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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 저녁 예배 때에 살펴본 바 히브리서 1장 1절로부터 3절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대하여 짧게 요약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의 핵심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그가 행하신 일의 지극히 아름답고 탁월한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그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말씀하기 때문에 이러한 서문이 적절합니다. 오늘은 서문 가운데에서 히브리서 1장 3절에 나오는 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라고 하신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죄라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 이후로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에 찾아온 악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거역입니다. 죄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진노를 불러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함으로써 아담은 그 후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서 척박한 저주받은 땅에서 온갖 수고의 땀을 흘려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와도 엄청난 산고를 겪어야만 자녀를 출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이 넘쳐야 할 그들의 지상의 삶은 지옥처럼 변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누군가가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평생 살아가는 저주받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 후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과 악한 영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살아가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고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정한 율법의 법도에 따라 죄에 따른 저주가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죄에 따른 저주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를 들면, 기브온 사람들을 학대하고 죽인 사울 왕의 죄악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자기의 고향 기브아에서 멀지 않은 기브온 사람들을 수시로 괴롭히고 죽이곤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본래 가나안 족속으로서 여호수아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그 장로들을 보내어 거짓 항복함으로써 여호수아와 장로들로 하여금 속아서 그들에게 맹세로써 화평의 언약을 맺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기들이 성급하게 행한 여호의 맹세 까닭에 그들을 죽일 수 없어서 기브온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무 패고 물 긷는 일을 평생에 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멸절을 면하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면서 이스라엘의 영내에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이 혈통적으로 가나안 원주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수시로 죽이고 학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은 고통을 견디면서 하나님께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아뢰면서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세월이 흘러 사울은 죽고 그 다음 다윗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오래 된 다윗 왕 말년에 이르렀습니다. 그 나라에 돌연 삼년이나 되는 긴 기간의 대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다윗이 그 기근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 때문에 그러한 기근이 생겼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이 기브온 장로들을 불러서 해줄 것을 물었더니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고 사울 왕에서 태어난 자손들 일곱을 하나님 앞에서 매달아야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들의 요구대로 사울 왕의 자손들 중에서 일곱 명을 넘겨주었더니 그들이 그 사울 왕의 고향 기브아에서 그 일곱 명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기근이 그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윗 왕이 삼년 기근 때문에 하나님께 여쭈고 그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준 것이 약 50년 뒤의 일입니다. 약 50년 내지 60년 정도 되어서 기근의 저주가 온 나라에 발생하고 그 원한을 풀어주자 그제서야 비가 쏟아져서 기근이 풀린 것을 보면 속량되지 않은 죄로 인한 저주는 이처럼 오랜 세월이 가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해줍니다. 죄가 이렇게 무섭고 죄로 인한 저주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조상이 저지른 죄가 적어도 그 후손 삼사대까지 그 죄 값인 저주가 물려 내려오는 것입니다. 죄가 처리되지 않으면 이처럼 죄는 반드시 그 죄 값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저주가 기브온 족속의 일처럼 50년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무려 500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대로 성취되는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리고 성과 관련된 일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여리고 성을 침공할 때에 그 성이 완전히 무너진 후에 그 초토화된 성읍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예언하기를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으리라”(여호수아 6:26)
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로부터 약 500년 정도 후에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이 벧엘 사람 히엘로 하여금 벧엘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이 죽었습니다. 아마 히엘이 그 옛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누군가로부터 들은 바는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오래 된 맹세와 예언이 자기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거의 땅바닥에 떨어진 때이니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가 맹세로써 경고한 이 예언을 그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히엘은 건축 도중 터를 놓을 때에 첫 아들이 죽자 혹시 그 말씀이 사실인가 잠시 생각하였겠지만 설마 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을 완공하고자 성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이 또 죽고 말았을 때에는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맹세로써 보증된 죄에 대한 심판의 저주가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이 흘렀어도 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속량되지 않는 죄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에 내려진 저주는 벧엘 사람 히엘의 집안에 임한 저주의 성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성에 드러워진 여호수아의 저주는 그 여리고 성의 하나님께 대한 거역과 우상 숭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고 진멸의 화를 당한 후에 남아 있었으며 히엘의 집안의 저주의 성취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성이 건축된 후에 사람들이 그 성에 몰려들어 살았는데 아직 저주가 풀리지 않아서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열매가 잘 맺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 거주민들이 농사를 지어도 열매를 맺다가 그만 도중에 떨어져버리곤 하였고 알곡이 다 익지 않고 쭉정이가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좀 흘렀는데, 마침 엘리사 선지자가 그곳을 방문하자, 여리고 사람들은 선지자에게 찾아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지고 오라고 한 후에 선지자가 물 근원을 찾아가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면서 선포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죄악 도성 여리고 성 터에 수백년 동안 그렇게 열매가 떨어지고 사람이나 가축이 도중에 죽어나가는 죽음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에 드리웠던 저주가 이렇게 해결된 것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저주란 무서운 것이며 그 원인이 되는 죄란 속량되지 않으면 반드시 이렇게 집요한 저주가 뒤따르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해야 하겠습니다. 그 성경에 이른바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는 민수기 32:23 말씀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이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과 그것을 어겼을 때에 뒤따르는 저주가 끈질기고 무서운 것임을 알고 모든 죄란 죄는 다 정말 두려워하여 피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 원죄 아래 있고 죄의 권세 아래 있는데 누가 감히 죄를 다 이길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저주의 끈질긴 추적을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기가 지은 죄의 값을 다른 것으로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물로도 죄를 한 터럭도 씻을 수 없으며, 세상의 권력으로도, 선한 행실로도 사실 자기가 지은 죄를 조금도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종교적 공덕으로도 죄를 씻고 저주를 속량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죄와 저주는 무엇으로 그 값을 지불할 수 있는가 하면, 죄의 값인 사망과 그 저주를 다 본인이 당해야 죄와 저주가 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와 그 죄의 대가인 저주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 아래 있고 저주 아래 있고 사망의 세력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모든 사람의 현주소입니다. 모두가 죄의 종이요 저주의 종이요 사망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실존적 자리입니다. 참으로 아담 이래로 모두가 다 이렇게 가장 비참한 형편에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무서운 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고 모든 저주를 다 속량하시고 사망의 권세까지 다 깨뜨리시고자 보내신 분이 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가 오시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실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이사야 53:5,6 말씀에 이렇게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그리스도에게 다 대신 담당하도록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일을 다 알고서 죄가 전혀 없으신 거룩하신 분으로서 가장 비참한 죄인의 자리인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이 깨끗이 다 청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 삶에 집요하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무서운 저주 역시 우리 주님께서 대신 저주를 완전히 담당하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저주도 다 깨끗이 속량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힘을 쓸 수 없고 죄 값으로 인하여 내려진 저주도 우리에게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축복의 삶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3장 13,14 말씀에서 힘차게 사도가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저주를 다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내려질 모든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로 인한 저주의 무섭고 집요한 추적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모든 죄가 다 값이 지불되었고 우리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정결하게 되었으며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그 사람에게 죄의 대가를 추궁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우리의 죄가 우리를 찾을진대, 그 죄는 이미 우리 주님이 가져가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의 피로써 값을 지불하셨음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가 우리를 무섭게 무겁게 압도하며 괴롭게 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그 값을 지불하신 주님의 십작가만을 믿음의 손으로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죄로 인한 저주들,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저주, 우리가 지은 저주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후손들을 괴롭힐까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저주들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저주까지 다 담당하여 그처럼 나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저주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저주에서 완전히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상속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천사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오직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저주를 대신 담당하는 지극히 거룩한 자만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렇게 어렵고도 중대한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마침내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대신하여 죽으셨고 삼일 후에 살아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얻은 이 놀라운 축복 곧 모든 죄가 사함받고 그 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 내려진 무섭고 집요한 온갖 저주로부터 속량되고 죄의 최종적인 값인 죽음마져 대신 당하시어 우리를 영원히 살리신 우리 주님을 참으로 찬양하며 감사하며 영원히 사랑하며 섬겨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사역 죄를 정결하게 하신 그의 사역을 참으로 영원히 찬양하며, 이 땅에서와 천국 들어가서도 영원히 주님의 십자가를 영원히 사랑하며 찬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철저히 죄를 멀리하고 죄를 가장 두려워합시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기고 그 화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점을 기억하고 죄를 정말 피합시다.
그리고 지난 날의 죄 때문에 계속하여 죄책감에 시달려 눌린 상태로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취의 효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입니다. 자기의 범죄를 인하여 송구하다고 죄책감을 계속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행하신 죄사함의 복된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이 될 수 있기에 그 일은 도리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지난 모든 죄악들을 생각할 때 죄를 참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되, 그러한 무서운 죄의 힘을 꺾어버리시고 그 죄에 따른 무서운 저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찬양하며 깊이 감사하면서, 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모든 이들에게 자랑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