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산길
황 정 환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영축산(영취산), 간월산, 신불산, 능동산, 가지산, 원효산뿐만 아니라, 높고 낮음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빨치산들이 들락거린 산들을 가리켜서 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생긴 것 같다. 그러기에 들판을 거친 대운산, 원효산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악이나 명산들을 두고 불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영남알프스의 남단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와서 수정산을 거쳐 동해의 바닷가에서 멈추어 섰는데 그 산이 악산이라며 이 산을 황령산(荒嶺山)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이 같은 황령산의 북쪽에는 바위들이 밀려 내려와서 쌓인 계곡으로 독사가 우글거린다며 사람들은 피해 다녔는데, 그 아래에 마리아수녀원이 있고 S여고가 위치하고 있으나 학교는 환경이 아름답고 특히 지하수가 풍부하여 교육환경이 아주 좋은 곳이다.
내가 교직 말년 4, 5년 전에 S여고의 교장으로 부임을 해갔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웃음을 모르는 사람이라 인기가 없는 그런 교장이었다. 수업 중이었지만 교내를 둘러보다 운동장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떤 중년 남자가 산 쪽에서 기어 나오더니만 내 가까이에서 쓰러졌다. 운동장을 돌아보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서무과의 거구인 검은 얼굴의 외국인 G 수녀님이 뛰어나오셨다.
기어 내려왔던 사람은 “저, 저가 아내 살인 미수범입니다. 자수를 하고 싶습니다. 경……, 경찰에 연락해 주십시오.” 하고는 다시 쓰러졌다. 나는 의아스럽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수녀님은 “연속 보도가 된 일인데도 교장 선생님만 모르십니다.” 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했다. 그는 손톱으로 운동장을 마구 파헤쳤다. 그리고 “얼른 물과 빵 같은 것을 가져다주시오.” 했다 수녀님은 당장에 달려가서 물과 빵을 가져왔고 그는 미친 듯이 먹고 마셔댔다.
얼마 후 고성능 사이렌 소리를 울이며 경찰차가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순간에 학교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해 졌다. 각 층의 창문마다 여학생들이 다투어 밖을 내다보려 했고, 교과서와 분필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려다 거기 학교장과 수녀님과 경찰이 자수자를 태우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각 층 창문을 올려다보니 밖을 내다보던 학생들의 얼굴이 사라졌다. 나만 보면 교직원이고 학생들이고 물러선다. 나는 그만큼 인기가 없는 교장이었다.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걸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모두가 돌을 던져 죽였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는 자부터 돌을 던지라 하셨다.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씩 사라지더니 모든 사람이 사라졌다고 했다. 손에 돌을 쥐고 있던 사람도 슬그머니 돌을 버리고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오늘따라 왜 이런 구절이 떠오르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내 마음의 방향이 그런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나는 서부경남의 고도 진주에서 삼천포로 빠지는 진사로 왼쪽에 서 있는 와룡산 기슭 사천의 가난한 공소집 막내로 태어났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과 단 한 분뿐인 맏이인 형님은 나와는 20년이나 나이 격차가 벌어졌으며, 그 아래로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있었는데, 자손이 귀하다며 형님은 이미 통영 본당의 윤 회장님 따님과 혼인한 사이이며,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 신행을 미루고 있는 형편이었다.
형님의 소원은 동경 유학이었고 우리 집은 형편이 가망이 없었고 사돈집은 딸과 사위를 함께 보낼 수는 없다며 맞서고 있었는데 선친께서 빚보증을 잘못 서시어 집안이 망하자 큰누나는 시집을 갔고 형님은 고학이라도 한다며 동경으로 건너가 버렸다. 부모님은 나를 데리시고 창원의 외갓집을 의지하여 떠났으며, 작은 누나는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온 집안이 하루아침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는데 후일 소식은 더욱 비참했다.
큰누나는 알고 보니 석녀(石女)였고 자형 소실의 수발을 드는 하녀 생활과 진배없는 고역 끝에 50줄에서 세상을 뜨셨다. 동경으로 떠난 형님은 고학을 계속하다 항일계의 학생회에 들어 쫒기다가, 노무자합숙소에 노무자로 위장하여 난을 피하다 그 집 따님과 사랑에 빠져 덜컹 어린애부터 낳았으니 우리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수녀원의 누님은 원래가 나약한 체질이었지만, 폐결핵의 시작이 진단된다며 전염의 위험이 크니 본가로 내려가서 휴양을 하고 돌아오라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연락이 전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형님 조당 때문이구나 싶었다.
부모님은 연로하시어 움직일 수도 없으시고 죄인(罪人)일 뿐만 아니라 미운 형님이지만 의지할 수 있는 곳은 형님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작은누나를 데리고 바늘방석인 외가를 떠나서 요코하마의 형님댁으로 밀어닥쳤다. 의외로 형님은 반가이 맞아주었고 결국 통영의 형수님은 큰형수님이라 불렀고, 요코하마의 형수님은 작은형수님이 되신 것이니까 우리 남매는 조당자(阻當者)의 동조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시쳇말로는 공범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뻔뻔스럽게도 그곳에서 학교까지 다녔다.
그러다 2차대전이 끝나자 작은누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이 사 주신 집에 살면서 시골 중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논밭도 옛날 그대로의 크기로 복구를 했다. 장가도 들고 부산으로 나와서 교회학교로 옮겼다. 이렇게 해서 나의 죄가 모두 사해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에 불과했다. 나에게는 더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누나의 병세는 점점 심해졌고 성심껏 보살펴주던 아내마저 드러눕게 되었는데, 급히 메리놀병원 가까이에 방을 얻어 옮겼으나, 회복할 가망은 없어 보였다. 형님이 사 주신 고향의 집과 논밭은 차례로 팔아 쓸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위시하여 작은누님과 아내는 차례로 세상을 뜨셨다.
나는 분명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임종하실 때는 전셋집 보증금마저 소멸하여 방을 비켜달라는 독촉까지 받았다. 나는 온갖 짓을 다 했었다. 내가 교장이어서 사리에 맞지 않는 짓도 저질렀다. D 학교의 교장이면서 F 학교의 야간 전임강사를 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주(週)에 이틀은 오후만 되면 강의를 맡아 대학으로 나갔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은 교회 학교는 서무를 수녀님들이 맡아서 교장의 명령이라도 돈은 부당하게는 지출되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저질렀을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막내였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형님도 돌아가셨고 통영의 큰형수님도 돌아가셨고 요코하마의 작은형수님도 돌아가셨지만, 가끔 조카들이 전화로 안부를 물어온다. 이것이 인생인 것이다.
황령산의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못골 큰못 위로 지나가는 고갯길에는 동해의 바닷바람과 영남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마주치는 바람고개가 이어진다. 구청에서는 해마다 여기에다 삼나무 묘목을 식목하는데, 그 삼나무가 풍겨내는 효능이 노인들에게 좋다며 노인들마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바람고개에 올라선다. 오륙도문협에서는 바람고개에서 해마다 시화전(詩畵展)을 벌인다. 내가 명년에도 바람고개로 올라서서 바닷바람과 산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시화전을 감상할 수 있을까 하고 새삼스럽게 바람고개를 휘둘러본다.
나도 나이가 차서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살아가지만 누구나처럼 지나온 삶을 왜 그렇게 밖에는 살지 못하였을까 하고 후회하지만 후회는 뉘우침만을 낳을 뿐이다. 만약에 인생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만 삶은 한 번뿐인 것을 지나가버린 시간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때는 믿음의 타렌트를 느끼기도 했었는데 나 자신이 몹시 서글퍼진다. 다시 믿음의 타렌트를 꼭 되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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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환]
· 부산가톨릭문협,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 전쟁문학회 부회장 역임.
· 남구문인협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폔문학 회원.
· 동양문학상, 신문예협회상, 한글문학상, 부산문학상, 부산예술상, 부산가톨릭문학상, 오륙도문학상 수상
· 저서 <저 산이 아직도를>, <사랑의 철학> 등 수필집 16권, <깊은 함정> 등 소설집 4권.
첫댓글 가슴이 뜨겁습니다. 회고록 같은 또는 참회록 같은 구절들이 뼈에 사무치는 것을 느낍니다. 미스 때 저도 결핵을 알았었는데(영양을 흡수하지 못한 장기 때문에)그땐 시기가 늦으면 요즘의 암처럼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지요. 다행히 저는 초기증상이었기에 입원하지 않고 약만 먹고 나았습니다만, 선생님의 그 생생한 불운들을 가슴으로 들었습니다. 하긴 제가 잘 아는 S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었던 분과 B대학교 교수였던 분도 알고 보니 폐결핵을 알았던 분으로 그런 사람의 동인회를 하자고 우스개소리를 하곤 했지만 그때의 작은 누님이 너무 애닲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