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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영적 언약의 성취를 첫째 부활이라고 부르고,
가시적인 새 몸으로서의 부활을 둘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 둘은 사실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가시적인 둘째 부활에 참여할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첫째 부활의 삶으로
그 둘째 부활의 필연적 도래를 증거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의 연관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공부할 부분이 바로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지상적 삶에 관한 부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책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의 완료된 교회와 지상의 가시적 교회를 넘나들면서
천상의 완료된 교회가 이 지상에서 어떠한 삶을 통과하게 되는지에 관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그 중에서 계시록 20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계20:4~6)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여기에서의
이 ‘천년’이라는 단어가 전 천년설과 후 천년설, 무 천년설이라는 각기 다른 종말론의 해석을 낳게 된 단초입니다.
여기에서의 천년은 단순히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이라는 숫자는 항상 완전함과 완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등장합니다.
그 숫자는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수인 10이 세 번 곱해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통치의 수 10과 하나님의 수인 3이 결부됩니다.
계시록 17장의 열 뿔과 열 왕 등이 왕적 통치를 가리키는 10이라는 숫자의 용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용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제가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면서
‘내 말을 잘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천이라는 정확한 숫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의 완전함과 완료성을 보여주신 것이라 했지요?
지금 계시록 20장의 진술은 바로 그 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서 왕으로 다스리시고 성도도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언제 시작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성도의 왕 노릇이 시행이 되는 그 천년이 언제 시작되는 지 잘 보세요.
(계5:9-10)
9.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둠의 나라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그들이 그때부터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의 ‘피로 사고’, ‘하나님께 드리시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왕 노릇 하는’ 것은 동사의 시제 상,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20장의 그 천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는 천년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기간이 아닌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들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생’의 ‘상태’를 ‘천년’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들이 사망의 올무에 갇혀 버린 상태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누구입니까?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가 몇 년을 살았습니까?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할 때 보았지요? 창세기 5장은 죽음의 족보였습니다.
모두 ‘죽었더라’로 끝이 나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 900살 이상을 산단 말입니다.
그 중에 천 살 넘게 산 사람이 있었나요?
므두셀라가 31년만 더 살았어도 천 살을 산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천 살 이전에 다 죽이신단
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가리키는 천년이라는 ‘상태’, 즉 영생을 살게 될 성도와 대조되는,
육신으로서의 인간들의 수명의 한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이라는
영생의 상태를 살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영생을 살고 계시지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영생의 상태인 ‘천년’을 살고 계신 거란 말입니다.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에서
‘목 베임을 받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도끼’라는 뜻을 지닌 ‘펠레퀴스’에서
파생한 동사 ‘펠레키조G3990πελεκίζω’의 완료 수동태 분사입니다.
- 베어내다,즉 머리를 자르다 목을 베다.
반면에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에서 ‘살아서’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것은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하게 될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영 단번에 살아나서 왕 노릇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해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는 마치 도끼로 목 베임을 받는 것과 같은
핍박과 고난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겪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 번에 살아나게 된 자들의 왕 노릇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왕이 아니라 왕 노릇이라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왕 노릇이라는 것은 왕이신 분에게 붙어서
그 왕이 가신 길을 그대로 좇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묵시 속에서의 왕들의 역사 속에서의
왕 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앞에서 ‘내가 왕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셨지요?
따라서 성도의 왕 노릇 또한 세상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역사 속에서의 천년, 즉 영생을 사는 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삶이 반드시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6:9~11)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잘 보시면 여기에서 죽임을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조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냐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가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 증거는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겠지요.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레위기 4장 7절의 말씀이 형상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레4:7)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안 향단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의 피가 번제 단 아래에 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번제 단 아래에 피를 뿌린 자들이라는 말인데 성경은 그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 ‘죽임 당함’이라는 단어가 바로 앞 장에서 똑같이 나옵니다.
(계5:6)
6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똑같이 나오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은 어린 양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바로 그 왕의 죽음이 그대로 성도들에게서 실재 화되어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죽임 당함을 왕 노릇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은혜로 부활을 하게 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난 삶, 즉 영생을 살게 되고,
그 삶이 천년의 삶이며, 그 천년의 삶은 성도들의 죽임 당함으로 점철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죽이는 이가 누구냐인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 세상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임 당함의 실행 주체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감안 할 때,
그 예수님의 죽임 당함을 실재 화하여 살게 되는 성도의 죽임 당함은 하나님에 의한 죽임 당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역사 속에서 천년을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죽이시는가? 그
리고 그것이 어떻게 왕 노릇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영생을 사는 일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게 복음입니다.

첫댓글 성도가 광야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부적합한 존재인가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아들의 나라인 것을 알아서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죽는 날까지 체험하는 기간이 인생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뀐 자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 작업을 지금도 주께서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그 천년을 사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