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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문하신 모든분 행복하세요~♬ 원문보기 글쓴이: joolychoi
지역마다 다른 도량형기를 국가표준으로 규정한
'도량형법'이 대한제국 법률1호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도(度)’란 자로 길이를 재는 것을 의미하며, ‘양(量)’은 되로
부피를 재는 행위, ‘형(衡)’은 저울을 이용해 무게를 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의 각종 생활에 큰 영향을 주며 기준이 없을 경우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한다.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기가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성립(1897년)된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8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했다.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만큼 이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도량형기들은 도량형 제도의 변천을
실물(유물)로 한 눈에 보여주는 것들로 이 모두가 당시에 ‘국가의 표준 도량형
용기’로 또는 ‘도량형기 단속 표준기’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다.
◆ 국내 최초 자장면의 발원지 ‘공화춘’
인천시 중구 선린동 38번지에 소재한 공화춘은 1930년을 전후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 타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 평인방을 사용해 창들이 사각형
으로 만들어진 점, 경사 지붕을 가리기 위해 외벽상부에 파라펫을 설치해 평
슬래브 건물처럼 보이게 한 점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건물이 보존대상이 되어 수리를 하게 되면 상량문 등을 찾아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인천남부 종합학술조사 314쪽~315쪽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발간자료).
중국에는 없는 중국음식 자장면을 팔기 시작한 공화춘
자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밝혀줄만한 관련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화교들이 '청요리' 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
(중국 된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 을 만들어 팔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이 1905년 개업한
공화춘이라는 것.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고 부근에
공화춘이란 신축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곳에서 자장면이 성황리에 팔리고 있다.
구 공화춘 건물은 얼마전 등록문화재 246호로 등록됐다.
인천 중구청은 현재 화교 두명이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을 사들여 자장면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 인천 앞바다 내항ㆍ외항 구분하는 분기점 ‘팔미도 등대’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는 인천시 중구
무의동 374번지에 소재한 팔미도에 있는 등대다. 팔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바위섬이다.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1백여 개의 무의도 가운데
인천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등대는 이 섬 해발 71m 정상에 하얀 몸매로
서 있다.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 그 빌미는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일본과
서구 열강 제국들이 인천항을 원활하게 이용하기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 인천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제40호<그림=국정브리핑 블러그
'시나브로' 밝은 세상 blog.korea.kr/achang>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면서부터 비롯됐다.
등대가 들어서기 전엔 물론 갈매기들만이 지키고 있던 작은 섬에 불과했다.
당시 인천항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해안선이 복잡해
입출항 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프랑스 표지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착공 1년 1개월 만에 등대를 설치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이 등대를
러일전쟁시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이 등대는 내항과 외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 섬의 면적은 0.17㎢로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세워져 있는
등대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등대의 높이는 7.9m. 일본인들이 세웠을 당시
90촉광짜리 석유등으로 등대를 밝혔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이 이 등대를 만든
궁극적인 이유는 선박들의 안전운행을 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용 가치가
있는 인천항을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는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리는 역할이
필요했던 것. 팔미도 등대가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교통부에서
인수하고 9년 후 렌즈의 내경이 300mm, 초점거리 150mm인 백열등이 자가발전
시설로 설치해 9천 촉광의 밝기를 보였다. 또 처음으로 안개 신호기를 설치함
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된 등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후 1963년 이 등대에 무선표시국을 설치했고, 1967년에는 무선전화와 등명기
를 백열등에서 수은등으로 교체 하는 여러 차례에 걸려 등대의 현대화를 위해
시설개조를 진행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처음에는 단순히 방향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항로표시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시설물이나
기기를 관리하는 기능까지 맡고 있다. 또한 기상 관측과 연안지역의 해양
관측까지 해 여객선은 물론 화물선, 어선 등의 입출항에 없어서는 안 되는
등대가 된 것이다. 이 등대는 인천상륙작전 수행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등대수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석유램프를 켜놓은 채 등명기를 손으로 돌려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상륙에 도움을 준 것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희망가’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너무나 유명한 이 대중가요는 실은 외국곡. 단지
우리의 노래로 알고 있는 것은 그 곡과 가사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바뀌어
불렸기 때문이다. 흔히 대중가요로는 1925년 발매된 ‘조선 소리판’에 실려 있는
도월색의 '시들은 방초', 김산월의 '장한몽', 그리고 1926년에 윤심덕이 불러 크게
히트시킨 '사의 찬미' 등이 있다. 그러나 '희망가'는 이보다 수년 전부터 대중 속에
급속히 퍼졌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3ㆍ1만세운동의 물결이 지난간 뒤인 1923년
무렵. 당시 대중의 마음은 허탈감과 죄절감 그 자체였다. 민족의 염원은 수포로
돌아갔고,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겉과 속을 달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 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노래를 '희망가'라고 했다. 가사가 한국어로 되어 있으니까 그 작사자와 작곡자가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지은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널리 불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 '섬진강 댐'
<사진 = 한국수자원공사 섬진강댐관리단>
** 이것이 "우리나 라 현존1호"를 찾아라.계속[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