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맑음
그냥 떠나가기엔 너무 잘생긴 미남. 그냥 떠나보내기엔 너무 젊은 성직자. 큰아들이 관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에는 너무 원망스러운 하느님! 옛사람들은 이런 비극을 ‘신들의 질투’를 사서라면서 입술을 깨물었단다. 그런데 인류를 살리러 당신 외아들을 십자가의 매다신 하느님이 이러시다니! “하느님, 너무 하셔요. 하느님이 미워요.” 오늘 오후 4시 수원 정자동 그 널따란 지하성당에서 거행된 아들 신부의 입관식에서 그 많은 성직자들과 성당을 가득 메운 그 많은 교우들 앞에서도 주체 못할 ‘어미’의 혼잣말이었다.
아침 해가 왕산 귀퉁이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면 기다란 햇살이 남쪽 창으로 들어와 서재의 북쪽 문까지 긴 방을 가득 채운다. 오늘이 대보름이고 춘분이 한 달 남짓 남아 동도 일찍 트고 저녁 해도 길어졌다.
수원 정자동에서 오후 2시에 김진완 신부의 위령미사에 참석하기로 맘마말가리타들과 약속을 잡은 터여서 서둘러 휴천재를 나섰다. 한남마을을 지나 절터마을을 지날 무렵이면 오봉으로 들어서는 방곡 골짜기가 물안개 속에 얼굴을 내민다. 문정리를 빼고는 이 골짜기 전부에 원한이 저 안개처럼 바닥으로 흐른다.
땅 파먹은 죄밖에 없는 지리산 골짜기 무지랭이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손에 학살당한 흔적이다. 방곡의 ‘함양산청추모공원’에 비석이 세워진 1000여명 양민 가운데 70%가 7세 미안의 어린이들과 여자들이라니! 엄천교회 뒷산을 넘으면서 남도 아닌 내 친정에서 서북청년단 간부로, 반공청년단 간부로 뽐내던 친척의 시커먼 얼굴을 떠올렸다. 아들 집 골방에서 죽어가던 그에게 보스코가 임종대세를 배려했었다. 자기 손으로 학살한 수백 수천 명의 무고한 동포를 저승에서 그가 무슨 낯으로 만났을까?
정자동 주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당으로 들어가니 열댓 명의 사제가 집전하는 위령미사가 막 시작했다. 김진완 신부의 시신이 제의차림으로 제단 앞에 안치되어 있는데 부르트고 피맺힌 입술에 단말마의 고통이 고스란히 흔적을 보였다.
마지막 한 달간 형을 곁에서 병구완한 살레시안 김진명 신부가 형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어린 시절부터 둘이서 간직하였을 숱한 동기애가 성난 파도를 잠재우느라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살레시안 부모모임에서 숱하게 보아온 고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우리 엄마들은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엄마는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내가 간이식으로 살아나느라 걔가 간암 4기가 된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죽어야 하는 건데... 그게 맞는 건데... 아~ 하느님, 너무 하셔요. 하느님이 미워요.” 엘리사벳, 안젤라, 율리아, 나... 할 말 없어 그니를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오후 4시에 보좌주교님의 주례로 입관식이 있었다. 동창신부들이 빈 관을 들고 들어와 시신 옆에 내려놓고 장의사들이 근 한 시간 걸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관뚜겅을 덮고 제단 정면에 관을 안치하였다.
내 아들, 내가 배어 낳고 젖 먹여 키우고 사제서품을 받던 날 그 의젓한 자태가 자랑스럽던 서른네 살 얼굴이 관 속으로 들어가고, 천으로 덮여지고, 관 뚜껑이 닫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미를 누가 위로할 수 있으랴, 제단 곁에 서 계시는 성모 마리아 외에? 우리가 어미로서 ‘피에타’를 알아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했다.
맘마말가리타회 일부 회원들은 5시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하기로 하고, 2시 미사를 올린 우리 여남은 명은 가까운 식당에서 위원석 신부 아버지가 대접하는 이른 저녁을 먹고 헤어져 우이동으로 돌아왔다. 과천을 지나며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서럽기만 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