다니엘서의 내용이 선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2300년에 대한 긴 기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은 2300년의 예언 기간이 끝나면서 이제 완전히 이 세상 종말의 때에 접어들게 되었다. 다니엘 예언 중에 또 하나의 기간 예언 1260일 예언은 1260년(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작은 뿔의 세력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시기에 대한 예언이다. 1260년의 예언은 1798년도에 끝마쳐지는데,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1798년도를 전후로 해서 교황권이 잠깐 몰락하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무신론 세력이 기치를 들기 시작하여 세계의 국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미국이 건국되어 일어났으며 이 세상 역사가 드디어 말세를 가리키고 있는 예언들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악해 질대로 악해져 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때처럼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계신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 더는 참지 아니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마지막 심판이 지나가고 있는 때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죄가 기록되어 있는 기록 책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고 계신다. 그 심판이 마쳐지면,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 각자가 행한 행위대로 보상 또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심판을 끝내시고 오늘 오신다면 아니 다음 주일에 오신다면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는가? 독자 여러분은 그때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마음을 온전히 드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