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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9 - 이자성이 자금성 점령후 만주족은 베이징 함락하고 청나라를 세우다!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환관의 횡포와 부정부패, 빈부격차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던 1592년 영하
에서 몽골족 발배의 난이 일어나 진압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7년간 25만을 파병했는데, 원거리라
보급에 천문학적인 전비가 들어간데다가.... 조선에 대군을 파견한 탓에 운남지방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난을 제때 진압하지 못했고 또 여진족이 흥기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재정적자는 눈덩이 처럼 불어납니다.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1640년에는 진저우를 공격해 승리하고, 1641년 송산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고는
명나라 홍승주가 투항함으로써 영원성을 제외한 랴오둥 반도 전체를 장악하니, 명군은 패퇴해
최후의 관문인 산해관에 틀어박히자 1643년 까지 6차례 원정을 벌여 직예성, 산동성 등 화북을 약탈합니다.
화북지방은 수년간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사 직전이었는데, 명청교체기에 도래한 소빙하기 때문에 식량위기가
일어났고 전국적인 기근이 터졌지만, 당장 나라가 망할판인 명은 군비 지출을 위해 세금을 올리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1627년 섬서성 징성현에서 민란을 일으켰으니 전국적인 민란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반란군 수장 왕가윤이 이끈 군대가 섬서- 산서 경계에서 전투를 벌였고, 왕가윤은 1630년
죽었으나 그 휘하 왕자용, 고영상, 이자성, 장헌충 등이 연달아 농민반란을
이어갔으니.... 1636년에는 고영상이 죽고 이자성이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합니다.
1641년 이자성은 뤄양을 점령해 주상순을 죽인 뒤 11월에는 시안까지 진출했는데, 이자성이 관중에서
총독 손전정의 군대를 궤멸시킴으로써 북중국의 명 주력은 아예 소멸해버렸으며
남쪽에서는 후난성에서 발호한 장헌충은 쓰촨성까지 점령한뒤 '대서국' 을 건국하고 황제를 자칭합니다.
청나라는 1642년 송산전투에서 홍승주의 명나라 대군 140,000명을 전멸시키고 산해관 외성들을 함락했으며
만리장성 동북을 석권했으니 청나라는 산해관 이북 명나라 영토를 빼앗는데 성공해 산해관만 남았으니
1642년 11월 홍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 (奉命大將軍) 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시점까지 청나라가 대부분 승전을 거두긴 했지만 결코 명나라를 멸망 및 점령시킬수 있을 정도의 국력은
아니었는데.... 군사력이 우월하지만 청나라 군사 기반은 대부분 기병이었고 오래전부터 서양과 교류를
하며 화기를 발전시켰던 명나라와 달리 총과 대포등 화기는 부실했기에 공성전에는 상대적으로 취약 했습니다.
청나라가 압도적인 군사의 양과 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에서 고배를 들이켰던 것도 이런 이유였는
데..... 또한 인구 수로만 보자면 청나라가 명나라 보다 압도적으로 적었기에 군사적으로
점령해도 내부적으로 민심을 완전히 가라앉히지도 못했지만 이런 불안요소는 시간이 갈수록 개선이 됩니다.
홍타이지의 청군은 연전연승을 거둬 명나라는 국토가 휩쓸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지라.... 이제
중원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중에 청 태종은 1643년 9월 하순에 51세에 죽으니 9남
아이신기오로 푸린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이 뒤를 이으니 세조 장황제 (世祖 章皇帝) 입니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못이룬 중국 대륙의 정복은 이제 6살에 불과한 아이신기오로 푸린 (순치제) 의 섭정을 맡은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호쇼이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愛新覺羅 多爾袞) 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3대 황제 순치제 복림 (福臨) 은 청 태종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생모는 효장문황후 (孝莊文皇后)
박이제길특씨 (博爾濟吉特氏) 로 몽골 과이심부(科爾沁部) 의 패륵 포화(布和) 의 딸이니 후금과
과이심부의 정치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황태극에게 시집와서 측복진(側福晋, 측실부인) 이 되었는데,
1636년 황태극이 성경 (盛京) 에서 황제를 칭한 이후 그녀를 영복궁 (永福宮) 장비 (莊妃) 로 책봉합니다.
숭덕 8년(1643) 8월 청 태종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향년 52세를 일기로 붕어했으니,
당시 박이제길특씨는 황후가 아니었고 청 태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그녀가 낳은 복림이 겨우 6세에 불과했으므로 아들의 황위 계승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걸의 풍모가 있는 야심가였으니.... 남편이 큰일을 앞두고 주저할 때면
자기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는 당찬 여자였는데, 완강하게 투항을 거부하던 명나라
장수 홍승주에게 미인계로 인삼탕을 먹여..... 항복을 받아낸게 바로 그녀였디고 합니다.
청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황실과 조정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니 과연 누가 황위를 계승할 것인가?
권력 투쟁의 피비린내 나는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으니 황위 계승의 영순위는 청 태종의
큰아들 숙친왕 호격 (豪格) 이었으니 35세로 부친을 따라다니면서 전공을 세웠고 추종 세력도 막강했습니다.
당시 황실의 최고 어른은 청 태종의 둘째 형 예친왕 대선이었으니 “황제의 장자(長子) 가 대통을 이어야 한다.” 고
생각한지라 그의 말 한마디에 후계 문제가 정리되는 듯했으나, 청 태종의 이복 동생 다이곤(도르곤) 이 강하게
반발했으니 한평생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전공은 말할 것도 없고 따르는 장수들도 호격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숙부와 조카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보였으니 왕공과 대신들은 숨을 죽이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는
데... ‘과연 누구의 편에 서야 멸문의 화를 피할 수 있을까.’그런데 오배(鼇拜) 등 양황기
대신들이 칼을 차고 과감하게 나섰으니.... “선제(先帝)께서 우리들에게 하해와 같은
은총을 베풀었소. 선제의 황자(皇子)를 추대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서 지하에 계신 선제를 모시겠소.”
마침내 절묘한 타협이 이루어졌으니 황제의 아들을 후계자로 추대하되 세력이 막강한 호격 대신에 아직 6세
어린 복림을 황제로 옹립하여 ‘완충지대’ 로 삼고 권력을 나누기로 합의한 것으로 호격의 세력을 등에
업은 누르하치의 조카 제이합랑 (濟爾哈朗) 과 형제들의 지지를 받은 다이곤이 섭정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면에는 박이제길특씨의 지략이 있었는데, 이미 늙은 대선은 황위에 욕심이 없었으므로 그를 설득했습니다.
만약 호격이‘대권’을 쟁취하면 다이곤과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나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질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아들을 추대해야만 호격과 다이곤의 싸움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며, 또 야사
에서는 박이제길특씨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이곤의 첩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만주족의 이른바 ‘형사취수 (兄死娶嫂)’ 의 전통에 따르면 그럴듯하지만 근거가 없는 얘기 입니다.
다이곤은 대신들이 황자만이 황위 계승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한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에게
위협적인 장자 호격만 아니라면 다른 황자의 계승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며 더구나 여섯살 복림이
황제로 등극하면 얼마든지 꼭두각시로 부리면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호격은
지략이 부족했으니 장남임에도 숙부 다이곤의 모략에 말려들어 결국 순치 5년(1648) 에 옥사 합니다.
숭덕 8년(1643) 8월 26일 복림은 성경의 독공전(篤恭殿)에서 황제로 등극하고 다음 해부터
연호를 순치(順治) 로 정했는데, 6세에 불과했지만 만주족의 상무정신을 이어받아
호전적이고 승부욕이 강했으니 1642년에 청 태종이 그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
복림이 쏜 화살이 사슴에 명중했으니...... 겨우 5세 (만 4세) 나이에 사슴을 잡았을 정도라?
명나라는 수십년간 암군이 연이어 재위에 오른데다가 대기근과 자연재해마저 겹쳐 내외부
의 우환에 시달리고 있었고 거기에 청군의 약탈까지 겹치며 국력이 줄어들었으니
그에 비해 청나라는 적극적으로 부패했거나 포로로 잡힌 명 관료들을 끌어
들이며 명나라의 기술력과 문화, 병졸들을 흡수하면서 명나라와의 간극을 좁혀나갑니다.
명나라가 암군들과 천재(天災)의 연발로 휘청거릴때도 장거정등의 명관료들이 필사적으로
개혁을 이끌어나가며 명나라의 기틀을 유지시키고 있었으나 이미 몇명의 관료들로
상황을 역전시키기엔 명나라는 썩을대로 썩은지 오래였으니..... 쌀값은 재해 전에
비해 7배나 올랐으며 이 가격이 7년 내내 큰 차이 없이 유지되는등 경제적으로 무너집니다.
황제들의 폭정으로 황실 재정도 파탄나 실업자와 반란이 속출했고 또 여기에 동림당 정권의
경제 대실패, 라틴아메리카 광산으로 부터 뱃길이 막혀 은 유입이 중단되는
악재까지 겹치니.... 명나라 역사를 통틀어 극후반부에 순식간에 국력이 반토막이 납니다.
그래도 명나라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신형 화기가 개발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철심동체 주조법
과 니형 주조법, 실랍법을 이용해 무게와 비용을 줄이고 내구도가 향상되어 더 많이 쏠수 있게
된 정료 대장군으로 철심동체 주조법의 원리는 남북 전쟁 때 미군 보다도 200년이 빠른 것이었습니다.
명군과 후금군의 전투는 총병인 명군을 상대로 후금군은 총의 최대 사정거리에서 깔짝깔짝 거리다가
기회가 생기면 기동력을 이용해서 측면 공격하거나 여차하면 돌격후 근접전을 벌였으니,
내구력을 늘린 신형 화기라는건 크게 의미가 없었으며 명군에게 도움이 되려면 후장식 소총
처럼 연사력이 크게 증가하거나 아니면 대기병 전투에 유리한 대형 총검 같은게 발명되었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이자성등 농민 반란군이 명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니 저런 신형 무기가 명군에 보급되어
전투력이 상승하기 전에 명나라가 이미 구제불능인 처지로 떨어졌고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했으니 청나라에는 “천운” 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명나라를 몰락시킨 것은 청나라가 아닌 한족 반란군인 이자성의 난이었으니
청나라와 농민 반란을 막는데 국방력을 대부분 할당했던 명나라는
이자성이 일으킨 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히 베이징을 함락당하고 맙니다.
1644년 1월 이자성은 시안(장안)에서 '대순' 을 세워 황제로 즉위했으며 3월 다퉁시, 장자커우시,
거용관을 장악하고 17일에는 베이징에까지 다다랐으니 공성 끝에 3월 18일 베이징 외성을
점령했고 오삼계가 5만 대군을 이끌고 베이징을 구원하러 오지만 도착전인 1644년 4월
25일 숭정제가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건국 276년 만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베이징을 정복한 이자성은 명나라 관리들을 학살하고 수도를 약탈하며 민심을 잃어
버렸고 산해관에 주둔한 오삼계를 회유하는 대신에 어히려 농민 병사들을 북상시키니,
오삼계는 앞뒤로 적을 맞은 형국이라 산해관 문을 열어 청나라 군대를 입관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명청 연합군은 오삼계 지휘하에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대파하니 1644년에
잔당이 시안(장안) 으로 도망가고 비어버린 베이징에 무혈입성을 하게 되는데, 같은 해 순치제는
도르곤의 제안을 받아들여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고 천지신명에게 제를 올려 중화의 천자임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는 청나라의 주장이었을 뿐, 실제로 이때까지만 해도 농민 반란군과 명나라의 옛 유신들이 남쪽
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으니.... 청나라는 일단 이자성을 먼저 처리해야 했습니다.
아이신기오로 아지거, 아이신기오로 도도에 구 명나라군 오삼계, 공유덕 등이 산시성에서 이자성을 공격했고
이자성은 도망치다가 후베이성에서 사망했는데, 이자성과 함께 농민 반란군의 양대 세력이던
장헌충 역시 쓰촨성에서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의 화살을 맞고 사망하면서 농민 반란군은 어느정도 정리됩니다.
한편 명나라의 황족들은 이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갈래갈래 나뉘어 서로 황제를 칭했으니 이를
남명 정권이라고 하는데, 무능함 때문에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치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난징에서 칭제한 홍광제 정권 이었습니다.
그러나 홍광제의 남명 조정 역시 당파 싸움과 환관의 난립으로 엉망진창이었으니 1645년 도도가 양저우를 공격
했고, 홍광제는 도망치다가 우후시에서 사로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으며 2대 융무제, 3대
영력제 등이 난립하며 등장했지만 제대로 된 정권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하고 모조리 청나라 군대에 쓸려나갑니다.
청나라는 명청교체기에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오삼계등 귀순한 옛 명나라 병사들을 앞장세워
함께 이자성 - 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을 연달아 패배시키니 1662년 남명의
영력제가 잡혀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 청나라는 마침내 중국 천하를 통일합니다.
청군은 이자성군과 남명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도가 지나쳐 "목을 자를래 머리카락을 자를래?"
라며 "변발 호복" 을 강요하니 중국인들의 격력한 반발을 초래해 수백만을
살육하는 혼란을 거쳐 평정되는데.... 노신은 "유맹의 변천" 에서 "협의 기질"
이 있는 과감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중국인들이 오랑캐 앞에 굴종으로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이후 이정국, 정성공 등 명나라 장수들이 싸웠으나 망해버린 나라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 이었으며,
1661년 청나라가 윈난성을 침공, 영력제는 미얀마로 도망쳤지만 오삼계가 미얀마를 협박해 영력제
를 죽이니 청나라는 중화의 유일한 황제로 자리매김하게 되며 청 조정은 먼 강남 지방은 관리하기도
어려웠기에 큰 공을 세운 오삼계, 공중명, 상가희에게 각각 평서왕, 정남왕, 평남왕 등 번왕직을 내립니다.
정성공은 명나라 말기에 해적이자 동녕국의 초대 국왕인데, 아명은 복송 (福松) 으로 일본 이름이니
후쿠마츠 (ふくまつ) 로, 평생을 반청복명 (反清復明) 운동에 바쳤으며 국성야 (國姓爺)
라고도 불리고 있으니 서양에서는 민남어로 국성야의 발음이 변한 콕싱아 (Koxinga) 로 알려졌습니다.
어머니는 일본인이며 태어난 나가사키의 히라도(平戶) 에서는 그의 탄생 축제를 여는등 인기가 있는데,
어찌 보면 한국인들이 당현종 때의 명장인 고선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며 중국에서
밀려난 장제스 (장개석) 와도 비슷하니 중국의 아들, 대만의 아버지로 영국의 조너선 클레멘츠
는 2004년 “해적왕: 국성야 (國姓爺)와 명(明) 왕조의 몰락” 이라는 정성공의 전기를 출판했습니다.
아버지는 명나라 관리이자 해적이며 거상이었던 정지룡(鄭芝龍) 이며, 어머니는 히라도번의 번사 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 의 딸인 타가와 마츠(田川松)인데 정성공은 일본에서 태어나 7세때
명나라 복건성으로 건너 왔으니 일본에서는 대만 섬을 처음으로 정복한 일본인으로 선전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인 타가와 마츠는 중견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니 타가와 가문은 현재 일본에서 지역 명문가로
잘 살고 있는데, 하지만 시치자에몬이 정지룡을 포섭하기 위해 준비해둔 첩의 딸,
즉 기생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니 정지룡이 연회때 타가와 마츠에게 접대를 받은 것이라는 애기입니다.
아버지 정지룡은 1604년 복건성 천주에서 출생했는데 젊은 시절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아
세례명이 니콜라스였으니, 히라도번 제3대 번주인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가 주최한 연회에서 우연히 다가와 마츠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침하여 정성공을 낳게 됩니다.
번주 가문인 마츠우라(松浦)씨는 헤이안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서 수군(해적)으로 활약
했던 해상 세력인 마쓰우라토 (松浦党) 의 당주, 즉 해적 출신이었으니.... 고려 말
왜구의 거점으로 지목된 3도 (三島) 가운데 한 곳이 마츠우라토의 마츠우라 였습니다.
히라도에는 에도 막부 이전까지 네덜란드 상인들이 교역하는 상관(商館)이 있었고, 해적 출신 마츠우라
가문이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에도 막부가 쇄국정책을 선포하고 히라도에
있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버리면서 히라도는 쇠퇴해 지금은 한적한 어촌입니다.
정지룡이 다가와 마츠와 동침해 정성공을 낳을 때 정지룡은 거상인 이단의 상단에
속해있었는데, 이단은 정지룡에게 자신의 부하인 안사제의 딸 안씨와 결혼
할 것을 요구하자 결국 정지룡은 정성공을 임신한 타가와 마츠를 두고 중국
으로 건너가 안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타가와 마츠는 홀몸으로 정성공을 키웁니다.
1624년 8월 정성공이 출생했으니 태어나기 전날에 태풍이 몰아쳤고, 태풍 속에서 한 마리의 고래가
춤을 추었다고 하며, 다음날 정성공의 어머니 마츠가 바닷가에 나오자 폭풍우가
잠잠해졌는데, 조개를 캐다가 산통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길에서 정성공을 낳았다고 합니다.
정성공은 '행운의 소나무' 란 뜻의 '복송' (福松 후쿠마츠) 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는데.... 마츠 (松) 가
일본어로는 '기다리다' 라는 뜻도 있으니 홀몸이 된 타가와 마츠가 기다린다는 의미라고도 하며
타가와는 기다리다가 지쳐 1629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정성공의 이부동생인 시치자에몬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단의 사망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복건성 앞 안해의 지배자가 되어 '왕' 으로
불리던 정지룡이 동생 정지연을 히라도번에 파견하니 타가와 마츠는 새 남편과 두 번째
아이 때문에 중국행을 거절했으니.... 정지룡의 간청에 7살 된 정성공을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이민이 빈번해 일본의 히라도, 필리핀의 마닐라, 베트남 등지에 모두 중국계 화교
이민사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활성화 되어 베트남의 호이안과
태국의 아유타야에 말레이시아의 말래카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남양군도에 저팬타운이 있었습니다.
조선이야 쇄국정책과 부모를 모시는 효(孝) 때문에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고 단 한명의
상인도 자율적으로 해외로 나가지 못했지만 중국과 일본 상인들은 동남아로 진출하니 조공 무역
과 함께 동아시아 해상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했으니, 유럽 국가들도 사치품 네트워크에 가담하게 됩니다.
히라도에서 성장하던 정성공은 난데없이 궁궐 같은 집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게 되었는
데... 7살이던 정성공은 향수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렸다고 하며, 또한 자신의
씨다른 동생과도 친했던 사이였기에 편지로 계속 교류했다고‘대만외지’를 비롯한 기록들은 전합니다.
정지룡은 장남이었던 후쿠마츠에게 “삼이”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정지룡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언어를 배우며 세력을 키운데 반해 안정적인 삶을
유지한 편이었고 정성공은 유가적인 교육을 받아 14세 때 “수재”에 합격하기도 합니다.
정지룡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지라 아버지를 자주 보진 못했고
유모와 계모, 삼촌들 손에서 자랐는데 정지룡은 명나라 관리이긴 했지만 이는 밀수와
해적질로 쌓은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얻은 것이나, 정성공은 아버지를 명나라의
충신이자 수군제독으로만 알고 자랐으니 이것이 정성공의 훗날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명나라가 망한후 들어선 남명 정권은 군권을 장악한 정씨 집단에 의지하여 정씨에게 국성
(國姓) 인 주씨(朱氏) 를 사성(賜姓) 하고, 정지룡의 아들에게 성공(成功) 이라는
이름을 주었으니 정성공의 이름과 '국성야(國姓爺)' 라는 칭호는 여기서 유래합니다.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돈과 군사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가문의 명예
를 얻고자 했으니..... 정지룡은 자신의 무역 왕국에 대한 관심이 어떤 정권에 대한 충성
보다 우선이었기에 청나라에 투항하니 아들 정성공이 만류했으나 거부당하자 정성공은 헤어집니다.
정지룡은 청나라 조정이 남방 3성을 관할하게 해줄거라 기대했지만 청군은 약속을 어기고 정지룡을 베이징
으로 압송했는데, 정성공에게 어렸을때부터 유교 경전에 무술도 가르쳤으니 이런 교육으로 정성공이
충의를 다해 반청복명 운동에 투신하여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정지룡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1644년 농민 반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과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 을 남명의 제2대 황제인 융무제(隆武帝)로 옹립해 청나라의 남정군에 대항
했는데, 1647년 정지룡이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아들 정성공에 대한 회유 공작에 실패해 참수당하는 것입니다.
정성공은 아버지 군사력을 이어받아 샤먼(하문) 으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무역을 통하여 군비
를 충당하는 한편 해징공의 작위와 절강, 복건, 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맹공을 퍼부어 1659년에는 장강을 거슬러 진강을 비롯한
강남의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명나라 고도 남경(南京)까지 진격해 포위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당시 정성공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그는 제해권을
활용해 상업 루트를 관리하며 자신의 왕국을 건립했으니 그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에서 거액의 이윤을 얻어 부흥군을 부양하고 무기를 구매합니다.
1660년에는 샤먼 전투를 지휘해 청나라 수군에 타격을 입히니 청나라는 산둥에서 광둥에 이르는 동쪽 연해의
주민을 내륙으로 20km 강제 이주시켜 정씨의 명나라 부흥군이 연해 주민들과 보급 또는 통상을 할수
없도록 청야작전(천계령)을 실시하니 정성공은 육상기지를 상실하자 무역 네트워크는 기반을 잃게 됩니다.
동쪽 연안 5개 성 백성을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내륙으로 옮기고 바닷가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은 처형한다는 천계령(遷界令) 을 내린 것인데, 제의한건 정성공의 부하로
청나라에 투항한 황오(黃梧) 라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대만 섬에는 네덜란드인
들이 남겨놓은 사탕수수 농장도 있었으니..... 정성공은 어떻게든 망하지 않고 버텨냅니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위해 군기를 엄하게 잡으려고 했지만, 부하들 몇몇이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약탈을 허용하기에 이르렀고, 강도질로 인해 군중의 불만을 사게 되어 반란 사태가 일어나는
통에 청군에 패배하니, 진강을 비롯한 점령지를 버린채 복건성 해안가의 금문도로 밀려나게 됩니다.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이었던 난징을 거의 되찾을뻔 하기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으니,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로 인한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장기적인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었던 타이완섬을 노립니다.
1661년 4월 29일에 정성공은 타이완섬 (타이난) 을 공격했으니, 대만의 반네덜란드파 원주민 및
한족들이 동맹을 맺고 봉기해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해 기지를 빼앗았는데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요새 성벽이 네덜란드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남명의 제2대 황제 융무제는 정성공을 부마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황녀가 없어서 대신 국성 (國姓) 인
주 (朱) 씨를 하사했으니 '국성야' (國姓爺)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서양에는 남중국 방언
발음인 '콕싱아'(Koxinga) 로 알려졌으며 난터우 현에 궈싱이란 지명이 있는데 여기서 따온 것입니다.
한족들 및 원주민들은 정씨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동녕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해 세력권 안에 들지못한 대만
원주민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으니 다두 왕국을 통해 대만 원주민들과 교역했고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 제작을 가르쳐 주는등 관계를 맺어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립니다.
하지만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정씨 세력과 남부
의 평포족 간에 갈등이 생겨났는데.....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아 텍 카우종 (阿德狗讓)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합니다.
정성공은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성공 사후 정씨 세력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정성공은 동녕국(명정시기) 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의 역사는 중화권 그리고 동북
아시아사로 편입되며 반청복명 운동을 위해 일본 에도 막부에 원병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 돈 사비냐노 만리케 데 라라(Don Sabiniano Manrique de Lara) 에게
너네 '소왕국'을 정복할수 있지만 불쌍해서 봐준다면서 순순히 조공을 바치라는
서신를 보내니, 이에 만리케 데 라라가 보낸 서신은 정성공을 "중국 해안의
지배자이자 통치자인 정성공 귀하" 라고 불렀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런저런 조롱을 담고 있었습니다.
"쳐들어 올 수 있으면 와보십시오. 저희가 소왕국이건 대왕국이건 당신들이 쳐들어올 힘이 있기나 한지요?
듣자니 당신들은 만주족은 물론 네덜란드까지 죄다 원수를 졌지 않으셨습니까? 귀하 쪽에서 무례를
저질렀으니 앞으로 귀하와의 무역을 중단하겠습니다. 만약 무역을 다시 하고 싶으시면 사과하든가 하시지요"
필리핀 도독령은 대만과 인접했고, 스페인인들이 소수였으며 스페인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만 정복 당시 네덜란드군은 요새에서 수비를 하는 입장이었고 정성공
군대는 공성전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정성공 측이 훨씬 더 막심했습니다.
정성공은 25,000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질란디아 요새를 공격했는데 동원 병력 중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12,500여 명이 전사 혹은 질병사했으니.... 비교하자면 당시
네덜란드측 사망자는 전사자와 병사자, 포로로 잡혀 참수된 사람 포함 1,600여 명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필리핀 도독령은 만약 스페인 본토에서만 병력을 조달받는 상황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당시 라틴아메리카 북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식민지와 갈레온 무역으로
연결되어 입지가 탄탄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정성공에 대해서 이런 도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정지룡 빈소를 지키다가 말라리아로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필리핀에서 중국인 학살
이 일어나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듣자 고열에 분기탱천해 만주족과 연합해 필리핀을 치겠다는 정성공
에게 부하들이 "온 세계가 당신께 숨죽이고 있습니다. 스페인도 그렇습니다." 라며 진정시켰다고 합니다.
필리핀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정성공은 1662년에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의 처형 소식
을 듣게 되었고 그후 죽는데, 영력제를 죽인 자는 정성공과 같은 한족 출신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였으니 훗날 청나라에 맞서 삼번의 난을 일으키면서
영력제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진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반청 복명을 외치던 조선에서도 정성공을 좋아했으니, 인조에게 실망한 조선 사대부들이
"청나라에 항복해 명나라를 배신한 인조를 정성공이 징벌하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고, 숙종 때 장길산의 역모 사건때 "바다에 사는 정씨가 장길산을 도우러
올 것이다." 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훗날 “정감록” 에 나오는 정도령의 원형으로 추정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