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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사(2) :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2.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1)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군리(軍吏)를 두기 위하여 국경에 성을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燕)을 멸(滅)한 뒤에는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遼東)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2)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에] 반(反)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亡命)하였다. 무리 천(千)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眞番·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제(齊)의 망명자(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王)이 되었으며,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3) 이때는 마침 [한(漢)의] 효혜(孝惠)·고후(高后)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만(滿)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만이(蠻夷)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天子)를 알현(謁見)코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天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財物)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服屬)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漢)나라의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 천자(天子)에게 들어와 조현(朝見)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알현(謁見)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4) 원봉(元封) 2년(B.C.109) 에 한(漢)나라는 사신(使臣)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涉何)가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마부를 시켜 [자기를]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곧바로 [패(浿)]수(水)를 건너서 새(塞)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
에게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天子)가 그 공(功)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涉)]하(何)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何)에게 원한을 품고 군사를 출동시켜 기습 공격하여 하(何)를 죽이니, 천자(天子)는 죄인(罪人)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어] 조선(朝鮮)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勃海)를 건너가게 하고, 병력 5만으로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에서 출격하여 우거(右渠)를 주살(誅殺)하게 하였다. 우거(右渠)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5) 좌장군(左將軍)의 졸다(卒多)가 요동(遼東)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진병(進兵)하였으나 싸움에 패(敗)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法)에 의하여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제(齊)나라 병사 7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험(王險)에 도착하였는데, 우거(右渠)가 성(城)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장군(樓船將軍)의 군사가 적은 것을 엿보아 알고, 곧바로 성(城)을 나와 누선(樓船)[군(軍)]을 공격하니 누선(樓船)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楊)]복(僕)은 그의 군사를 잃고 십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다시 모았다. 좌장군(左將軍)도 조선 패수(浿水) 서편의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였다
6) 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이로움이 없다고 여겨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웠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태자(太子)를 보내어 들어가 사죄(謝罪)하게 하고 말 5천필을 바치며, 또 군량(軍糧)을 공급하였다.
무리 만여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左將軍)은 그들이 어떤 변(變)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太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다. 태자(太子)도 사자(使者)와 좌장군(左將軍)이 속이는게 아닌가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浿水)를 건너지 않고 다시 부하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위(衛)]산(山)이 천자(天子)에게 보고하자, 천자(天子)는 산(山)을 주살(誅殺)하였다.
7) 좌장군(左將軍)은 패수(浿水)에서 군사를 격파하고 바로 전진하여 [왕험(王險)]성(城)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방면을 포위하였다. 누선(樓船)[장군(將軍)]도 가서 [좌장군(左將軍)과] 합세하여 성(城)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右渠)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니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은 본디 시중(侍中)으로 [천자(天子)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연(燕)과 대(代)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樓船)[장군]은 제(齊)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 앞서 우거(右渠)와의 싸움에서 곤욕(困辱)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므로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마음으로 부끄럽게 여겨 우거(右渠)를 포위하고서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8) 좌장군(左將軍)이 맹렬하게 성을 공격하니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사사로이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은 여러 차레 누선(樓船)[장군(將軍)]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樓船)[장군(將軍)]은 [조선(朝鮮)과의] 약속을 성취시키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左將軍)도 사람을 보내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로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 까닭으로 두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左將軍)은 마음속으로 ‘누선(樓船)이 전번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 지금은 조선(朝鮮)과 사이가 좋으면서 [조선(朝鮮)은]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그에게 모반할 계획이 있지 않는가’ 의심은 하면서도 감히 발설하지는 못했다
9) 천자(天子)는 말하기를 “장수가 잘 전진하지 못하므로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우거(右渠)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였더니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左將軍)과 서로 일을 그르쳐서 끝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 두 장군이 성(城)을 포위하고서도 의견이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결판이 나지 않는다.” 하고는, 전 제남태수(前 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공손(公孫)]수(遂)가 도착하니 좌장군(左將軍)은 말하기를, “조선(朝鮮)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누선(樓船)이 여러 번 싸울 시기에 합세하지 않아서입니다.”하고는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공손(公孫)]수(遂)에게 낱낱이 고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樓船)을] 체포하지 않으면 큰 해(害)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樓船) 혼자만이 아니라 조선과 함께 우리 군대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라고 하니, [공손(公孫)]수(遂)도 이를 옳게 여기고 좌장군(左將軍)의 군영(軍營)에 들어와서 일을 의논하자고 부절(符節)로써 누선장군을 부르고는, 곧 좌장군(左將軍)의 부하(部下)에게 명령하여 누선장군(樓船將軍)을 붙잡아 결박한 뒤 그 군사를 [좌장군(左將軍)의 군사와] 합치고, 이를 천자(天子)에게 보고하자, 천자(天子)는 [공손(公孫)]수(遂)를 주살(誅殺)하였다.
10) 좌장군(左將軍)이 이미 두 군대를 합병한 뒤 맹렬히 조선(朝鮮)을 공격하였다. 조선(朝鮮)의 상(相) 로인(路人)· 한도(韓陶)와 니계상(尼谿相) 참(參)과 장군(將軍) 왕겹(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樓船)[장군(將軍)]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지금 누선(樓船)은 잡혀 있고, 좌장군(左將軍) 단독으로 장졸(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니, 맞아서 싸우기 두렵거늘 왕(王) 또한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한(韓)]도(陶)·[왕(王)]겹(唊)· 로인(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한(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路人)은 도중(道中)에서 죽었다.
11) 원봉(元封) 3년(B.C.108) 여름, 니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험성(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右渠)의 대신(大臣) 성이(成已)가 또 [한(漢)에] 반(反)하여 다시 군리(軍吏)를 공격하였다. 좌장군(左將軍)이 우거(右渠)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相) 로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成已)를 주살(誅殺)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朝鮮)을 평정하고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참(參)을 봉(封)하여 홰청후(澅淸侯)로 삼고, [한(韓)]도(陶)는 추저후(秋苴侯)로,
[왕(王)]겹(唊)은 평주후(平州侯)로, 장(長)은 기후(幾侯)로 삼았다.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저양후(沮陽侯)로 삼았다. 좌장군(左將軍)을 불러 들여 [그가] 이르자 공(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그러지게 한 죄로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樓船將軍)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列口)에 이르렀다면 좌장군(左將軍)을 기다렸어야 당연한데, 함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 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찬자평(撰者評)
○ 찬(贊)한다.
초(楚)·월(粤)의 선대(先代)는 대대로 국토가 있었다. 주(周)나라가 쇠미(衰微)할 즈음에는 초(楚)의 국토가 5천리나 되었으며, 구천(句踐)도 월(粤)에서 패업을 이루었다. 진(秦)이 제후(諸侯)를 멸(滅)하였으나 오직 초(楚)에만 전왕(滇王)이 있었으며, 한(漢)이 서남이(西南夷)를 베었으나 전(滇)만 홀로 사랑을 받았다.
동월(東粤)이 멸망되자 나라에서는 그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는데, 요왕(繇王) 거고(居股) 등은 오히려 만호후(萬戶侯)가 되었다. 세 지방의 개척은 모두 일 좋아하는 신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서남이(西南夷)는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발의(發議)하였고, 양월(兩粤)은 엄조(嚴助)와 주매신(朱買臣)이 기의(起議)했으며, 조선(朝鮮)은 섭하(涉何)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전성기(全盛期)를 만나 출동하면 성공하였으나 너무나 수고스러웠다. 태종(太宗)이 위타(尉佗)를 진무(鎭撫)한 옛 일을 보면, 옛 사람의 이른바 ‘예(禮)로써 초치(招致)하며, 덕(德)으로써 먼 곳의 사람을 회유(懷柔)함’이 아닌가!
3.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서(序)
2. 부여(夫餘)
3. 읍루(挹婁)
4. 고구려(高句驪)
5. 동옥저(東沃沮)
6. 예(濊)
7. 한(韓)
8. 찬자평(撰者評)
1. 서(序)
1)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그 의미는]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夷)는]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였다.
2)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谷)’이라 하였으니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3)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德)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叛)하기 시작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왕화(王化)에 감복되어 왕실(王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 걸(桀)이 포악해지니 제이(諸夷)가 내지(內地)에 침입(侵入)하여 왔는데, 은(殷)의 탕왕(湯王)이 혁명(革命)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입하였다.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殷)이] 쇠약(衰弱)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토(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4)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砮)와 고시(楛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周)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초유(招誘)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동이(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강왕(康王) 때에 숙신(肅愼)이 다시 왔다.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의 상류(上流)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제후(諸侯)를 분리시켜 서언왕(徐偃王)에게 명(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국토(國土)가 500리였으며,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로(陸路)로 와서 조회(朝會)하는 나라가 36국(國)이나 되었다. 목왕(穆王)이 후(後)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부(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楚)나라에 알려서 서국(徐國)을 치게 하니, [조부(造父)는] 하룻만에 [초(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초문왕(楚文王)이 대병(大兵)을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만명(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無道)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 왔다. 왕(王)이 괵중(虢仲)에게 명(命)하여 정벌(征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유왕(幽王) 대(代)에 이르러 [왕실(王室)이] 음란해지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범하여 왔는데, 제환공(齊桓公)이 패업(霸業)을 닦고서 물리쳤다. 초영왕(楚靈王)이 신(申)에서 회맹(會盟)할 적에는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 월(越)이 낭사(琅邪)로 옮기고 나서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侵略)하여 멸망시켰다.
5) 진(秦)나라가 육귝(六國)을 합병한 후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방의 이(夷)를 모두 분산시켜 진(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진섭(陳涉)이 기병(起兵)하여 진(秦)의 천하(天下)가 허물어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으로 피난하여 와서 그 나라의 왕(王)이 되었다. 백년 쯤 지나서 무제(武帝)가 그를 멸망시키니 이에 동이(東夷)가 처음으로 상경(上京)에 통(通)하게 되었다.
6) 왕망(王莽)이 위(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자, 맥인(貊人)이 변경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 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 초에는 [동이(東夷)가]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의 위세가 북방(北方)을 떨게하고 명성(名聲)이 해외(海外)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예(濊)· 맥(貊)· 왜(倭)· 한(韓) 등이 만리(萬里) 밖에서 조공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화제(和帝) 시대 이후로 사절이 왕래하다가 영초(永初) 연간(A.D.107~113; 高句麗 太祖王 55~61)에 [국내 정치가] 다난(多難)하게 되자, 드디어 중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영제(靈帝)가 실정(失政)하여 국내가 어지럽게 되자 이런 일이 점점 잦아지게 되었다.
7) 한(漢)나라가 중흥(中興)한 뒤로부터 사이(四夷)의 빈공(賓貢)이 때에 따라 어기거나 빈(叛)함은 있었으나, 사자(使者)와 통역(通譯)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풍속과 풍토(風)土를 대략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이(東夷)는 거의 모두 토착민(土着民)으로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관(冠)으로는 고깔(변-弁)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른바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했던 것이다. 보통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을 통틀어 사이(四夷)라고 부르는 것은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을 모두 제후(諸侯)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2. 부여(夫餘)
○ 부여국(夫餘國)
1) 부여국(夫餘國)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리(千里)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高句驪)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이천리(二千里)이며, 본래 예(濊)[족(族)]의 땅이다.
2) 처음에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 왕(王)이 출타중에 그의 시녀(侍女)가 후(後)[궁(宮)]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王)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侍女)가 말하기를, “지난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기(氣)가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로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 왕(王)이 그 아이를 신이(神異)하게 생각하여 그 어머니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王)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사수(掩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東明)은 그걸 밟고 물을 건너서 부여(夫餘)에 도착하여 왕(王)이 되었다.
3) [부여(夫餘)는] 동이(東夷)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으로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 알맞다. 명마(名馬)와 적옥(赤玉)과 담비(초,貂)· 삵괭이(놜,豽)가 생산되며, 큰 구슬의 크기는 마치 대추(산조,酸棗)와 같다. 목책(木栅)을 둥글게 쌓아 성(城)을 만들고 궁실(宮室)과 창고(倉庫)와 감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활· 화살· 칼· 창으로 병기(兵器)를 삼았으며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지어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 등이 있으며, 그 나라의 읍락(邑落)은 모두 제가(諸加)에 소속되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는 조두(俎豆)를 사용하며, 회합(會合)시에는 배작(拜爵)·세작(洗爵)의 예(禮)가 있고 출입(出入)시에는 읍양(揖讓)의 예(禮)가 있다. 납월(臘月)에 지내는 제천행사(祭天行事)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준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길흉(吉·凶)을 점친다.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4) 그 풍속은 형벌이 엄하고 각박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은 그 집사람을 모두 적몰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로 변상해야 되고,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하는 여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 다시 산 위에다 시체를 버려둔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아내로 삼고, 죽어 [장사지낼 적에는] 곽(椁)은 사용하지만 관(棺)은 쓰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가량이나 된다. 그 나라 왕(王)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므로, 한(漢)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옥갑(玉匣)을 미리 현도군(玄菟郡)에 갖다 두어, 왕(王)이 죽으면 그 옥갑(玉匣)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5) 건무(建武) 연간(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조헌(朝獻) 하고 입현(入見)하였다.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에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후하게 보답(報答)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부여왕(夫餘王)이 처음으로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7~8천(千)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귀부(歸附)하였다. 영녕(永寧) 원년(元年)(A.D.120; 高句麗 太祖王 68)에, 사자(嗣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조공(朝貢)을 바치므로 천자(天子)가 위구태(尉仇台)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下賜)하였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元年)(A.D.136; 高句麗 太祖王 84)에, 그 왕(王)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므로, 제(帝)는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하게 하여 [관람시켜] 보내었다.
6)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A.D.161; 高句麗 次大王 16)에,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貢物)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元年)(A.D.167; 高句麗 新大王 3)에, 왕(王) 부태(夫台)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노략질하므로,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A.D.174; 高句麗 新大王 10)에 이르러 다시 표장(表章)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夫餘)는 본래 현도(玄菟)에 예속되었으나 헌제(獻帝) 때에 그 나라의 왕(王)이 요동(遼東)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3. 읍루(挹婁)
○ 읍루(挹婁)
1) 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오곡(五穀)과 마포(麻布)가 있으며,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 산출된다.
2) 군장(君長)은 없고, 그 읍락(邑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그들은 산림(山林) 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여겨서, 대가(大家)는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그 바닥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만 가리고 다닌다. 그 사람들은 더러운 냄새가 나고 불결한데, 집 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어 놓고 둥그렇게 모여 산다.
3)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에 신속(臣屬)되었다. 그들 종족의 숫자는 비록 적지만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며, 험한 산중에 산다. 활을 잘 쏘아서 사람의 눈을 쏘아 꿰뚫을 수 있다. 활의 길이는 4자(척,尺)정도나 되는데 그 힘이 쇠뇌(노,弩)와 같다. 화살대는 고(楛)를 쓰는데 그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된다.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고, 촉에는 모두 독약을 바르므로 사람이 맞으면 즉사한다. 배를 잘 타고 노략질을 좋아하므로 이웃 나라들이 꺼리고 걱정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동이(東夷)나 부여(夫餘)는 음식을 먹을 때 거의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지만, 오직 읍루(挹婁)만은 법도(法度)가 없으니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4. 고구려(高句驪)
○ 고구려(高句驪)
1)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접경(接境)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사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自給)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東夷)들이 서로 전(傳)하여 오기를 [고구려(高句驪)는]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法則)이 [부여와]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
2) 모두 다섯 [부(部)]족(族)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이다. 본래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王)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설치한 관계(官階)에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주부(主簿)·우태(優台)· 사자(使者)· 조의(帛衣)· 선인(先人)이 있다.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고,鼓)과 관악기(管樂器)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3) 그 풍속은 음란하고,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 귀신(鬼神)· 사직(社稷)· 영성(零星)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신(禭神)이라 부르며, 또한 10월에 [그 신(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그들의 공공 모임에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모두 책(幘)을 쓰는데 [중국(中國)의] 관책(冠幘)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혼인에 있어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뒤에야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 후] 곧 장례에 쓸 물건들을 조금씩 준비한다.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는] 금과 은 및 재물을 모두 써 후장(厚葬)을 하며, 돌을 쌓아(적석,積石)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氣力)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服屬)시켰다.
4) 구려(句驪)는 일명(一名) 맥(貊)이라 부른다.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5)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6) 건무(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高句驪)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건무(建武)] 23년(A.D.47; 高句麗 閔中王 4) 겨울에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등 만여명이 낙랑(樂浪)에 투항하였다.[註014]
[건무(建武)]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사람을 쳐다보니, 국인(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용맹(勇猛)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7)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元年)(A.D.105; 高句麗 太祖王 53) 봄에,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遼東)을 침입하여 여섯 현(縣)을 노략질하므로, 태수(太守) 경기(耿夔)가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참살(斬殺)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궁(宮)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 원초(元初) 5년(A.D.118; 高句麗 太祖王 66)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8) 건광(建光) 원년(元年)(A.D.121; 高句麗 太祖王 69) 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과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거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兵馬)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遂成)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姚光)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遂成)은 이 틈을 타 험요지(險要地)를 점거하여 [요광(姚光) 등의] 대군(大軍)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성곽(城郭)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후한(後漢)은]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 [요동(遼東)]속국(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9)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현(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공조(功曹)인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註022]·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포위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幽)]주(州)· [현도(玄菟)]군(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10) 이 해에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이 왕이 되었다. 요광(姚光)이 상서(上書)하여, 그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하니, [후한(後漢)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궁(宮)이 생전에 악독하여 요광(姚光)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리(義理)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절(使節)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지난날의 죄(罪)를 꾸짖고는 그 죄를 용서해 주어 이후 그들이 선(善)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안제(安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遂成)이 한(漢)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현도(玄菟)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수성(遂成) 등이 포악 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罪)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그러나] 선비(鮮卑)· 예맥(濊貊)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명만을 보내니, 교화(敎化)를 받을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후한(後漢)의]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귀순(歸順)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모두 속전(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필(匹)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하였다. 수성(遂成)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 그 뒤로 예맥(濊貊: 고구려)이 복속(服屬)하니 동쪽 변방에 사건이 줄어들었다.
11) 순제(順帝) 양가(陽嘉) 원년(元年)(A.D.132; 高句麗 太祖王 80)에 현도군(玄菟郡)에 둔전(屯田) 육부(六部)를 설치하였다. 질제(質帝)· 환제(桓帝)의 시대에 다시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건녕(建寧) 이년(二年)(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고구려(高句驪)를]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5. 동옥저(東沃沮)
○ 동옥저(東沃沮)
1) 동옥저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 쯤 된다. 토질(土質)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五穀)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읍(邑)과 촌락에는 우두머리(장수,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며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言語)·음식(飮食)·거처(居處)·의복(衣服)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들은 장사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椁)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이나 되며 한쪽끝 부분을 열어 놓아 문을 닫는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시체는 우선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하고, 뒤에 뼈만 추려 곽(椁)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며,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목상(木像)을 새기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한다.
2)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서 옥저(沃沮)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沃沮)를 현(縣)으로 고쳐 낙랑(樂浪)[군(郡)]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도위(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거수,渠帥)를 봉(封)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그 나라는 지역이 좁고 작은데다가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의 대인(大人)을 뽑아 사자(使者)로 삼아서 읍락(邑落)을 [토착 거수渠帥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租稅)로서 초포(貂布)· 어염(魚鹽) 및 여타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美女)를 뽑아 그 종이나 첩(妾)으로 삼았다.
3)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으니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南沃沮)와 같으며, 읍루(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 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산을 내려와 읍락(邑落)에서 산다. 그 나라의 노인(老人)이 이야기하기를, “일찍이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한 벌 주웠는데, 그 모양은 마치 중(中)[국(國)]인(人)의 옷과 같고 두 소매의 길이는 3장(丈)이나 되었다.” 하며, 또 이르기를,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 가운데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말을 해 보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 가운데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는데 여자들이 그 신정을 엿보면 곧 자식을 낳는다’고 하였다.”
6. 예(濊)
○ 예(濊)
1)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2)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봉(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소제(昭帝) 원시(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高)]구려(句驪)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대(大)]령(領)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예(濊)가 한(漢)에]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조(條)나 되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6년(B.C.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동부(東部)]도위(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대(大)]령(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을 봉해 현후(縣侯)로 삼으니, 세시(歲時)마다 모두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3)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예(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읍락(邑落)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마,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생구(生口)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산출(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절(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헌상(獻上)한다.
7. 한(韓)
○ 한(韓)
1)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接)하여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萬餘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三韓)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2)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잡거(雜居)하며 역시 성곽(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궤배(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금(金)·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牛)· 마(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축실(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그 사람을]‘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3)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성책(城栅)과 가옥(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읍(邑)에는 각각 거수(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철(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4)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後孫)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5) 건무(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6)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의 국중(國中)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8. 찬자평(撰者評)
1) 논(論)한다. 옛날 기자(箕子)가 쇠망하는 은(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팔조(八條)의 법(法)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읍락(邑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악하고 나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백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동이(東夷)의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삼방(三方)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중니(仲尼)가 분연히 구이(九夷)에 가서 살으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孔子)가 ‘군자(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노자(老子)는 ‘법령(法令)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신의(信義)로 다스린 따위는 성현(聖賢)의 법(法)을 만든 근본취지를 얻었다 하겠다.
2) 찬(贊)한다.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 산(山)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지었다. 진(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연(燕)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피난하여,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동이(東夷)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더니, 드디어 한(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복속도 하고 배반도 하는구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