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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됐도다.
(롬 7:10)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하)
‘생명의 길로서 율법’을 부정한 이단들, 예장 합동 꼴뚜기파 고경태 목사, Wolf이철, Wolf진남, Wolf창모 같은 Wolf들이 예장 합동에서 더 태어나지 않으려면, 로마서 7장 10절에 비춰 갈라디아서 3장 21절 하반절을 ‘죄인을’을 더해 이해하면 된다.
만일 죄인을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바른 믿음} 고경태 <칼빈이 레 18:5에서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했는가?>
예장 합동 꼴뚜기파 고경태 목사 주특기인 횡설수설로 이뤄진 위 링크 글은 읽지 않아도 된다. 비문非文인 제목만 읽으면 되는데, 칼빈 선생님께서 레위기 저자가 아니시니 “레 18:5에서”를 ‘레 18장 5절 주석에서’로 고치고 “율법으로” 앞에 ‘죄인이’를 더해 읽으면 된다.
칼빈이 레위기 18장 5절 주석에서 죄인이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했는가?
다음은 ‘정이철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113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비록 갈라디아서 3장 21절 해석으로서 바른 주장,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100% 바른 주장이 있을지라도, ‘생명의 길로서 율법’과 ‘전 생애에 걸쳐 생명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심으로써 흠 하나 없는 어린양으로서 향기로운 화목 제물이 되신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를 부정한 이 글은 당연히 100% 이단성 있는 글이다. 밑줄은 내가 긋는다.
그동안 수없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기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기 위해 보내신 율법 속에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기능이 처음부터 장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장착하신 기능은 오직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죄를 죄로 규정하여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죄인은 반드시 자기 죗값을 갚아야 하므로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무한히 정죄할 뿐이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에서 옮기는 글이다. 도돌이표 인용으로, 가로 속 글은 내가 더한다. 밑줄과 굵은 글씨도 마찬가지다.
…(전략)…
다음과 같은 바울 사도 말씀도 매우 중요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이를 근거로 우리는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주실 그것(의義, 의롭다 하심)을 그리스도께 구해야 한다고, 혹은 ㅡ결국 같은 것이지만ㅡ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에 대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ㅡ“사람이 이를 행하면(율법을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영생을 얻으리라.)”(레 18:5)ㅡ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에서도 이 사실이 분명하게 확증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 율법으로 ···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행 13:39). 만일 의義는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짐(율법을 지키는 것)을 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처럼 만드셨으니, 그리스도께서 그 공로로 우리를 위해 자비를 얻으셨다는 것을 과연 누가 부인하겠는가?
갈라디아에서 가르치는 내용도 같은 목적을 지닌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 ··· 려 하심이라.”(갈 4:4~5)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것을 친히 지불하셔서 우리를 위해 의義를 얻으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계신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의義의 전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다(롬 4장).
…(하략)…
개혁 신학의 아버지 칼빈 선생님께서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명명백백하게 가르치신 윗글에서 칼빈 선생님께서 그 증거 성구로 삼으신 구절인 레위기 18장 5절과 사도행전 13장 39절은 눈여겨봐야 할 구절들이다. Wolf이철은 레위기 18장 5절에서 복음을 읽지 못한 나머지 “마귀의 스파이”답게 이 구절을 간교하게 비트는 해석을 함1)으로써, 자신이 예장 합신 노승수 목사님과 김병훈 목사님을 묻으려고 파 놓은 이단의 무덤으로 스승 서철원 목사님과 함께 들어가는 세기의 듣보잡 짓거리를 했지만, 칼빈 선생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를 증언하는 구절로서 이 두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롬 1:17)로서 복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며 ‘율법의 의義’ 혹은 ‘의義의 율법’을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길로서 율법(마 19:17. 행 2:28, 롬 7:10 상), 의로우신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칭의稱義의 율법’을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3장 39절에 적힌 “모세 율법”에서 우리는 당연히 레위기 18장 5절을 떠올려야만 한다. 바꿔 말하면, ‘생명의 길로서 모세 율법, 칭의稱義의 율법’을 떠올려야만 한다.
그러면 칼빈 선생님께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하신 뒤 사도행전 13장 39절을 인용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를 설명하실 때, 칼빈 선생님께 사도행전 13장 39절에 적힌 “이 사람”,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겠는가? 당연히 ‘성령으로 원죄의 혈통 유전 없이 율법 아래 거룩하게 태어나셔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신 그리스도, 의인義人이신 그리스도’(행 7:52. 약 5:6)다. ‘생명의 길로서 모세 율법을 주신 성삼위 성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사 11:1~3) 의로우신 여호와의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키시는 경건의 공로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그리스도’(딤전 3:16)이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3장 39절에 관한 칼빈 선생님 이해는 다음과 같다.
또 죄인인 너희가 생명의 길인 모세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생명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아 부활하신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물론, 논리와 독해력 수준이 초등학생보다 못한 Wolf이철은 “율법 속에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기능이 처음부터 장착되지 않았”다는 100% 바른 {성경}의 가르침을 내세워 ‘생명의 길로서 율법’과 ‘마지막 아담으로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흠 없이 율법을 준수하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신 의인義人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세기의 듣보잡 짓을 했다. 범주 오류로 허수아비 때리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바른 논리와 놀기 위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근거를 성경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중략)… 율법 속에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기능이 처음부터 장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Wolf이철 주장을 가지고 말장난을 해보자. 논리와 독해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을 애써 모르쇠 하는 세기의 철면피 Wolf이철이 이 말장난에 숨은 행간 의미를 깨달을지 모르겠다.
이 바른 주장에서 강조해야 할 단어는 ‘의인義人’ 반대말인 “죄인罪人”이다. 그런데 서철원 목사님은 {종말론 강의} [제2강]에서 “율법을 예사로 범하는 것이 예수에게서 진행됐단 말입니다.” 하셨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360쪽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죗값을 하나님 자신이 갚기로 하셨다. 죗값을 갚기 위해 죄를 범한 본성을 입기로 하셨다. 그리해 사람의 자리에 오셨다.” 하셨다. ‘율법을 범한 죄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위 인용문에서 밑줄을 그은 Wolf이철 100% 바른 주장 속 단어 “죄인을”에서 “을”을 삭제해 “죄인” 뒤에 ‘그리스도를’ 넣으면, 다음과 같다.
율법 속에는 죄인 그리스도를 의롭게 만드는 기능이 처음부터 장착되지 않았다.
강조해 앵무새처럼 또 말하지만, 로마서 10장 5절에서 “모세가 (레위기 18장 5절에)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했거니와” 하신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서 2장 13절에서 이미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셨다. 또한 로마서 7장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됐도다.” 하셨다. 이 지점에서 개혁 신학의 아버지 존 칼빈 선생님 제자로서 이른바 “장로교 창시자”이신 존 낙스 목사님께서 동료 목사 다섯 분과 함께 지으신 ‘{The Scottish Confession} (1560)’에서 글을 옮기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도 영적 쓰레기다.” 할 ‘서철원 교조주의’ 신학>2)에서 전문全文 인용이 아닌 부분 인용을 했던 도돌이표 인용으로, 다음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제15조> 전문全文이다.3)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제15조: 율법의 완전과 인간의 불완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장 공의로우며 가장 공평하고 가장 거룩하며 가장 완전함과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이 흠 없이 온전히 행할 때 인간에게 생명을 주며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을 명령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이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본성은 지극히 부패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하기에 결코 율법의 행위를 흠 없이 온전히 이행할 수 없습니다. 만약 거듭난 뒤조차도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그분의 의와 속죄를 붙잡는 게 필수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 의해 자유롭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일에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키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에게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그리스도 예수 몸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심으로써 우리 불완전한 순종을 흠 하나 없는 온전한 것처럼 받아 주시며 많은 더러움으로 더럽혀진 우리 행위를 그분 아드님 의로 덮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율법에 순종할 의무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자유롭게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의 지위(율법의 완전과 인간의 불완전)를 인정했는데,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는 지구 역사상 그 어떤 누구도 율법이 요구한 순종을 이행했거나 이행하거나 미래에 이행해 그 공로를 우리에게 줄 사람(성인聖人)은 없다는 사실을 확언確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엎드려 무익한 종임을 거짓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의무 이상 덤으로 행한 선행의 행위를 신뢰하는 자는 헛된 것을 자랑하고 저주받을 우상 숭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히 9:14 상)를 고백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벧전 2:22)다며 ‘흠 하나 없는 어린양으로서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를 명명백백하게 고백한다. 그러함에도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에서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시고’를 떠올리지 못하신 반법주의자 서철원 목사님은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추천사>에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 개혁 신학의 아버지인 칼빈의 가르침에 아무런 자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전통이 17세기에 시작됐고 ……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 위에 두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깁니다.” 하셨다. 그러나 “17세기” 이전 16세기 1560년에 작성된 장로교 최초 신앙고백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능동 순종’이라는 용어만 쓰지 않을 뿐 이토록 명명백백하게 “하나님의 지혜”로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로 이루신 의義’, “그분의 의義”를 고백한다.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아니라 ‘율법의 축복으로서 레위기 18장 5절을 성취해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자가 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명백백하게 고백한다.
‘율법 아래 나셔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아니라,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성 삼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모세 율법의 주인이시지만, 율법 아래 거룩한 마지막 아담으로 나셔서 전 생애에 걸쳐 생명의 길로서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지키심으로써 하나님 아들로 선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 영화로운 몸을 입는 부활이라는 율법의 축복을 낳은 그리스도의 의義’도 복음이다. 그리고 원죄의 혈통 유전으로 잉태할 때부터 죄인인 까닭으로 율법의 의義를 성취할 수 없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산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써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신 뜻이다. 그러므로 ‘전 생애에 걸쳐 생명의 길로서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온전히 지키신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의義’를 건너뛰어 ‘그리스도의 속죄’만을 주장하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목사들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이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고후 11:3 상)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고후 11:4 상) 이단의 복음이다. 저주를 받아야 할 “다른 복음”(고후 11:4 하. 갈 1:6~9)이다. ‘우리 맏형님으로 나신 그리스도 부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수난’마저 허무는 Wolf 복음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분 아들에 관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분 아들에 관해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2~4)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고난: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L/237
나는 위 링크 글에서 로마서 5장 10절은 사도행전 13장 38절~39절과 병행 구절임을 설명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 38절~39절과 병행인 구절은 로마서 5장 10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절은 위 링크 글에서 인용했던 구절로 바로 로마서 4장 25절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 13:38)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39)
우리가 원수 됐을 때 그분 아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됐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분 살아나심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경건하지 않는)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예장 합신 김병훈 목사님께서는<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러한 구별은 “죄악의 용서와 영원한 의의 드러남”(단 9:24), “죄 사함과 기업을 얻음”(행 26:18), 또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는 것”(갈 3:13)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갈 3:26) 등의 구별을 근거로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고난: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결론’ 부분에서 옮겼던 말씀들, “장엄”한 “진리의 자기주장”인 말씀 일곱 구절에서 끝 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다. (행 13:33)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을 형제로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히 2:11)
이에 예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10)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으로 제자들을 “내 형제들”로 부르셨다. 우리를 “내 형제들”로 부르심으로써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었음(갈 4:5 하)을 선포하신 것이다. 우리의 칭의를 선포하신 것이다. 신인神人으로서 성삼위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히 1:3 상)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 맏형님으로 나신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부활(롬 1:4. 히 1:5) 때이기 때문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메시아 시편 2장 8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해 그들에게 보내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7~18)
조직신학에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과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이라는 용어가 있다.5) 그런데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왕국, 그 “기업을 얻”으신 때는 언제인가? 비하의 십자가를 짊어져 하나님께 율법의 저주를 당하신 때인가, 생명의 길로서 율법의 축복에 따른 승귀의 부활 때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그분께서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심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히 1:4~5)
다음은 ‘게할더스 보스 {히브리서의 교훈} 김성수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4)’ 48쪽~49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20대 초반 청년 시절 내 마음을 뜨겁게 했던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도돌이표 인용이다.6)
히브리서 2장 1절~5절에서 저자는 신자들에게 이와 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케”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구원이 이처럼 위대한 것은 모든 것을 신자들 발 아래 복종케 하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에게 복종케 된 세계는 옛 세상이었으나, 새 세상은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아래 복종케 됐고 그와 더불어 모든 인류에게 복종케 됐다.
같은 세상이 다르게 표현된 곳이 있는데, 히브리서 12장 12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 즉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만일 이 말을 단순한 은유적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저자가 의미한 내용을 놓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하늘의 세계와 생명의 관계로 연결돼 있다. 하늘의 세계가 마치 육지가 돌출해 대양을 향해 뻗듯이 신자들 삶 속으로 뻗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사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히브리서에 국한되지 않고 바울 서신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우리 나라는ㅡ{개역 성경}: 우리 시민권ㅡ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이 현 세상에 흩어져 사는 식민개척자들인 것이다.
바울 사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
존 칼빈: “하늘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의義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 산 소망이 있’(벧전 1:3)다. 그분께서 다시 사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자로 나타나심과 같이, 우리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분 부활에 있다.” “만일 의義는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짐을 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처럼 만드셨으니, 그리스도께서 그 공로로 우리를 위해 자비를 얻으셨다는 것을 과연 누가 부인하겠는가?”
게할더스 보스: “‘그리스도 부활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는 데 공헌해주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관한 대답을 가장 간단하게 다시 표현하면 ‘사망이 죄와 관련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활은 의義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리 육체를 회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큰 소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닮은 상태로 영화돼 우리가 그런 몸을 입음으로써 우리 영혼이 하늘의 상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그런 상태에서 거할 수 있게 되며, 결국 끝이 없는 그런 영원한 생명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큰 소망인 것입니다.”7)
그레샴 메이첸: “나는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크게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존 머레이: “진리의 자기주장은 장엄하다.”
김홍전: “우리가 진리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수호하고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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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른 믿음} 정이철 [정이철 목사 신학 헌의안 올리고 싶은 분들에게 드리는 자료 정리]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옮긴다.
청교도들은 율법을 지킴이 곧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자격, 즉 하나님의 의를 얻는 원래의 방법이 율법준수라고 가르쳤습니다. 현대의 청교도주의자들도 율법준수가 영생의 의를 얻는 원래의 길이었다는 주장을 위해 레위기 18장 5절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를 자주 인용합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원래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의 자격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처음에 정한 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레위기 18장의 말씀은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이전의 원주민들처럼 동성애, 수간, 친족 성행위 등을 범하지 않아 그들처럼 멸망의 심판을 받지 말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구약 시대에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로 영생의 자격(의)을 얻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0장 5절에서 그 말씀은 인용하였으나, 바울의 결론은 율법의 행위로는 영생의 의를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의 의를 얻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롬 10:8-12절).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도 영적 쓰레기다.” 할 ‘서철원 교조주의’ 신학>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82
3) 내가 “의무 이상 덤으로 행한 선행의 행위”로 번역한 “works of supererogation”에 관해서는 “works of supererogation”를 복사해 {Naver} 검색창에 검색하기를 바란다. ‘Supererogation, Works of’나 ‘Opera supererogatoria’로 검색하면, 더욱 좋다. 그리고 원문 “but we affirm that no man on earth, with the sole exception of Christ Jesus, has given, gives, or shall give in action that obedience to the Law which the Law requires.”에서 밑줄 친 문장을 “지구 역사상 그 어떤 누구도 율법이 요구한 순종을 이행했거나 이행하거나 미래에 이행해 그 공로를 우리에게 줄 사람(성인聖人)은 없다는 사실을”로 의역했는데, 이는 로마천주교에서 이른바 “Dulia”로 말하는 교리, ‘의무 이상 덤으로 행한 선행의 행위로 이른바 “성인聖人”이 된 사람, 그 성인의 공로에 의지하는 성인 숭배 교리’를 염두에 둔 의역이다.
4) {기독교개혁신보} 김병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5)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650쪽~656쪽을 참고하라.
6) 김홍전 <사죄와 의롭다 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에서 도덕적인 자권子權과 법적인 자권子權>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42
7) 게할더스 보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칭의>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62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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