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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되신 주님
야고보서 1:1-4
2024년3월10일 주일낮 11시
인도, 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저자임을 1:1에 밝히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고 예루살렘 공회 지도자였습니다(행 15). 신약에 네 사람이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주후 44년 순교당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저자가 아닙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918).
사도행전 12:1-3 KRV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요한의 형제 야고보, 즉 12사도 중 한 명 야고보는 헤롯에게 순교당했습니다(사도행전 12:2).
야고보서 저자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여러 형제 중 하나였습니다.
마태복음 13:55-56 KRV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에 동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처음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고난과 죽음과 부활 후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서, 예수님이 보리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게 했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습니다(요
6:1-13).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말했습니다(요 6:14).
그 뒤로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더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요 6:26)"하셨습니다.
이어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셨습니다(요 6:29).
이어서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요 6:30)"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택함받지 않았기 때문 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는 다 예수님께 오는 것이고, 결코 버림받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요 6:37).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빵이라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요 6:41).
모여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많이 물러가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요 6:66).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 가려느냐" 물었습니다(요 6:6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니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였습니다(요 :70-71).
이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요 7: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여러가지 입니다.
첫째,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입니다(요 5:18).
셋째,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요 5:18).
넷째, 바리새인, 서기관 등 기득권 종교 지도자들을 회칠한 담, 독사의 자식 등으로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왔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하길,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요 7:2-3).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7:4)."
라 했습니다.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7:5).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답하셨습니다(요 7:6)
가족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일은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기 전 까지는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저자 예수님 동생 야고보 역시 예수님 고난과 부활 이후 까지 우리 주님 되심을 몰랐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히브리어 '야곱'(야아코브)의 헬라어 이름( 音 寫 음사)인데 '발뒤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 네 사람의 야고보가 나옵니다.
1. 예수님의 주요 세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베대와 살로메 아들(마 27:56; 막 1:19; 15:40)이고 사도 요한의 형제입니다(마 17:1; 막 3:17; 5:37; 행
12:2).
예수님과 사도 야고보는 사촌지간으로 여겨지고 베드로와 동업 어부 출신입니다(눅 5:10-11).
열두 제자 중 알패오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구분해 '큰 야고보' 혹은 '연장자 야고보'로 불립니다.
사도 야고보는 성격이 불같아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니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도록 예수님께 부탁했다 꾸지람을 들었습니다(눅
9:53-55).
그런 불같은 성격으로 형제 요한과 함께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막 3:17).
사도 야고보는 변화산(마 17:1-8)과 야이로 딸 살릴 때(막 5:37), 겟세마네 동산 기도(마 26:36-46) 때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초대 교회 기둥 역할을 했는데(행 1:13),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열두 사도 중 최초 순교자가 되었습니다(행 12:2;
주후 44년경).
2. 알패오 아들이고 요셉(요세) 형제로(마 27:56; 막 3:18)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막 15:40) 예수님 제자(마 10:3; 행 1:13) 입니다.
3. 예수님 형제(행 12:17)이고 유다(유 1:1)의 형제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을 제재하고 비판적이었습니다(막 3:21,31; 요 7:5).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고전 15:7), 주님 승천 목격 후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예루살렘 교히 중추적 지도자로(행 12:17; 15:12-21; 갈 1:19; 2:9, 12) 주님 교회를 섬겼습니다.
야고보서 저자입니다(약 1:1).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유대 어느 제사장에 의해 순교당했다 합니다(주후 62년경).
4. 가룟 유다가 아닌 사도 유다 아버지 이름도 야고보입니다(눅 6:13, 16; 행 1:13).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https://naver.me/xJNMZ8dx
예수님 동생 야고보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의 승천을 목격한 후, 교회 안에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부활 후 택함받은 이들 중 하나입니다(고전 15:7).
바울은 그를 교회 기둥이라 했습니다(갈 2:9).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시 야고보를 만났습니다(갈 1:19).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마지막 방문시 야고보를 만났습니다(사도행전 21:18).
베드로가 감옥에서 구출되었을때, 그의 친구들에게 야고보에게 말하라 했습니다(사도행전 12:17).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회 지도자였습니다(사도행전 15:13).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 형제"라고 밝힐만큼 야고보는 잘 알려졌습니다(유다서 1:1). 야고보는 주후 62년 순교당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주후 50년에서 6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당시 교회는 유대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야고보서는 유대적 성격의 글입니다.
야고보서는 교회 질서를 반영하는데, 교회 지도자들을 "장로들"(5:14)과 "교사들"(3:1)로 부릅니다.
야고보서는 이방인 출신 신자의 할례 논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교회 모임 장소를 헬라어 용어 "시나고게"로 표현합니다(2:2).
야고보서 수신자들은 1:1에 "그 나라들 중에 흩어진 열두지파들"입니다.
어떤 이는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 "열두 지파들"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수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2:1; 5:7-8).
이 그리스도인들은 스테판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 박해로 페니키아, 사이프러스, 수리아 안디옥 등에 흩어져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사도행전
8:1;11:19).
시험과 억압을 당하는 흩어진 신자들에게 격려의 내용을 담은 목회적 서신이기도 합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918).
야고보서 저자, 예수님 동생 야고보는, 1:1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 합니다.
종의 첫째 의미는, "종(servant)"은 주인에게 속하고 떠날 자유가 없는 "노예(slave)"입니다.
둘째 의미는, "종"은 자기 주인을 기쁨으로 섬기는 자입니다(로마서 1:1 각주, 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 1746).
"각 나라들에 흩어진 열두 지파들"은 스테판 집사 순교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 박해로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지중해 연안 각 나라들로 흩어져
사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말입니다(1:1).
"내 형제들이여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길 바랍니다(1:2)."
야고보서는 "형제들"이라는 단어를 15회 사용합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책망할 말이 많지만, 형제 사랑으로 꾸짖습니다(niv study bible, zondervan, 2002,1920).
시험, 어려움을 만나면 평안, 안정, 안락함 등을 잃게 되기 쉽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해도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은 주권적 주님과 변함없는, 빼앗기지 않는 관계, 교제 속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빌
3:1; Macarthur study bible, Crossway, 2010, 1778).
편안할 때, 평상시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무엇인가 어려움에 처할 때, 어떤 이해관계가 걸릴 때 그 사람의 생각, 성품, 태도, 믿음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시험과 어려움, 고생스러운 일을 겪으면서 믿음이 성숙해지고 단단해집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3)."
시험이나 어려움 당할 때 기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믿음과 인내를 훈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2-3절의 시험은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험이나 어려움은 교회 바깥에서 오는 경우가 있고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ㅂ
고린도후서 12:7-10에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너무 커서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님이 자기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12:7).
바울은 삼층천의 계시를 경험했습니다(고후 12:2).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빼 주시도록 세 번 주께 기도했습니다(12:8).
그러나 주님 응답은 바울에게 주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몸에 가시가 있는 상태로, 약한 상태로 있을 때, 주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12:9).
바울 몸의 가시가 무엇일까요?
답은 "모른다"입니다.
몸의 가시는 영적인 것, 육적인 것,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에, 불면증, 성적 욕망, 육적 욕망 등이 있습니다.
혹자는 바울의 가시를, 바울과 그의 사역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라 합니다.
칼빈과 루터는 바울의 영적 유혹이라 합니다(naver blog/joy).
"영적 유혹"이라는 표현은 이상합니다.
영적인데 유혹을 받는다?
물론 말씀 교역자는 신유 은사, 투시 은사 등의 욕심이나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블로거 joy에 의하면, '육체'라는 말과 '치다'는 말로 보아서 바울의 육체적 질병 혹은 결함으로 봅니다.
욥기 2:5에 사탄이 욥 몸에 질병, 즉 피부병을 일으킵니다.
이는 하나님 허용에 의한 것입니다.
필자도 육체적 질병으로 생각합니다.
갈 4:13-15에 바울은 육체 약함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눈이라도 빼주고자 할만큼 그를 사랑했습니다.
갈 6:11은 바울이 큰 글자로 편지를 씁니다.
또 다른 추론은 바울이 밤빌리아에서 말라리아에 걸렸습니다.
머리에 열나고 눈이 쑤시고 잘 안보였을 것입니다.
혹은 고후 10:10에 "그들 말이 그의 편지는 무게와 힘이 있으되, 그가 말할때 약하고 시원치 않다"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고후 11:6)라 합니다(참고 naver blog/joy).
고후 1:8-9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으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고 살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즉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라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람은 먹고 살만 하고, 등이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께 대한 갈급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 능욕, 궁핍, 핍박, 곤란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이 약할 그 때가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육체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으나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신자가 연약한 중에 있을 때 그리스도 능력 안에 머물게 됩니다(고후 12:9).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4).
"온전하다(텔레이온)"는 말은 죄없는 상태가 아니라 영적 성숙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소통과 더 큰 신뢰를 갖게 합니다.
안정되고 경건하고 의로운 성품으로 변화되게 됩니다(MacArthur study bible, 1876).
죽는 날까지 근심, 염려가 여러분과 제 삶에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연약함 중에, 어려움 속에 더욱 하나님 의지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과 자녀들, 자손들 삶이 되길 주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