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일본 출판계가 요즘 한국 영화사들을 향해 이렇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한국 영화사들이 일본소설과 만화의 영화판권을 사기 위해 너도나도 달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국내에 일본소설 붐이 불기 시작한 몇 년 전, 그리고 일본 원작들의 영화판권 구매가 상당히 늘어난 지난해나 올해 초와도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 일본 원작 판권 전쟁은 극도로 치열하다. 웬만한 한국 영화사들치고 한 번쯤 일본소설이나 만화판권 구입을 시도해보지 않은 곳이 드물 지경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런 흐름은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올드보이>로부터 시작됐다. 공식적으로는 200만 엔(한화 약 2천만 원)에 원작 판권을 구매한 것으로 알려진 <올드보이>의 성공은 충무로의 일본영화 판권 구매 릴레이와 일본 출판사들의 판권료 인상을 부추겼다. 최근 일본 출판사들이 충무로 제작사들에게 부르고 있는 영화 판권료는 평균 500만 엔 안팎. <올드보이> 이전까지만 해도 평균 200만 엔 선이던 영화 판권료가 이젠 ‘따블’을 넘어버린 것이다. 올해 여름 기시 유스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공포스릴러 영화 <검은집>이 160만 관객들의 비명을 끌어낸 이후엔 충무로 영화사들이 미스터리와 추리소설 같은 일본 장르문학 쪽에서 소재를 찾고자 눈을 돌리는 흐름도 감지되고 있다. 2~3년 전만해도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등 사랑과 열정, 행복을 다루는 드라마성 짙은 일본문학들에 대한 관심이 컸다면, 최근엔 극명하게 미스터리, 호러, 추리, 스릴러 등 장르 문학에 매혹되는 추세다. 일본 장르소설의 인기 작가들인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국내에 대거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들 작품의 영화판권을 ‘찜’하려는 한국 영화사들의 경쟁이 대단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경우 대표작인 <화차> <모방범>까지 두 편의 영화판권 계약이 이뤄졌다. <스텝파더 스텝> 등 다른 작품들의 판권 문의도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우 대표작인 <백야행>은 올해 1월 SM픽쳐스가, <레몬>은 2006년 프라임엔터테인먼트가 약 300만 엔 선에서 판권을 구입했다. 하지만 히가시노의 또 다른 작품들인 <변신>과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은 현재 충무로 영화사들의 판권 경쟁의 중심에 놓여 있다. 특히나 히가시노의 소설은 “영화화하기 쉬운 구조”라는 평과 함께 엄청난 주목을 끌고 있으며 그중 <용의자 X의 헌신>은 가장 뜨거운 판권 경쟁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 계약을 중개한 국내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의 김숙진 대리는 “한국 영화사 6~7군데가 판권 구입에 뛰어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현재 <용의자 X의 헌신>의 일본 내 출판사에서 판권 구입을 위한 한국 영화사들의 기획서 마감시한을 오는 9월 말로 정해놓은 상태다. 어떤 영화사로 낙찰되든 엄청난 판권료를 지불해야겠지만. 미야베, 히가시노와 더불어 가볍지만 톡 쏘는 독특한 유머감각으로 사랑받으며 국내 출판계에서 '일본소설의 빅3'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역시 충무로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공중그네>와 <남쪽으로 튀어!>는 영화사 진상과 마술피리가 영화판권을 구입했으며 <인더풀> <면장선거>에도 영화사들의 판권 문의가 쇄도하는 중. <검은집> 이후 인지도가 급상승한 기시 유스케의 <푸른 불꽃>도 최근 국내 영화사와 판권 계약을 맺었고,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도 꾸준히 눈길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올드보이> <미녀는 괴로워>의 성공으로 일본만화 원작에 대한 관심도 식을 줄 모른다. 오가와 야요이의 <너는 펫>, 마츠모토 코지의 <피안도>,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 등의 판권을 구입한 국내 영화 제작사들은 한창 시나리오를 개발 중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판권 계약 관행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예년의 평균적인 판권 계약기간은 시나리오 작업 시기부터 2~3년 정도였지만 최근 한국 영화사들은 판권 계약 후 5년으로 기간을 늘려 잡고 있다. 2~3년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투자를 받아 한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개봉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충무로 영화사들이 대체로 판권 계약서를 서로 돌려보기 때문에 계약 상황도 비슷하다. 현재 감독과 캐스팅 모두 미정인 반짝반짝영화사의 <반짝반짝 빛나는>도 동명 원작의 영화 판권 계약기간이 5년. 자동연장 계약을 했기 때문에 감독이 정해지는 대로 내년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일본소설과 만화들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반짝반짝영화사의 김무령 대표는 “한국소설에 비해 일본소설이 덜 무겁고, 이야기의 종류도 다양한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재밌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 장르소설 판권의 인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욕구, 장르적 특수성, 시나리오 개발의 용이성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여러 편의 일본 소설 판권을 보유한 아이필름의 신혜은 제작이사는 "한국 문학에서 다루기 힘든 과감하고 다양한 소재"를 일본 소설의 장점으로 꼽는다. 게다가 "한국 소설이 사건을 겪는 인물의 내면을 통해 사회를 성찰한다면 일본 소설은 도발적인 사건과 과감한 소재를 택하면서도 상처와 콤플렉스 투성이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이 캐릭터들의 감수성에 의해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사람들이 지닌 불안감과 외로움, 소통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공감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을 지닌다"고 말한다.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 한국판을 출간했던 창해출판사 이옥선 편집주간의 설명도 일리 있다. “일본의 정서와 우리의 정서가 비슷하다. 지금은 일본소설 팬층이 워낙 두텁게 형성된 상태라 판매율도 기본 이상은 하고, 그중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수익이 엄청나기에 특정 작가군의 작품은 출판 경쟁도 무척 심하다. 대중이 공감하는 이런 검증된 시장을 영화가 놓칠 이유가 없다.”
충무로 영화사들은 판권 구입을 위해 국내 출판사나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아예 일본 출판사로 날아가거나 작가와 바로 접촉해 판권 구입 작업을 벌이기도 한다. 일본 영화계도 자국 소설과 만화들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온 건 다를 바 없다. 원작자나 일본 출판사 측에선 아무래도 일본 내 감독과 배우, 제작사를 선호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한 1년 이후에 계약을 하도록 한국 영화사에 권유하거나 일본영화 리메이크판권을 사는 쪽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불리한 계약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영화판권을 구매하는 충무로 영화사들이 많은 건 ‘일단 사놓고 보자’는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일본 원작들을 향한 이 뜨거운 구애는 사실상 한국영화는 물론 한국 대중문화의 토양이 허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원작이 있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방식이 어제오늘 있었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한 상황, 그렇게 많은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도 걸물을 만나기 힘든 한국영화 시나리오 시장의 허약함, 감독이 주로 시나리오를 쓰는 상황에서 형성되기 힘든 시나리오 작가 시스템의 부재, 시나리오를 발굴하더라도 영화화할 모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국영화 제작사,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문제다. 판권은 구매했지만 아직 대부분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아쉬운 건 최근 충무로 영화사들이 이미 너무 알려진 작품들에 '뒤늦게' 뛰어들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판권료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에서 구매하고, 시나리오 개발을 포함해 제작기간이 지나면 독자들은 그 책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의 인기작만이 아니라 미출간 도서나 마니악한 작품에도 눈길을 쏟을 필요가 있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를 포함해 국내 출판계에서 '일본소설의 빅5’로 불리는 온다 리쿠, 이사카 코타로 등은 물론 새로운 작가층은 넓고도 깊다. 기왕 일본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삼겠다면 충무로 제작사들의 발 빠른 발굴 정신이 더더욱 필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