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감독들의 평가를 보면, 당시 강수연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살짝 엿볼 수 있다. <고래사냥 2>(1985)의 배창호 감독은 “아직
어린 배우지만 ‘깡다구’가 있고 무척 열성적이다. 본인이 선택한 작품을 위해서 다른 계획을 모두 보류한 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기에 전념하는 진지한 자세를 높이 사줄 만하다”며 갓 스무 살이 된 여배우의 잠재력을 이야기했고,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의 이규형 감독은 “집념이 강한 연기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단계에 다다르지 못한 연기를 할 땐, 주위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다시 해야 직성이 풀린다”며 어리지만 프로페셔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강수연을 평가했다. 임권택 감독은 인터뷰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서 <씨받이>(1987)에 강수연을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십팔 세 철 없는 애로부터 씨받이
로 가서 한 일 년을 그렇게 갇혀서 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거를 거기서 일 년 후든 이 년 후든 나이와 관계없이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살고 났을 때 연기가 저 앞하고 뒤가 전부 커버될 만한 충분한 기량을 가진” 배우는 강수연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녀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였다. 서너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했고, 1987년에 개봉한 작품만 무려 6편이었다.
영화의 성격은 다양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는 청춘 스타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흥행작이었고, <연산군>(1987)
에선 요부 장녹수가 되었다. <감자>(1987)에선 당찬 아낙네 복녀 역을 맡았고,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에선 거칠게 살아가는 창녀였다. <됴화>(1987)에선 숙명과 업보의 인생을 살았고, <씨받이>(1987)에선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대리모가 되었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배우가 보여주기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폭 넓은 스펙트럼이었고, 역할엔 ‘극단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녀는 ‘강수연적인 것’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소설가 전혜성은 강수연에 대한 배우론에서 “그녀의 입김이 닿는
순간, 어떤 악하고 비천하고 암담한 현실도 발랄하고 매력적이며 또 튀는 물고기처럼 생생하고 낙천적인 우주로 변해버린다.
따라서 그녀가 만들어낸 ‘강수연적 창녀’ ‘강수연적 씨받이’ ‘강수연적 조선시대 새댁’ ‘강수연적 아낙네’ 그 모든 것이 일련의
발랄한 1980년대적 현대성을 짙게 뿜어내고 있다. 그것은 역할을 철저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할 줄 아는 배우 강수연이 지닌
매혹적인 능력의 일부”라고 말한다. 강수연은 과거 선배 여배우들이 지녔던 어떤 ‘전형성’에서 벗어나, 일견 모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때 <씨받이>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안겨준다.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시 강수연은 한국영화의 해외 업무를 관장하던 영화진흥공사로부터 영화제에
참석하겠냐는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사실. 폐막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녀는 베니스에 있지 않았고, 수상 결과가
발표된 후에 국내에서 치러진 자축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 스타라는 이름의 이면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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