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胡 十 六 國 時 代
前燕(전연)나라
모용부의 시조로 기록된 慕護跋(모호발)은 3세기 중기에 부락민을 거느리고 謠西(요서)를
근거지로 발흥하여 모용외 재위씨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모용황 때는 칭제 건원을 할 정
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을 틈타 중원 동부 관동을 차지할 정도
로 강대국으로 거듭나 화북 통일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前 燕 王 朝 世 家
前燕(전연 AD. 337∽370 鮮卑族(선비족) 위치 중국 화북 성: 慕容(모용)
|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在地名 |
|
| 宣武皇帝(선무황제) | 慕容廆(모용외) |
| 棘城 | 遼寧省宣縣 |
| 제1대 | AD. 337∼AD. 348 | 文明皇帝(문명황제) | 慕容皝(모용황) | 모용외의 3남 | 극성 | 요령성의현 |
| 제2대 | AD. 348∽AD. 360 | 景昭皇帝(경소황제) | 慕容儁(모용준) | 모용황의 2남 |
|
|
| 제3대 | AD. 360∽AD. 370 | 獻武皇帝(헌무황제) | 慕容暐(모용위) | 모용준의 3남 |
|
|
부족장의 지위는 慕容木延(모용목연). 慕容涉歸(모용섭귀)로 계승되었고 묘용외는 269년
에 섭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섭귀가 사망 후 그의 동생 모용내가 부락민에게 살해당한
이후 285년에 요동에서 부족장 지위에 즉위하였다. 333년 5월 모용외가 사망한 후 형제
간에 계승싸움이 일어났다.
모용외(AD, 269〜AD, 333) 모용섭귀의 차남
269년 선비족 모용부의 대인 모용섭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
자 모용섭귀의 동생인 모용내가 그 자리를 찬탈했다. 조카인 모용외를 죽이려 하니 모용
외는 요동으로 도망가 2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살아났다. 285년 국인(귀족)들이 모용
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옹립했다. 285년 동쪽으로 부여를 공격하였다. 부여왕 의려는 대
책없이 공격당하자 자살했고, 모용외가 그 국성을 함락하고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진나라가 가침을 보내 의려의 아들 의라를 맞이해 왕으로 즉위시키려하자 모
용외가 손정을 보내 기병으로 이를 요격했다. 가침이 이를 막아내고 손정을 베어 부여를
회복시켰다. 289년 중심지를 청산으로 옮겼다. 293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그 군세가
강하여 고구려 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서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
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 소형의
벼슬을 지내고 있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봉상왕을 맞아하기 위해 왔다가 봉
상왕의 행열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모용외는 고
노자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294년에는 대극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296년, 모용외는 다
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서천왕의 무덤을 도굴하였다. 그러자 봉상왕이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하였고, 고노자가 신성
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하였다. 333년에 사망했다. 그
의 아들인 모용황은 자립하여 연왕을 칭했으며, 손자인 모용준이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
면서 고조 선무제 혹은 무선황제에 추증했다.
제1대 문명황제(AD. 297∽AD. 348) 모용외의 3남
모용황은 321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면서 모용부의 대인이 되었
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모용한과 동생 慕容仁(모용인), 모용소와 대립하여 모용부는 내
분을 겪게 된다. 모용인은 모용소와 반란을 꾸몄으나 발각되어 모용소가 살해당하자 요
동의 平郭(평곽 遼寧省 蓋州市. 요령성 개주시)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요동일대를
장악하였다. 모용한은 단부로 망명하였다가 단부의 군대를 이용해 모용황을 공격하였다.
한때 모용황은 멸망직전까지 몰렸으나 모용한이 모용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철군하
면서 살아남았다. 336년, 모용황은 모용인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37년 모용황은 진나라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단절하고, 연왕을 자칭하며,
연나라(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단부와 대립했기 때문에 조나라(후조)와 동맹을 맺
고 338년에 단부를 공격하였다. 모용황이 혼란에 빠진 단부를 약탈하고 튀자 조나라의
석호는 전연에게 분노하여 단부를 멸망시킨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조나
라의 침입으로 한때 수도인 극성이 포위되기도 하였으니 모용황은 농성 끝에 조나라 군
대를 격파하고 역으로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다. 이후 조나라의 유주를 계속 공격하며 약
탈전을 벌였다. 한편 339년 공격후 342년에 고구려에 대규모 공격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國內城(국내성. 吉林省 集安市 길림성 집안시)을 파괴하고 高句麗王 釗(고구려왕 쇠 故
原王 고국원왕)의 부친 乙弗利 美川王(을불리 미천왕)의 묘를 파헤치고 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사로잡았다. 또 344년에는 우문부를 습격하여 멸망시켰고 346년 1월에는 夫餘
(부여)를 멸망시켰다. 그 후 348년에 수렵 도중에 낙마사고로 안해 머리를 크게 다쳐 모
용황이 결국 사망하였다.
제2대 경소황제(AD. 319∽AD. 360) 모용황의 2남
349년 동진에게서 사지절, 시중, 대도독, 독하북제군사, 유평이주목, 대장군, 대선우, 연
황,의 칭호를 받아 공인된 연왕이 되어 즉위하여 사면령을 내렸다. 석호가 죽어 조나라
(후조)와 위나라(염위)가 혼란해지자, 모용준은 이 두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워 정
예병 20만을 마련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355년에는 자신이 제위에 오른 것을 단감
이 비난하자 모용각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게 해서 356년에 단감의 항복을 받았다가
357년에 죽였다. 또한 357년에는 업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360년 1월 병이 들어 사망
한다.
제3대 헌무황제(AD. 350∽AD. 384) 모용준의 3남
처음에는 중산왕에 봉해졌다가, 이내 형들이 요절하여 태자가 되었다. 모용준이 사망하자
360년에 11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모용준은 죽으면서 동생 慕容恪(모용각), 숙부 慕
容評(모용평), 그리고 원로 공신 慕輿根(모여근)에게 유언을 내려 후사를 부탁했는데, 따
라서 이 셋은 각기 삼공의 자리를 나누어 맡고 어린 모용위를 보좌하였다. 그 중에서도
모용각이 태재로 섭정을 맡아서 전권을 대리하게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모여근은 모
용각과 모용위 사이를 이간질하고, 종국에는 둘 다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용위는 오히려 모여근의 음모를 간파하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진작부터 모여근의 역심을 알고 있었던 모용각이 자초지종을 까발리면서 모
여근은 온 가족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로 전연의 조정에는 한동안 공포 정국이
조성되었지만, 모용각이 앞장서서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이자 이것도 해소되었다.
이후 모용각의 섭정하에 전연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모용각이 죽자 모용외의 아들
모용평이 태재가 되었는데, 그는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 해서 전연은 점점 쇠약해진다.
결국 前秦(전진)의 부견이 왕맹을 앞세워 전연을 침공하자, 전연은 멸망하고 모용위는 부
견에게 항복하였다. 고구려로 망명한 태재 모용평은 복수의 그날 만을 노리고 있던 고국
원왕에게 그대로 묶여 전진으로 압송된다. 모용위는 부견의 휘하에서 신흥후에 임명되었
다. 비수대전에서는 후방에 있었으나 이후 모용수가 거병하여 전연을 재건한 후연을 세
우자 장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여다가 같은 선비족인 서연의 慕容沖(모용충)의 공
격에 부견을 뒷치기 하려다가 들켜, 부견에게 목숨을 잃었다.
수도 천도
文明帝(문명제) 慕容皝(모용황) 棘城(극성) 遼寧省 錦州(요령성 금주)
龍城(용성) 遼寧省 朝陽(조양성 조양)
景昭帝(경소제) 慕容儁(모용준) 薊(계) 河南省 薊省(하남성 계성)
鄴(업) 河北省 臨漳(하북성 임장)
사료 출처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과 三崎良章(삼기양장)의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과
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