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서 오랫동안 터잡고 살아온 이른바 토속성씨로는 밀양손씨, 고흥유씨, 탐진안씨, 여산송씨, 평산신씨, 행주은씨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행주은씨는 고부면을 중심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행주은씨'라는 본관 대신에 편의상 '고부은씨'라고도 부른다. 본관이 행주(행주산성이 위치한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 일대)이기 때문에 인구의 대부분이 수도권에 거주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정읍시 고부면 지역이 가장 큰 집성촌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에 고부군에서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 역할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신분적으로 중인계급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오래된 토속 성씨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정읍에서는 행정기관을 포함하여 각계각층에 진출하여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성씨이다.
그러면 여기서 행주 은씨(幸州 殷氏)에 대한 일반적인 자료를 제시해본다.
행주 은씨의 시조 은홍열(殷洪悅)은 당(唐)나라 석학으로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의 요청에 따라 당 선종(宣宗)의 천거로 서기 850년(당 선종 5년) 동래한 8학사 은(殷)씨, 홍(洪)씨, 기(奇)씨, 길(吉)씨, 봉(奉)씨, 육(陸)씨, 방(房)씨, 위(魏)씨 중의 한 사람으로 학문과 예악을 가르치고 신라조에서 벼슬이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으며, 학식과 덕망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므로 고려조에서도 그 위덕을 기려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화시랑 보문각대제학(壁上三韓三重大匡 文化侍郞 寶文閣大提學)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정양이다. 시조가 말년에 행주에 전거하니 후손들이 행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고려 고종 때 문림랑(文林郞)을 역임한 은윤보(殷允保)를 기세조로 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행주은씨 인구는 12,241명(2000년 통계자료)으로 우리나라에서 본관으로 따진 인구중에 327위에 해당한다.
행주은씨와 관련하여 요즘 대한민국 정가에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은수미 국회의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은수미 의원(1963년생)은 최근 여당이 추진하는 테러방지법의 표결처리를 저지하기 위한 합법적 방해 연설(이른바 필리버스터)을 시도하여, 종전 최장기록이었던 10시간 15분을 깨고 10시간 18분 동안 쉬지않고 연설을 하였다. 이를 두고 여당에서는 총선을 의식한 정치적 쇼라고 폄하하였으며, 야당에서는 국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여기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향후 총선에 반영될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장시간의 필리버스터(filibuster, 스페인어로 해적선을 의미함) 기록을 경신한 은수미 의원은 그 부모 세대까지 정읍과 연고가 있는 고부은씨의 핏줄이다.
은수미 의원의 인생 역정은 20세를 전후하여 크게 달라졌다. 1963년생으로 서울 신림동에서 자라난 그녀는 해군사관 출신의 장교로 근무한 아버지 덕택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사회현실에 눈을 뜨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급기야는 제적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이른바 사노맹사건(박노해, 백태웅씨와 함께 관련됨)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며, 그 후유증으로 대수술을 받으며 생사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이후 6년 형기의 감옥생활을 마치고서 학교로 돌아와 다시 학업을 이어갔는데, 노동운동을 주제로 한 박사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받게 된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정부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 들어가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전문가답게 그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딴지일보에 실렸던 인터뷰기사를 옮겨본다.
그는 스스로 "어릴 때부터 20년 간을 신림동에서 살았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부유하게 자랐지만 내 친구들 상당수는 판자촌에서 자랐다. 인상적인 사건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놀다가 친구를 장난 삼아 밀었더니 벽을 뚫고 옆집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 벽이 뚫린다는 것 자체가 놀랐고, 우리집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또 한번은 중학교 때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집을 찾아 갔더니 흙집에서 세를 살고 있었다."라고 성장기를 회고 했다
1992년 초 당시 정부가 '반(反) 국가 단체'로 규정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활동으로 구속돼 6년 간 강릉교도소에서 복역했다. 1997년 출소한 후 대학으로 돌아가 2005년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 6월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발족하고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비정규직 등 노동문제 관련하여 자문직을 역임하여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노동정책자문위원, 2011년에는 박원순시장 희망서울 정책자문, 2012년 청년유니온 자문[ 등 활동하였다.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3번으로 영입,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첫댓글 2018년 6월에 치루어질 지방선거에 성남시장으로 출사표를 던진 이후 이 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 글도 덤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