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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전통문화라는 인문학을 과학으로 풀다 1.2[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40 14.06.03 16: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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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과학으로 풀다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1-1>

 

과학이 있는 한국 전통마을

 

배산임수의 전형 예담 남사마을. 이호선 작. 박찬종 제공.

 

 

마을은 한자로 촌락(村落), 부락(部落), 취락(聚落) 등으로 쓴다. 일반적으로 ‘외부로부터 은폐되고 자연 울타리인 골(谷)을 테두리로 하며, 같은 물을 사용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한 행정적 단위 공간’을 말한다.

선조들은 삶과 문화가 자연이라는 공간에 배어든 토속적 문화 경관(景觀)의 표상을 마을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과학이 더해져 현대인들이 ‘전통마을’이라 부르는 단위가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전통마을은 흔했다. 1930년대 일본인 선생영조(善生永助)는 한반도 전국에 약 1만5000개의 집성촌(씨족마을)이 있다고 적었다. 집성촌이란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씨족 사회다. 지금은 보기 드문 마을이지만 교통이 원활치 않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전통마을이 지금까지 보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이긴 하다. ‘마을’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최소한 30~100여 호가 모여사는 마을이 길, 외부 공간, 마을 조경을 개발이라는 명분에도 훼손없이 보존되려면 개인이나 가족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현재 정부에서는 우리 것을 찾자는 일환으로 과거의 전통마을 특성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을 ‘민속마을’, ‘명승’ 또는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하여 이를 보존하고 알리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과학유산답사는 이들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 그들이 갖고 있는 본질을 알아보고자 한다.

몇 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살아온 터전을 몇 마디 문장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역사가 길수록 전통마을이 갖고 있는 무형의 무엇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한국 전통마을을 방문한다면 무엇을 보고 또 어떻게 보아야할까. 가장 효율적으로 답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한필원 교수는 우리의 전통마을을 ‘사상?문화?사회?환경’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명제로 답사하려는 마을을 정리한다면 나름대로 한국 전통마을의 실체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명제들은 과학이라는 주제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전통마을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잣대를 동원하면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잣대를 어디에 대, 이해해야 할까. 비교적 간단하게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마을이 자랑하는 중요 지정 문화재를 기본으로 답사하는 것이다. 중요 지정 문화재는 그 자체가 공인기관에서 중요성을 인지하고 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물과 유산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들만 집중적으로 다룰 경우 딱딱하고 다소 지루한 건축과 역사 논리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이들을 배제한다면 전통마을 자체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과학유산답사기」에서는 건축물과 기념물 등을 토대로 설명하지만 이들에 대한 전문적인 내역은 배제하고 과학이 있는 우리의 전통마을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보는데 집중할까 한다.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만큼 전통이 갖고 있는 멋이야말로 세상을 새롭게 보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 복합적 기능의 전통마을

수많은 전통마을이 장구한 역사를 뒤로 사라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남아있는 마을에는 남다르게 깃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어떤 정신 하나가 마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소의 힌트는 있기 마련이다. 전통마을에는 남다른 위계성 즉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전통마을은 대체로 조선 시대에 들어와 조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보는 모습은 그 당시의 틀을 바탕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는 마을의 기초가 성리학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학의 원리는 ‘질서’다. 큰 틀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다. 전통마을일수록 이들 위계가 마을 안에 철저히 배어 있다. 양반들은 반가(班家), 서민주택인 민가(民家)에서 살았는데 조선시대에 이에 반하는 마을이 있다면 이는 전통마을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위계는 가옥들의 배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위계가 높은 것일수록 마을 공간의 후면에 위치한다. 특히 씨족마을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집은 종가(宗家)로 답사 초보자라도 종가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전통마을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목적지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번에 설명하는 전통마을 중에서는 씨족마을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이를 씨족마을과는 다른 각도에서 풀어간다.

전통마을은 한국인의 기본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교과서다. 그것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 처한 현실 조건을 충실하게 따르려고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전통마을 구성에는 나름대로 교과서가 있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경국대전(經國大典)』,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이다.

 

 

왼쪽부터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경국대전(經國大典)』,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그러나 한국인의 장점은 이들 규례가 현실과 동떨어질 경우 이를 과감히 버리고 현실에 맞도록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자가례』에는 사당을 안채 동쪽에 두라고 했지만 한개마을의 경우 사당을 안채 서쪽에 두었다. 이런 집을 지은 당사자가 정통 성리학자인 것을 생각하면 조상들이 얼마나 현실을 민감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상들이 당시 사회질서였던 성리학이 이야기하는 원칙에 과감하게 손댔던 것은 과학을 기반으로 한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공간은 인간에게 보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야 주어야 하는데 이런 원천적인 문제는 기본적으로 과학이 해결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통마을을 답사하면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수시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묘미다. 즉 마을을 잘 분석한다면 그 마을의 문화가 형성된 배경뿐만 아니라 마을을 조성한 사람들의 과학적 속성까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은 자연환경과 인공 환경이 잘 결합될수록 중요성이 배가된다. 이는 마을 나름대로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건이다. 마을의 입지를 선정하고 나서부터의 일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인공 요소를 가미하는 일인데 이런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있게 마련이다.

전통마을에서는 거주지 자체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선정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마을이 풍수를 감안해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은 감추고 물은 얻는다는 뜻) 형을 택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음으로 비교적 서늘하다. 주거에 마루(대청)가 있다는 자체가 여름의 시원함을 고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의 경우 이와 반대의 역할을 하므로 거주 공간 자체를 자원의 소모를 최소화하거 거주지 자체가 순화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사전에 계획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마을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장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확인하고 자신을 수련하면서 의례(儀禮)를 행하는 장소다. 유교 사회와 같이 위계가 분명한 사회에서 성별?연령별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상적인 만남을 갖는 것이 기본이다. 함께 살아가는 마을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남자들이 만나는 소통의 장소를 다르게 하였다.

현대의 노인회관에서 남녀를 분리하여 노인정을 지었다가는 난리를 치겠지만 전통마을일수록 이런 위계가 확연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개의 마을을 보면 모든 것이 한 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런 개념의 차이가 어떻게 우리 선조의 삶을 지배했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유산답사의 기쁨이다.

● 폐쇄적인 전통마을

씨족마을이 한국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봉건사회를 의미하는 유럽의 장원제도의 경우도 근본적으로 씨족사회를 의미한다. 엄밀하게 말하여 씨족사회란 매우 폐쇄적인 혈연집단을 의미한다.

전통마을이 세워지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온전히 새로운 장소에 입향조(入鄕祖)가 들어가 개척하거나 이미 마을이 조성된 곳에 새로운 일파가 들어와 점차 자기들의 주거지로 변모시키기도 한다.

어떤 방법이든 대부분의 씨족 마을의 중심이 되는 집은 종가다. 종가란 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입향조’가 들어와 살던 집으로 장손이 대를 이어 대대로 거주하면서 문중의 구심점이 된다. 여기서 문중이란 부계의 종족이 조상의 제사를 같이 모시고 분묘를 보존하며 종원(宗員)의 친목과 복지를 위해 조직된 집단으로 5대조 이상의 조상에 대한 시제(時祭)를 같이 모시는 경우를 일컫는다.

종가는 전통 사회에서 마을의 정신적 상징이자 중심이며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한다. 종가에서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분가하여 점차 종가의 아래쪽으로 집을 지어나가면서 씨족마을이 형성된다. 이때 후손 중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관직이 낮아도 학문이 높은 선조가 등장하면 씨족마을은 남다르게 공고해진다.

본래 조선 전기까지는 균분 상속이라 하여 재산 상속은 아들과 딸, 맏아들과 막내 간에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제사 또한 윤회 봉사라 하여 자녀들이 돌아가며 모셨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재산상속 제도가 자손 균분에서 장자 상속으로 바뀐다. 이와 같이 상속 제도가 바뀌는 이유는 수많은 전란을 통해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제사가 등한시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곡절이 있더라도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주인공을 찾았는데 이에는 장자가 적격이었다. 그에게 재산을 몰아준다면 적어도 자신을 위한 제사는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상속 재산이 장자에게 집중적으로 쏠리게 되자 종가는 대부분 마을에서 가장 큰 재산가이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명문가가 된다. 명문가를 토대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종가를 둘러 싼 문중은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유성을 유지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을의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마을은 과거의 유습을 현재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다.

●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는 씨족마을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씨족마을에서 출생하고 마을 서당에서 학습하며 그중 일부는 과거 등을 통해 중앙관직에 진출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낙향하여 마을에 은거하며 제자를 기른다. 죽어서는 대개 마을 뒤쪽 선산에 묻히고 영혼은 사당에 모셔진다. 그가 훌륭한 학자이거나 유명한 정치가가 되면 마을이나 인근 서원에 모셔져 사후까지 문중의 홍보사절 역할을 한다.

자신이 태어나서 죽는 곳 자체가 한 장소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어려서 중앙 정치무대로 진입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라면 마을을 생각하는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마을을 무시할 수 없으며, 이 생각이 전통마을 속에 녹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공통심리다. 영화나 소설 등 작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자기 집으로 가기 싶다는 말을 자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과거 전통마을에서는 이런 생각이 더욱 깊었음을 물론이다. 이들 내역 역시 더불어 찾아보는 것이 과학유산 답사의 기본이다.

여기에 소개되는 전통마을 모두 집성촌 즉 씨족마을은 아니다. 마을이 생기는 연유가 반드시 양반들이 포함된 반가를 위주로 형성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씨족마을의 형성 및 이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는 것보다 전통마을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한국의 전통마을이 다변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전통문화라는 인문학을 과학으로 풀다

 

[이종호 박사의 과학유산답사기 제3부]

<1-2> 합리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풍수지리

 

 

대한민국의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진 세종대왕릉의 모습.

 

 

● 풍수지리가 마을의 기본

전통마을을 설명하면서 풍수지리를 건너 뛸 수는 없다. 한국의 마을이 탄생될 때 가장 먼저 고려된 부분이 풍수지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배산임수(背山臨水)다.

배산임수란 대체로 전면을 제외한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쪽으로 물이 있는 지형을 의미하므로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좋은 입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라고 하면 자손이 조상의 덕을 보려고 묏자리나 찾는 미신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그래서 현대와는 맞지 않는 구닥다리 관습이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실제로 풍수론에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인생을 풍수와 연관시킨다는 것 자체가 석연한 해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풍수론 전체를 버리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풍수론은 우리 조상들이 그동안 의지하고 살았던 음양과 오행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설명하는 자연관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음양오행론은 철학의 개념을 뛰어 넘어 의학, 수학, 풍수지리,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이론을 제공했고 그동안의 동양인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살아갈 때 사는 집인 양택(陽宅)과 죽은 뒤 묻히는 묘지, 음택(陰宅)으로 나뉘는데 여기에서는 양택만 설명한다.

양택을 위한 풍수지리는 결국 살아가는 데 있어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추구한다. 소위 명당이라고 부르는 곳은 이상적인 땅이다. 명당은 기본적으로 지맥(地脈) 중에서 기(氣)와 정(精)이 가장 잘 모인 곳인 혈(穴)의 바로 앞자리로 인식했다. 주택으로 본다면 혈에 본채를 놓고 명당에 안마당을 만들었다.

기와 혈을 이용해 명당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자연관을 기초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연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생기론(生氣論)이다. 한의학에서 인간의 몸에는 ‘기’라는 생명의 기운이 경락을 따라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약 360개에 달하는 혈 자리가 있다고 한다. 혈이란 기운이 모이는 중요한 곳으로 경락을 ‘기차 길’에 비유한다면 혈은 ‘역’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질병에 걸렸을 때 침이나 뜸을 놓는데 그 자리가 바로 혈이다. 한의학에서 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인데 집을 지을 때도 이런 혈을 중요시했다는 것은 건물도 인간처럼 숨을 쉰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명당의 개념도.

 

 

전통마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배산임수(背山臨水)다. 배산임수의 기본은 사신사(四神砂)다.

사신사는 산의 좌우, 전후 사면에 있는 산을 뜻한다.

주산을 등지고 왼쪽에 있는 산을 청룡, 우측에 있는 산이 백호, 앞에 있는 산을 주작, 그리고 뒤에 있는 산을 현무라고 하여 일반적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라고 말한다.

조선이 탄생하자마자 새 수도를 서울로 정하고 왕궁을 건설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이 풍수이다. 경복궁의 주산은 북(北) 현무인 ‘백악산’, 남(南) 주작은 관악산, 좌청룡은 대학로 뒷산인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이 맡았고 물은 경복궁 앞을 흐르는 한강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기초로 선정된 서울이므로 현재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과 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수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마을들의 대부분이 이런 개념을 기본으로 선정했다.

● 주변 환경과 관계를 찾고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특징 중의 하나는 거주 공간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중시하며 주변 환경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풍수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이 살 공간과 그 주변 경관에 대해 풍수적 해석을 공유했다. 예를 들면 낙안읍성, 하회마을, 왕곡마을, 개평마을, 남사예담촌, 제주도 성읍읍성마을 등을 비롯해 평양, 청주, 무주, 공주 안동 등이 키, 돛, 닻, 노 등 배로서 모든 도구를 갖춘 ‘행주형(行舟形)’라고 생각했다. 이런 행주형은 인재를 가득 싣고 장차 출발하려고 묶어 둔 것으로 인식하여 이곳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부하게 모집된다고 믿었다.

반면 우물을 파는 것을 막는 금기도 있었다. 마을이 물에 떠 있는 배 형국이라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기본 질서 즉 마을에 대한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함께 살아가는 묘수를 함께 지키는 것이다.

또한 돌탑을 세우지 않았다. 돌탑이 무거우므로 배가 가라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풍수의 특징은 이런 생각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삼지 않고 보다 유연한 생각으로 변모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운문사의 경우 터전을 행주형의 배에 비유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웅보전 앞의 좌우에 삼층석탑을 쌍탑으로 배치했다. 배는 파도에 의해 언제든지 침몰할 수 있으므로 배를 안정시키기 위해 오히려 무거운 돌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풍수 자체가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무작정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맞는 형태로 변형시킨 것이다. 한국의 풍수가 유달리 장수할 수 있는 이유다.

 

 

하회마을은 행주형 지형이므로 우물을 파지 않지만(오른쪽) 운문사는 오히려 쌍탑을 세웠다(왼쪽).

 

한편 우리나라의 풍수지리는 중국의 풍수와 달리 비보(裨補) 풍수의 개념이 발달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보란 부족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보완한다는 뜻으로 풍수개념에 따라 인공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통마을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환경을 보완하는 방법이 발견된다. 안산(案山)이 취약한 경우 동수(洞蓚)라 불리는 수목을 마을 전면에 조성하기도 하며 겨울철의 주풍 방향에 동수를 조성하여 방풍효과를 얻기도 했다. 이는 풍수지리의 개념을 차용하여 거주자들이 자연을 순화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풍수 개념과 관계없이 겨울철에 바람이 많이 분다면 마을의 거주환경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한국 전통마을이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속가능한 마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 지속가능한 장소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한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제시했다. 그는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를 꼽았다. 즉 이들을 조화롭게 구비하면 지속 가능한 거주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란 땅의 흐름을 말하는데 기본적으로 풍수지리적 입지 조건을 말하며 생리란 이로움을 얻는 것이므로 경제적 지속성을 말한다. 즉 재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농업과 상업에 유리한 곳을 택하라는 것이다. 인심이란 사회생활의 측면 곧 사회적 지속성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산수는 환경 심리적 측면으로 집근처에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있어야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중환은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음을 볼 때 모든 곳이 입맛에 맞는 지속 가능한 거주지를 찾는 것이 간단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거주의 기본으로 기름진 땅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의 물품을 상호 교환할 수 있는 경제적 측면과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가까운 곳에 마음 내키는 대로 감상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확장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경제적인 측면을 먼저 고려한 후 여가를 생각하라고 설명했다. 이중환의 생각은 간단하다. 경제 활동이 기본이므로 경제적 조건을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마을을 찾아보면 이런 사상이 마을의 기저부터 깊이 스며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음미해보면 과학을 기초로 하여 마을을 조성했다는 조상들의 슬기를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전통마을을 간다

어떤 마을이든 마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입향조든 아니든 여러 가지 면을 고려하여 마을이 세워질 곳을 사전에 택한 후 자신들이 거주할 수 있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한국인의 터전에서 한국인이 창안한 건물을 한옥이라 한다. 한옥은 큰 틀에서 사대부들이 살던 기와집과 평민들이 살던 초가집으로 나뉜다. 한옥의 기본 지식을 토대로 답사하는 것이 보다 전통마을에 대해 이해가 쉽지만 이들 정보에 대해서는 답사기 중간 필요할 때 부연하여 설명한다.

「과학유산답사기」의 주제로 한국의 전통마을을 정했지만 어느 곳부터 답사하는가를 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이곳에서는 우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일곱 마을(외암마을, 낙안읍성, 왕곡마을, 한개마을, 하회마을, 양동마을, 제주성읍마을)을 우선으로 결정하고 그동안 여러 각도에서 평가를 받은 아래 전통마을로 압축했다. 그러나 이들 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그리고 제주성읍마을은 이곳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주성읍마을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을 중점적으로 답사할 때 설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1. 충남 아산군 송암면 외암리 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 236호)
2.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
3. 전남 보성군 득량면(得粮面) 오봉리(五峰里) 강골마을
4.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낙안읍성마을(사적 302호)
5. 경남 남해군 홍현리 가천 다랭이마을
6.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예담촌.
7. 경남 함안군 지곡면 개평리 개평마을
8.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명승 53호)
9.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중요민속자료 255호)
10.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11.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산운마을
12.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달실마을
13. 강원도 강릉 선교장
14.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1리 왕곡 전통마을(중요민속자료 236호)


마을 이름을 보면 잘 알려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 생소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잘 안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마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 마을에 대한 기본 정보가 많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답사에 의욕이 생긴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 답사기가 기초가 되어 보다 많은 우리 전통마을에 대한 정보들이 축적되기를 바란다.

물론 이곳에서 설명하지 못한 전통마을이 많이 있지만 위 내역으로 답사를 한정시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이번에 다루지 못한 곳은 추후에 다시 기회를 만들어 답사에 도전할 예정이다. 한편 답사지로 향할 때 내비게이션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 찾아가는 길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위와 같이 답사일정을 잡은 것은 필자가 자동차로 서울에서 출발한 뒤 전체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정을 고수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답사의 성격 상 마을의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므로 한 장소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도 어려움 중의 하나이다.

모든 답사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일정표를 보고 머리를 절래 흔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답사 여정에는 항상 자유로움이 있으므로 각자 편리함에 따라 방문지를 선택하기 바란다. 답사 일정이 만만치 않지만 남다른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의 것을 찾아본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불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과학저술가

참고문헌 :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1)』, 김봉렬, 돌베개, 2006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한필원, 북로드, 2007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한필원, 휴머니스트, 2011
「풍수지리의 주거입지를 적용한 현대적 이해에 관한 연구」, 윤선영,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9
「풍수」, 최준식, 네이버캐스트, 201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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