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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학과 포스트휴머니즘
손 영 미
1. 포스트휴머니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3막 2장에서, 한밤중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광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에드거를 보며 리어왕은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란 게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가? . . . 너는 그야말로 물건에 불과하구나. 아무런 치장 없는 인간은 너처럼 하잘것없고 벌거벗은 두 발 짐승일 뿐" (III. iv. 100-107). 여기서 치장이란 에드거가 바로 그 앞에서 언급한 미용 기구, 장갑, 포도주, 주사위, 신발, 비단, 향수 등을 가리키는데, 인간은 그런 것들을 통해 비로소 자연의 횡포로부터 벗어나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런 형편은 그로부터 400년 후인 20세기 말에도 마찬가지여서, 마거릿 애트웃은 한 수필에서 여성의 몸은 기본적으로 ”가터 벨트, 팬티 거들, 페티코트, 슬립, 브래지어, 그물 스타킹, 쇼올, 하이힐 구두, 코걸이, 베일, 얇은 가죽 장갑, 머리띠, 타조 목도리, . . . 플라넬 잠옷, 레이스 속옷, 침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갖추고 등장한다면서, 여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일부를 빗으로 빗고, 수건으로 닦고, 분을 칠하고, 로션을 바른” 후에야 오바를 입고 거리로 나설 수 있다고 쓰고 있다 (Oates ed. 9). 다시 말하면, 아무런 손질이나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몸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체’가 될 수 없고, 사회가 기대하는 갖가지 과정을 거치고 필요한 장비를 갖춘 후에야 비로소 그 공동체의 구성원, 일정한 이야기 속의 인물인 ‘여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편지』에서 실연 당한 주인공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내가 처한 상황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고, 소설처럼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져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요” (89; 강조는 필자). 이 세 가지 예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적인 전제일 뿐,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고 상대하는 것은 모두 일정한 치장과 역할을 통해 구성된 존재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문화적으로 구축된 주체만이 사회가 제공하는 일정한 이야기에 편입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그런 역할을 통해서만 자신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포스트휴머니즘이라 불리는 최근의 인문학이 전통적인 인문학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분,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기존의 인문학은 어떤 보편적인 이상, 즉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속성을 찾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그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참된 인간상, 바람직한 사회상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humanism)를 기치로 내세운 서구 인문학이 말하는 이 보편적인 인간이란 실제로는 근대 서구 사회의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한 것이었기에, 그 외의 사람들, 예컨대 여성, 비서구 문화의 구성원, 피식민자, 동성애자 등은 비정상적이거나 저급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이 가진 생활 방식이나 문화는 개선되고 수정되어야 할 하나의 문제, 없애거나 파괴해도 무관한 부정적인 현상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그 대표적이고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전통적인 인문학은 이 서구의 백인 남성이 가진 시각과 입장을 기준으로, 그가 모든 담화와 해석의 유일한 중심이자 주체가 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모더니즘과 구조주의는 이 서구 인문학의 논리적인 귀결로서, 언어와 사회를 비롯한 모든 구조는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고, 해석자는 그 중심 또는 심층 구조를 준거로 하여 각 요소가 그 구조 안의 나머지 요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완벽한 이해,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치나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막시즘을 포함한 근대의 거대 담론들(grand narratives)은 모든 담론을 끝낼 담론, 역사의 변화 방향과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밝혀 줄 유일한 진리 담론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오타르(Lyotard)가 지적한 대로 이 거대 담론들은 20세기에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그 근거를 상실했고,1) 이제 인문학은 작은 담론들의 시대,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주변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나 인간성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찾아내기보다는, 그런 진리로 받아들여져 온 지식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과정을 통해 보편성과 권위를 얻게 되었는지, 어떤 내적, 외적 요인들이 그 지식에 정당성과 필연성을 부여해 왔는지 연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되었다. 지식의 내용보다는 생산 과정이 연구 및 분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발달한 새로운 인문학은 그런 보편적인 인간상과 거대 담론들의 근거와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인간이란 해당 문화에 의해 일정한 속성과 역할이 주어진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주체로서의 존재”), 사회 안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부과된 주체로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리 이상하고 특이해 보일지라도 각 문화는 나름의 논리와 구조를 가진 독특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런 논리와 구조의 구축 과정을 분석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 변화의 핵심에는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융성했던 구조주의는 언어학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언어학은 구조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자극, 영감의 원천일 뿐 아니라 구조주의 안에서 행해지는 여러 프로젝트의 방법론적 모델이다” (Culler 4). 소쉬르, 벤베니스트, 촘스키 등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언어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사회, 문화적 현상을 어떤 의미를 지닌 대상, 즉 하나의 기호로 파악했고, 이 기호들의 의미는 내적, 외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의해 결정되며, 그 관계들의 문법을 정확히 파악하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기호의 의미 또는 심층 구조를 분석해 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 최근 몇십 년 동안에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그 중요한 일부라 할 수 있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은 서사 또는 수사학이다. 구조주의가 일종의 모더니즘, 하나의 기호가 어떤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그 기호를 사용한 발화의 주체는 그 의미의 소유자 또는 완벽한 이해자라고 상정한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기호의 유기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관계는 유동적이고, 끝없이 지연되며, 다중(多重)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더니즘이 인간을 발화의 의심할 바 없는 주체라고 보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주체 자체가 자신도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데리다, 푸코, 라깡, 알뛰세는 그 구체적인 이론은 서로 다르지만, 기호나 서사, 개인의 작용이나 행동이 단일화되고 독립적인 주체적 의식이 아니라 그것들이 속해 있는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하고, 이 공통점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서사 자체에 대한 견해에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서사와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생각하는 서사는 그 구조와 위상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새로운 서사의 가장 유명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던 로브그리예는, “서사의 모든 요소들 . . . 순차적인 전개, 연속적인 플롯, 일정한 감정 변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들의 무조건적인 이용 등등 . . . 일관성 있고, 연속적이고, 단성(單聲)적이고, 완전히 해독 가능한 안정된 세계관을 그려내기 위한 모든 것들은 사라져야 하고, 이야기라는 개념 자체도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사실주의 서사의 핵심인 심리 자체도 그처럼 낙관적이고 통합된 사회상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된 존재인 주인공의 시각에서 모든 사건을 그려내기 위해 구축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태도의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Nash 203-4 재인용). 그에 반해 포스트모던 서사의 주인공은 다른 서사의 패러디일 수도 있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나보코브의 『투명한 물체들 Transparent Things』),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여러 명으로 생각될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고 (끌로드 시몽의 『전도체 Les Corps conducteurs』), 전혀 다른 두 가지 결말을 누릴 수도 있고 (존 파울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인유의 원천에 따라 여러 개의 이름이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다 (나보코브, 『투명한 물체들』, 『에이더 Ada』, 끌로드 시몽, 『농경시 Géorgiques』). 뿐만 아니라, 표면상의 시간 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독서를 통해 인과 관계에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건들의 순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실주의 서사와 달리, 새로운 서사의 플롯은 사건들의 순서 자체가 극히 모호할 뿐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는 실재의 차원들 자체가 끊임없이 바뀐다. 예컨대, 끌로드 시몽이나 로브그리예의 소설에서는 흔히 사진이나 광고, 그림 속의 인물이 갑자기 밖으로 나와 일련의 사건에 말려들었다가 다시 화면 속으로 흡수되곤 한다. 새로운 서사의 또 다른 특징은 이런 인물이나 사건들을 묘사하는 시각 자체가 모호해지거나, 다양화되거나, 다층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인공의 의식을 중심으로 그의 심리적, 윤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새 서사에서는 많은 경우 수많은 시각과 실재가 병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혁신적인 기법들의 심미적, 철학적 함의는 무엇일까? 로브그리예와 함께 누보로망의 대표 주자로 활동했던 미셸 뷔토르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인류의 의식을 그 모순과 맹목성 속에 가둠으로써 그 동안 일어난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진단하면서, 소설 형식의 혁신은 사실주의에 반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은 사실주의(greater realism)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Butor, 1968, 30, 28). 그는 여태 오락물이나 사치품으로 간주되어 온 문학이 실은 사회 발전에 불가결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설상의 이런 혁신은 서사적이면서도(epic) 교훈적인 역할을 할 새로운 시, 체계적인 실험 방법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30). 문학이 심미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고 독자의 정서와 도덕감에 영향을 미쳐 사회의 변화에 공헌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워즈워스가 쓴 『서정가요집 Lyrical Ballads』(1802) 서문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뷔토르와 워즈워스는 둘 다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시기에, 극히 혁신적인 문학적 기법을 동원한 작품들을 써냈고, 그것이 심미적, 문화적 영역을 넘어서서 인간의 의식과 도덕성 자체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서사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정치적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기호학 또는 그 일부라 할 수 있는 서사학의 영향으로 새로 생겨난 학문들은 그와 같은 도덕성, 정치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등장하거나 본격화된 페미니즘, 문화 연구(Cultural Studies), 커뮤니케이션 연구, 영화학(Film Studies), 동성애 연구(Gay/Lesbian studies), 탈식민주의(Postcolonial Studies) 등은 모두 좀 더 평등한 인간 관계와 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 다시 말하면 좀 더 도덕적인 인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표를 그 바탕에 깔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기존의 어떤 학문보다 더 노골적으로 윤리적이다. 이 때, 그 윤리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수많은 개체들의 시각, 입장, 목소리가 어떤 한 지배적인 힘에 의해 억압되거나, 지워지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다중심주의(polycentrism)이다.2) 그리고 이 새로운 학문들의 모델이 되는 것은 역시 서사적 상상력이다. 각 개인의 삶은 어떤 일관성을 지니고 있고, 이 일관성의 형태는 바로 서사의 형태와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초 프로이드가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 (Keen 174), 심리 분석과 후기구조주의, 네오막시즘의 영향 속에 발달한 이 새로운 학문들은 모두 서사 구조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에 가장 근본적인 토대 중의 하나가 된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서사는 본질적으로 어떤 특정한 시각과 입장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바, 이 학문들은 서사의 바로 그 점을 활용하여 보다 다양한 시각, 보다 많은 입장을 고려하고 중재함으로써 사회를 좀더 도덕적으로 만족스러운 형태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새로운 학문들의 영역이나 방법론이 인문학은 물론 문화계 전체를 변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등장과 기호학 및 서사학적 사고 방식의 확산은 기존의 학문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여러 학문들의 통․폐합과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문․사․철로 대표되는 기존의 인문학은 물론 심리학, 법학, 자연 과학 등, 많은 분야가 더 이상 고유의 연구 대상이나 방식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서사학적 방식으로 영화나 광고를 읽거나 심리 분석 자료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법관이 자신의 판결을 합리화하기 위해 서사를 동원하는 과정을 연구한다든가, 법조문의 서사적 구조를 분석한다든가3) 역사가가 특정 인물이나 세력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정한 시각에서 어떤 사건을 기술하는 방식을 파헤친다든가, 그런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왜곡된 중요한 사실들을 조명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작업은 물론 구조주의 시대 롤랑 바르뜨에 의한 작업들, 즉 기호학적 방식으로 화장품 광고, 신문의 인생 상담,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경기, 에펠탑 등을 해석한 것과4) 궤를 같이 하지만, 바르뜨의 신화학이 그런 현상들의 뒤에 숨어 있는 심층 구조의 논리성과 일관성에 역점을 둔 반면, 최근의 학문들은 그 모순과 상호 의존성에 주목하면서, 그야말로 전방위적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그 결과 적어도 인문학에서는 기존의 학문 영역이나 방법의 틀이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문학은 허구를 연구하는 반면 역사학은 진실을 찾는다고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고, 영문학자는 영어로 된 문학 작품을 읽고 그 미학적 구조를 연구하면 된다든가, 역사학자는 이런저런 사료를 해석해 어떤 사건의 진상을 밝히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보다는 영문과에서 익힌 서사학을 이용해 비드(Bede 673-735)와 셰익스피어, 자동차 광고와 공포 영화를 비교하고 해석한다든가, 어떤 사료의 형성 과정과 집필 주체, 숨은 동기를 분석해 낸다든가, 아예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의 구분을 없애고 인간의 모든 의사 소통 현상을 연구하는 커뮤니케이션 학부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런 학문들과, 그것들이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맺는 관계, 그리고 이 학문들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Disciplinarity라는 분야까지 등장하고 있다.5) 그래서 이제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의 필요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그런 학제간 연구의 전제가 되는 각 학문 자체의 연구 대상은 물론, 그 존재 근거, 사회적 역할, 그 토대가 되는 사고 방식 자체를 의심하고, 파헤치고, 분석하는 지각 변동의 시대가 온 것이다.
2. 서사의 인식론적, 정치적 특성
그렇다면, 지난 세기 후반에 시작된 인문학의 혁명적인 변화에서 서사학이 그토록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세기 초 구조주의의 토대가 된 언어학 및 기호학의 후신이라는 역사적 요인 이외에, 서사학의 어떤 측면이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도구로 만들었던 걸까? 여기서는 세 가지 측면을 통해 그 연관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1) 주체의 서사적 성격
이 글의 모두(冒頭)에 나온 세 가지 예를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서사적으로 구축된다는 것, 아침에 옷을 골라 입고 그에 맞는 신발에 발을 디미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날 전개될 어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수행할 역할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처럼 수많은 플롯의 등장인물로 사는 한 우리는 늘 그리고 이미 인위적이고, 상대적이고, 구성된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심대한 영향을 준 막시즘이나 네오막시즘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서사학이 보는 인간은 역사와 사회적 규율 (라깡의 “아버지의 이름,” “상징계”), 자신의 잠재 의식, 갖가지 지식 구조와 이야기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과거와 사회가 결정하는 이야기들의 틀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이 회의주의나 비관의 이유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체는 스스로 통제하기 어려운 수많은 요인에 의해 구축되지만, 그것은 즉 요인들의 변화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는 상당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소설인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나 『홀림 Possesion』(A. S. Byatt, 1990)은 주인공들에게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과 출산 및 행복한 재회로 끝나는 결말 등 두 개의 상반되는 행로를 제시하며, 그 선택은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현실 속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아기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어떤 서사로 구축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체험할 때마다 그 서사에 수정․보완을 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인상, 사건, 생각들이 어떤 논리적 구조를 지닌 ‘이야기(들)’ 속에 통합되고 배치되면서, 일정한 주제와 결말을 통해 나름의 일관성을 획득해 가는 것이다.6) 그런데, 이 서사의 중요한 부분마다 주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프롭(Propp)의 역할(role)-기능(function) 이론이나 그에 대한 브레몽(Bremond)의 반박에서 보듯,7) 그 선택은 서로 다른 몇 개의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이 선택이나 결과의 수는 문화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개인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는 결정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상대주의나 인본주의식의 자유 의지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고, 주체의 피결정성을 강조하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니힐리즘과 다른 것은 바로 서사의 이런 측면 때문일 것이고, 같은 연유로 서사적 상상력이 사회 구성원들간의 관계를 좀더 민주적이고, 유동적이며, 윤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 지식의 서사적 성격
“묘사는 언제나 이미 서사 행위이다” (Hubert Damisch, L'origine de la perspective, 239; Bal 293에 재인용). 그리고 서사는 이미 그 안에 인식 대상, 인식자의 시각, 인식의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문학 뿐 아니라 현대 심리학과 철학, 정치학자들의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지식은 흔히 어떤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고, 이렇게 기호나 말로 이루어진 서사는 갖가지 현상이나 사건들을 어떤 의미 있는 구조로 통합하여 의식, 고찰, 분석의 대상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사는 지식의 도구로서 두 가지 상반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 서사는 우리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장 효과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는 인식의 도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갖가지 동화를 통해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지식을 쌓고, 우리 사회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습득하는 것은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사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세계상만을 제공한다. 예컨대, 기독교나 그리스 신화의 역사관은 인류사의 초기를 황금 시대로 상정하고, 인간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 세계 역사 전체가 파국을 향해 내닫는 하나의 긴 내리막길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데 수천 년 동안 갖가지 서사를 통해 유포되고 강화된 이런 거대 담론을 거부하기란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디푸스 컴플렉스 같은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와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 이론에서 하나의 서사 형태로 제시된 이 개념은 적어도 서구 문화에서는 일종의 보편성과 진리치(眞理値)를 획득했고, 그래서 비서구인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이질적이지만, 라깡 등의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인간/남성의 본질적인 경험이 되고, 그를 체험하지 못 하는 이들, 예컨대 여성은 뭔가를 결여한 존재, 정상적인 발달 단계와 진화를 거치지 못 하는 불완전한 존재로 비쳐지는 것이다.
황금 시대나 외디푸스 콤플렉스 못지 않게 보편화되어 있는 개념 중 하나가 역사의 ‘사실성’일 것이다. 허구를 다루는 문학이나 가치를 다루는 윤리학과 달리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진실과 의미를 규명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역사 역시 하나의 지식이고, 우리가 말하는 서사적 역사는 그야말로 서사 행위의 산물인 관계로 허구 못지 않게 허구적이고, 편벽되고, 일방적이라는 것이 헤이든 화이트 같은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역사의 문학성 내지 서사성을 조명하여 포스트휴머니즘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 학자 중 하나인 화이트는 연대기(annal)나 편년사(chronicle)과 달리 역사(narrative history)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흐름에 어떤 구조를 부여하고, 기승전결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시각과 입장이 사건의 선택과 배열의 기준이 되는데, 그건 바로 그 이야기를 집필하는 사람 또는 세력의 그것일 수밖에 없으며, 헤겔이 말했듯이 역사는 법, 합법성, 정당성, 도덕적 원칙, 그리고 권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역사성과 서사성은 거의 동의어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도덕적 의도 없이 서사를 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Could we ever narrativize without moralizing)” (White 27; 화이트의 강조)
그렇다면, 우리는 지식의 이런 서사적 성격을 늘 염두에 두고, 우리가 배우거나 갖고 있는 지식은 언제나 이미 누군가의 시각과 입장을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객관성과 도덕성을 확보하려면 끊임없는 숙고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지식의 내용보다는 그 형성 과정과 윤리적, 정치적 효과를 주로 분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해석과 분석의 도구로서의 서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롯은 효과적인 비극의 정수였을 뿐 아니라, 그런 플롯을 이용한 서사는 설득의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수사학』에서 그는 우리가 상대를 설득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 첫째는 연역 및 귀납을 통한 논리적 방법(enthymeme)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유추적이고 구체적인 특성을 이용한 서사적 방법(paradeigma)이었다 (Rhetoric 1417 a, b; McGuire 220에 재인용). 따라서 서사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히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긴 해석과 분석의 힘을 통해 서사는 한 개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도 있고,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는 강력한 무기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사의 이런 힘은 세계의 많은 것을 논리적, 순차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다시 말하면 서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어떤 인과 관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인식 및 해석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에, 이미 그 안에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시각과 입장이 반영되어 있고, 듣는 사람에게 그것들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게 개별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어떤 이야기로 구성해야 하고, 우리는 그런 행위를 통해 세계와 자신의 행동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즐겨 다뤄지는 주제로서 예컨대, 로빈슨과 호프는 서사가 다른 인식의 도구보다 우수한 이유로,
1) 경제성 (유용한 정보를 쉽게 고르게 해 줄 범주들을 제공한다)
2) 선택성 (어떤 사건의 주요 요소들과 그것들간의 관계를 선택하게 해 준다)
3) 친숙성 (어떤 사건이 지닌 질서, 그것이 지닌 반복성, 다른 사건들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을 들면서 서사는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균형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결론짓고 있다 (Robinson & Hawpe 113 ff). 서사적 사고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인식, 생각, 기억, 행동들을 성공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도구이며, 개인들간의 의사 소통과 공감을 돕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123). 실제로 맥과이어 같은 학자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서사들은 그 공동체가 가진 지식의 저장고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갖가지 제도 및 기관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뿐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통합시키기도 하고, 분열시키기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McGuire 223). 다시 말하면 이야기 안에는 그 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그대로 담겨 있고, 이야기들은 모두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서사가 그토록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사는 해석과 분석의 도구이기에 특정의 서사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권력 관계를 알아낼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제외되거나 억압된 세력이나 요소를 드러낼 수 있고, 그로부터 새로운 권력 관계와 가치관을 반영하는 서사를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자나 시점, 사건의 배열 등만 조금 바꿔도 완전히 다른 세계, 완연히 다른 이야기,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해석이 제시되는 예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새로운 서사의 작가들이 같은 이야기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여러 번 제시한다든가, 한 소설 속에서 서로 다른 결말들을 여러 개 만들어 낸다든가, 기존의 동화나 소설을 시점을 달리 해 고쳐 쓰는 (『제인 에어』→Jean Rhys, Wide Sargasso Sea; 『Beowulf』→John Gardner, Grendel) 것도 서사의 그런 인식론적(heuristic), 정치적 힘 때문일 것이다.
3. 김용성, 『기억의 가면』
김용성의 『기억의 가면』(2004)은 이러한 서사와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형식적으로는 염연히 소설이지만, 한민족 모두가 체험했고, 그 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제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고, 그 형식이나 효과 또한 일반 소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을 다룬 최근의 새로운 소설들, 즉 북한의 입장과 내부 사정까지를 포함한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에서 우리의 현대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손석춘의 『아름다운 집』(2001)이나 황석영의 『손님』(2001)과 궤를 같이 한다. 손석춘이 “해방 직후인 46년 미 군정청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국체로서 자본주의(14%)보다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77%)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라든가, 47년 조선신문기자회의 조사로는대한민국(24%)보다는조선인민공화국(70%)을 국호로 더 선호했다” 등 그 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친북적 자료들을 발굴, 삽입하고, 황석영이 우리 문화에 갑자기 역병처럼 찾아와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켰던 막시즘과 기독교를 둘 다 무서운 손님 (“마마,” “역병”)으로 규정하면서, 황해도 신천에 있는 ‘미제 학살 기념 박물관’을 중심으로 기독교와 좌익간의 치명적인 갈등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재구성하려고 한 점에서, 이 두 소설은 소설과 역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중요한 시도였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이 상당히 일관된 시각과 뚜렷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고, 형식 또한 비교적 전통적인데 비해, 김용성의 소설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한국사 소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못 주목할 만 하다: 김용성은 한․중․일 세 나라의 사료(史料), 수기, 역사 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점의 소유자인 이진성만을 이용해서는 제대로 그려내기 힘든 한국전 당시의 사정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 속의 소설’을 끼어 넣기도 하고 (진성의 삼촌 이문수가 쓰는「죽은 자의 말」(pp. 197-221, 232-260), 소설 쓰기의 기법과 그 효과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표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그의 “작가의 말”에는 역사와 허구의 관계에 대한 포스트모던적인 시각이 명확히 드러나 있고, 그에 따르면 이 소설을 쓴 목적이 단순히 흥미로운 소설의 창작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재고(再考)임을 알 수 있다.8)
이 소설이 같은 소재를 다룬 여타 소설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인물 묘사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체험한 화자 이진성을 주인공으로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의 시각이나 해석은 『아름다운 집』의 이진선이나 『손님』의 류요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미미하다. 이진성은 오히려 누보로망의 주인공들처럼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는 갖가지 사료와 사건, 인물들을 이어 주기 위해 동원된 일종의 그물코라 할 수 있다. 손석춘이나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우리는 이진선이나 류요섭의 눈으로 작품 안의 사건들을 해석하게 되지만, 이진성의 경우는 그 시각이 극히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다른 시각들에 묻혀 있기 때문에, 독자가 그와 동일시하기한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은 끌로드 시몽의 『전도체』나 로브그리예의 『질투 La Jalousie』, 뷔토르의 『변경 La Modification』 같은 본격적인 포스트모던 소설보다 훨씬 더 분산된 시각(focalization), 훨씬 덜 인간 중심적인 인물 묘사를 선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들이 수십 개의 시점과 복잡다기한 시간 운용 등 갖가지 반사실주의 기법을 동원하면서도 결국은 주인공의 심리와 정신적 변화를 사실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노력하는 반면, 『기억의 가면』에서는 표면상의 주인공 겸 화자인 이진성의 느낌이나 변화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인물들 및 집단의 입장과 생각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효과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서구의 누보로망들보다 바크틴이 말하는 다성적, 다중심적 서사를 더 모범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시점, 화자, 시간의 유연한 운용 또한 이 소설의 주제를 구현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기억의 가면』에 그려진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는데, 이 부분은 1) 한 사건을 보는 여러 시각과, 그 시각들을 보여주는 화자들 (focalizers/ narrators), 2) 그 화자들과 같은 실재의 차원에 속하지만, 소설 전체로 볼 때 그들 모두의 시각을 연결하고 있는 일종의 초화자(extra-diegetic narrator)인 이진성, 3)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서사들이 모여, 서로 모순되거나 심지어 무관할 수도 ‘진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을 그리기 위해 동원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1) 삼촌 이문수 (서대문 형무소에서 좌익 정치범들이 풀려나는 장면을 보고 감동 받은 후, 사회주의와 인민 해방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원 입대한 북한군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월북하여 중공군에까지 합류하지만,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이 중국과 미국의 대결 국면으로 이어져 조국 통일을 방해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연장시킨다는 걸 깨닫자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종전 후 김일성 체제하에서 반당 종파분자 및 간첩죄의 죄목을 쓰고 광부로 일하다가 56년 자살), 2) 진성의 큰엄마 (가족을 보호하고, 가족의 일체성을 유지하고, 실종된 시동생 이문수에게 최소한의 음식과 옷을 남겨 두려고 함―p. 262), 3) “김인숙” (사회주의 혁명의 논리나 소속 부대에서의 역할보다는 삼촌과의 관계 유지에 고심. 나중에 중국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아 기른 것으로 추정됨), 4) “사촌동생” 이종만 (중국 거주. “김인숙”의 아들로,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북한에서의 이력을 숨기는 데 급급함―p. 270 ff.), 5) 쟝밍쭝 (이진성의 삼촌 비슷한 인물을 만난 적이 있지만, 확인을 해 주지는 못함―p. 192 ff.), 6) 허정민 (브라질 상 파울로에 거주하는 “중립국 포로.” 전쟁 때 입은 부상과 화상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불구자. 40년 동안 한 번도 한국에 가지 않았음―p. 98 ff.), 7) 중국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중공군 제6사단 (“남조선과 싸울 거라는 그 어떤 언질도 받지 못하고 압록강을 건너온 사람들―p. 199), 8) 미군 포로 존 스미스 일병 (스탠포드 영문과 재학생으로 19세 10개월―p. 210) 등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주로 ‘소설 속의 소설’인 이문수의 글을 통해 그려지지만, 우리는 이에 더해 객관적인 역사 (하기와라 료, 『조선전쟁』, 고지마 노보루, 『한국전쟁』) 및 개인들의 회고록 (홍 쉬에쯔, 『항미원조전쟁회고』,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등)으로 이루어진 더 큰 맥락을 배경으로, 이들이 휘말려 들어간 이 엄청난 비극의 전말과 그 속에서 개인들이 겪는 이념적, 정서적 갈등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복합적인 관찰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주인공 이문수를 포함해 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행동이나 운명에 대해 거의 아무런 결정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이들의 행로는 많은 부분 그들 자신이 알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더 큰 요인들, 예컨대,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협상, 미국의 참전 결정, 남북의 분단 등에 의해 결정되고 변질된다는 것, 그리고 이들 중 그 누구도 순수히 선한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 어느 인물이나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실되다든가 사건의 본질이나 핵심에 가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같은 사건의 경우, 헤이든 화이트가 말했듯이 각 공동체에서 가장 많은 힘과 도덕적 권위를 가진 집단의 시각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는 역사는 오히려 더 심한 오류와 왜곡을 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시각이나 화자의 운용에서 역사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기억의 가면』 같은 서사는 거기 연루되었던 수많은 인물과 집단의 입장과 해석을 제시할 수 있고, 그런 연유로 이 소설에서는 그 전쟁들을 체험했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체험과 시각이 그 어떤 역사에서보다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거기 휩쓸린 인물들은 화자인 이진성의 예에서 보듯, 끊임없이 자신과 사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지어내고, 다른 인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상대의 이야기를 찾아 들으면서 가능한 의미들을 구축해 간다. 『기억의 가면』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낮은” 고귀한 존재로 보고, 그 합리성과 존엄성을 굳게 믿는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고, 그래서 허구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인 실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9) 그런데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성과 거기 따른 인간의 고통을 그린 많은 소설들이 역사적 ‘진실’에 대해 표면적으로 불가지론적이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한껏 비현실적이고 유희(遊戱)적인 기법들을 동원함으로써 오히려 그 아픔을 더 잘 드러내 왔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때 전란을 피해 조국을 떠난 주인공이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다른 교수의 시에 주석을 붙이는 척 하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자신의 왕국에 대한 온갖 망상을 끼어 넣는 나보코브의 초소설(metafiction) 『창백한 불꽃 Pale Fire』이나, 역시 러시아 혁명 때문에 미국으로 탈출한 험버트 험버트라는 인물이 어린 소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문학 작품들 속의 사랑을 재현해 보려다 끝내 처참하게 실패하고 마는 경위를 보여 주는 그의 전위적인 소설 『롤리타』처럼, 『기억의 가면』 역시 전란에 휩싸인 개인들의 운명과 영혼을 그려내기 위해 수기, 역사 기록, 소설 속의 소설, 수많은 1인칭 서사들을 통해 현대를 살아온 영혼들의 상처를 그려내려 하고 있다. 이 포스트모던적인 소설에서 “진실”이나 “진상”이 차지하는 위상은 삼촌과 그의 행적에 대한 일관성 있고 사실적인 서사를 구축하려는 이진성의 끈질긴 시도에 대해 그의 사촌 동생일 “수도 있는” 이종문이 던지는 말, 즉 “제가 선생님의 사촌 동생이면 좋겠습니까? 선생님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274)에서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 현대의 격동적인 삶 속에서 진실이란 실재하거나, 이해할 수 있거나,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유동적이고, 산발적이고, 복잡다기한 것,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어떻게든 구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기억의 가면』과 현대의 포스트모던 서사는 진실과 개인의 위축된 위상, 그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의 폭력성이 우리에게 남겨 준 거부할 수 없는 유산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나름의 진실, 더 진솔한 작은 서사들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한 일관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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